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체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인 경제난에 대량아사를 가 져온 식량난까지 겹쳐 계획경제와 국가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 의 국가기구의 심각한 기능장애를 초래했다. 국가자원의 만성적·구조 적 결핍 상태는 체제유지를 위한 비용 조달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국가 전반을 통제하면서 체제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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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북한체제의 변화 전망
도모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을 계기로 북한의 대외개방의 우호적 상황이 마련되었으며, 남북한 교류협력과 대북 경제적 지원 등은 북한 사회의 개방 분위기를 조성 하는데 기여했다. 그와 함께 남북한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교류로 인 한 물자와 대외정보 유입으로 북한 정권이 우려하는 대민통제력의 이완 현상은 불가피해졌다. 특히 정부의 배급제가 거의 해체된 상태 에 주민들 스스로의 자활 방식인 장마당 형태의 농민시장이 나타나 고 점차 낮은 수준의 ‘시장’이 형성·발전되어 가는 추세를 막을 수도 없었다. 북한은 이러한 국면을 2002년 7월에 취한 ‘경제관리개선조 치’로 대응하고자 했다.
북한의 개혁·개방 조치의 일환으로 단행된 ‘7·1 조치’는 북한 당국 스스로 개혁·개방 정책을 선제적으로 추진한 정책 유형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7·1 조치’는 낮은 수준의 시장 형성 등의 ‘밑으로 부터의’
사회변화를 추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한 ‘떠밀린’ 개혁 조치 로 이해된다. ‘7·1 조치’는 물가, 임금, 환율 세 측면에서 당시의 거래 현실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생산성의 증대를 기대했으나,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가, 임금, 환율의 현실 화는 먼저 최소한의 공급 사이드의 조건 충족이 어느 정도 전제되어 야 한다. 그러나 ‘7·1 조치’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단행되었고, 그 결과 엄청난 인플레와 수요공급의 부조화로 인한 많 은 장애와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분출될 수밖에 없었다.
현 단계에 북한의 개혁 조치의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이른 측면이 있지만, 북한의 개혁 성격은 중국의 개혁 경험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예컨대 정치적 측면에서 ‘7·1 조치’는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의 초기 단계 즉, ‘부분 개혁’ 단계와 비슷한 양태가 드러나 보이지만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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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의 기본방향과 추진전략
선도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교체가 부재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는 점에서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 경험과는 다르다.31 사회 분야에 서의 체제변화를 전망한다면, 중국의 경우 경제발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사회의 자율성 신장과 함께 다원화 현상과 당국가 체제의 약화 가 나타났다.
그와 달리 북한에서의 사회변화는 경제발전의 결과가 아닌 오히려 경제실패와 국가 기능의 장기적 침식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 처럼 경제적 성공의 축적이 보다 높은 수준의 시장경제로 나아가게 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국가 중앙계획경제의 실패가 궁극적으 로 시장경제의 태동을 가져오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중국 의 경우 시장경제의 성공이 국가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면, 북한의 경 우 시장경제의 태동이 국가의 해체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 면, 시장경제의 태동은 북한 정권의 합리적인 정책의 산물이라기보다 는 국가 차원의 억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의도와도 어긋나 는 밑으로부터 확장되고 있는 ‘불가역적’ 변화라는 점이 북한체제의 미래 향방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개혁·개방의 성공여건>
밑으로부터 떠밀린 개혁, 또한 불가역적 변화에 맞닥뜨린 현실에서 성공적인 개혁을 통한 북한체제의 연착륙(Soft Landing)은 구조적 인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성공적인 개혁·개방에 비춰볼 때, 북한의 개혁·개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31 박형중, 북한의 개혁·개방과 체제변화 (해남, 2004), pp. 177~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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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왕조적 수령체제의 유지와 성공적인 경제개혁은 병존하기 어 렵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체제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스 탈린적 체제유지의 성공 사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시장경제 논리를 받아들이는 개혁은 외부정보의 유입과 자유의 확산을 막을 수가 없 다. 시장과 자유는 북한의 왕조적 수령체제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외부세 계를 잘 알고 있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 가장 유 연한 지도자로 군부의 반대를 극복하고 그의 개방 의지가 정책적으 로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개혁·개방은 지 도자 개인의 독특한 개성과 취향을 넘어선 수령체제의 고유한 속성 과는 배타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발로가 아 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북한은 대외개방을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개방과 단속 즉, 적당한 수준의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서 시행착오 속의 변화를 보일 것이다.
