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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정책의 주요 내용

가. 안보수출국으로서의 국제적 역할

통일이전에 서독은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핵보장 아래서 안보 를 유지하면서 구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긴장관계를 완화 하기 위한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서독군의 활동과 관련해서 는 서독의 주요 정당인 기민당/기사당, 사민당, 자민당간에 서독군을 단지 국가방위와 NATO 관할지역에만 투입한다는 데 합의가 있었 다.84) 유엔이 수행하는 평화유지 활동이나 작전들에 서독은 단지 인 도적, 물적 지원의 형태로 참여하였다. 이라크가 1990년 8월 2일 쿠 웨이트를 침공하여 발발한 걸프전시 서독은 처음에는 자국군이

NATO 관할지역 이외에서 발생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대해 서독은 179억 마르크 의 재정지원만을 약속하였다. 통일이후인 1991년 1월 말 독일정부는 크게 주저하면서 다국적군에 가담하고 2월 28일 전쟁종료 이후 비로 소 어뢰탐색정을 걸프만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독일은 타국으로부터 국제평화의 ‘기피자,’ ‘기회주의자’ 등의 비난을 받았 다.85)

politik.

84) 기민당의 에르하르트 수상때인 1964년 키프로스 사태에 서독군이 NATO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 기민당의 키징어 수상때인 1967년 서 독전함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해상봉쇄를 반대하는 NATO 함대의 작전에 참여하였다. 1969년 사민당의 브란트 수상 이후부터는 NATO 관할 이외지역에 대한 서독군의 투입이 금지되었고, 이는 1982 년이후 기민당의 콜 수상 집권시에도 유지되었다.

85) S. Bierling, Die Außenpolitik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pp.

278~279.

6월 COMECON, 7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데 이어

12월 소련마저도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 독

일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소멸되었고 독일은 더 이상 안보의 수입국 이 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통일이후 독일의 군사비 는 점차 감소 추세에 있고(<표 2> 참조), 미국과 유엔은 탈냉전시대 에 독일이 국력에 상응하게 안보의 수출국으로서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표 2> 독일의 군사비 추이(1992~2001)

연도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10억달러 42 38 35 35 34 33 33 34 33 32

출처: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 Yearbook 2002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 254.

그래서 1991년 초부터 독일에서는 주요 정당과 국민들 사이에 독

일군의 활동범위에 관한 열띤 논의가 있었다. 당시 여당인 기민당/기 사당은 유엔이 수행하는 평화 유지 및 활동에 대한 독일군의 참여가 원칙적으로 기본법에 상응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한 기본법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연정파트너이었 던 자민당은 기본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야당이었던 사민당 은 유엔안보리의 위임 하에 단지 순수한 평화유지활동이 수행되는 경 우에만 독일군을 투입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민당은 유 엔의 지휘 하에서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이나 걸프전에서와 같이 일국 의 지휘 하에서 이루어지는 군사행동을 엄격히 배제하였다. 녹색당/

동맹90은 국제정치의 수단으로서 모든 무력의 투입과 군사력을 통한 강제적인 평화를 원칙적으로 거부하였다. 국제문제에 대한 책임과 관

련, 1990~91년에는 피설문자들의 단지 23~32%만이 독일이 ‘세계 에서 더 많은 책임’을 넘겨받아야 한다는 데 찬성한 반면, 1993년에

는 82%가 찬성 견해를 나타냈다. 1992년 이래로 피설문자들의 다수

가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독일군의 투입을 지지하였으나, 1993년의 경우 피설문자의 1/3 미만이 국제적 평화확보의 수단으로써 군사력 사용을 지지하였다.86)

독일군의 행동범위 문제는 1992~1994년 기간동안 3차례에 걸쳐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다루어졌다. 여기에는 구 유고슬라비아와 소말리 아 사태가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첫째, 유고슬라비아 사태87) 와 관련하여 콜 정부는 NATO와 WEU의 공동행동이라는 틀 내에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금수조치를 감시하는

86) Ibid., pp. 280~282.

87) 유고슬라비아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었었다.

