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이 생모의 죽음을 인식한 것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연산군은 4 세때 일어난 생모의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컸다. 어렸을 때는 정현 왕후를 친어머니로 생각하며 자랐을 것이다.200) 연산군이 즉위 전 생모에 대 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 다.200)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연산군 일기에 남아있다. 연산 1 년(1495,
19 세) 3 월 16 일201) 기록에 따르면 ‘왕이 성종(成宗)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이른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란 이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領敦寧) 윤호(尹壕)를 기무(起畝)라 잘 못 쓴 것이 아니냐?" 하매, 승지들이 아뢰기를, "이는 실로 폐비(廢妃) 윤씨 (尹氏)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 지 않았다.’고 하였다.’즉, 윤호는 중종의 외조부이고 윤기견은 연산군의 외조부이다. 연산군은 윤기견이라는 인물의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자 신의 외가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아가 윤씨가 폐출되어 사사 된 사실 역시 몰랐던 것이다.200) 어린 연산군에게는 생모가 죄인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신적 충격이 컸을 것이다.200)
게다가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지만, 천륜은 속일 수 없었 던지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잘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3)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을 자신의 친 자식처럼 사랑과 관심을 쏟아주지는 못 했을 것이다. 게다 가 할머니인 인수대비는 연산군에게 지날 칠 정도로 혹독하게 대했다고 한 다.3) 자신이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연산군이 자라는 동안 정서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고찰
이 연구에서는 연산군 일기와 다른 문헌들을 통해 확인한 임상 양상과 가족력 을 근거로 연산군과 폐비 윤씨가 양극성 장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연산군 일기를 통해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과 연산군의 말과 행동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산군의 기분 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내, 증상 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전반적인 증상의 경향을 파악하였다.
연산군이 보인 정신증상이 양극성 장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많 다. 1495 년 (19 세)부터 1497 년 (21 세)까지 모호하고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 하고 있으며, 식욕부진, 수면장애, 피곤, 무기력 등의 우울 증상을 보였다. 이 시기는 우울 삽화로 볼 수 있으며, 소아 청소년의 우울증은 성인기 우울증보다
신체 증상 호소가 더 흔하다.202) 특히 무기력, 피곤 등은 단극성 우울증(major depressive disorder)보다 양극성 우울증(bipolar depression) 가능성을 더 시 사한다. 우울증이 양극성 장애를 더 시사하는 임상적 특성으로 어린 나이에 발 병, 25 세 이전에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 짧은 기간(3 개월내)동안 우울증이 빠르게 시작되고 사라지는 경우, 5 번이상 반복적인 우울 삽화를 보이 는 경우, 두드러진 정신운동 지연을 동반한 우울증, 과수면과 과식욕을 보이는 경우 (reverse vegetative signs), 계절에 따른 기분 변화가 있는 경우 (seasonality), 양극성 장애의 가족력이 있는 경우, 항우울제로 치료시에 경조 증이 발생하는 경우라고 한다. 203)
이후 1498 년 (22 세)에는 6 월부터 10 월까지 중국에 가는 길에 중국 물건을 많이 사오라고 하며 사치가 증가하였고, 진상하는 물건을 독촉하며 과도하게 사 냥에 집착하는 모습이 있었다. 임금이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취미로 사냥에 몰입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가 지나쳐 경조증으 로 볼 수 있다. 또, 특권층으로써 사치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연 산 8 년 11 월 14 일 기록에서처럼, 생필품이 아니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원숭이를 수입 반대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평소에 사치나 향략을 하는 성 격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임금이라 하더라도 평소 달리 사치가 지나친 것으로 봐서 경조증 가능성을 의심해 볼 수 있다.
1499 년 (23 세) 1 월에는 적절한 기능을 유지하며 기분 증상이 없어 관해 상태 로 보인다. 3 월부터 10 월까지 말이 피곤해서 가지 못 할 정도로 과도한 사냥과 에너지 증가, 무분별한 소비를 보여 경조증을 의심할 수 있다. 1500 년(24 세) 1 월에서 5 월 까지는 관해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6 월부터 9 월까지 사소한 문제에 신하들을 벌주는 등 과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있으면서, 10 월부터 다 시 과도한 소비와 사치로 신하들이 걱정하는 상태였다. 1501 년(25 세) 4 월까지 사치가 심해져서 민생에 부담이 될 정도여서 경조증 증상으로 의심해 볼 수 있 다. 5 월부터는 기록에 기분 증상을 의심할 만한 내용은 드러나지 않아, 관해 상 태로 판단되며, 1502 년(26 세) 3 월,4 월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02 년(26 세) 6 월부터 11 월까지 사치가 더 심해져, 기호가 다양해지고 진상 을 과도하게 요구해 수레가 부서지고 말이 넘어질 정도였다. 난잡한 춤을 추고 음탕한 놀이를 하는 등의 모습은 경조증 혹은 조증으로 인한 가능성이 있다. 이
러한 모습이 경조증이 아니라 성격 문제는 아닌지 의심이 들 수 있는데, 이후 경과에서 뚜렷한 조증 증상이 나타나며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정도가 과하여 경 조증 증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7 월에는 민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적절한 정책을 펼쳐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는 없었고, 8 월에는 죽은 생모를 그리 워하며 슬픔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우울증상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조증 증상과 함께 동반되어 혼재성 삽화 양상의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다. 경조증 증상이 있으면서 11 월에는 외교 사안에 대해 적절한 결 정을 내리는 모습으로 기능적인 면은 잘 유지가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503 년(27 세) 2 월부터 6 월까지는 과도한 음주와 절에 들어가서 여승을 내쫓 고, 여러 젊은 여자들을 남겨 충동적이며, 문란한 성적 행동을 하였고, 이런 행 동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판단력 저하의 모습 이 있었다. 7 월부터 9 월까지 과민한 반응, 사소한 일에 가혹한 처벌, 집요함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조증 진단 기준 중에 과민한 기분, 성적 행동과 같은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활동의 지나친 몰 두와 같은 항목들과 부합하여 강력하게 조증 증상을 시사한다.
