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 기업과 가족주의
동아시아 3국의 기업제도에 관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는 각국 기업집단 의 조직형태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91 한국 기업집단의
특성은 ‘위계적’ 혹은 ‘가산적’(patrimonial)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본다.
즉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의 기업집단은 소유구조에서 창업자와 그를 이은 상속자의 존재와 역할이 두드러지고, 기업 활동에 필요한 의사결
90위의 책.
91김성철, “한국 기업과 가족주의: 한국인의 가족에 대한 인식과 기업경영에의 적 용,” pp. 229-231.
정도 총수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모습을 보여준다. ‘문어발’식 기업 집단의 하위단위는 재벌 총수와 혈연 등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는 책임 자가 관리한다.
일본의 기업집단은 하나의 기업집단을 구성하는 기업간의 관계가 수평 적이고 보완적이어서, ‘공생적’ 혹은 ‘공동체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기업집단의 구성은 한국과 같이 문어발식 형태를 보이지만, 창업자 혹은 소유자 개인의 영향력은 미미하고 대신 기업간의 상호출자 및 합작투자 형식으로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숫자가 적은 타이완 기업집단은 수많은 독립기 업들이 가족관계와 같은 연결망 속에서 거래를 하여, ‘군생적’ 혹은 ‘가족 연결망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새로이 기업을 창설하기 위한 투자는 주로 개인 단위 혹은 파트너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이 수많은 기업들은 위계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으로 분화되어 탄력적이고 유연한 기업 활동 을 수행한다. 한국과 일본처럼 거대 규모의 기업 집단은 타이완에 존재 하지 않는다.
이러한 동아시아 3국의 기업집단의 차이는 유교적 사회질서의 상이한 측면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된다.92 가산적’인 한국 기업조직의 특징은 혈 연관계 및 소유자 개인의 역할과 위상이 강조된다는 의미에서 ‘가부장적’
인 유교질서가 반영되며, ‘공동체적’인 일본 기업조직의 특징은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존중한다는 ‘협동과 단결’의 유교 가치관을 수용한 형태이고,
‘가족 연결망적’ 타이완 기업조직은 시장이라는 상황에서 가족관계가 어
떻게 지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역시 유교적 사회구성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동아시 아 3국의 기업집단이 공히 유교적 사회질서를 일정한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의 기업들이 운영되는 방식은 각기 다르며, 거기에는 상당한 정도 가족문화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92유석춘,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제도주의적 시각,” p. 131; 국민호, “동
동아시아 3국의 가족제도의 차이는 각국의 기업형태나 경영방식에 여 러 가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가의 계승과 관련하여 일본과 한국에 서는 장자나 기타 1인의 상속자의 존재, 본가-분가의 의존관계 등으로 재 벌이라는 거대 기업집단이 운영되고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균분 상속으 로 가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가장이 죽은 다음에는 형제들이 각각 새로 운 가를 형성하는 것이 정형이어서 기업조직의 측면에서도 거대 기업집 단을 형성하지 않고 분절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분절화된 기업들은 ‘가족 연망적’ 관계로써 서로 연결된다.93(김성철 2001: 255-56).
한국과 일본의 기업경영의 차이는 훨씬 미묘하다. 동아시아 기업제도 연구자들은 한국의 기업은 혈연에 기반한 가산적인 조직이며, 일본은 은 행의 소유를 통한 공동체적 운영으로 대표된다고 한다. 이는 물론 기업과 관련한 양국 법령 차이의 영향도 있으며, 또 일본 기업의 역사가 한국보 다 훨씬 길기에 혈연에 의한 소유 의식이 그만큼 약화된 영향도 있다. 하 지만 양국 가족제도를 보면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해진다. 한국에서는 장자 계승이 제도화되어 있고 가장권은 혈연을 통한 생득적인 지위여서 가족 이란 혈연을 매개로 한 위계질서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일본 에서는 가장권이 대부분 장자를 통해 계승되지만, 비혈연도 가능한 성취 지위이며, 혈연을 통한 명분보다는 가라는 공동체 자체의 영속을 더욱 중 요시한다.
요약하자면, 동아시아 각국의 기업 경영방식은 흔히 가족주의로 통칭되 지만, 이 나라들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서로 다르며 각 국가의 가족에 대한 인식과 가족제도의 차이를 일정한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 . 조직문화
동아시아 3국간의 문화적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아마
93김성철, “한국 기업과 가족주의: 한국인의 가족에 대한 인식과 기업경영에의 적 용,” pp. 255-56.