1987년 티토 사망이후 집권한 밀로세비치가 지배세력인 세르비아(슬 라브족, 그리스정교, 친러시아 노선)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동구 사회주 의 체제 붕괴이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로마 카톨릭교, 친서방노 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회교도)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1991년 분쟁이 야기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주민과 세르비아 소수 주민간 분쟁 에 14,000명의 유엔보호군(UNPROFOR: UN Protection Force)이 크로 아티아에 투입되었다. 1992년 4월에는 보스니아 주민과 세르비아 소수 주민간의 전쟁도 발발하였다. 유엔은 5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있 는 세르비아인을 지원하고 보스니아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세르비아 에 대해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1993년 1월 보스니아에서는 회교도와 크로아티아 주민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4월부터 NATO는 보스니아 상공에서 비행금지를 결의한 유엔 조치의 이행을 감시하는 한편, 유엔 보호군에 대한 공중지원을 하였다. 1994년 4월부터 NATO는 세르비아 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으나 미국 및 국제적 중재로 1995년 11월 21일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유고연방(세르비아-몬테네그로) 간에 데이튼(Dayton)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평화협정은 12월 14 일 파리에서 정식조인되었고 60,000명의 NATO군이 미국, 영국, 프랑 스 통제지역에서 협정이행을 감시하게 되었다. “Yugoslavia's Birth to its Breakup,” www.xs4all.nl/~frankti/Warhistory/war_hist. html.

데 협력하기 위하여 독일 함정과 해군기를 아드리아해로 파견하는 결

정을 1992년 여름에 내렸다. 이에 대해 야당인 사민당의 연방하원

의원들은 연방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을 하였으나 정부의 독일군 투입 을 막기 위한 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 둘째, 유엔 안보리는 1993년 초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상공에 대한 비행금지를 결의하고 이에 대한 감시를 NATO에 위임하였다. NATO는 AWACS 조기경보기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여기에 독일군이 협력하였다. 이는 NATO 관할 이외지역(out of area)에 대한 독일군의 투입이기 때문에 연정파트 너인 자민당은 이를 기본법상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래서 자민당은 기본법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의 합헌성 여부를 연방헌법재판소에 제기하였다. AWACS 조기경보기에 독일군을 투입 하지 못하도록 연방헌법재판소가 일시적인 명령을 내리도록 하려는 이 소송에는 사민당 의원들도 합류하였으나 연방헌법재판소는 1993 년 4월 8일 5 대 3 표결로 이를 기각하였다. 셋째, 소말리아에서 인 도주의적 조치에 대한 독일군의 참여가 문제되었다. 유엔 안보리는 1992년 초 이래로 소말리아에서 정치적 불안을 제거하고 절박하게 요구되는 인도적 지원을 하기 위한 다수의 결의안들을 채택하였다.

1993년 4월 21일 정부의 결정과 연방하원의 동의로 1,700명의 독

일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이미 평정된 지역에서 인도적 임무에 참여 하였다. 그러나 몇 주 후에 소말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유엔군과 소말 리아 내전 당사자들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사민당은 연방헌법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여 정부결정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연방헌법 재판소는 6월 23일 만장일치로 독일군 참여의 지속여부는 연방정부 가 아니라 연방하원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연방헌 법재판소는 1994년 7월 12일 독일군 투입의 합헌성을 인정하고 동 시에 독일군의 모든 외국투입은 연방하원의원 비교다수의 동의를 받

도록 하였다. 여당이나 야당 모두가 결과에 만족하였다. 1995년 이후 에는 독일정부나 연방의회 모두가 독일군의 외국투입에 관한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는 합헌성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정치적 논리를 펴는 데 비중을 더 두게 되었다.88)

상기와 같은 논란 시기 중에도 콜 정부는 독일군의 행동범위 확대 를 위한 조치들을 계속 취하였다. 독일은 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무기 사찰에 참여하고 있고, 1992년 5월부터 1993년 10월까지 150명의 독일위생병이 캄푸치아에 주둔한 1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을 지 원하였다. 1994년 7월 연방헌법재판소의 최종결정이 내려진 것을 계 기로 헤어촉(Herzog) 대통령은 1995년 3월 독일이 국제안보 문제에 더 많은 관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9) 독일 정부의 이러한 안 보역할 확대에 대한 욕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국제분쟁 조정에서 독일군의 역할이 무조건적으 로 배제될 때 이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얼마나 제한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둘째, 독일은 현재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추구 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들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의무를 떠맡고 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다.90) 이와 같은 배경에서 독일은 밀로

세비치(Milosevic)의 유고연방에 대한 유엔의 제재를 지지하고 크로

아티아 및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대통령들에게 외교적 압력을 행사 함으로써 평화를 위한 대화 및 「데이턴 평화협정」 체결에 일정한 역 할을 하였다. 따라서 데이턴은 “하나의 중요한 강국으로서 독일이 발

88) S. Bierling, Die Außenpolitik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pp.

12~15.

89) “Roman Herzog: Die Globalisierung der deutschen Außenpolitik ist unvermeidlich. Rede des Bundespräsidenten beim Festakt zum 40.

Jahrestag der Gründung der Deutschen Gesellschaft für Auswärtige Politik am 13. 3. 1995 in Bonn,” Bulletin, Nr. 20 (1995. 3. 15), p. 162.

90) S. Bierling, Die Außenpolitik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p.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