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부계 및 모계 가족들을 중심으로 정신과적 가족력에 대해 조사하여 유 전적인 요인에 대해 파악해 보았다.(그림 2)
가. 부계 가계도
i. 7 대 세조 (수양대군) (1417-1468)
세조는 1417 년 9 월 24 일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과 부인 심씨의 차남 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다.181) 세조는 정희왕후 사이에서 2 남 1 녀, 근빈 박씨에서 2 남을 얻어 총 4 남 1 녀를 두었다. 이들 중 정희왕후의 자녀가 의경세자(덕종), 해양대군(예종), 의숙공주이며, 근빈 박씨의 자 녀로는 덕원군, 창원군이다.182)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 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183) 성격이 강직하고 독점력이 강 한 인물이었다.184)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인 패륜 적인 행동을 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조카인 단종을 죽인 죄책감으로 시 달렸다고 한다. 말년에는 세조의 형수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려, 아들인 의경세자가 죽어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 행위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184)
ii. 정희왕후 (1418-1483)
정희왕후는 본관은 파평으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번의 딸이다.
1418 년에 태어나 1428 년 수양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처음에는 낙랑부 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에 책봉되었 다.182) 1468 년 예종이 19 세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 최초로 수렴 청정을 하였고, 예종이 재위 1 년 3 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 의경 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성종(자을산군)을 그날로 즉위시키고 섭정을 하기도 했다.182)
예종이 죽었을 때는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 다는 이유로 정희왕후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고, 덕종에게도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적인 결단 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182) 13 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7 년동안 정사를 맡은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으로 왕권 안정에 힘썼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 년 정치 에서 물러났다.182)
*: 양극성 장애 가능성이 아주 높음 그림 2. 연산군 가계도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하였다고 하며,185) 안정된 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아 뚜렷한 정신적, 기능적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 로 보인다.
iii. 의경세자 (덕종) (1438-1457)
세조의 맏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름은 장, 자는 원명이 다. 1445 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 년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에 오 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182) 한확의 딸 한씨(인수대비)를 부인으로 맞아 1454 년에 월산대군을 낳고, 1457 년에 성종을 낳았다. 예의가 바르고 학 문을 좋아했다고 전해지며, 해서에 능했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잔 병이 잦았고, 결국 20 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182) 세조와 그 가족들 은 단종을 죽인 것으로 인해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다고 하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182)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 명의 승려들이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어 병의 치유를 빌었다.186) 하지만 그는 끝내 호전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고 한다.182) 이러한 기록이 있으나 죽기 전 신체상태가 좋지 않아 생긴 섬망인지 명 확히 알 수 없으며, 다른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기분장애나 정신 질환 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iv. 8 대 예종 (1450-1469)
세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황(李晄)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처 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 년 형 의경세자가 죽자 8 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187) 1468 년 9 월 7 일 19 세의 나이로 세조로부터 왕 위를 이어 받았다.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성년이 되지 않은 데다가 건 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185) 그 래서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이것은 조선왕조 에서 행해진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20 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사인 은 봉와직염과 패혈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188) 성격이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다고 하나185) 특별히 기분증상이나 정신병적 증상 이 의심되는 기록은 없다.
(1)장순왕후 (1455-1461):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는 한명회와 부인 민씨
의 큰딸이다.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의 친언니로 동시에 촌수로는 그녀의 시숙모가 된다.185) 1460 년에 예종과 가례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 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후 1472 년(성종 3 년)에 장순왕후에 추존 되었다.
(2) 안순왕후 (?-1498): 청주부원군(淸州府院君) 한백륜의 딸이며, 1461 년 장순왕후가 요절하자 1462 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 다.185) 1468 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고, 자녀로는 제안대군 과 현숙공주가 있다.
(3) 제안대군 (1466-1525): 예종의 둘째 아들이며, 안순왕후의 자녀이다.
4 세때 예종이 죽자 왕위 계승의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185) 1470 년 5 세의 나이에 제안대 군으로 봉해졌고,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후 평생을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고 한다.189) <<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이 되어있으며,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왕위 계 승에서 밀려난 사람은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피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185) 이에 정신질환 으로 인해 어리석은 모습이 있었던 것인지 혹은 고의로 한 행동인지 판 단하기 애매하다.
v. 의숙공주 (1441-1477)
의숙공주(懿淑公主)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2 남 1 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 났다.190)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37 세의 나이로 세 상을 떠났고, 이에 성종은 철조(轍朝: 정사를 휴무함)를 명하였다고 한 다.191) 남아 있는 자료가 적어 정신질환 유무를 알 수 있는 기록을 찾아 보기 어렵다.
