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영·미 간 중국에 대한 견해차의 배경
연합국의 분열, 독일문제의 미해결 등 여러 정치적인 문제도 떠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의 팽창주의와 공산진영의 세력 확장이 더해져 정치·경제
·사회 등 전반에 걸친 최악의 위기를 몰고 왔다.89
이처럼 자생적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유럽 국가들 은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제 2차 세계 대전 후의 영국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을 대외 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는 미국이 세계무대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지 게 하는 동시에 영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세계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발상이었다.90 영국의 첫 번째 목적은 뜻대로 달성 되었다. 1947년에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 포함에 따라 미국과 소련 간의 군사적 대립은 공식화되었다.91 그러나 정치·
군사적인 처방의 성격이 강한 트루먼 독트린만으로 유럽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따르자 미국 정부 내에서 추가적인 원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 다.92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 내놓은 종합적인 처방은 마셜플랜이었다.93
위에서 살핀 바처럼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외정책의 중심은 절대적 으로 서유럽에 있었다. 서유럽 제국(諸國)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으로서 자 유진영의 한 축을 이루는 만큼 미·소 대결의 주요의 장(場)이 아닐 수 없었 다. 영국의 입장에서 서유럽이 미국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앞자리를 차 지하는 것은 당연히 반가운 일이었고 또한 이는 영국이 바라는 바와 맞아떨
89 남정옥. 「미국의 트루만 행정부의 대유럽 정책: 마샬 플랜을 중심으로」. 『史學志』Vol.
32 No.1 (1999) 185쪽.
90 Ra Jong-Yil, “Special relationship at war: The Anglo-American relationship during the Korean War”,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Vol.7 Issue 3(1984), p302.
91 남정욱. 앞의 글 186쪽.
92 김정배. 「마셜플랜의 결정과정: 마샬의 제안까지」. 『역사와 경계』Vol. 31 (1996) 298 쪽.
93 유럽부흥계획, 일명 마셜플랜은 당시의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이 제창한 것으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황폐화된 동맹국을 위해 미국이 계획한 재건, 원조 계획이다. 위키백과.
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의 개막과 공산주의의 확장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 정책 결정자들에게 유럽 우선주의는 불변의 정책기조이기는 하지만 냉전이 심화되면서 정부 부처간에 의견차이가 점점 벌어져 가는 것 은 사실이었다. 예컨대 당시 중앙정보국의 관료들이 아시아가 지니는 중요 성에 대해 강조한 바가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하나 가까운 미래에 급박한 위기가 아시아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94
이와 같은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은 아시아·태평양지역으로의 관심 이동에 대한 요구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의 이와 같은 움직임 에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게는 서유럽의 안정이 자 국의 안보문제와 직결되는 만큼 항상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의 세력범위 하에 있고 영국의 발언권이 별로 없는 극동지역의 중요도 는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미국의 전략 중심이 서유 럽에서 극동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 전쟁 기간 중 영국이 미국의 정책에 끊임없이 이견제기를 하고, 특히 중국 이 참전한 후 중국을 다루는 정책을 놓고 미국과 심각한 대립을 벌였던 것 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 중국을 자극하는 일 을 가급적 피하고 전쟁을 한반도에 국지화시켜야 한다는 정책기조에는 전쟁 의 확대로 인해 미국의 관심이 극동지역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려는 전략 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이 같은 우려는 1950년 12월에 워 싱턴과 외무성 간 오가던 전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프랭크스 주미 영국 대사가 트루먼·애틀리 정상회담의 상황을 외무성에게 전하면서 미국의 협상 대신 강경한 대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호전적인 태도를 보 고하였다.95 이에 대해 외무성은 사태가 이대로 진행되는 것을 방치한다면
94 김명섭. 「6·25전쟁 직전의 ‘애치슨선언’에 대한 재해석: 서유럽에서 동아시아로 확장되는 미국의 전략적 관심」. 박두복 편『한국전쟁과 중국』. 서울: 백산서당(2001) 84~88쪽.
95 From Washington to Foreign Office, No. 3330, 7 Dec. 1950, PREM 8/1171, TNA.
미국이 조만간 중국과 전쟁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럴 경우 두 가 지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하나는 미국의 정책에서 극동지역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서유럽의 그것을 추월하게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이 그 틈을 타 유럽에 개입하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96 이러 한 상황의 전개는 영국의 국익과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었다.
전쟁 발발 후 양국은 전쟁의 성격에 대해 공동인식을 가졌다. 즉 한국 전쟁은 소련이 그 배후에 있는 대리전쟁(proxy war)이었다는 것이다. 이러 한 공동인식 하에 영국은 유엔의 미래와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의 도발을 사 전 예방하기 위해 침략자의 도발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큰 틀에 서 미국의 정책에 보조를 맞추었다.97
그러나 영국은 막후 세력을 보다 더 경계해야 하고 쓸데없는 곳에 자원 을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 한국 전쟁을 장기화하거나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영국의 이 같은 우려에 대한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구 소련 문서를 토대로 진행된 연구인 “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에서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을 유럽으로부터 분산시키려 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가 있었다.98 더욱 흥 미로운 것은 1950년 8월 스탈린이 고트발트(Gottwald) 체코슬로바키아 대 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였다. 이 편지에 따르면 소련이 안보리에서 대표를 철 수시킨 이래로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수렁에 빠져 버 렸고……유럽이 사회주의를 공고화하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세계적 차원의 힘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모든 것이 공산주의 진영에게96 From Foreign Office to Washington, No.5534, 8 Dec 1950, PREM 8/1171, TNA.
97 김계동(2014). 219쪽.
98 Sergei Goncharov, John Lewis, and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 orean War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152.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소련이 일부러 안보리에서 대표를 철수 시킴으로써 미국의 군사개입을 유도하였고 유럽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유리 한 환경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태균 교수는 더 이상 밝혀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스탈린의 언급은 단지 자신의 실수에 대한 ‘변명’일 가 능성이 높다며 만약 위의 언급이 사실인 것으로 입증된다면 한국전쟁의 기 원에 대한 연구는 다시 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99
스탈린의 편지에서 드러난 그의 의도의 진실성을 떠나서 한국전쟁의 발 발과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개입으로 인해 영국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의 의도에 대해 영국 지도부가 얼마 정도 정확히 파악했었는지 알 수가 없으나 그러한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정책 제정 시에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