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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

2. 자전적 기록을 통해 본 이범선의 문학

2.2.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

이범선은 한국전쟁기와 전후, 그리고 타락한 현실질서가 폭력적으로 군림한 이후 한국 사회의 본질을 깊이 파헤치고자 노력한 작가72)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 고 있다. 이는 전후작가라는 맥락에서 이범선에 대한 아주 포괄적인 평가이다.

이범선과 같이 1920년대에 출생한 전후작가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장용학(1921 년~1999년)과 손창섭(1922년~2010년)을 떠올릴 수 있다. 장용학은 관념소설이라 는 새로운 계보를 창출하였고 여러 작품을 통하여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가 하였는데, 그의 작품세계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인간들의 삶은 일상적인 세계는 아예 배제된 본질적인 측면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손창섭은 전쟁 또는 그 로 인한 1950년대 사회의 황폐상 등 객관 현실의 탐구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화된, 부재의 현실을 반영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다. 인간탐구에 있어서도 그의 뿌리 깊은 ‘인간불신’, ‘인간모멸’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이

혼합의 기본원리는 화가로 하여금 많은 물감 가운데서 빨강과 노랑의 두 가지 물감을 골 라 내게 하는 효과 밖에는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꼭 마찬가지로 플로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야기도 그것을 머리에 넣어둠으로써 방향 을 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작품이 써지는 것도 아니요, 또 꼭 그것으로 작 품을 쓰려고 할 필요도 없다.

어찌 들으면 대단히 무책임한 이야기 같으나, 나는 도리어 그것이 가장 솔직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왜냐 하면, 소설을 쓰는데 무슨 묘한 요령이라도 있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글을 쓰려는 이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테두리 속에 막아 버리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기 때문이다.”(이범선, 「소설과 플로트」, 󰡔문학춘추󰡕, 1964.6, 326쪽 참조)

71)이범선, 「대담취재: 「오발탄」 그리고 「피해자」」, 앞의 글, 219쪽. 72)김윤식, 정호웅, 󰡔한국소설사󰡕, 문학동네, 2015, 370-371쪽.

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오히려 ‘무의미’에 가치를 부여한다.73)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당시 대부분의 전후작가들이 역사적인 상황 속에 서 절망과 불안 의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범선은 보다 원초적인 인간성의 바 탕 위에서 그러한 인간들이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에 대해 더 초 점을 두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범선의 많은 소설들은 일상생활과 밀착된 사 소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단번에 독자들의 구미를 끄는 강렬함 은 부족하지만 그의 전반 문학세계를 관찰하였을 때 그 속에는 이범선만의 인생 태도 내지 인간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이범선은 많은 대담과 수필 등을 통해 자신의 창작관을 피력하면서 늘 ‘인간’을 가장 중심에 두고 작품 을 창작하고자 노력하였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그를 둘러싼 담론 장 속에서 그와 인연을 맺어간 사람들 또한 그를 어디까지나 가장 본질적인 인간 의 모습을 그리고자 노력한 작가라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작가 이범선이 생각하 는 인간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또 그의 인간관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살펴보는 것 은 추후 그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다.

‘인간’이라는 문제는 이범선의 전반 문학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 이자 그의 문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놓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 다면 이범선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인간세상은 어떤 인간세상이고 또 그 가 눈길을 돌리고 있는 인간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이런 사항들을 알아내기 위 해서는 우선 작가 이범선이 아닌 인간 이범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요해 할 필요 가 있다. 그는 자신의 가난했던 영유아 시절, 나름 평온했던 학생시절, 직장을 수 없이 옮겨 다니던 젊은 시절, 해방을 겪으며 고향에서 쫓기다 시피 월남하던 시 절, 6⋅25전쟁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시절을 되돌아보며 ‘도 무지 화려하지 못하고 평범이하의 일생이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그는 6⋅25전쟁 을 겪으며 ‘인생 그거 별게 아니란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바 있다74). 그는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평범하다 못해 그 이하’였다고 평가하지만 지인들의 눈에 비친 인간 이범선은 그야말로 ‘정직함’ 그 자체였다. 평소에 술도 하지 않는 아주 ‘절제 있는 사람’75)이었고 ‘검소하고 겸손한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76),

73)김윤식, 정호웅, 위의 책, 361-372쪽 참조.

74)이범선, 「나의 이력서 — 60년의 색깔」, 앞의 글, 292쪽. 75)조병화, 「서민의 목소리」, 앞의 글, 355쪽.

‘학처럼 고고하지만 친구, 후배를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77)이었고 ‘신의를 무엇 보다도 중히 여겼으며’78), ‘부드러우면서도 강직’79)한 사람이었다. 낚시를 유독 좋아하였지만80) 그것은 결코 남들처럼 물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 나는 기쁨과 벗들과의 만남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잡은 물고기는 방생

(放生)하였다고 한다81). 이범선은 미발표 유작 「나의 피난기」에서 자식들에게

‘인생은 결국 고통과의 싸움이고 그 상대는 자신이기에 남에게는 항상 겸손하고, 자기에게는 늘 엄격히 대할 것’82)을 요구하였는데 자신 또한 그런 원칙을 철저히

76) “ “육십이 내일 모레다. 나는 그 긴 세월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본다. 많은 일들이 있었

다. 그러나 나는 항상 큰거리를 외면한 채 뒷길로만 걸어온 것같다”고 말씀하신 당신……

휘황찬란한 큰길, 그러나 자칫 허영과 오만과 위선으로 가득한 큰 길이 아닌, 검소하고 겸 손하고 착한, 그리하여 외로운 작은 길, 그런 뒷길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흰 까마귀”로

“미운 오리 새끼”로 여기면서 걸어오신 뒷길이었다.”(김용운, 「애달픈 색소폰 소리」, 󰡔현

대문학 — 「추도특집: 이범선의 인간과 문학을 말한다」󰡕, 1982.5, 361쪽.)