vi. 인수대비 (1437-1504)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는 세종 19 년(1437) 9 월에 좌의정을 지낸 청 주 한씨 서원부원군 (西源府院君) 한확 (韓確: 1403-56)의 3 남 6 녀 중 여섯째 딸로 출생하였다. 2) 세종 19 년은 아버지 한확이 둘째 딸을 세종 의 서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시집보내 세종과 사돈이 된
해였다. 태종 4 년(1404)에 태어난 어머니 남양 홍씨는 조선조 개국공신 인 남양군(南陽君) 집현전 대제학 문경공(文景公) 길민(吉旼)의 손녀이 자, 한양부윤 정부(情夫)의 외손녀이다.2) 인수대비는 17 살이 되던 단종 1 년(1453)에 한살 아래인 수양대군의 맏아들 도원군(덕종)과 혼인했 다.11) 결혼한지 2 년, 세자빈이 된지 불과 2 년 3 개월 만에 남편이 죽음 으로 겨우 21 살로 2 남 1 녀를 둔 청상과부가 되었다. 1469 년 자신의 둘 째 아들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 9 대 임금인 성종이다. 예종 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불과하여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2)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면 서 33 세에 다시 궁으로 들어가 성종대와 연산군대에 걸쳐 35 년 동안 대 비로 살았다. 손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생모의 비사를 알고 폐행을 일삼자 이를 걱정하며 저지시키려고 노력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176) vii. 월산대군 (1454-1488)
덕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수대비이다. 성종의 형으로, 일찍이 아 버지를 잃고 조부인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1471 년 월산대군 으로 봉해졌다.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던 월 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이로 인해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서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성 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부드럽고 율 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한다.192)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특별히 정신질환을 의심할 증상은 없어 보인다.
viii. 9 대 성종 (1457-1494)
성종의 첫 중전인 공혜왕후(한명회의 딸)가 몸이 약해 자식을 갖지 못 하자, 1472 년(성종 4 년) 후궁으로 정현왕후(윤호의 딸)이 간택되었 다.165) 이때 또 다른 후궁이었던 소용 정씨와 소용 엄씨, 그리고 당시 숙의의 지위에 있었던 윤기견의 딸 윤씨(폐비 윤씨)를 포함해 4 명의 후 궁이 있었다.165) 1474 년(성종 6 년) 공혜왕후가 죽자, 당시 성종이 가장 총애하고 있었고 마침 임신 중이던 숙의 윤씨가 비로 책봉되었고, 그 해 아들을 출산했다.165) 이때 성종의 나이는 19 세였다. 보위에 오른 후 이 해 봄까지 대왕대비인 세조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고, 예종
비 안순왕후가 왕대비로,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있어 정사 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인수대비는 덕종의 부인으로 세자인 월산대군 이 죽고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수빈(粹嬪)으로 지냈다.
이후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어 린 성종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고 한다.161)
ix. 연산군의 자녀
자녀로 연산군과 폐비 신씨 사이에 요절한 자녀를 제외하면 2 남 1 녀가 있다.193) 폐세자인 이황(李 ), 창녕대군(昌寧大君)인 이성(李誠), 휘신 공주이다. 폐세자 황과 창녕대군 성은 반정세력에게 피살되었고, 결국 휘신공주만 남았다.193) 휘신공주는 능성 구씨 능양위 구문경(具文璟)에 게 하가하여 1 남을 두었는데, 혼인 후에 연산군이 폐위됨에 따라 그녀 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폐서인되어 공주 직첩을 회수당하고, 재산을 몰 수당하고 시아버지 구수영의 청으로 이혼까지 당하는 등 왕실 여인이 당 할 수 있는 온갖 비참한 꼴을 다 당하게 된다. 다행히 중종 3 년에 중종 의 배려로 구문경과 재결합하고 집도 하사 받았으나, 공주 신분은 되찾 지 못했는지 계속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193) 이황(1498 년 1 월 10 일- 1506 년 10 월 10 일)은 조선 제 10 대 왕인 연산군의 맏아들이다. 성품이 차분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세자시절 기상이 성종과 닮았으며, 왕의 자 질도 보였다고 한다.194) 기분 증상 등과 관련하여 특기할 점은 없는 것 으로 보인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출되어 폐세자(廢世子)로 강등되 었고 1506 년 10 월 10 일 창녕대군 성, 양평군 인, 이돈수 등과 함께 사 사되었다.194)
창녕대군 이성(昌寧大君 李誠, 1501 년 - 1506 년 9 월 24 일)은 조선의 제 10 대 왕 연산군의 차남이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출되자, 형 폐 세자 황과 함께 사사되었다.195)
나. 모계 가계도
i. 폐비 윤씨(?-1482)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로 본관이 함안이다. 폐비 윤씨가 언제 태어 났는지, 출생년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죽임을 당하고, 아들 연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