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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李光洙의 혼인론을 중심으로

Dalam dokumen 근대 한ㆍ중 연애 담론의 형성 (Halaman 39-49)

근대적 남녀관계를 지칭하는 ‘연애’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수용된 것 은 대략 191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124) 이는 메이지와 다이쇼시기 일 본에 유학한 유학생의 귀국과 연관이 있으며, 3ㆍ1운동 이후 문화통치 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근대적 사조가 급속도록 유입되던 시대적 분위 기와도 연관이 있다. 1925년 개벽 잡지에서는 3ㆍ1운동 이후 유행한 새로운 어휘를 소개하였는데, 그 안에 자유연애라는 단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엇잿든 朝鮮에 萬歲運動이 탁 터졋겟다. 이것저것 前에 보지 못하든 새 現像이 만히 생겨것다. 前에 듯지 못하든 새 말도 만히 생기고 前에 쓰지 못하든 새 文字도 만히 쓰게 되야섯다. 다른 것은 다-그만두고 이제 己未 以後 朝鮮에 새로 流行되는 術語를 잠간 모아 본다하면-. ··· 戀 愛自由. 性에 오래 굼주렷든 朝鮮 靑年男女間에서는 7年 大旱의 生命水 갓치 달게 밧아 흔히 쓰는 文字이다. 따라서 主唱者 에렌케이 를 祖上님 갓치 하고 잇다. ··· 煩悶苦痛 못 먹고 못 입어도 煩悶苦痛 할 말을 못 하고 쓸 글을 쓰지 못해도 煩悶苦痛 卽 모든 不遇의 境遇에는 반듯이 쓰 는 말이 煩悶苦痛인데 不幸히 朝鮮 靑年男女間에 만히 쓰개 되얏다.125) (밑줄-인용자)

당시 조선에서 유행한 단어 중에는 문화운동ㆍ실력양성ㆍ민중ㆍ무 124) 권보드래, 앞의 책, pp.12-18.

125) 最近朝鮮에 유행하는 新術語 (개벽27, 1925.3.1), p.70.

산자ㆍ부르주아ㆍ어린이ㆍ해방ㆍ계급투쟁ㆍ煩悶苦痛 등의 어휘가 있었 다. 즉 식민지 조선의 국가 건설과 관련된 어휘와 함께 근대적 주체로 지칭된 민중과 계급, 그리고 청년들의 새로운 행동양식과 관련되어 번 민ㆍ고통과 연애자유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특히 번뇌와 사랑은 청 년 남녀 간에 많이 사용되는 용어로서, 생명수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 고 병에 걸린 것과 같은 고통을 청년들에 안겨주는 일종의 정신적 현 상으로 정의되었다. 또한 연애자유하면 엘렌 케이를 떠올릴 정도로, 엘 렌 케이는 자유연애의 대명사처럼 받들어 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들은 일본으로부터의 근대적 사상의 유입과 더불어 3ㆍ1운동 이전 부터 이미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는 근대 소설과 신문 매체의 역할이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1910년대 중ㆍ후반 일본에서 유학하였던 이광수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연애관의 영향을 받아서 早婚의 惡習(1916) ㆍ 朝鮮家庭의 改革(1916) ㆍ 婚姻에 對한 管見(1917) ㆍ 婚姻論(1917) 등의 글을 발 표하였다. 그 가운데 婚姻에 對한 管見 에서 그는 혼인의 조건으로서 의 연애의 의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戀愛의 根據는 男女 相互의 個性의 理解와 尊敬과 따라서 相互間에 닐 어나는 熱烈한 引力的 愛情에 잇다하오. 毋論 容貌의美, 音聲의美, 擧動의 美等 表面的 美도 愛情의 重要한 條件이겟지오마는 理知가 發達한 現代 人으로는 이러한 表面的 美만으로는 滿足하지못하고 더 깁흔 個性의美―

卽 그의 精神의 美에 恍惚하고사 비로소 滿足하는것이지오. 外貌의 美만 取하는것은 아마 動物的 又는 原始的 愛겟지오. 進化한 戀愛의 特徵은 熱 烈한 感情의 引力과 明晳하고 冷靜한 理知의 判斷이 平行하는데 잇다하 오 가장 잘 敎育을 바든―卽 가장 健全하게 發育한 靑年男女의 戀愛은 이러한 것인가 하오.126)

위 글에서 이광수는 연애를 “남녀 상호간의 개성의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열렬한 흡인력”으로 정의하였다. 그는 연애를 理智ㆍ精神 ㆍ진화와 결부된 문명의 산물로 간주하고, 이전의 표면적 미만 추구하 126) 李光洙, 婚姻에 對한 管見 (學之光, 1917.4.19), pp.376-377.

던 동물적ㆍ원시적 애정과는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다. 또한 그는 연 애를 단순한 성적 자유와 쾌락으로 연결 짓지 않고, 사랑에 기반을 둔 재생산적 결합과 연계지음으로써 ‘생식’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 는 혼인의 목적이 “生殖과 幸福을 구함”에 있고, 생식의 이상은 “건전 하고 재능 많은 자녀를 완전하게 교육하여, 개체의 번영과 종족의 번 영”127)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광수는 건강한 신체 를 가진 남녀, ‘선조로부터 유전된’ 양질의 정신력을 가진 자, 생리적ㆍ 심리적으로 충분히 발육한 성년의 남녀(남자 만 18세, 여자 만15세), 충분한 경제력을 가진 부모만이 혼인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는 질병에 걸린 자, 정신적 결함이 있는 자, 충분한 경제력이 없는 자 는 자녀에게 惡質을 유전하고, 사회적 빈곤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혼인 과 생식의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였다. 이처럼 그의 연애론은 유전적ㆍ 계급적 차별에 근거한 근대적 가정의 확립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국가 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건강하고 성숙한 ‘개인’ 혹은 ‘국민’의 양성 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결국 이광수에게 연애란 일종의 성숙한 개 인의 생식을 통한 민족의 개량이라는 우생학적 목적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의 연애관ㆍ혼인관은 엘렌 케이의 우생학적 연애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그가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와 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유학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본의 저명한 자연주의 문학가인 金 子筑水는 1911년 太陽 잡지에 現實敎(人間改造論) 란 글을 발표하 여 엘렌 케이를 연애와 인류 진화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한 사회개량론 자로 소개하였다.128) 그는 1893년 와세다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후,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독일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와세다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1908년 早稻田哲學 127) 李光洙, 婚姻에 對한 管見 (學之光, 1917.4.19), p.375.