77) “학촌형! 형은 성품 곧고 청결하여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고, 청렴하여 가난을 두려워하

지 않았고, 결백하여 부정을 미워했고, 솔직하여 거짓을 멀리했고, 성실하여 나태를 용서 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 형은 참으로 곧은 성실한 삶이었습니다. 학처럼 고 고하였읍니다.”

“학촌! 형은 조국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하루라도 우국의 뜻을 잊은 일이 없습니

다. 동시에 형은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며, 친구를 위해서는 궂은일이라도 신경과 육체의 소모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앞장 서서 도왔읍니다. 또한 후배와 제자들의 일에 대하 여서도 그러했습니다.”(김광식, 「이범선의 영전에」, 󰡔현대문학 — 「추도특집: 이범선의 인 간과 문학을 말한다」󰡕, 1982.5, 353쪽.)

78) “학처럼 메말라서 차겁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한번이라도 자리를 함께 하고나면 따뜻한 정을 누구나 간직하게 하는 인품을 지녔던 셈이다.……무엇보다도 선생께서는 사람과 사 람사이의 믿음을 아끼셨다. 재주부리는 사람은 범접할 수 없으리만큼 신의를 무겁게 간직 한 관계로 여간해서는 짓지 않은 분이었다.”(윤재근, 「인생의 웃음과 문학의 울음」, 󰡔현대 문학 — 「추도특집: 이범선의 인간과 문학을 말한다」󰡕, 1982.5, 362쪽.)

79) “학촌은 실로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부드러우면서도 대단히 강직한 사

람이었다. 그는 항상 서민의 편에 서서 사고를 하고 행동을 했던 사람이다. 농담 속에도 뼈가 있고, 평범한 말 속에도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뜻이 고여있었다. 서민으로의 성장, 서민으로의 경험, 서민으로서의 철학이 몸에 배인 조선인이었다.”(구경서, 「학촌과 나」,

󰡔현대문학 — 「추도특집: 이범선의 인간과 문학을 말한다」󰡕, 1982.5, 357쪽.)

80)이범선은 어느 회고담에서 “낚시를 누구보다 좋아해요. 낚시는 ‘마음은 군자처럼, 살기는 왕자처럼’ 하는 생각을 품게 하는 정신적인 취미에요”라고 자신의 낚시관을 피력한 바 있 다.(이범선, 󰡔표구된 휴지: 이범선 대표중단편선집󰡕, 책세상, 1989, 첫 페이지 삽도 참조) 이밖에 이범선은 197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세대󰡕잡지에 차례로 「밤낚시와 처녀귀신」,

「낚시풍류」, 「만추낚시」등 세편의 꽁트를 발표한 바 있다.

81)김용운, 「애달픈 색소폰 소리」, 앞의 글, 360쪽; 곽학송, 「학촌과 낚시질」, 󰡔현대문학 —

「추도특집: 이범선의 인간과 문학을 말한다」󰡕, 1982.5, 359쪽.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일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한 바 있다. 부드럽지만 강직하고 착하지만 약하지 않으며 남에게는 겸손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요구해왔던 이 범선은 일생을 두고 정직하게 살아왔다. 이는 인간에 대해서든 사회에 대해서든 그가 항상 철칙처럼 지켜왔던 것들이다.

그는 진남포 공립상공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일화83)를 떠올리며 민족의식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야구경기 중 무조건 조선인이 있는 팀 을 응원하였다는 그 일화는 단지 당시의 어린 마음에서 기인된 편협한 민족의식 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훗날 󰡔검은 해협󰡕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이범선은 보다 진지하게 민족의식에 대해서 재차 언급한다. 󰡔검은 해협󰡕은 한국 인과 일본인사이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소설의 후기에서 이범선은

‘어쩌면 자신의 옹졸한 감정일지도 모르나 어쩌다 조리(일본 짚신)를 신은 젊은 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언짢고 체육경기에서 한국선수가 일본선수를 이기면 저 도 모르게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기분이 드 는 이유는 ‘오랜 역사 속에서 쌓이고 쌓인 민족감정으로 인해 옛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고 ‘동족도 사상이 다르면 적이 되어 버리는 판에 이민족(異民族) 이래서 덮어놓고 적대시할 이유는 없다’고 강조한다. 즉, 그의 말대로 결코 ‘그 사람이 어느 민족이냐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인간이냐’가 문제라 는 것이다.84) 바꾸어 말해 이는 민족의 문제마저도 ‘인간 자체의 문제’로 인식하 고자 했던 작가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훗날 모 대 담에서 종교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을 한 개의 계열로 생각하고 있는 기자 에게 자신은 ‘종교 또한 인간의 내면문제에 속하는 것이기에 굳이 그것을 한 개 의 계열로 따로 분리시키려 하지 않고 있다’85)고 답한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 해할 수 있다.

“내 소설의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대체적으로 소극적이고 구박받거나 억울하 82)이범선, 「나의 피난기」, 앞의 글, 265쪽.

83)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다니던 진남포 상공학교는 일인학생이 반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야구부는 전부 일본학생이었기에 평양고보와 야구경기를 하면 무조건 평양고 보를 응원했다는 것이다.(이범선, 「나의 이력서 — 60년의 색깔」, 앞의 글, 293쪽.) 84)이범선, 「작가의 노트」, 󰡔검은 해협󰡕, 경미문화사, 1979, 618-619쪽.

85)이범선, 「대담취재: 「오발탄」 그리고 「피해자」」, 앞의 글, 2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