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에서는 김말봉의 「佳人의 市場(화려한 지옥)」(『부인신보』
1948.7.1- 1948.5.8.)을 대상으로 공창제폐지라는 여성운동을 통해 여성 연대가 모색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242)
해방 전 「밀림」(『동아일보』, 1935.9.26.-1938.2.7./1938.7.1.-1938.12.25.) 과 「찔레꽃」(『조선일보』, 1937.3.31.-1937.10.31.)으로 이름을 알린 김말 봉은 통속작가 또는 대중소설의 논의 속에서 규정되어 왔다. 백철은
“순수하게 흥미 중심의 통속성을 갖고 등장한 것은 김말봉이 처음”이 라고 언급할 정도로 김말봉을 1930년대 통속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 가한다.243) 통속소설이라는 것은 당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저널리즘의 대두에 편승하여 흥미위주로 쓰인 작품으로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를 부정하는 것과 달리 김말봉은 자신이 통속작가라는 것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244) 임화에 의하면 1930년대 후반 통속소설은 시국 적 상황으로 인한 예술소설의 위기에서 배태된 것으로 작가의 정치적 자 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였다.245) 김말봉이 자 신을 통속소설작가로 당당히 내세우면서 문단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은 이러한 시국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말봉에게 붙은 통속작가라는 레테르는 그를 1930년대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
242) Ⅲ장 3절은 임미진, 「해방기 아메리카니즘의 전면화와 여성의 주체화 방 식: 김말봉의 『화려한 지옥』과 박계주의 『진리의 밤』을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29, 2014)의 내용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243) 백철, 『신문학사조사』, 민중서관, 1963, p.343.
244) “「찔네꽃」을 通俗小說이라 한다면 作者金末峰氏는 다른 作家들과 같이 通俗小說이란 말에 氣分을 傷하거나 남으랠 분이 아니오, 快히 그곳에 自處 할 분이다. 通俗小說을 마다하지 않고 그 말에 甘受하며 거기에 自處하고 通 俗小說을 쓰되 天地人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스스로 許하는데 金末峰 씨의 達觀이 엿보인다. 우리 文壇에 新聞畵載小說을 쓰는 作家는 大槪, 그 通俗性에 대하여 自身의 非本意임을 辨明하거니와 金末峰씨만은 決코 그런 苟且한 辨明을 하지안코 眞心으로 通俗小說을 쓰고 本意로쓰고 天職으로 쓴 것임을 언제나 認定할뿐이다.” 백철, 「뿍 레뷰 金末峰作家著 「찔네꼿」」,
『동아일보』, 1938.12.29.
245) 임화, 「통속소설론」, 『문학의 논리』, 학예사, 1940.
을 가진 여성작가로 분류되기보다 박계주, 김래성과 함께 통속소설, 대 중소설 작가로 논의되어 오게 했다246) 통속성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은
‘반페미니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247)
그러나 해방 후 김말봉은 해방의 대의를 수행하는 여성지식인의 선두 에 자리한다. 1946년 8월 10일 여자국민당, 애국부인, 동맹불교부인회, 천도교부인회, 대한독립촉성, 애국부인회, 부녀총동맹, 여자기독교청년회 등 14개의 부인단체가 해동역경원에서 ‘폐업공창구제연맹’을 결성하는 데, 이때 김말봉은 페업공창구제연맹을 발기한 독립노동당부인회장으로 참가하여 위원장을 맡는다.248) ‘폐업공창구제연맹’은 1947년 11월 공 창폐지령 제정이후 발전적 해소를 했지만, 폐창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창 기들의 교화사업에 적극적인 관심과 활동을 전개한 좌익연합단체다.249) 김말봉은 ‘폐업공창구제연맹’의 위원장으로서 해방 후 공창제폐지운동 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공창제폐지는 식민지시기에 시행된 법을 폐지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민족 주체에서 배제된 영역에 있던 거리의 여성을 신생조선의 구성원으 로 포섭한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해방기 조선에서 공창제폐지 를 단행한 것은 미군정이었지만, 이는 조선여성단체의 끊임없는 요구로 가능하였다. 미점령군(GHQ)은 일본에서 1946년 1월 ‘공창폐지’에 관한 각서를 발령하고 즉각적으로 공창제를 폐지했지만, 한국에서는 1946년 5 월 ‘부녀자의 인신매매 금지법’을 공포했을 뿐 공창제폐지에 대해 적 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250) 당시 몇몇 조선인들이 인신매매 금지법을 246) 이는 백철이 『신문학사조사』에서 김말봉을 ‘역사소설과 통속소설’ 항
목에서 언급하고 ‘여류문학의 수준’에서는 논의하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47) 이호숙, 「대중소설의 반 페미니즘적 경향: 김말봉론」, 『페미니즘과 소설 비평:근대편』, 한길사, 1995.
248) 「廢業公娼救濟聯盟을 結成」, 『동아일보』, 1946.8.11.
249) 좌우익연합의 ‘폐업공창구제연맹’은 미군정의 좌익여성단체 탄압으로 인 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후 공창제폐지에 관한 문제는 미군정 보건후 생부 산하 부녀국의 주도 하에 이뤄졌다. 양동숙, 「해방후 공창제 폐지과정 연구」, 『역사연구』9, 2001, p.221.
