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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내적균형 전략 : 강성대국 건설

Dalam dokumen 북방삼각관계 변화와 지속: (Halaman 88-92)

가. 국방위원장 1기(1998.9~2001.1): 체제 도약 모색

1998년 9월 북한은 ‘강성대국’91 기치 하에 김정일시대를 출범시 켰다. 북한은 강성대국의 특징으로 사상강국·정치대국·군사강국· 경제강국을 내세우고, 강성대국 건설방식으로 ‘사상의 강국을 만드 는 것부터 시작하여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튼튼히 세우고 그 위 력으로 경제 건설의 눈부신 비약을 일으키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이미 ‘사상강국·정치대국·군사강국’은 이미 달성하였기 때문에 ‘경 제강국’만 달성하면 명실상부한 ‘강성대국’이 될 수 있다고 북한은 주장했다.

사상 및 정치강국 건설과 관련, 북한은 각종 상징 조작과 사상사 업을 전개했다. 북한은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강성대국의 ‘신호탄’ 으로 강조하는 등 주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코자 했다. 김일 성을 ‘영원한 주석,’ ‘사회주의조선의 시조,’ ‘세계혁명의 원로수령’

으로 칭송하고,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을 재추대(1998.9.5), ‘혁명의 계승자’로 부각시키는 등 우상화작업을 지속하였다. 북한은 ‘선군

정치(先軍政治) 사상’을 내세워 군부중시 체제를 지속하는 한편,

제10기 최고인민회의 개최와 중앙 조직 개편, 그리고 지방 인민회 의 대의원 선거(1999.3.7)와 지방 조직 정비를 이룩하였다. 이는 김 일성 사망과 경제 파탄 상황에 따른 리더십 부재와 혼란 방지 및 체제관리를 위해 군이 국방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업무를 선도 적으로 수행케 하려는 의도였다.

91_“정론,” 뺷로동신문뺸, 1998년 8월 22일; 뺷조선중앙방송뺸, 1998년 8월 23일.

군사강국 건설과 관련, 북한은 내부체제 공고화 및 적화통일 수 단강화, 그리고 대미협상 수단확보 차원에서 군사력 증대정책과 군부 우대정책을 강조했다. 특히 다단계 로켓 발사(1998.8.31)를 통 해 중·장거리 유도미사일 개발능력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대미 협상력을 강화하였다. 김정일의 총비서 추대 시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당 중앙위원회와 공동명의로 발표하고 제8차 헌법 개정 시 국가주석을 폐지하고 김정일을 국방 위원장에 재추대한 사실은 북한이 군사력 증대 및 군부 우대정책 을 지속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경제강국 건설에 있어, 북한은 정치우선주의와 사회주의 방식 고수를 주장함으로써 그 한계도 노정하였다.92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자력갱생과 함께 외부자원 도입 정책을 전개하였으

나, 1997년 -6.8%, 1998년 -4% 내외 등 9년째 마이너스 성장을 지

속하였다.

나.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오바마 행정부까지(2001.1~2011):

체제수호를 위한 노력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가속화되던 북미 관계 개선은 부시

(George Bush)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 이후 클린턴(Bill Clinton)

미 대통령의 방북계획 취소로 인해 주춤거리게 되었다. 2001년 1월 20일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유화적

92_북한은 전민에 ‘경제 정상화 총력’을 촉구하면서도, 우리식 사회주의에서는 ‘사 상이 먹는 문제에 우선’한다는 사상교양 강화를 강조하였다. 뺷로동신문뺸, 1999년 4월 15일; 뺷평양방송뺸, 1999년 4월 13일.

인 것으로 평가하고, 북한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표출하였다. 이후 부시 행정부는 3월 9일 대북 정책 전면 재검토 등 대북 정책 6원칙 을 발표하고, 6월 6일 제네바 합의 이행 개선 등 강경한 대북 정책 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2년 1월 29일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 고,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이같이 미국은 북한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규정하고 미사일방어체제(Missile Defence: MD) 구축과

대북 강경 정책을 일방적으로 진행시켜 나갔다.

이에 대해 북한은 체제 수호적 자세를 취하였다. 2001년 6월 18 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대미 대화 재개 입장을 공식 표명하였고, 김정일은 러시아 방문을 앞두고 7월 24일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대조선고립압살정책’에 따라 대미 관계개선이 저지되고 정세가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선의에는 선의로 대하고,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할 것임을 천 명하였다.93 그리고 2002년 1월 31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타격의 선택권은 미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력

반발하였다.

다. 핵무기 개발: 개발과 협상 병행

북한은 김정일정권의 장기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난과 안보난을 반드시 해결하여 유효성을 제고하고, 연대성을 강화해야 하는 바, 이를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중심고리’임을 확신하는 모습이었

93_뺷로동신문뺸, 2001년 7월 28일.

다.94 이에 북한은 부시 행정부로부터 체제보장을 받아내기 위해 2002년 9월 농축우라늄 핵개발 계획을 의도적으로 노출시키고, 2003년 경수로발전소 완공지연과 미사일 모라토리움 해제 문제를 중심으로 큰 담판을 준비하였다. 우라늄 농축 계획은 바로 미국의 관심을 이끌어 내어 협상을 통해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체제 보장 을 받아내려는 카드로 준비된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북한이 핵 개발 계획을 시인한 것은 단순히 미국의 확실한 증거에 의한 윽박 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시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이었던 것으 로 평가된다.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없이는 김정일 체제가 장기 지 속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 상황에서 농축우라늄 핵개발 계획 의 포기를 전제로 그 효과를 극대화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 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이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 는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맥

락에서, 2003년 상반기 북한은 공세적 위기관리 전략(offensive

crisis management strategy) 차원에서 대미 압박을 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은 핵동결 해제선언을 통해 플루토늄 생 산 가능성을, 전투기의 북방한계선 침범(2003.2.17) 등으로 정전협 정 무효화 가능성을, 지대함 미사일 실험발사(2003.2.24, 2003.3.10) 등으로 미사일 모라토리엄 폐기 가능성을 각각 시위함으로써 대량

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개발과 더불어 미

국을 양자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북한 은 북경 3자회담에서 핵무기 보유를 비공식적으로 미국에게 통보

94_김정일은 1997년에 이미 ‘미국을 100년 숙적으로 보려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대미 관계정상화를 모색한 바 있다. 김정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 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뺷로동신문뺸, 1997년 8월 4일.

하였고, 백남순 외상 또한 평양방문 미 의원단에게 재처리 완료를 언급함으로써 북미 협상이 균형협상과 중요협상임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은 농축우라늄 핵개발 계획과 플루토늄 핵무기 보유 의혹을 대미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용으로 일단 활용하되, 정권유 지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개발하였다. 특히 북한은 미국 부시행정 부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목적 이 아니라 김정일정권 붕괴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정권 유지를 위한 최후 보루 확보 차원에서 핵무기 개발을 실제적으로 추진하 였다.95

2. 북한의 외적균형 전략: 전방위 외교 좌절과 북방

Dalam dokumen 북방삼각관계 변화와 지속: (Halaman 8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