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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8 지구적 파트너십 프로그램

9‧11 사태의 충격으로 평화적인 핵폐기 분야에서 생긴 것이 ‘G8 지구

적 파트너십 프로그램’(G8 Global Partnership Program)인데, 이는

CTR 프로그램을 국제적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11 사태가 초래한 안보질서의 변화를 고려할 때, 이 사태가 CTR 프로그램의 대폭 적인 확대라는 결과를 야기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확대’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졌는데, 그 하나는 CTR 프로 그램의 혜택을 받는 대상을 구소련 국가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 로 넓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CTR 프로그램에 예산을 지원하는 국가도 G8 국가와 더불어 다른 나라들로 확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G8 국가 들은 테러집단이나 테러집단을 보호하는 국가가 핵, 화학, 세균무기와 미사일 그리고 관련 장비와 물질 및 기술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차단하 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이러한 약속은 2002년 6월 27일 캐나다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여섯 가지 원칙으로 구체화 되었다.

G8 국가들은 또한 CTR 형태의 프로젝트를 확대하고, 비확산과 군 축, 테러방지 및 환경 차원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양자 혹은 다자적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위해 G8 국가들은

2012년까지 200억 달러의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은

미국이 출연하기로 했다. 미국이 담당하는 100억 달러는 미국 정부가

1992년부터 2004년까지 CTR 프로그램을 이행하면서 지출한 120억 달

러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2006년 현재 한국을 포함한 23개국이 G8 지 구적 파트너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주 요 수혜국이다.37

지구적 파트너십 프로그램은 G8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의 하나로 자

37 _ G8 지구적 파트너십 프로그램의 역사와 협력의 범위, 한계, 회원국 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Vladimir Orlov, ed., Guidebook: Global Partnership Against the Spread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Moscow:

Human Rights Publishers, 2006).

리 잡았다. G8 정상들은 정상회담을 마무리하면서 빠짐없이 지구적 파 트너십 프로그램의 철저한 이행을 위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2003년에 발표된 ‘에비앙 행동계획’(Evian Action Plan)과 2004년의

‘시 아일랜드 행동계획’(Sea Island Action Plan)은 G8 국가들이 취해 야 할 구체적인 실천조치들을 담고 있다.38 2005년 정상회담에서도 WMD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G8 정상들의 강력한 의지와 이를 위한 상호협력의 중요성을 담은 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39 2006년도 세인트 피터스버그 정상회담에서도 G8 정상들은 지구적 파트너십 프로그램의 이행 현황을 화학무기 폐기, 핵잠수함 해체, 핵물질 처리와 보호 및 무 기개발에 종사한 과학자 관리 등의 측면에서 검토하고 그 성과를 평가 했으며, 구소련 공화국들의 가입 문제를 계속 검토해나가기로 했다.40

38 _ G8 Senior Group, G8 Global Partnership Annual Report (June 2005), <http://www.

fco.gov.uk/Files/kfile/PostG8_Gleneagles_GPWGAnnualReport 2005.pdf>.

39 _ Gleneagles Statement on Non-Proliferation (June 2005), <http://www.fco.

gov.uk/Files/ kfile/PostG8_Gleneagles_CounterProliferation.pdf>.

40 _ Report on the G8 Global Partnership (St. Petersburg, July 16, 2006), <http://e n. g8russia.ru/docs/22.html>.

우크라이나와 리비아의 사례

우크라이나와 리비아는 북한 핵의 평화적인 폐기를 추진해나가는 과 정에서 유용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두 나라는 모두 평화적인 방법으로 핵무기(우크라이나)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리비 아)을 포기하겠다는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고, 국제사회의 전폭적인 지 지와 지원 하에 평화적인 핵 폐기를 실현했다. 두 나라가 제기한 핵확산 문제의 기원과 동기는 달랐지만, 양국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종착점은 같았다. 즉 핵무기뿐만 아니라 화학, 세균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완전 히 폐기하고 관련 시설과 장비를 해체하는 한편, 국제사회로부터의 정 치, 경제, 안보적 보상과 대가를 챙긴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구소련의 네 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로서 앞서 소개한 미 행정부의 CTR 프로그램의 주요 수혜대상국이 다. 소련 붕괴 과정에서 네 공화국은 러시아가 구소련의 핵보유국 지위 를 승계해서 핵무기와 관련 하부구조를 보유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보유하고 있던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 및 관련 장비를 러시아로 이전하고 비핵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리비아의 경우에는 북한과 같이 불량국가로 지목되던 과거의 행적에서 벗어나서 평화적으로 WMD 능력을 폐기하고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준 사례로 꼽힌다. 어쩌면 모험과도 같을 수 있었 던 리비아 당국의 WMD 포기 결심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국제사회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1. 우크라이나