128) 白水紀子, 앞의 논문, pp.515-516.

會를 설립하는 한편 早稻田文學(1891년 창간)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 였다. 金子筑水는 독일 유학기간 엘렌 케이의 사상을 접하였을 것이 고,129) 이를 그가 교편을 잡고 있었던 와세다대학의 학생들에 적극 소 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소개한 本間久雄은 金子筑水의 문하생 으로 1908년 와세다대학의 英文科를 졸업하였으며, 1918년부터는 와세 다대학의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本間久雄은 졸업후 早稻田文學 에 문학평론가로 데뷔하여 활약하던 중, 엘렌 케이의 부인과 도덕을 접하고 엘렌 케이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그가 1913년부터 1922년까지 다수의 엘렌 케이 관련 저작을 번역하였음은 앞에서도 이 미 언급하였다. 때문에 이광수는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문학부에 있었 던 金子筑水과 本間久雄로부터 엘렌 케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으며, 또한 早稻田文學을 통해서 엘렌 케이의 사상을 접했을 가능 성이 있다. 특히 그가 엘렌 케이의 연애론에서 우생학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本間久雄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되는데, 本間久雄이 연애의 자유를 언급하면서 ‘자유는 곧 책임이다’라고 주장한 부분과 엘 렌 케이의 연애론의 의의를 ‘인종의 개량’에서 찾고자 했던 점은 거의 흡사하다. 또한 本間久雄이 개인의 행복과 종족의 개량 사이의 융합을 당위의 명제로 주장했던 것처럼, 이광수도 혼인의 목적을 “種族의 繁 榮과 個體의 幸福”130)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광수는 엘렌 케이의 연애론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靈肉一 致의 사랑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광수는 婚姻에 對한 管見 에서 정신적인 관계를 육체적인 정욕보다 우위에 두는 ‘靈的 戀愛’를 찬미하였다

129) 엘렌 케이의연애와 결혼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은 1904년 이지만, 원래 이는인생의 노선(Lifslinjer)I-III의 1부로서 1903년 스톡홀름에서 이미 출간 되었다. 독일에서는 특히 엘렌 케이의 모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1905년 모성보 호협회가 설립되었으며, 엘렌 케이는 그들의 첫 번째 대회의 연사로 초대되었 다.

130) 李光洙, 婚姻에 對한 管見 (學之光, 1917.4.19), p.376.

毋論 肉的要求도 잇겟지오-그것이 戀愛의 完成이겟지오. 原始的으로 보면 그것이 戀愛의 究竟의 目的이겟지오. 그러나 進化한 複雜한 文明과 精神生活을 가지게된 人類에 잇서서는 이 肉的要求는 찰하리 第二義인듯 한觀이 잇지오. 毋論 肉的要求가 不潔하다 함이아니지오. 靈肉의 合致가 戀愛의 理想이라 하닛가, 또 靈과 靈의 愛着에 肉과 肉의 愛着이 들어야 비로소 戀愛가 成立되는것이라 하닛가 肉的要求를 決코 賤히 녀김이아니 지오. 다만 非文明的 戀愛는 오직 肉의 快樂을 渴求하는데 反하야 文明的 戀愛는 이것以外에 靈的要求가 잇다함이외다. ··· 靈과 靈 서로 抱擁하 야 飽和한 滿足에 達한 後에 비로소 肉으로까지 合하야 戀愛가 이에 完 成되는것이니 이것이 卽 婚姻이외다.131)

이처럼 그는 靈肉의 合致가 연애의 이상이라 주장하면서도 육체적 연애를 원시적ㆍ비문명적으로 평가 절하시키고, 정신적 연애를 문명과 진화의 상징으로 미화하였다. 즉 육체와 정신은 비문명과 문명을 구분 짓는 척도로서, 일종의 진화의 감정인 연애는 반드시 정신적 결합을 일차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간주한 것이다. 또한 그는 육체적 관계에 서 영적인 사랑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부정하고, 영적인 결합에서 육체 적 결합으로의 전이, 즉 영적인 결합이 반드시 육체적 결합에 선결되 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광수는 연애의 완성인 육체의 결합의 시점 은 반드시 혼인의 단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의 연애관은 연애와 결혼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혼인관계 내부에 성적 결 합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근대적 일부일처제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광수의 경향은 무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주인공 이형 식은 色에 취하여 밤마다 영채를 찾아가는 배명식을 “육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으로 비난하였다.132) 또한 이형식은 김선형에 대한 정 신적 이해를 결여한 자신의 사랑을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시대로 옮겨가려는 과도기 조선 청년의 사랑”으로 규정한다.133) 무정에서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성숙과 민족의 번영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기까지 주인공 남녀의 연애는 유보되며, 이는 국민 131) 李光洙, 婚姻에 對한 管見 (學之光1917.4.19), p.377.

132) 이광수,무정, p.80.

133) 이광수,무정, p.325.

Dalam dokumen 근대 한ㆍ중 연애 담론의 형성 (Halaman 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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