중국의 성공은 최고 정치지도부의 교체와 함께 당 중심의 개혁지 도층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는 베트남의 개혁·개방 사례에 도 적용된다. 북한의 왕조적 수령체제에 자유의 유입과 확산을 막을 수 없는 개혁·개방의 본격적인 결단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적 변화를 전제한 중국의 개혁·개방을 북한 수령제체가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방의 순간 밀어닥친 자유 분위기를 탱크 와 대포로 짓누르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마친 루마니아의 차우체스 쿠 정권의 몰락 사례를 통해 김정일 정권은 이미 충분한 학습효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왕조적 가족지배 체제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정권이 본격적으로 개혁·개방을 단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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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수령의 자의적 통치로부터 법적·제도적 통치구조로 변화되 어야 한다. 즉, 법적·제도적 지배구조가 전사회적으로 확립되어야 한 다. 이를 위해서는 수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의 분산, 탈중앙화와 분 권화, 통치기구의 실질적 제도화 진척, 자의적 국가 폭력과 억압적 통 치기구의 축소, 일반주민들의 탈집단화와 비공식적 네트워크의 확대 등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물론 북한 정권이 이러한 변화과 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정권의 의지 와 능력에 달려 있다. 현 단계 북한에서 사회 하부구조의 변화가 전 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정권의 의 도와는 상관없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법적·제도적 통치구조의 변화와 는 무관하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는 수령체제 자체의 일정한 양보가 전제되어야만 개혁·개방의 전망과 비전을 찾을 수 있다.
셋째, 북한의 개혁·개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에 대 한 우호적인 대외환경이 필수적이다. 즉,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이루 어져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 개방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대미 관계 등 대외환경은 무척 우호적이었다. 중국의 개혁조치는 국제사회 가 환영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외 지원을 통해 오히려 경기과열을 우려하는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베트남의 경우, 미국 과의 국교정상화 동남아시아연합국가(ASEAN) 가입 등 우호적인 국제환경을 조성한 후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 추진과정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불안정을 겪었지만 베트남 정부는 1993년 에 이르러서는 경제안정과 함께 근대화와 공업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32
32 박형중,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과 발전 북한을 위한 모델?,” 통일문제연구협의회,
평화를 위한 우리의 한반도 정책 대구상 (통일연구원·경기개발연구원 공동학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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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북한체제의 변화 전망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한 대외환경은 무척 열악하며 중국이나 베 트남 개방 당시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북한의 핵 문제는 1990년대 김일성 시대의 개방 시도 단계에서부터 김정일 시대의 지금까지 개 혁·개방 과정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핵문제가 해결되 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을 우회한 전방위적 실리외교를 추진 한다고 해도 소규모적 경협 이외에 본격적인 개방·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중‧장기적 여건 조성을 구축하기는 어렵다.33 대미관계가 개선 되어야 서방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자본과 기술의 도입, 시장 확보 등이 가능해진다. 더욱이 미국과의 적대관계의 해소 없이 체제유지를 위한 과도한 군비지출 부담을 극복할 수 없다. 피폐화된 사회간접자 본, 에너지와 외환 등 경제적 자원의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 기술, 시장 등을 모두 대외개방을 통해 획득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핵문제 해결을 통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는 문제다. 전쟁 이후 60여년 이상 지속되어온 대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경제회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핵문제 해결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핵 없는 김정일 정권’의 존립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 로 여기에 북한문제의 딜레마가 있다.
의, 2005.7.26~27) 참조.
33이교덕 외, 북한체제의 분야별 실태평가와 변화전망: 중국의 초기 개혁‧개방과정과의 비교분석 (통일연구원, 2005), pp. 489~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