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위원회가 제출한 정전 5원칙이 유엔총회에서 가결된 뒤 각국의 관 심은 중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모아졌다.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국가들 은 당연히 중국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 한국전쟁이 평화적으로 종결되었으 면 하는 바람이었다. 미국은 원칙상 평화적인 해결을 찬성하지만 중국이 서 방국가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만약 중국이 제의 를 거부한다면 우방과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방들로 하여 금 자신의 규탄 결의안을 따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계산이었 다.42
아니나 다를까 군사적 승리에 들떠 있던 중국은 ‘5원칙’을 강력히 거부 하고 나섰다. 1월 17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신화사(新 華社)를 통해 정전위원회의 제의에 대한 장문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에 서 정전위원회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정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지 미국이 ‘숨쉴 틈’을 확보하려는 책략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서 대안제의(counter-proposal)도 제기하였다.
i. 적대행위의 조기종결을 위해 모든 외국 군대는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하고 한국문제의 해결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
ii. 대만에서 미군의 철수 문제를 비롯한 다른 극동문제도 평화
42 沈志華. 앞의 글 6쪽.
회담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iii. 평화회담에 중국, 소련, 영국, 미국, 프랑스, 인도, 이집트가 참석해야 하며 중국의 유엔가입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
iv. 평화회담은 중국에서 개최되어야 한다.43
미국은 중국의 이 같은 답변이 유엔에 대한 모독과 다름 없다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원래 계획대로 자신의 규탄 결의안을 추진해 나 갔다. 미국은 결의안 초안을 작성한 후 영국과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 서 방국가에 보냈고 공동제의국(co-sponsor)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해 당 국가는 자국의 미국 주재 외교관들에게 미국의 초안을 같이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1월 19일, 영국의 유엔대표인 젭은 외무성에 각국의 의견이 반영된 수 정안을 보냈다. 미국의 유엔대표인 그로스(Gross)도 각국의 의견을 수렴한 후 애치슨에게 통보하였다.44 당일 오후, 그로스가 국무부로부터 회답을 받 고 그 결과를 각국의 유엔대표에게 고지하였다. 각국 대표들은 초안의 몇 가지 문항에 관해 미국과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특히 제3항, 제8항과 제9항에 관한 이견이 컸다. 결국, 캐나다의 피어슨은 자국 정부로부터 공동 제의를 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캐나다 정부는 1월 17일 저 우언라이의 성명에서 몇 가지 모호한 점이 있다면서 중국 측에 천명을 요구 하고 회답을 받기 전까지는 결의안에 대한 결정을 미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프랑스의 라코스테(Lacoste)와 호주의 샨(Shann)은 아직 자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못 받고 있는 터라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로스는 미국이 아마도 공동제의국 없이 결의안을 제출할 것이고 초안 그
43 Foreign Office and Whitehall Distribution, PREM 8/1405, TNA.
44 From New York to Foreign Office, No.104/NO.105, 19 Jan. 1951, PREM 8/1405, TNA.
대로 제출할 수도 있다고 유감을 밝혔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유 엔에 관한 여론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젭은 이상의 상황을 정리하면서 수정안을 지지하고 공동제의하자고 외 무성에게 전문을 보냈다.45 그러나 이에 대해 베빈이 부정적이었다. 그 이유 는 결의안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 다. 특히 결의안에 공동대책위원회를 통해 제재조치를 취하는 문항이 포함 돼 있는 만큼 만약 공동제의를 하게 된다면 공동제의국으로서 공동대책위원 회에서 나오는 모든 결정을 지지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어 특별히 신중 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베빈에게 또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젭이 보내온 제111번 전문에서 한국 이외의 목표물에 대해 폭격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베빈은 애치슨이 평화적으로 극동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가 없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미국 이 공동제의국을 구하기 위해 여러 국가를 개별적으로 접근하면서 다른 국 가가 이미 협조의 뜻을 보였다고 속임수를 쓰는 것도 베빈의 반감을 샀 다.46 따라서 베빈은 젭에게 미국의 결의안을 공동제의하거나 찬성표를 던 지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결국, 미국은 공동제의국을 구하지 못한 채 1월 20일에 독자적으로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결의안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i. 유엔은 중공의 개입에 대응하는 데 있어 국제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주요 책무를 이행하지 못하였다.
ii. 중공 정부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유엔의 모든 제 안을 거부하였다.
iii. 중공은 한국에서 침략행위를 저질렀다.
45 From New York to Foreign Office, No.111, 19 Jan. 1951, PREM 8/1405, TNA.
46 From Foreign Office to Washington, No.255, 20 Jan. 1951, PREM 8/1405, TNA.
iv. 중공에게 유엔군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한국에서 군대 를 철수하는 것을 촉구한다.
v. 유엔이 행동으로 침략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다.
vi. 모든 국가에 유엔의 행동에 대해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한다.
vii. 모든 국가에 침략자를 지원하는 것을 삼가 줄 것을 촉구한다.
viii. 공동대책위원회가 추가 조치를 강구하여 관련 제안을 유엔총 회에 보고하도록 한다.
ix. ……47
그리고 미국은 추가 제재에 관한 제안서를 작성하여 규탄 결의안이 통 과되는 즉시 공동대책위원회에 제출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이 고안한 추가 제재는 군사, 경제, 정치 세 개의 분야를 포함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프랭크스는 곧바로 외무성에게 관련 내용을 보고하였다.48
이처럼 영국은 미국의 결의안 상정을 막지 못하였다. 미국은 이 결의안 을 제출한 후 무슨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서방국가들을 설득하여 결의안을 통과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49 하지만 영국은 미국의 결의안과 추가 제재 안에 대해 동의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강경책이 협상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릴 것이고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사실 영국은 일찌감치 중국이 1월 13일에 통과된 5원칙을 거부할 경우 유엔에서 반드시 조치가 따를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외무성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군사·경제·정치 별로
47 From New York to Foreign Office, No.116, 20 Jan. 1951, PREM 8/1405, TNA.
48 From Washington to Foreign Office, No.205, 20 Jan. 1951, PREM 8/1405, TNA.
49 김계동. 앞의 책 436쪽.
미리 정한 바가 있었다.50 미국의 그것과 대조해 보면 극명한 차이를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50 From Foreign Office to Washington, No.174, 15 Jan. 1951, PREM 8/1405, T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