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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와 통일외교(1989~90)

과 이주가 증가하고 함부르크와 베를린간 도속도로가 건설되며 방문 왕래가 용이하게 되는 등 양독 관계가 호전되었다. 그러나 콜 정부는 안보문제에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대신 인권, 이주의 자유, 무 역 문제 등을 거론하였다. 특히 체르노빌 핵사고 이후에는 원자력 시 설 안전과 환경 문제를 부각시켰다. 1986년 5월 동서독간에 문화협 정이 체결되었고 1987년 9월 호네커의 서독 방문시 서독 정부가 공 식 예우를 갖추어 환대함으로써 콜 수상 자신의 위상도 제고되었다.

이 회담 결과, 과학, 기술, 환경보호 관련 3개 협정이 체결되었고

1987년 8월 말까지 3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을 방문하여 자유와

복지 상황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서독의 실상이 동독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정책에서 콜 수상의 가장 큰 성과는 동독 연금자들의 서 독 방문 확대, 철도망 개선 및 서독 방문 동독인들에 100마르크로의 환영금 인상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전반기 미‧소간의 대결이 증대되는 시기에 서독 외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콜 정부는 친서방정책이라는 아데나 워 초대 수상의 전통을 승계하면서 소련 및 동구 국가들과 무역관계 를 계속하는 현실주의적인 동방정책과 독일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으로 동서 진영간의 탈냉전 분위기가 시작되는 1980년대 후반기에 콜 수상은 통일보다는 자유와 인권 등을 중시하 는 기독교적, 민주적 긴장완화 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서독은 정치, 경제면에서 유럽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1990년대 문턱에서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되었다.

의 안정과 경제력 축적56) 및 외교역량이라고 한다면, 대외적 요인은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르바쵸프는 1989 년 10월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의에서 기존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기를 선언하고57) 동구 국가들의 독자노선을 인정함으로써, 동구 국가들이 소련의 군사개입에 대한 위협없이 체제개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에 따라서 공산당 일당 독재의 경직된 체제와 낙후된 경제상황에 있던 대부분의 동구 국가들은 대내적인 체제개혁 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동독은 서독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유지하면 서도 내적인 체제개혁을 거부하고 있었다. 동구 국가들 가운데 체제 개혁에 앞장섰던 헝가리의 1989년 5월 2일 국경개방과 동독인들의 탈주,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인들의 특별열차 편에 의한 서독으로의 이주 등은 라이프찌히와 드레스덴에 서의 대규모 평화혁명을 야기하였고 10월 18일 호네커의 퇴진과 11

월 9일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동독 공산당은 이튿날 자유선거 실시, 여행규제 철폐, 경제정책 전 환 등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발표하고 11월 17일 개혁파 모드로프

(Modrow) 수상의 새 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동서독 관계를 긴밀히

하기 위해 ‘계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 형성을 제안하였 다.58) 한편 이 당시 콜 수상은 독일통일보다는 동독의 안정회복을

56) 예로 1989년 서독의 무역흑자는 715억 2,900만 달러로서 세계 1위이었다.

57) 고르바쵸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이유는 미‧소 간의 신데 탕트로 소련의 군사적 완충지대로서 동구의 효용성이 감소되어 대외 적 군사 부담을 축소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58) Jochen Thies und Wolfgang Wagner (Hrsg.), "Beiträgen und Dokumenten aus dem Europa-Archiv (이하 Dokumenten aus dem Europa-Archiv로 약함)," in Das Ende der Teilung. Der Wandel in Deutschland und Osteuropa (Bonn: Verlag für Internationale Politik, 1990), pp. 210~222.

원하였으나, 다수의 서독인들은 동구, 특히 소련에서의 사태발전을 이 용하여 이 기회에 독일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동 독에서의 급격한 사태발전, 동서독 국민의 통일에 대한 점증적인 기 대감, 소련의 개혁정책에 대한 불확실성 등으로 콜 수상은 11월 28 일 연방의회에서 통일정책에 관한 ‘10개 항 프로그램’을 밝혔다. ‘10 개 항 프로그램’은 동독에 대한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원조, 동서독간 협력강화, 동독 공산당의 권력독점 종식, 동독의 자유선거 실시와 계 획경제 폐지, 연방제 창설을 목표로 한 국가연합 구조 형성, 유럽공동 체 내에서의 양독 관계 발전, CSCE의 역동적 추진, 군축 및 군비통 제의 지속적 추진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59) 이 당시 콜 수 상에게는 “재통일, 즉 독일의 국가적 단일성 회복이 서독정부의 (장기 적인) 정치적 목표”(제 10항)이기는 하지만 단기적 “목표는 동서독간 에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는 통행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제 1항)이 었다.