250) 이선이, 「냉전기 동아시아의 ‘성’관리 정책 : 중국과 한국의 ‘폐창정 책’ 비교분석」, 『여성학논집』 제24권1호, 2007, pp.215-216. 이선이는 한
공창폐지로 받아들이자 러취군정장관은 자진하여 맺은 매춘은 인정한다 고 발표하기까지 하였다.251) 그러자 1946년 8월 14개의 여성단체는 ‘폐 업공창구제연맹’을 결성하고 즉각 공창폐지를 시행하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 달라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결국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 군정은 다음 해인 1947년 8월 입법회의에 공창제도폐지령을 통과시키고 11월 ‘공창제도 폐지령’을 공포하였다.252) 공창제폐지령은 미군정의 일방적인 영향력이 아닌 조선인의 수용과 대응 속에 시행된 것이다. 환 언하자면, 해방 후 민주주주의의 열망은 여성의 권리향상에 대한 기대감 을 고취시켰지만 그것이 제도적으로 구체화되기까지 조선인들의 요구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제도가 공창제폐지라고 할 수 있 다.
김말봉은 공창제폐지운동을 전개하면서 이를 작품화 한다.253) 그 작품
국과 일본에서의 공창제폐지에 관한 미군정의 정책 차이를 일본의 특수위안 부시설협회(RAA)에서 찾고 있다. 일본은 패전 후 미군의 성적유린에 대해 자 국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RAA를 구성하고 여성들을 모집하였다. 한국 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반대 여론이 높아 철회되었다고 한 다.
251) “婦女賣買와 其契約禁止법령 七十호는 부녀자의매매 또는 그 계약을 금지 하고 기왕의것을 무으로하는 것으로 아직 공장을 없샌것은 아니다. 따라 매 매에의하지 않고 자진하여 나스는데에 대한 것까지 폐지한다는 것은 아니 다.”라고 발표한다. 「러長官 發表」, 『동아일보』, 1946.5.29.
252) 그러나 1948년 1월 공창제 폐지법에 대한 재심의안이 제출되어 공창제 폐 지가 효력을 발생한건 1948년 3월이었다. 문제가 된 조항은 제3조의 처벌조 항와 제4조의 효력발생일이다. 논란 끝에 제3조의 처벌조항(라. 타인에게 성 병을 전염시킨 자)는 삭제됐고 효력발생일은 예정대로 시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한 논의는 양동숙, 「해방 후 공창제 폐지과정 연구」, 『역사연구』
9호, pp.227-228. 참고.
253) 김말봉의 『佳人의 市場』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최미진, 「광복 후 공창폐지운동과 김말봉 소설의 대중성」,『현대소설연구』 32, 한국현대소설 학회, 2006. ; 최지현, 「해방기 공창폐지운동과 여성연대 연구」, 『여성문학 연구』29, 한국여성문학회, 2008. ; 박선희, 「<佳人의 市場> 개작과 여성운 동」, 『우리말글』 54, 2012. ; 임미진, 「해방기 아메리카니즘의 전면화와 여성의 주체화 방식: 김말봉의 『화려한 지옥』과 박계주의 『진리의 밤』을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29, 2014. ; 배상미, 「성노동자에 대한 낙 인을 통해 본 해방기 성노동자 재교육운동의 한계」, 『현대소설연구』 55, 2014.
은 『부인신보』에 1947년 7월 1일부터 1948년 5월 8일까지 총108회에 걸쳐 연재한 「佳人의 市場」이다.254) 「가인의 시장」에 등장하는 공창 폐지 위원장 정민혜란 인물은 작가 김말봉을 연상시킨다. 김말봉은 자기 이야기를 통해 주변화된 여성의 생활의 포착하고 그들의 정치사회적 지 위개선과 개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김말봉이 위원장으로 있던 공창폐지연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창기구제사업’이었다.
공창구제연맹에서는 百 만원의 재원을 세워 시내 三개소에 수용소 (희망원=希望園)를 설치하야 이곳에 二百명을 분할수용식혀 우선글을 가르키고 다음에 재봉요리법등을 가르키여 직업을 알선하는 일방의 료기관도 완비시켜 성병도치료 건전한 결혼도 알선하게 되었다. 또 이외에 동원의 사업으로는 二十四만원을 게상하야 양돈(養豚)을 경영 하여 차후에 경비에 충당하며 二萬三천원을 게상하야 원예부(園藝部) 를 두어 원예일반지식도 취입시키기로 되었다.255)
인용문에서 보듯, 공창폐지연맹은 희망원이라는 재활원을 설치하여 공 창에서 나온 여성이 안정적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계도하는 역할 을 하고자 하였다. 공창폐지연맹의 위원장이었던 김말봉은 희망원 설치 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256) 이는 1948년 3월 김말봉 의 근황을 전한 기사에서 기자가 희망원의 진행사항을 묻자 “시(市)에 서 직일을맡겠다고 하니 한걱정 덜었다”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 다.257) 당국에서 맡겠다고 한 희망원 역시 실현되지 않았다. 이 시기 공 창에서 나온 여성들은 ‘창기연맹’을 구성하였고 대표 3인이 시장을 비
254) 「가인의 시장」은 미완작품으로 1952년 단행본 『화려한 지옥』이 나오면 서 개작·완성하여 출판되었다. 개작과 관련해서는 박선희, 위의 논문, 참고.
255) 「更生의 길로 引導 : 百萬圓財團으로 希望園을 設置」, 『동아일 보』,1946.8.11.
256) 김말봉이 사재를 털어 희망원에 준하는 ‘박애원’을 설치 운영하였다는 김항명의 증언이 있지만 실질적인 기록과 자료는 없다. 김항명, 『MBC 여성 실화 찔레꽃 피는 언덕 김말봉』, 명서원, 1976, p.433.
257) 「現役女人群의 푸로퓔 金末峰氏 公娼廢止聯盟委員長」, 『경향신문』, 194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