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쉬미트 수상의 사민당과 연정을 하고 있던 자민당이 안보 정책의 고려 및 연방예산과 재정문제로 야당인 기민당으로 돌아섬으 로써 연정이 붕괴되고 쉬미트 수상은 불신임을 받아 퇴진하였다. 이 에 따라서 콜(Kohl, 1982~98) 연방하원 기민당 원내의장이 신임 수상으로 동년 10월 선출되었다. 10월 13일 정부성명에서 나타난 콜 수상 외교의 우선순위는 ① 서독과 미국 관계의 강화, ② NATO와의 관계 강화, ③ 협상을 통한 동서간 최저 수준의 군사균형 유지, ④ 유
50) C. Hacke, Weltmacht wider Willen, pp. 287~306.
럽통합을 위한 새로운 길의 모색이었다. 콜 수상은 동시에 프랑스와 의 관계도 확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콜 수상의 서방외교 기조는 대 서양 요소와 서유럽 요소를 잘 배합시키는 것이었다.51) 콜 정부는 초기에 쉬미트 수상 때와 같이 미국의 안보정책, 특히 대소 강경정책 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신냉전기를 맞아 레이건 미 행정부는 서방 동 맹국들을 대소 강경정책에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콜 수상은 중립적 인 입장을 취하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긴장완화 정책을 추구하도록 촉 구하였다. 서독은 경제이익 때문에 소련 및 동구 국가들과 무역관계 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콜 수상은 동서 진영간에 중거리 미사일 을 완전 폐기하기 위한 레이건 미 대통령의 제의에 찬성하는 한편, 미국과 소련에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협상을 재촉하였다. 그
러나 ‘유연반응’ 전략52)에 기초해 있던 NATO는 소련과 핵 및 미사
일 감축 협상에 대한 진전이 없자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핵과 퍼싱
Ⅱ 미사일의 추가배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도 핵과 SS-20 중거 리 미사일을 증가시켰다. 콜 정부는 일방적인 군축과 억제력의 포기 가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감하고 상기와 같은 미 국의 군비를 지원하였다. 이 당시 미국은 대소 군사우위의 회복을 위 해 「전략방위구상」(SDI)을 계획하고 서유럽과 공동연구를 하고자 하 였다. 콜 정부는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상황과 SDI로 소련 의 군사위협이 증대하고 동서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딜렘마 에 빠졌기 때문에 미국에 제한적으로 협조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985년 3월 소련에서 고르바쵸프(Gorbachev) 공산당 서기장이
51) Ibid., pp. 323~325.
52)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떠한 형태의 적 공격에도 핵을 사용 하겠다는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을 갖고 있었으나 1960 년대 이후에는 재래식무기로부터 핵무기까지 적절히 사용한다는 ‘유연 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으로 변화시켰다.
집권하여 동서간 이념 대립과 군사적 팽창보다는 대화와 신뢰구축을 강조하는 ‘신사고’ 외교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소련의 외교 및 안보정책 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 결과 1986년 10월 레이캬빅 미‧소 정상 회담에서 모든 핵무기의 폐기 문제가 중요 협의사안으로 등장하게 되 었고 모든 중거리 미사일의 폐기, 화학무기 금지, 재래식 군사력의 저 수준 균형 등을 규정함으로써 군축문제에 한 이정표가 되는 「중거리 핵전력협정」(INF)이 1987년 12월 체결되었다. 이는 또한 동서관계 가 탈냉전기로 진입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INF 협정과 관련, 콜 수상은 서방측이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는 데에 반대하고 억제력 정도 는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서독 연방의회의 다수 의원들은 INF 협정에 찬성하였다.
프랑스에 대한 관계에서 콜 수상은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라는 쉬미 트 전 수상의 정책을 계승함으로써 본-파리의 축이 강화되었으나 프 랑스의 서독에 대한 무역 적자, EC 이외 지역의 무역에 대한 입장 차이53) 등으로 이 축이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1980년대 전반기 서독에서 중립주의 경향이 나타나고 동서독 대화의 확대를 촉구하는 평화운동이 전개되자 프랑스는 서독의 NATO 이탈 가능성을 우려하 는 등 과잉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54)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 과 학과 기술‧정보통신‧우주 분야에서 협력, 핫라인 설치, 군사합동작전 수행 등은 양국 관계를 긴밀히 하였고 유럽통합이 촉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동방정책과 관련, 콜 수상은 집권 직후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에 서 소련의 군비확장을 비판하였기 때문에 서독과 소련 관계는 원만하 지 못했다. 1983년 7월 콜 수상의 모스크바 방문도 대소관계의 극적
53) 당시 서독은 EC 이외 지역에 대해 자유무역을 주장한 반면, 프랑스는 EC의 공동행동을 선호하였다.