1503 년(27 세) 10 월부터는 조증 증상이 시작해서 11 월에는 만취해서 흥청 망 청 노래하며 춤추는 모습의 조증 증상이 있으면서, 그날 새벽에는 우울하고 슬 픈 모습을 보여 우울 및 조증 증상이 같이 나타나는 혼재성 삽화가 의심된다.
갑자사화 전후인 1504 년(28 세)부터 중종 반정으로 폐위될 때인 1506 년(30 세) 8 월까지 조증 삽화가 강력히 의심되는 모습들이 있었고, 그 정도도 최고에 달했 다. 분노 및 충동 조절의 어려움으로 생모 폐위 사건과 연류된 사람들에게 폭력 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하고, 관원들의 아내를 간음하며 모후의 기일에도 유흥을 하는 등 성욕 증가, 판단력 저하 등이 두드러지며, 증상이 심할 때면 한밤 중에 소리지르고 폐비가 붙은 형상의 춤을 추는 등의 정신병적 증상도 동반되었다.
정리하자면, 우울 삽화는 1495 년(19 세) 1 월- 1496 년(20 세) 11 월, 1506 년 (30 세) 1 월, 1506 년(30 세) 8 월에 3 차례 있었다. 경조증 혹은 조증 삽화의 경 우 1498 년(22 세) 6 월- 11 월, 1499 년(23 세) 3 월-10 월, 1500 년(24 세) 6 월- 10 월, 1501 년(25 세) 4 월, 1502 년(26 세) 6 월- 1503 년(27 세) 9 월, 1504 년 (28 세)-1506 년(30 세) 8 월로 대략 6 번 나타났다. 혼재성 삽화는 1502 년(26 세) 8 월과 1503 년(27 세) 11 월에 2 차례 있었다.
그리고 1497 년(21 세) 4 월- 1498 년(22 세) 5 월, 1500 년(24 세) 1 월-5 월, 1501 년(25 세) 5 월- 1502 년(26 세) 4 월 등에는 적절한 기능을 보이는 관해 상 태가 분명히 일정기간 있었다. 양극성 장애의 특징은 증상이 삽화적으로 나타나 고, 관해 시기에는 비교적 정상적인 기능을 보인다는 것인데, 연산군이 보인 임 상 양상은 이런 특징과 비슷하다.
기분 삽화가 수개월 이상 지속되다가 관해와 재발을 반복하였으며, 이런 삽화 중에 증상의 중증도가 심할 때는 정신병적 증상이 동반되었다. 그러나 이런 증 상이 상당 기간 뚜렷하고 지속적으로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조현병이 나 분열정동장애 같은 정신병적 장애 가능성은 떨어지며, 기분장애를 더 시사한 다. 기분 장애 중에서도 증상이 지속적이지 않고 삽화적이며, 조증 증상과 우울 증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양극성 장애 진단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폭력적이고 잔혹한 모습으로 반사회적 혹은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아 닌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인격장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평소 성격으로 봤 을 때, 한시를 잘 쓰며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기질이 잘 드러난다. 연산 8 년 7 월 옥중에 있는 죄인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일을 빨리 진행해 백성들을 보살피 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백성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헤 아려,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섬세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을 봤을 때도 성격 문제라는 것을 연상하기 쉽지 않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사회적으로 불법적이고 무책임한 행동들을 반복 한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관심이 없고 전혀 무감각하며, 자신이 상대방 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것에 대한 반성이나 죄책감이 없는 것이 특징이 다.204) 자기애성 인격장애는 자신의 목표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 계가 착취적인 경우가 많고,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이기 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정과 연민을 가장한다.205) 즉, 인격장애는 남의 권리 를 침해하지만 병식이 전혀 없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으며, 죄책감 도 못 느낀다. 그러나 연산군의 경우 백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공감 능 력도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착취적이지 않다. 이러한 행동은 성격적인 문제보다는 병적인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또, 연산 9 년(1503, 27 세) 11 월 22 일 기록에 보면 그 전날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난잡한 잔치를 벌인 사실에 대해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며, 실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