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존투쟁 속의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탐구
3.1.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의 유덕한 인간상
사실 이범선의 소설 중 직접 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은 많지 않다. 있 다할지라도 이러한 소설들은 대체적으로 포성이 남발하는 아비규환의 전장의 상 황보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을 요한다.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동족상잔의 잔혹함, 또는 이데올로기의 모순 등이 아니라 전장이라는 배경 속에서 보여 진 인간들의 모습 그 자체이다. 본 절 에서 연구대상으로 하는 「더퍼리 전서방」, 동트는 하늘 밑에서, 「분수령」등은 모두 전쟁의 한 단면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
100) 김병익, 「6⋅25와 전쟁문학」, 「이대학보」, 1982, 174쪽.
키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우선 「더퍼리 전서방」에서는 인천 상륙작전 중 성급히 유엔군을 맞이하다 비 극적인 죽음을 당한 전서방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었건만 아직도 어린애 같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더퍼리 전서방’이라 부른다. 통 상적으로 전쟁소설에서 ‘영웅’은 전술이 뛰어난 지휘관 또는 병사와 같은 전투요 원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평범하다 못해 ‘바보’ 같 아 보이는 인물인 전서방을 ‘영웅’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소 설과 구별된다.
껌어틱틱한 얼굴에 여기 저기 쌀가루 칠을 해가지고 왔다 갔다 하는 그는 한 번만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큰 소리로 아주 허물 없는 인사를 하곤 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시우.”라든가 또는 “허 선생님 쪽 빼고 어딜 가슈.”이런 식 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딴 사람이 했다면 실례가 될 말도 그가 하면 다들 웃 어버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천하 태평 명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싸움도 또 곧잘했다. 누가 경우에 틀리는 수작을 하면 공연히 남의 싸움까지 맡아 나서곤 하였다. 언젠가 도 정거장에서 짐군과 어떤 중년 신사가 짐삯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가로 맡아
“이 새끼가 우리례 이렇게 삯짐이나 지고 댕기니게니 그저 우섭게 아누나.”하 고 어느 사이에 자기가 지게군이 되어 웃통을 벗어붙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전 서방의 제일 특성은 고집이 센 것이었다. 누가 머래도 제 하고싶 은 짓은 하고야마는 성격이었다.
전 서방이 六⋅二五에 남으로 따라 나서지 못한것도 그의 그 고집에서였다.
그래도 전 서방보다는 좀 세상 물정을 아는 백 선생이 남으로 가야한다고 했을 때 전 서방은 그야말로 싸우자고 달려들었던 것이었다.101)
‘껌어틱틱한 얼굴에 여기 저기 쌀가루를 칠해가지고 다니는 그’의 이미지는 누 가 봐도 어수룩한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딴 사람이 했다면 실례가 될 말도 그 가 하면 다들 웃어버린다’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로부터 그는 결코 누군가의 미움 을 사는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천하태평명랑’하여 고민 없이 즐겁게만 살
101) 이범선, 학마을 사람들(제 1창작집), 앞의 책, 109-110쪽.
것 같은 그이지만 ‘불의’ 앞에서는 결코 웃어넘기지 못하여 누군가가 심기를 건 드리는 일을 했다하면 남의 싸움에까지 끼어드는 의외의 면이 있다. 이는 ‘고집 이 센’ 그의 성향과 연관이 있는데 그는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어떤 상황이건 자 신이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야 마는 고집불통이었다. 결국 그 고집 때문에 6⋅ 25때 누구의 권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국군을 믿고 있다가 온 서울이 인 민군으로 포위되어서야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서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자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밖으로 나가 전쟁 상 황을 살피고 하수도 밑에서 같이 피난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 곤 하였다. 그렇게 모두가 국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정적을 깨우는 갑 작스런 폭격소리에 모두가 밖을 향해 보니 다름 아니라 전서방네 집이 불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때면 남의 집이 붙는대도 제일 먼저 나가서 덤빌 전 서방이 그야말로 삼년을 죽을 먹어가며 마련한 제 집이 탄다고 하는데도 그저 덤덤히 앉아만있었다.
전 서방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벽 쪽으로 돌아앉아 샤쯔 앞 자락으로 가리 우고 성냥을 켰다. 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이즈러져 있었다. 이마엔 핏 줄이 돋혔고 입에 문 담배 끝은 푸르르 떨었다.
……
한참이나 계속 되던 폭발이 멎고 집 타는 불길만이 환히 하수도 안을 비치고 있었다. 다들 흥분한 얼굴로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전 서방은 담배 꽁다리를 발 밑에 물에 던졌다. 그리고 마주 앉은 백 선생에게로 넌즛이 눈을 들었다. 그 의 커다란 두 눈에는 눈물이 글성하니 고여 있었다. 전 서방은 무슨 말을 할 듯 하다 말고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며 코를 씽 풀어 하수도 물우에 뿌렸다.102)
해방 다음해에 월남한 뒤 꼬박 3년 동안 쌀장수를 해가며 갖은 고생 끝에 겨우 마련한 집이 타고 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덤덤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너 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섭게 이지러진 얼굴’, ‘핏줄이 돋친 이마’, ‘떨 리는 담배 끝’, ‘눈물이 글썽하니 고여 있는 그의 눈’은 이미 ‘슬픔’, ‘분노’, ‘억울
102) 이범선, 위의 책, 117-118쪽.