54) C. Hacke, Weltmacht wider Willen, p. 359.
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고, 호네커는 1984년 소련의 압력으로 서독 방문을 포기해야 했다. 겐서(Genscher) 서독 외상은 소련에 대해 화 해와 군사우위 정책의 포기를 요구하는 한편, CSCE에서 소련의 인 권 침해를 비난하였다. 소련 지도층은 1980년대 전반기에 3명의 최 고 지도자가 연속 사망하는 상황에서 서독과의 관계 강화에 이해가 없었으며 단지 교역관계만 정치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발전되었다. 이 러한 배경에서 콜 정부는 고르바쵸프의 집권 이후에 대소관계에서 신 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개혁정책의 추진을 위해 서독 의 경제원조를 필요로 했고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 건이후에는 환경, 기술, 핵시설 안전 등의 분야에서 서독의 협력이 필 요하였다. 1986년 7월 겐서 외상의 모스크바 방문시 양국간 「과학기
술협정」 체결과 1987년 7월 바이체커(Weizsäcker) 서독 대통령의
소련 방문시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 지지를 계기로 서독과 소련 관계 는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정책과 관련, 콜 수상은 동독에 대해 서독의 민주주의적인 모 습을 부각시키고 통일보다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촉구하였으며 기존에 체결된 조약과 협정들이 잘 이행되도록 하는 데 정책의 중점을 두었 다. 쉬미트 전 수상 때부터 외상직을 맡고 있던 겐서가 독일정책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의 연속성이 견지되었다. 호네커 동독 정부는 1980년 게라에서의 4가지 사항을 재차 요구하였는데 이 에 대해 콜 정부는 동독이 과도한 요구를 해서 양독 관계를 해치지 말고 건설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을 요구하도록 주장하였다. 소련의 경제난으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동독은 서독과의 접촉을 희망
하였고 1983년과 1984년 콜 정부는 총 20억 마르크에 달하는 2종
류의 차관을 제공하였다.55) 이 대가로 동독으로부터 서독으로 여행 55) Ibid., p. 373.
과 이주가 증가하고 함부르크와 베를린간 도속도로가 건설되며 방문 왕래가 용이하게 되는 등 양독 관계가 호전되었다. 그러나 콜 정부는 안보문제에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고 대신 인권, 이주의 자유, 무 역 문제 등을 거론하였다. 특히 체르노빌 핵사고 이후에는 원자력 시 설 안전과 환경 문제를 부각시켰다. 1986년 5월 동서독간에 문화협 정이 체결되었고 1987년 9월 호네커의 서독 방문시 서독 정부가 공 식 예우를 갖추어 환대함으로써 콜 수상 자신의 위상도 제고되었다.
이 회담 결과, 과학, 기술, 환경보호 관련 3개 협정이 체결되었고
1987년 8월 말까지 32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을 방문하여 자유와
복지 상황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서독의 실상이 동독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정책에서 콜 수상의 가장 큰 성과는 동독 연금자들의 서 독 방문 확대, 철도망 개선 및 서독 방문 동독인들에 100마르크로의 환영금 인상 등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전반기 미‧소간의 대결이 증대되는 시기에 서독 외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콜 정부는 친서방정책이라는 아데나 워 초대 수상의 전통을 승계하면서 소련 및 동구 국가들과 무역관계 를 계속하는 현실주의적인 동방정책과 독일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고르바쵸프의 개혁정책으로 동서 진영간의 탈냉전 분위기가 시작되는 1980년대 후반기에 콜 수상은 통일보다는 자유와 인권 등을 중시하 는 기독교적, 민주적 긴장완화 정책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서독은 정치, 경제면에서 유럽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1990년대 문턱에서 국제적으로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