이와 같은 콜 수상의 제안에 대해 크렌츠(Krenz) 동독공산당 서기

장은 “두 개의 독립적인 독일 주권국가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면 어느

사안에 대해서도 협의할 수 있으나, 통일은 현안이 아니다”라는 반응 을 보였다. 한편 미국은 콜 수상의 ‘10개 항 프로그램’이 동독에서 변 화되고 있는 상황과 동독의 서독 관계에 상응하는 적절한 제안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소련은 동독이 자주 국가임을 강조하고 콜 수 상의 제안을 비판하였다.60) 라이프찌히 등에서 대규모 반공, 통독 시 위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크렌츠의 뒤를 이어 동독공산당 서기장이 된 기지(Gysi)는 동독에서의 자유 총선거를 1990년 3월 18일 실시하기 로 하였고, 1월 말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고르바초프로부터 자신의

59) Dokumenten aus dem Europa-Archiv, pp. 222~228.

60) Frankfurter Rundschau, 1989. 11. 29.

통일 구상에 대한 동의를 받은 모드로프 수상은 2월 1일 ‘4단계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계약공동체로서 협력과 선린관계 에 관한 조약 체결, 공동의 기관을 갖는 국가연합 형성, 국가연합 권 력기관으로 양국의 주권 이양, 양측에서의 선거를 통한 단일 독일연 방국가 창설 및 단일의회 구성이었다.61) 이 방안은 과도체제로서 국 가연합을 구성한 후에 단일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점에서 콜 수상의

‘10개 항 프로그램’과 유사하나 타협이 어려운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

고 있었다. 콜 수상의 통일안은 통일독일이 NATO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나, 모드로프의 통일안은 단일 연방국 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양독의 군사적 중립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통일독일의 NATO 편입은 부시 미 대통령이 1989년 12월 NATO 정상회담에서 밝힌 통독 4대 조건62)의 핵심 내용이며 서유럽 국가들 의 합의사항이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중립화 통일은 독 일 자신과 유럽을 1945년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릴 위험이 있다”63)고 경고하였다.

콜 수상은 1990년 2월 자신의 통일정책을 수정하여 가능한 한 조 기에 통일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는 그가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쵸 프로부터 독일통일에 대한 독일인의 자결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모스크바 회담에서 콜 수상과 고르바쵸프는 “통일문제의 결정권은 독일인에게 있으며, 독일인 스스로가 통일의 시점과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에 합의하였다.64) 이후 동독에서 3월 18일 역사상 최초의

61) Dokumenten aus dem Europa-Archiv, pp. 318~319.

62) 통독 4대 조건은 민족자결, NATO와 EC에 대한 독일의 지속적인 의 무 및 전승 4국의 책임과 권리 고려, 유럽의 안정 속에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통일, 헬싱키 협약 원칙에 의한 국경문제 해결이었다. Horst Teltschik, 329 Tage. Innenansichten der Einigung (Berlin: Wolf Jobst Siedler Verlag GmbH, 1991), p. 65.

63) Le Monde, 1990. 2. 2.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의회와 신 정부가 구성되었고, 드 메지 에르(de Maiziere) 동독기민당 당수를 수상으로 하는 신 정부는 서 독 기본법 제 23조, 즉 동독 5개 주의 서독으로의 편입을 통해 정치 통합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동서독은 5월 18일 합의된 「화폐‧경제‧사 회통합에 관한 조약」에 따라서 7월 1일부터 단일경제와 사회체제로 출범하였고 8월 31일 「독일의 단일성 회복에 관한 조약」(일명 통일

조약)에 의하여 대내적인 정치적, 법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화폐‧경제‧사회통합에 관한 조약」과 「통일조약」이 독일통일의 내 부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이었다면, ‘2+4 회담’은 독일통일의 외부문 제 해결을 위한 조치이었다. 전승 4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전 독일 및 베를린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러 나 제 2차 세계대전을 종결짓는 독일과 전승 4국간의 평화조약이 체 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통일을 앞두고 동서독과 전승 4국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하여 ‘2+4’ 회담이라는 특수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통일독일의 외부문제 해결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국제정치적인 문제와 국제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였다. 첫째, 국제정치적 측면 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은 통일독일의 유럽안보 및 평화 보장, 통 일독일의 현 유럽국경선 인정, 새로운 유럽안보질서에서의 통일독일 의 위상, 통일독일의 주권회복, CSCE 과정에서의 통일독일의 역할, 주변국의 통일독일 동의 여부, 제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에 대한 통 일독일의 피해보상 의무 여부 등이었다. 둘째, 국제법적 측면에서 해 결되어야 할 문제들은 양독의 유럽국경 인정과 구 독일제국 영토의 포기, 이를 위한 관련 당사국들의 자결권 행사라는 절차의 필요 여부, 관련국의 이러한 자결권 행사 절차 이후에만 독일통일이 가능한가의

여부, 전승 4개국과 EC의 통독에 대한 동의 여부, 평화조약의 체결

64) Dokumente aus dem Europa-Archiv, pp. 3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