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1. 신제도주의 이론50과 북한경제의 변화
2. 북한의 경제위기와 제도변화
가. 경제위기 이전 제도-조직의 관계
경제위기 이전 북한의 경제 관리 방식은 사회주의 경제 건설기의 ‘유 일관리체제’와 1960년대 이후 ‘대안의 사업체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 일관리체제는 계획의 강한 중앙 집권화와 노동력의 강제 동원, 기업소 의 관리 권한이 지배인 1인에게 집중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 당시 경제 관리는 계획의 전달과 자재·소비재의 공급을 국가가 철저하 게 통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노동에 대한 유인도 물질적 자극보다 는 정치도덕적 자극이 최대한 활용되었다. 물론 북한은 1947년 5월부터 경제 각 부문에서 도급제를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었으나 사회주의 경제건설 시기는 특히 정치도덕적 자극이 ‘천리마 운동’과 같은 형태로 강조되었던 기간이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유일관리체제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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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집권적 경제관리 방식은 점차 비효율적인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이 는 기업의 수가 증가하고 기업 규모가 대형화, 산업 규모가 복잡해짐에 따라 1인 지배인에 의한 기업소관리의 어려움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은 ‘대안 의 사업체계’라는 새로운 경제 관리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1961년 채택 된 대안의 관리방식은 중앙권력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계획 개념을 탈피하여 계획 수립과정에 기업소의 참여를 허용하고 생산현장 의 능력과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기업소의 책임이 지 배인 단독책임제에서 공장 당위원회가 책임을 지는 집단지도체제로 변 경되었다. 임금 분배도 노동의 난이도에 따라 8등급으로 단순 구분하였 던 방식을 대안의 사업체계에서는 기본임금, 기술수준, 월간 노동시간 으로 세분화함으로써 노동자간 임금이 차별화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하 였고 ‘작업반 우대제’와 ‘분조도급제’를 도입하는 등 물질적 자극을 강조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53 하재룡에 따르면 시기별 임금 차등 정도 는 1953년 기준 1.65배에서 1961년 3.9배, 1980년대 말 5배로 증가하고 있어 물질적 자극을 강화하는 형태로 임금 체계54가 정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55
53 _ 하재룡, “북한의 산업화와 노동정책,” 노동문제논집 14권 (1997), p. 13.
54 _ 북한의 임금(생활비) 체계는 노동의 양과 질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분야에는
‘도급지불제’를 적용하며 상대적으로 노동 결과에 대한 물질적 자극이 약한 분야에 대해서는 ‘정액지불제’를 적용하는 형태로 구분되어 있다. 공업 생산에는 도급 임금 제가 기본적으로 적용되며 상금과 장려금도 생산계획, 제품의 질, 설비 및 자재의 효율적 이용에 연계시켜 지불되도록 하고 있다. 즉, 공식적으로 임금, 즉 생활비는 그가 어떠한 노동을 하고 있는가에 의해 평가되고 물질적 유인이 임금체계에 잘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5 _ 북한은 노동보수를 자본주의적 임금과 다르다는 측면에서 1978년에 제정된 사회주
의 노동법에서 생활비 또는 노동보수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노동보수란 “로동자, 사무원들에게 로동과정에서 소모한 육체적 및 정신적 힘을 보상하고 생활을 보장하 기 위하여 사회총생산물의 일부를 그들이 지출한 로동의 량과 질에 따라 분배하는
그러나 이와 같은 공식적 임금 체계가 실제로 노동에 대한 강한 물질 적 유인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건화는 이를 노동정 량에 대한 기술적 평가의 어려움, 노동자들이 지닌 평등주의적 경향, 노동보수에 차이를 크게 두지 않으려는 북한당국의 사회주의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적 가치관은 배급제 가 일종의 간접 임금으로 실제 소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는 북한의 분배 시스템에 반영되고 있다. 즉, 기본식량, 주택, 교육, 보건, 의료 등의 현물보조가 배급제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어 실제 임 금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최신림·이석기는 전 체 노동자 평균 소득의 50%가 배급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 하고 있다.56
또한 새터민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충성도나 출신성분 등의 정치도덕 적 자극의 비중이 여전히 높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Q: 노동자들의 노동실적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A: 노동정량 초과 달성시 출신성분에 따라 차등보상한다. 성분이 나쁜 노동자들은 노동정량의 50% 초과분까지만 보상을 받는 반면, 출신 성분이 높은 노동자들은 100% 보상받는다.57
배급제의 존재로 인해 임금이 물적 유인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정치도덕적 자극에 중점을 두려고 하는 제도의 특성상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키려는 유인이 부족했던 것이 경제위기 이전 북한경제
몫의 화폐적 표현”이라고 한다. 사회과학출판사, 경제사전 2 (평양: 사회과학출판 사, 1985), p. 189; 정건화, “북한의 노동체제에 대한 제도론적 접근,” 동향과 전망
62호 (2005).
56 _ 최신림·이석기, 북한의 산업관리체계와 기업관리제도 (서울: 산업연구원, 1998).