도 현대적 조직 내의 인간관계와 관련된 역학일 것이다. 이 나라들이 전 통적으로 유교적 윤리관을 공유했던 사회들이라는 인식 때문에 이들 사 회에서 조직 내 인간관계의 역학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 기 쉽다.94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구체적인 문화적 실천에서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사회적 격변 과정에 서 그 문화들 역시 상이한 방향을 따라 변화해 왔다.
한국과 일본은 강력한 가부장제 가족문화의 모델 위에서 상하 위계가 확실한 조직체계를 발전시켰다. 우두머리가 중심이 되어 집단 구성원들에 대한 개인적 온정주의를 수단으로 집단에 대한 귀속감과 충성을 요구하 는 동시에 상하의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조직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 조직은 도조쿠와 같은 친족조직의 특성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사회에서는 친족적 관계를 비친족적 관계에까지 확 대해서 적용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도조쿠의 특징인 위계적 조직, 지도자와 추종자간의 기능적 미분화 및 특수주의적 관계, 비호 및 원조와 충성 및 봉사, 은(恩)과 은을 갚는다는 의식 등은 얼마 전까지도 건설이나 광산, 부두 노동자 조직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회사는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나 작업지시를 노무집단의 우두머리인 오야가타(親方)를 통해서 하 며 노동계약의 내용 등도 오야가타와 협의한다. 노동자가 오야가타의 허 락 없이 집단을 떠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왜냐하 면 회사는 오야가타와 일종의 신사협정 같은 것을 맺고 있어서 오야가타 를 거치지 않는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오야가타 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며 결과적으 로 상하 위계질서가 확실한 조직문화가 형성된다.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노사간에 계약적․법적 성격보다 특수한 개별
94예를 들어, 한국과 중국은 서구문화가 비교의 준거점이 되기 때문에 서구적 개인 주의와 대조되는 집단주의 문화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최윤희․김숙현, 1997.
참고), 1저맥락문화(low-context culture)보다는 고맥락문화(high-context culture)
적 관계가 강력하였으며 대기업의 경우에도 적어도 이데올로기적으로 는 이러한 의식이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흔히 경영자의 온정주의
(managerial paternalism)라고 하는 이러한 이상은, 회사가 전통적인 이
에의 역할을 대신하여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기대하며 이에 대한 반대급 부로 종업원 개인 및 그 가족을 챙겨주고 책임져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온정주의와 가족주의는 종업원의 충성심과 안정적인 노사관계 의 유지에 매우 유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일본 경제의 성장을 설명하는 문화적 요인으로도 강조되어 왔다. 소위 일본적 경영의 내용인 기업별 노조, 연공서열, 종신고용은 그러한 가족주의적 온정주의의 근대 적 표현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온정주의와 가족주의는 국가의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의 미비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강력한 산업별 노조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경영자와 기업별 노조간의 타협 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회사나 정부 같은 조직의 내부에서도 소집단이 매우 중요하다. 대개
‘과(課)’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일본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과’가 기본적인
일의 단위이며, 일의 배분이나 책임의 한계, 업적이나 능력 평가 등도 과 를 단위로 하고 있고 권한도 과장에게 위임되어 있다. 과장은 부하직원에 대한 감독적 기능과 함께 온정적 배려에 의한 인간관계가 강조되며 마치 이에의 가장과도 같은 온정주의가 기대되고 있다.
이렇게 소집단인 과가 중요하므로 과를 단위로 한 구성원과의 화합과 연대의식은 ‘과’의 구성원들은 ‘과’에 대한 충성을 다른 모든 집단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할 것이 요구되며 과원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다른 모든 아이덴티티에 비하여 강조된다. 이는 특히 자기가 소속된 ‘과’가 다른 집 단과 경쟁이나 갈등 관계에 들어가게 될 경우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자동차 노동자는 자동차 노동자라는 아이덴티티보다 도 요타나 닛산의 직원이라는 의식을 가질 것이 기대되며, 회사나 관청에서 의 경쟁이나 갈등에 따른 균열은 수평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소속 집단에 따라 상하가 결합하면서 수직적으로 일어나게 된다.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