함’ 등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 그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것을 바쳐가며 마련한 생존의 터전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은 결코 덤덤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앉아 만 있었던 데는 그만의 ‘개인작전’이자 ‘비밀작전’이 숨겨져 있었다.
“참 잘 드러맞았구나”
전 서방은 혼자 히죽이 웃었다. 흡사 투전판에서 마지막 밑천을 털어 대고 뜨는 판에 보기좋게 뒷 자를 들어 맞히고 돈을 뻑 긁어당길 때와도 같이 우쭐 하였다. 전 서방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뭐야?”
백 선생도 깨어있었다.
“됐어 데놈들이 이제야 도망을 티네. 참 고렇게두 드러맞는다군 내 하하하
하”
밤이 깊도록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때때로 코만 훌적거리고 앉았던 전 서방이 만족해 웃기까지 하였다.
“뭐가 맞아!”
“아 그거 아까”
전 서방은 한번 좌우를 살피고 나더니 백 선생의 귀에다 손을 말아 대었다.
듣고 있는 백 선생의 입이 앞에 바게쯔 안에 켜놓은 촛불을 삼키기나 하려는 것처럼 점점 커졌다.103)
전서방은 ‘잘 드러맞았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작전승리에 대해 내심 뿌듯해하 고 있었다. 사실 그는 미리 자기네 집과 안영감네 집 바로 옆에 있는 인민군의 본부이자 탄환 저장소인 곳에 폭격이 가해지면 화재가 일게끔 조치를 취해놓았 던 것이다. 따라서 전서방의 ‘개인작전’은 사실 ‘모두를 위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결국 전서방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지만 그의 희생은 그곳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희생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을 위한 자기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단 한사람 싸우다 죽은 용사요”104)라는 백선생의 말에는 전
103) 이범선, 위의 책, 119쪽.
서방에 대한 동정이 깃들어 있는 동시에 전서방의 영웅적인 행위 즉 그의 ‘선의 적인 행위’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행위는 존재에서 나온다’라는 중세 철학자 들이 오래된 격언이 있듯이 결국 행위가 선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한 것이었 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선이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상황에 처한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다.105) 주위 사람들의 눈에 비춰진 전서방의 모습은 다 소 어리숙하고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 ‘바보 같음’과 ‘고집’이 그의 성품을 더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고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그로 인해 꼭 더 행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의 그런 고귀한 성격이 다른 사람들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세계에 엄청난 혜택을 주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06)
요컨대, 전서방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희생은 오히려 그 사람 의 인격을 더 부각시키는 작용을 한다. 「더퍼리 전서방」이 개인의 ‘영웅적인 행 적’을 통해 인간의 착한 본성을 부각하는데 주력하였다면 동트는 하늘 밑에 서107)는 장편소설이니만큼 더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전장에서 피어난 따뜻한 인간애와 그 속에서 보여 진 인간의 존엄성을 부각하고 있다. 소설은 전쟁 중 압 록강까지 올라갔다 전선에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서 엄대위를 위수로 한 대열의 개개 인물들이 어떻게 극한상황에 대처하는지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묘파하고 있다. 전반 대열을 이끌어가야 하는 선도자인 엄대 위는 단연 믿음직한 장교이다. 대열에는 병사들을 포함한 자치대원들과 피난민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한마디 명령이 자칫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엄대위인지라 매사에 최대한 개인감정을 억누 르고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택하려 노력한다. 따라서 그는 지나가는 피난민들을 보면서도 ‘일부러’ 외면하려 애를 쓰고 병사들의 죽음 앞에
104) 이범선, 학마을 사람들, 앞의 책, 124쪽.
105) 노베르트 슈페만 지음, 박찬구⋅류지한 옮김, 도덕과 윤리에 관한 철학적 사유, 철학 과 현실사, 2001, 143-144쪽.
106)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상혁 옮김, 공리주의, 앞의 책, 33쪽.
107) 최근까지 이 작품은 이범선의 첫 장편소설로 알려져 왔지만 얼마 전 황정현이 이범선은
동트는 하늘 밑에서를 연재하기 두 달 전에 새가정잡지에 울타리 저 편에 핀 꽃이라는 작품도 연재하였음을 밝혔다. 따라서 이범선의 첫 장편소설은 울타리 저 편 에 핀 꽃이라고 정정할 필요가 있겠지만 동트는 하늘 밑에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 판된 이범선의 장편소설임에는 틀림없다.(황정현, 「이범선의 첫 번째 장편소설 울타리 저편에 핀 꽃과 이범선 문학의 재인식」, 앞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