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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세대 전쟁 체험의 특징

해방공간의 나라 만들기가 완성되기도 전인 6․25전쟁이 터졌고 그 혼란이 수습되 지 않은 상황에서 1948년에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는 조선 인 민공화국이 수립된다.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더욱 첨예하 게 심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동안 지배해 왔던 핏줄개념의 민족이 이데올 로기로 인하여 다른 나라를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며 전쟁이 터 진 것이다. 6․25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1950년대 문학이 겉으로든 내면적이든 전쟁을 모티프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당 대의 상황이 강요된 상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시’로 불리는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3년 동안은 혼란과 파괴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유엔군을 포함하여 213만 명에 이르는 생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비용이 150억 불이라는 엄청난 물적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전쟁은 1950년대 모든 것을 변화시켜 버렸다. 한 통계에 의하면 남한의 전쟁 피해자 총수는 약 131만 명이 사 망하고 18만 3천 명이 부상당했으며 7만 명이 포로 또는 행방불명되었다.83) 수많 은 사람들이 강제로 납북되었으며 무려 36만 4천 명이 북한 당국에 의해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적어도 20만 명의 남한 청년들이 강제로 북한 의용군에 가입하였고, 5백만이 넘는 남한 인구가 집을 잃고 방황한 것으로 집계되 었다.84)

이것은 북한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이며 게다가 전쟁이 남긴 보이지 않는 긴 흔 적들을 감안하지 않는 것이지만 당시의 참상을 대충 짐작케 한다. 때로 이 전쟁은

‘문명화 이전의 상황’이라고 이야기 될 정도로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 전쟁에 대한 기록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비극은 있으되 그것은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존재했다.

한국전쟁이 너무나 참혹하고 쓰라린 경험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추악하고 파괴적이 며 비도덕적인 측면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쟁과 연관된 것은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만 간주되고 있고, 따라서 다른 시각에서 전쟁의 역사적인 의미 를 찾아보려는 시도는 그만큼 어려울 수박에 없다. 그러므로 ……중략…… 한국에서 는 전쟁에 관한 심오한 소설이나 시도 많지 않거니와 전쟁의 경험을 토대로 한 감동적 인 영화나 음악도 찾아보기 어렵다.85)

여전히 전쟁의 마성(魔性)은 사그러들지 않아서 그것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은 필연적으로 수행된 군부의 팽창86)은 오랫동안 전쟁을 신화

83)국방연구소의 『한국전쟁 인명피해집』(1996)에 근거한 남한의 민간인 총 사망자의 공식 통계치는 37만 3,577명이지만,4․19직후 조작된 학살자유족회에서 파악한 숫자는 113만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져 있 다.(김영범,「한국전쟁과 양민학살」,동아시아 평화인권 한국위원회 편,『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2』, 삼인,2000,pp91-92쪽 참조).이러한 점에서,거창양민학살사건을 소재로 한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1987),4.3사태 비극을 거쳐온 자전적 화자의 성장기억을의 역사화인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2000),황해도 신천학살을 오구굿 형식으로 풀어 상처의 카니발화를 통한 소통 가능성을 보여준 황석영 의 『손님』(2001)의 현재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84)이채진,「한국전쟁의 숨은 뜻」,『사상』,1990년 봄호,p,185.

85)이채진,위의 책,p.186.

86)김세진,「한국군부의 성장과정과 5․16」,『1960년대』,거름,1984.pp.95~98참조 한국전쟁이 발발 할 당시인 1950년 6월 한국군의 총병력은 10만을 상회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정도 규모의 병력을 보유

화하거나 토테미즘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한 또 하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1950 년 전쟁은 그 수많은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문학적으로 그려질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이 시대의 정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국토는 파괴되었고 경제적 궁핍은 극에 달 하여 정부는 이른바 구호물자에 의존하지 않고는 국가경제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 에 이르게 된다. 또한 정치적인 혼란이 야기된 것은 물론 윤리의 파탄과 모랄의 부재 등 페허화된 시대상을 보이게 된다. 살육과 파괴로 대변되는 시대, 그 결과 모든 출발을 불모의 땅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른바 ‘화전민의식’87)이 지배 하는 시대가 된다.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양극화는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를 초래하였다. 남한과 북한 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극단적으로 강화해 감으로써 이데올로기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성을 띤다.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는 이념의 모색을 차단 하고 그 결과 이념의 부재라는 정신적 공백을 초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 선택이 가능했던 해방공간과 달리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신념차원과 윤리차원에서 강요되 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고의 유연성 확보가 어렵게 되고 경직된 지적 풍토가 형 성되었다.

