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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사례

1. 우크라이나

냉전이 종식되던 당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구소련의 네 개 공화 국(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들은 러시아가 구소련

의 핵보유국 지위를 계승하고 다른 공화국들은 핵무기와 핵능력을 완전 히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서, 핵을 포기해야만 하는 공화국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소련이 해체되던 당 시에 1,90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의회와 군부 는 핵을 포기할 경우 소련으로부터 정치적, 군사적인 압박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 정부의 핵포기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이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 미국으 로부터 구체적인 안전보장 약속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 결과, 1994년 1월 14일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크라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3자 협정’을 체결하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확산 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에 가입한 비핵국가로 남 는다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안전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41

-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 회원국들의 독립성과 주권 및 국경선을 존중하고,

국경의 변경은 평화적인 방법과 합의된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는 것을 인식함.

- 회원국의 영토적, 정치적인 독립성에 반하는 무력의 사용이나 사용 위협을 삼감.

- 유엔헌장에 의거하거나 자위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 두 나라의 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함.

- 경제적인 압박수단을 사용하여 CSCE 회원국의 주권 행사를 자국 의 이익에 종속시키고 실리를 얻는 것을 삼감.

41 _ Trilateral Statement by 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Russia and Ukraine (January 14, 1994).

- 우크라이나가 핵무기의 공격이나 공격 위협을 받게 되는 경우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즉각적인 지원을 강구함.

- 우크라이나를 포함해서 다른 어떤 비핵국에 대해서도 핵무기를 사 용하지 않음. 다만, 핵보유국과 관련을 맺은 나라가 미국과 러시아 혹은 두 나라의 동맹국을 공격하는 경우는 예외임.

1994년 12월 5일에는 위와 유사한 안보 공약을 미국, 러시아 및 영국

이 함께 제공하기도 했다.42이상과 같은 안보 공약의 토대 위에서, 우 크라이나는 미국으로부터 핵 폐기에 필요한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받 아들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안보 공약은 우크라이나가 안심하고 외 부의 지원을 받아 핵을 폐기할 수 있는 정치적인 토대가 되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크라이나의 핵관련 시설이 모두 폐기된 것은 아니 다. 평화적인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인력과 장비는 민간분야로 전환 되어 과학기술자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인 부분은 재활용되었다. 키에프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과학기술센터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핵보유국에서 비핵국가로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었던 데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크라이나 행정부가 핵을 포기하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는 것, 즉 최고 지도층의 정치적인 결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웃 러시아가 핵보유 강국이기 때문에 소규모 핵을 갖는 것이 안정을 가져 오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의 안보불안을 자극해서 자국의 안보에 위협 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42 _ Memorandum on Security Assurances in connection with Ukraine’s accession

to the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December 5, 1994).

둘째,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는 구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완전한 투명 성이 확보되어 있었다. 즉 핵무기와 관련 물질 및 장비의 소재와 규모 그리고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이미 파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비밀 핵개발을 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소규모의 핵전 력을 가지고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없는 여 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소규모 핵전력의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모호성의 결여가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지도부로 하여금 핵 전력 유지라는 옵션의 가치를 크지 않다고 인식하도록 했을 것으로 보 인다.

셋째, 우크라이나는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규범을 위반함 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나라라는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또한 신생국 가로서 국가재건을 위해서 국제사회로부터의 다양한 지원과 지지를 기 대하고 있었다. 국제사회에서의 깨끗한 이미지가 외부의 지원을 도왔 고, 또한 외부지원의 필요성이 핵 포기를 촉진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를 이끌어내었던 이와 같은 요인들이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평화적인 북핵 폐기가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우크라이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핵개발의 역사를 보면, 북한정권이 얼마나 핵개발에 집착해왔는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핵무기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과 행 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만과 집요함’이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집 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외부적으로 이를 철저히 부인하고 기만하 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핵개발에 대한 철저한 부인 속에서 이뤄졌던 북 한의 주요 기만행위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일성 생존 당시부터 2003년 4월 3자회담에서 북한 당국자가

핵 보유를 시인하기 전까지 핵문제에 대한 북한의 공식입장은 “핵무기 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핵무기를 개발하 지 않겠다는 의사를 처음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1977년 10월 일본 NHK 논설위원장과의 대담에서였다. 이후 김일성은 1991년 9월 26일 이와나미 서점 사장과의 대담에서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고 단언했고, 1992년 신년사와 같은 해 2월 20일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단과의 오찬에서 발표한 담화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특히 김일성은 오 찬 담화에서 “우리에게는 핵무기가 없는 것은 물론 그것을 만들지도 않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큰 나라들과 핵 대결을 할 생각이 없으며 더욱이 동족을 멸살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조에서 북한은 1991년 12월 남한과 비핵화 공동선언을 체 결하면서 재처리시설을 갖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6개월 후에 실시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결과 이미 재처리시설을 보유했고, 적어 도 세 차례 재처리를 실시하고 플루토늄까지 추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결국 김일성이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단을 만나서 오찬연설을 하던 당시에 이미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하고 있었다. 공장규모의 재처리 시설을 보유‧가동했고, 이를 통해서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 두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10~14kg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2005년 2월 10일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북한 외무성의 성명과 2006년 10월 9일의 핵실험은 김일성의 이런 연설이 완전히 허구였다는 것을 입증한 또 다른 사례에 불과하다.

둘째, 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과 이 선언의 이행을 약속한 제네바 기 본합의에 의거해서 농축활동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칸

(Abdul Qadeer Khan) 박사가 주도한 핵 밀거래 네트워크가 발각되면

서 북한이 1990년대 중반 이후 파키스탄으로부터 농축에 관련된 기술 과 장비를 들여오는 등 양국 간에 긴밀한 핵개발 협력이 있었음이 드러 났다. 북한은 아직도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만, 2006년 9월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이 자신의 자서전에서조차 칸 박사와 북한사이의 핵 밀거래 상황에 대해서 소상히 밝힐 정도로 증거는 많다.

셋째, 북한은 2003년 1월 NPT에서 탈퇴하면서도 핵개발 의사는 없 다는 정부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2003년 4월 하순 북경 3자회담에서 이근 수석대표가 켈리 차관보에게 핵무기 보유 사실을 시인함으로써 정부성명을 불과 3개월 만에 뒤집었다.

북한의 핵능력은 아직 많은 사항들이 베일에 가려져있다. 특히 2002 년 12월 영변에 머물던 IAEA 사찰관들이 추방된 이후 북한의 핵활동 에 대한 국제사회의 감시와 통제는 완전히 해제된 상태이다. 북한 당 국은 또한 HEU 프로그램의 존재에 대해서도 계속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협조자였던 파키스탄 당국이 나서서 증거를 제시하고 실체를 인 정하고 있는 HEU 프로그램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최근 북한의 HEU 프로그램 규모 와 관련하여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위반하면서 HEU 프로그램을 추진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2007년 2월 27일 디트라니(Joseph DeTrani) 미국 국 가정보국 북한담당관이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서 북한이 공장규모의 HEU 프로그램에 필요한 물질을 획득했다는 정보에 대해 서는 강한 자신감을, 공장규모의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정보에 대해 서는 중간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43 2002년 10월 HEU

43 _ 디트라니의 발언 원문은 다음과 같음. “While there is ‘high confidence’ North

Korea acquired materials that could be used in a production-scale uran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