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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동(북)아시아론의 위상

가 . 근대 중국의 아시아 인식

중국인의 세계관을 얘기할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화이론에 입각한 중 국 중심주의적 사고를 떠올리게 된다. 즉,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중국이 인 간 문명이 펼쳐지는 세상 전체, 곧 ‘천하’(天下)의 중심부라는 믿음을 가 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들이 동아시아 이웃나라들을 동등한 지평 위 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는 점을 곧잘 지적한다.

고대에 형성된 이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는 문명의 중심인 ‘중국’(華)과 문명화되지 못한 ‘오랑캐’(夷)의 세계로 구성된다. ‘화이론적 질서관’에서 야만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오랑캐들은 중심에서부터 어떤 방향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이(夷), 만(蠻), 적(狄), 융(戎) 등과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이 구도에서 정치적․지리적 범주로서 ‘화’가 차지하는 중심 위치 는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11 중국이라는 지리적․문화적 중심과 주변 부 국가 간의 위계적 격차를 상정하는 이와 같은 세계관은 청나라 말기까 지도 존속하였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지역적 유대 를 도모할 수 있는 상대로서 한국과 같은 이웃국가들을 생각하기는 어려 웠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그 역사에서 아시아에 대한 수평적 사고의 경험을 전혀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수평적 사고의 시작은 청일전쟁으로 중국 중심의 질서가 와해되고 1898년의 개혁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 지배엘 리트가 극도의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 에 없는 많은 약소국가의 하나임을 자각하면서 일부 중국 지식인들은 아

11이에 비해 중국 명·청 시대 전환기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에서는 화이관계의 변 화 가능성을 인정하는 시각이 서서히 형성되었다(김한규 1999: 648-58, 788-

797; 최소자 1997; 쑨거 2003: 69). 이것은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가 ‘화’의 정통

성을 대표할 수 없다고 하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시아의 여러 민족을 제국주의에 대항할 연대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었 다.12 량치차오(梁啓超)나 쑨원(孫文) 등의 주장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인식의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량치차오는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식민지로 전락할 위 기에 빠지자 중국이 아프리카의 약소국가와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음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을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과의 연대에서 찾게 되었다. 특히 일본이 서구 열강 을 견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여 일본 주도의 아시아 연대를 주장하였다. 아시아 민족 간의 연대를 보는 그의 이러한 시각은 다분히 인종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시아와 서구의 대립을 황 인종 대 백인종의 대립으로 간주하였고 흑인종, 홍인종, 갈색 인종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황인종만이 백인종과 경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3

쑨원은 1924년에 일본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면서

양계초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 강연에서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 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아시아 민족들에게 독립의 새 희망과 유색인종간 연대의 필요성을 제시해 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인의와 도덕에 바탕을 둔 동방의 왕도(王道) 문화가 무력에 의존하는 서양의 패도(覇道) 문화와 싸 워 이겨야 한다는 점을 주창하면서 아시아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 결국 ‘대아시아주의’는 서양의 강력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 고통 받는 아시아 민족들끼리 단합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피압박민족들이 그 불평등 을 타개하기 위해 연대하는 문제이다(쑨원 1997). 이와 같은 쑨원의 아시 아 인식은 국민당 지도층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실제 피압박민족 의 국제기구인 ‘민족국제’의 발족 구상이라든가 일본과의 공존공생을 도 모한 왕징웨이(汪精衛)의 시도를 통해 구체화되기도 했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 아시아 연대를 도모하는 시도들도 나타났다.14 20

12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0), p. 59.

세기 초 아나키즘의 영향 하에서 류스페이(劉師培)는 아시아의 약소민족 들이 국가주의를 초월한 대동단결을 통해 백인종의 억압에 대항해야 한 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일본의 야욕도 아시아인이 경계해야 할 것으로 규 정하였다. 리다자오(李大釗) 역시 1차대전 직후에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거부하고 아시아 피압박민족들이 ‘아주연방’과 같은 지역협의체의 구성을 통해 세계연방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아 시아인들은 ‘아주화친회’와 같은 기구를 결성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 이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에는 중국과 조선의 활동가 들 사이에 반제국주의적 연대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또 만주에서 시작 되어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간 종교단체들의 이념과 활동도, 비록 일본의 국가주의에 이용당한 측면이 있긴 했지만, 국가 단위를 초월한 연 대의 모색으로 평가될 수 있다.