이러한 전쟁이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민족의 재편성’과 ‘외래문화수용 의 극대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일상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의 요 구로 표현할 수 있다. 전쟁이 뒤흔든 것,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식민주의에 의 해 왜곡된 것이긴 했지만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길항과 그 사이에 놓인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순식간에 모든 기존질서를 철저히 파괴했고 변형시켰다. 그것은 이전보다 더욱 봉건적인 형태로 물러서기도 했고, 때로는 급작스럽게 현대적인 것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반근대적인 생각과 탈현대적 인 상상력을 뒤섞어 놓기도 했다. 그것이 어떤 것 이든 간에 전쟁의 폭력성에 모 습을 드러낸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장비와 병력의 모든 면에서 북한 인민군에 뒤지고 있었다.정쟁이 발생 하자 남한에 서는 17~40세의 징접 가능한 인원에 대한 총동원이 단행되었다.1952년에는 지난 2년 간 의 전장에서 8만명의 장교와 사병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총병력은 25만에 달하였다.한 국군의 총병력은 1954년에 최고에 달했다.

곽종원,『전쟁문학특집』,「월간문학」,1969.10.

87)김윤식,『한국 현대문학사』제2판,일지사,1994,p.267.

한국전쟁은 전쟁의 원인이나 전후 현실의 재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구의 상황과는 차별적 성격을 지닌다. 전쟁이 인간의 의미에 대한 반성의 매개가 됨에 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후의 현실은 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국가 이데올 로기가 더욱더 강화되어 가는 모순된 상황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인식으로서의 ‘새로운 모럴’을 추구하던 작가들에게는 이 시기는 구체적인 현실의 퇴행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전쟁 체험 과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추구하던 작가들에게 삶은 오히려 왜곡된 채 더더욱 공고해지는 상 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의 시대 상황은 폐허가 된 토양에서 혼란의 소용돌이를 겪는 가운데 이 념적 경직화를 초래했고, 그 결과 지적인 사고의 폭이 좁아든 것으로 요약된다 할 수 있다. 당대 사회가 혼란을 동반한 가능성보다는 혼란 그 자체로 점칠되는 아노 미 사회였다는 의미이다. 이른바 ‘신이 침묵하는 시대’88)였던 것이다. 전후문학 의 후반부터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이 치열하게 이루어진 시대라 할 수 있다. 심의 침묵만이 강조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문학을 이 중적 의미를 띌 수 있는 시기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민족적인 신성한 것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며, 밖으로부터 충격에 대응하여 안으로부터 폭발하는 역 사적 추진력의 자기발견의 시대’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1953년에 3년간에 걸친 치열했던 전쟁이 기대치 않았던 방식으로 종말을 고했을 때, 이 시기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은 대체로 새로운 작가의 등장에 의해서가 아니 라 기존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낯선 체험을 적어낸 것이 었는데, 대체로 「종군작가단」 활동의 소산인 것과 피난지에서의 창작으로 대별 된다. 이것들이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를 띠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 다. 전쟁 시기에 전쟁의 경험을 자기화 할 수 있는 작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 인다. 오직 두 가지 방식만이 가능했는데, 전쟁의 담론을 그대로 수용하느냐, 아 니면 자기 체험이라는 협소한 영역 안으로 자신의 글쓰기는 움츠려 드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는 적지 않은 소설적 성과를 낳았는데, 대체로 단편소설 형식에 대응 한다.

88)김윤식,『한국 현대문학사』제2판,일지사,1994,p.265.

전쟁체험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전쟁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주체의 입장에서 새롭게 생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성과 부조리성을 우연적 사태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현상이나 원인 역시도 인간의 삶의 한 속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하고, 이를 바라보는 주체의 현재시점에서 반성적 거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곽종원은 이러한 전쟁문학을 내용상 1) 가장 초보적인 것으로서 이념을 위해 효 용성을 내세운 것, 2) 배경은 전쟁이지만 인간성은 파헤치는 데 초점을 두는 것, 3) 전쟁 그 자체가 주제인 것 의 세 종류로 분류한다. 1)이 대체로 전시에 씌어진 것들이라면 2)와 3)의 경계는 다소 모호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전쟁 자체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이는가에 의해서 그 경계가 나누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파괴와 살육으로 점철된 한국전쟁은 그 자체로 한계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휴전으로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것이 종전(終戰)이 아니라는 점 에서 한계상황은 연속성을 띠고 있다. 전후의 파괴를 복구하고 상혼을 치유하기 위한 제반 노력이 집중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복구의지만으로 전쟁의 상혼이 씻겨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생존권의 위협을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일 수 없다. 정신사척 차원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정신사적 문제를 문학연구 편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소이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