57 _ 새터민 Y00(기능공, 남)와의 인터뷰, 1996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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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도-조직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제위기가 시작되 면서 원자재의 불규칙한 공급으로 노동성과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려 워졌고 공급할 소비재 자체가 전반적으로 부족하고 인플레가 심각한 상황에서 ‘생활비’로 지불되는 화폐임금의 격차는 물질적 자극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제도-조직의 상호의존관계가 지속적으로 노동생산성을 저하시킬 유인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소득의 50%를 차지 하는 배급제의 존재는 기업소 조직 내에서 노동생산성 향상의 물질적 요인은 되지 못했지만 노동자들을 계획의 틀에 묶어두는 강력한 물질적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90년대의 계획이탈은 식량난으로 인한 배급제 마비의 충격 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본다. 배급 중단이라는 공식적 제도의 단절은 주 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채택하게 만들었다. 계획에 소 속되어 의무를 다함으로써 임금과 배급표를 받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 할 수 없게되자 각 경제주체들은 계획을 이탈할 유인을 가지게 되었다.
단, 이러한 변화는 어느 한 순간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연속적 으로 이루어졌다. 새터민의 증언을 토대로 경제 주체들의 의식변화 과 정과 비공식적 제도들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나. 경제위기와 비공식적 제도의 형성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사회주의 교역국들의 감소라는 위기 상황에 부딪힌다. 특히 편중된 중화학공업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원자재를 소련 등에 의존하고 있던 북한의 산업은 1990년대의 대외환 경 변화로 인한 충격이 컸다. 1990년대 초반 물질적 자극의 도입이 보다 강조되었지만 원자재가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획 달성 자체가 무의 미해졌다.
안좋아지기 이전에는 노임 받는 것 가지고 신경을 많이 썼죠. 그 노임으 로 국정가격으로 줄 때는 그 노임에 신경을 쓰는데 가격이 올라간 뒤에 는 임금 받아야 별로 사지도 못하는데 임금에 신경을 별로 안쓰죠. 돌격 노동을 하는 돌격대가 따로 있고 선전을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어요.58
위 증언은 탄광 노동자 출신의 새터민의 인터뷰 내용이다. 도급제를 토대로 하는 물질적 유인의 비중이 큰 직종이었지만 소비재 부족으로 배급사정이 악화되고 인플레가 심각해지자 임금의 구매력이 급격히 내 려가기 시작하고 계획달성에 대한 물질적, 정치도덕적 유인이 함께 저 하되기 시작했다. 또한 원자재 공급이 원활해지지 못하면서 계획달성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계획의 일원화 체 계가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한다.
Q: 계획의 일원화가 현실적으로 깨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A: 90년대 초반부터 계획한 대로 실행이 되지 않았다. 그 때부터 경제가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때는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면 위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현재는 비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위에 서도 자재나 전기, 배급을 전혀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59
그러나 경제위기가 바로 계획으로부터의 이탈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80년대 후반부터 경제의 생산능력에 전반적으로 저하되었고 계획 달성 이 힘겨워지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북한경제 내에서는 이를 사회적 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8·3인민소비 품 생산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업소 단위의 부산물 등을 이용하여 자체적으로 소비재 등을 계획외 생산하는 것이다. 새터민들
58 _ 새터민 H00(기능공, 남)와의 인터뷰, 2004년 2월 21일.
59 _ 새터민 K00(남, 2000년 탈북)와의 인터뷰, 2007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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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증언에 의하면 이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80년대 말인데, 국영상점을 통해 구입할 수 있는 소비품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1988년 8·3인민소비품 판매유통 규모가 전체 소매상품유통액의 9.5%
를 차지하게 된다.60 배급제가 기본적으로 작동하던 시점에는 전반적 인 부족 현상을 국가 차원의 생산운동으로 극복하려고 하는 등 경제위 기가 곧바로 계획이탈을 불러오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50년동안 유지되었던 경제 조직의 결속이 깨어진 것은 식량난으로 인한 배급제 의 중단, 아사자가 급속히 발생하면서부터이다. 북한의 식량생산은 집 단농장 체제의 문제점, 농자재 부족 등으로 1980년대 말부터 5%이상 씩 감소하기 시작했다.
Q: 농업 부진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A: 비료와 농약의 절대부족과 집체생활에서 오는 의욕상실, 능률저하 때문이다. 농민들은 스스로의 처지를 천하게 여기며 “우리가 먹을 것만 농사한다”는 의식이 강하다.61
전체 곡물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1988년 1ha당 396.9kg으로 1983년 수준으로 하락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지속적으로 400kg이하를 기록 했다. 그러나 식량 부족으로 사람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위기는 자연재 해로 인한 흉작이 발생한 1995년부터이다. 특히 1996년 홍수, 1997년 가뭄 등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사회주의 국가들로부 터의 경제적 지원 중단, 식량 수입에 필요한 외화 부족까지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남성욱은 1995~1998년간 식량 수요량과 공급량을 토
60 _ 정은미, “북한의 국가중심적 집단농업과 농민 사경제의 관계에 관한 연구,” 박사학
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7), pp. 207∼208.
61 _ 새터민 P00(당간부 출신)와의 인터뷰, 1997년 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