냉전이 종식되던 당시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던 구소련의 네 개 공화 국(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들은 러시아가 구소련

의 핵보유국 지위를 계승하고 다른 공화국들은 핵무기와 핵능력을 완전 히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서, 핵을 포기해야만 하는 공화국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소련이 해체되던 당 시에 1,900여 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의회와 군부 는 핵을 포기할 경우 소련으로부터 정치적, 군사적인 압박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 정부의 핵포기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이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 미국으 로부터 구체적인 안전보장 약속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 결과, 1994년 1월 14일 당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크라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3자 협정’을 체결하고, 우크라이나가 ‘핵무기확산 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에 가입한 비핵국가로 남 는다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안전보장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41

-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 회원국들의 독립성과 주권 및 국경선을 존중하고,

국경의 변경은 평화적인 방법과 합의된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는 것을 인식함.

- 회원국의 영토적, 정치적인 독립성에 반하는 무력의 사용이나 사용 위협을 삼감.

- 유엔헌장에 의거하거나 자위를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 두 나라의 무기가 사용되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함.

- 경제적인 압박수단을 사용하여 CSCE 회원국의 주권 행사를 자국 의 이익에 종속시키고 실리를 얻는 것을 삼감.

41 _ Trilateral Statement by 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Russia and Ukraine (January 14, 1994).

- 우크라이나가 핵무기의 공격이나 공격 위협을 받게 되는 경우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즉각적인 지원을 강구함.

- 우크라이나를 포함해서 다른 어떤 비핵국에 대해서도 핵무기를 사 용하지 않음. 다만, 핵보유국과 관련을 맺은 나라가 미국과 러시아 혹은 두 나라의 동맹국을 공격하는 경우는 예외임.

1994년 12월 5일에는 위와 유사한 안보 공약을 미국, 러시아 및 영국

이 함께 제공하기도 했다.42이상과 같은 안보 공약의 토대 위에서, 우 크라이나는 미국으로부터 핵 폐기에 필요한 기술적, 재정적 지원을 받 아들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안보 공약은 우크라이나가 안심하고 외 부의 지원을 받아 핵을 폐기할 수 있는 정치적인 토대가 되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크라이나의 핵관련 시설이 모두 폐기된 것은 아니 다. 평화적인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인력과 장비는 민간분야로 전환 되어 과학기술자들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인 부분은 재활용되었다. 키에프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과학기술센터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핵보유국에서 비핵국가로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었던 데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우크라이나 행정부가 핵을 포기하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는 것, 즉 최고 지도층의 정치적인 결단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웃 러시아가 핵보유 강국이기 때문에 소규모 핵을 갖는 것이 안정을 가져 오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의 안보불안을 자극해서 자국의 안보에 위협 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42 _ Memorandum on Security Assurances in connection with Ukraine’s accession

to the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December 5, 1994).

둘째, 우크라이나의 핵무기는 구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완전한 투명 성이 확보되어 있었다. 즉 핵무기와 관련 물질 및 장비의 소재와 규모 그리고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이미 파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비밀 핵개발을 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소규모의 핵전 력을 가지고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전략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없는 여 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소규모 핵전력의 전략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모호성의 결여가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지도부로 하여금 핵 전력 유지라는 옵션의 가치를 크지 않다고 인식하도록 했을 것으로 보 인다.

셋째, 우크라이나는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규범을 위반함 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나라라는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또한 신생국 가로서 국가재건을 위해서 국제사회로부터의 다양한 지원과 지지를 기 대하고 있었다. 국제사회에서의 깨끗한 이미지가 외부의 지원을 도왔 고, 또한 외부지원의 필요성이 핵 포기를 촉진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핵 포기를 이끌어내었던 이와 같은 요인들이 북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평화적인 북핵 폐기가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암시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우크라이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핵개발의 역사를 보면, 북한정권이 얼마나 핵개발에 집착해왔는가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의 역사를 돌아볼 때, 핵무기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과 행 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만과 집요함’이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집 요하게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외부적으로 이를 철저히 부인하고 기만하 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핵개발에 대한 철저한 부인 속에서 이뤄졌던 북 한의 주요 기만행위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일성 생존 당시부터 2003년 4월 3자회담에서 북한 당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