나 . 동아시아에 대한 현대적 인식

최근 중국에서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주로 한국이나 일본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에 대해 지 식인간의 학술교류 차원에서 응답하는 반응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에서는 진정한 동아시아론은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지식인들에게 동아시아공동체론과 같은 개념에 대해 질문할 때 흔히 듣게 되는 반응은 중국인들에게 동아시아라는 인식 자체가 매우 희 박하다는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문 화에 대해 익숙하게 아는 중국인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동아시아공동체 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 문제 에 비교적 관심을 많이 가진 지식인들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한 자와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전통을 공유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

14위의 책, pp. 59-60.

고 최근의 한류 현상과 관련하여 그것이 한중관계에 대해 의미하는 바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동아시아의 지역적 연대나 공동체 구 상은 여전히 낯설고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15 심지어 동아시아공동체와 관련된 학술적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들도 대개는 동아시아공동체론의 인식론적 문제를 지적하거나 공동체 개념을 원론적으로 논의하는 데 그치고 있다.

전후 냉전체제의 형성 이후 자본주의 세계와 수십 년간 단절과 대립의 역사를 살아온 중국의 입장에서, 개방정책으로 서로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지역적 연대를 상 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식인간 의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온 한국의 대표 적인 지식인들이 토로했듯이16, 오늘날 중국의 관심은 미국을 비롯한 서 방세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하고 있는 동아시아 여러 사회에 대 한 수평적 관심은 찾기 힘들다. 한 중국 지식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 의 시선은 태평양을 넘어 미국에 가 닿아 있을 뿐, 바로 자기 옆에 있는 나라들을 찬찬히 살필 여유는 갖고 있지 못하다.”17 특히 동북아시아 이 웃국가로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

중국과 북한은 냉전기간 동안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서로 상당히 긴 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공연이나 영화 등의 형태로 부분적인 문화교류 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과 북한간에는 어느 정도 상호이해의 기초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적대국가들인 중국과 남 한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그 때문에 남한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

152004년 여름에 이 연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의 몇몇 지식인과 동아시아공동

체론에 관한 인터뷰를 수행한 바 있다. 중화서국(中華書局) 편집부에 근무하면 서 칭화대학 중문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정런지아(鄭仁甲)씨, 베이징사범대학 중 문학과 장더쥔(張哲俊) 교수, 칭화대학 사회학과 장샤오쥔(張小軍) 교수 등은 동아시아공동체 개념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아직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견 해를 피력하였다.

16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 pp. 48-51.

17쾅신니앤, “한류속을 달리는 <지하철 1호선>,” 「Image of Korea」, 창간호 (2002),

인 정보와 지식을 중국인들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국인들에게 남 한은 전쟁 직후의 피폐한 농촌사회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양국 간 경제교류의 활성화와 공식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에 따라 서로 간에 인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에 남 한에 대한 이해도가 점차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특히 서울에서 1986년 아 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남한의 실상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은 TV 중계를 통해 고층빌딩과 자동차, 소비재가 넘쳐나는 현대화된 남한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92년에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급속하게 발전하면 서 다각적인 교류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한국에 대한 중국인의 인 식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광, 사업, 유학, 학술 등을 목적 으로 상대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여 직접적인 대면 이나 체험을 통해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늘어났다. 특히 최 근에는 한국 TV 드라마와 영화 등이 중국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게 되 면서 이런 것들을 통해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사회의 모습을 좀 더 친근하 게 느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양국 간 교류의 급속한 증가에 따라 1980년대 후반부터 한 국에 대한 관심과 연구 역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증대하고 있다.18 1980 년대 중반부터 요녕성에서 광동성에 이르는 연해지역에 한국학 연구기관 과 단체가 많이 증가했고 북경대, 요녕대, 산동대, 복단대, 항주대 등에 한 국학연구센터가 설립되었다. 또 한국어 혹은 한국학을 가르치는 학과가 기존의 북경대와 낙양외대 외에 요동대학, 절강대학, 상해외국어학원, 북 경외국어학원, 북경대외경제무역대학, 북경여유학원, 북경어언문화대학, 산동사범대학 등 많은 대학에 개설되었다. 이처럼 한국학 연구기관과 학 과가 늘어나면서 한반도에 대한 연구 역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의 하나로 부상하면서 1990년대 초반기에 한국경제에 대한 연구 열풍이 일었다. 최근 5년 간의 연구논문 저자들을

18임계순, 중국인이 바라본 한국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2002), pp. 307-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