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맺음말을 대신하여
이상에서 豆油를 짜고 남은 부산물인 豆餠이 명말청초의 강남경제 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살폈다. 이와 같이 두병의 영향력 이 컸다는 것은 그 필요성이 증대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두 유생산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豆油의 용도가 다양해지면 서 각종 음식물을 튀기고 볶아서 가공하고 조리하는 문화에 영향을 주 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요리에서 식용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두유의 생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녔음을 의미한다.
豆餠의 量이 확대된 것은 우선 豆油생산과 관련된다. 두병은 초기에 는 식품으로도 이용되었지만, 주로 가축의 飼料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두유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과정 속에서 이것이 식물의 작용을 활성화 시킨다는 교훈을 얻게 되면서 작물의 肥料나 肥力을 높이는 용도로까 지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두유를 짜고 남은 찌꺼기까지 자원 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糞尿와 마찬가지이다. 이는 모든 자연의 부산물 은 다시 자연의 자원으로 되돌려준다는 三才觀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130)
두병이 명말청초에 강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용된 것은 사회경제 적인 여건이 성숙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豆餠은 기존의 밑거름과는 달리 작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速效性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덧 거름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특히 강남지역의 경우 水田의 발달과 더불 어 잠상업이 발달했으며, 그 외에도 水旱田에서 다양한 상업작물을 재 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밑거름으로 가장 손쉽게 획득할 수 있는 비 료는 바로 逐月事宜 에서 보이는 강가의 罱泥나 퇴비였었다. 그리고 덧거름으로는 당송대 이후부터 분뇨가 많이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명 130) 최덕경, 東아시아 糞尿시비의 전통과 生態農業의 屈折: 糞尿의 衛生과 寄生
蟲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35, 한국역사민속학회, 2011), pp.258-264.
말청초가 되어 고용노동자의 怠業과 노동조건이 까다로워지면서 노동 력의 확보와 이용이 곤란해져 인력을 동원한 비료생산이 결코 용이하 지 않았다. 게다가 磨路같은 퇴비나 糞尿 등은 제조 및 腐熟과정에 시 간이 많이 소요되고, 외부에서 구입할 때도 취급하기 불편할 뿐만 아 니라 많은 운송비와 인력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직접 水旱田에 시비할 때도 적지 않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경제적 여건이 변하게 되었고, 더 이상 기존과 같이 많은 노동력을 투자하여 踏糞을 생산하거나 외지에서 분뇨를 입수하기가 쉽지 않아 비료에 대한 인식 이 바뀐 듯하다. 병비가 짧은 시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러 한 여건변화를 효율적으로 수용하면서 생산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런 점에서 豆餠은 명말청초 사회경제의 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두병은 화북의 산동, 하남 및 강소성 등지에서 가축의 사료나 棉田의 비료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강남지역에 면화재배가 확대되고, 水田과 잠상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두병이 점차 강남지역으로까지 유입 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豆餠은 우선 부피가 작고 가벼우며, 냄새가 없어 수송이나 취급이 편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소성분이 많아 肥 效性이 높아 적은 양을 시비하고도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보관하기도 간편하였다. 이런 점에서 두병은 변화하는 강남지역 농촌의 비료로 적 합하였다. 그 결과 현금을 지불하고서라도 비료를 구입하였던 것이다.
특히 豆餠은 물기가 많은 토지의 온도를 높여 작물의 생장을 촉진 했기 때문에, 水田은 물론이고 각종 蓮, 芡 등의 습지작물이나 사탕수 수의 재배에도 효과적이었다. 때문에 비록 다른 지역에 가서 화폐로 구입할지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손해 보는 것은 아니었다. 餠肥 는 작물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면서 많은 水․旱田작물의 基肥와 追肥 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명대 중기이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 다.
四時纂要
에서 보이듯 唐宋代에는 추비로 분뇨가 주로 이용되었 으나 명청시대가 되면서 두병이 새롭게 등장했던 것이다.이처럼 명대 중기이후 金肥가 현실화된 것은 무엇보다 江南지역의
개발로 인한 水田의 확대와 잠상업의 발달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 리고 당시 인구증가로 인해 토지 보유면적은 10畝 단위로 줄어들었지 만,131) 다양한 상품작물에 눈을 돌리면서 강남지역에 알맞은 속효성 追肥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효율적으로 대신한 것이 바로 豆餠이었던 것이다.
豆餠의 용도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豆油생산지였던 산동, 강소 등지 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淸初부터는 滿洲지역의 두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淸 중기 海禁令이 풀리면서 본격적으로 沙船을 이용하여 만주지역에서 생산된 두병을 강남지역으로 운송하였다. 이것 은 강남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두병의 용도가 다양해지고 그 수 요 또한 증대되면서 만주지역에서 생산된 두병이 자연스럽게 강남지역 으로 수입된 것이다.
사실 淸初까지 豆餠은 豆油의 생산지인 山東, 河南 또는 江蘇, 安徽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이는 木棉의 비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산 동지역의 경우, 搾油業의 발전과 함께 花生의 광범위한 재배가 이루어 져, 豆油와 花生油를 대량으로 外省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남지 역에서는 점차 목면의 재배가 활발해지면서 착유의 부산물인 豆餠에 주목하고,132) 두병을 수입하게 된 것이다.133)
처음 만주의 豆油도 산동의 移民에 의해 제조되었다는 견해가 있었 다. 이것은 만주의 두병이 山東人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 다.134) 그런데 만주에서 豆餠이 언제부터 제조되었는지가 분명하지 않 다. 또 만주의 두병이 海運을 통해 강남으로 유입된 역사를 살펴보자 면 매우 복잡한데, 이것은 加藤繁의 연구에서 이미 자세하게 밝히고
131) 沈氏農書 運田地法 第16段, p.67, “凡人家種田十畝,須下秧十三畝.”; 補 農書校釋 總論 第6段, p.148. “吾里田地,上農夫一人止能治十畝.”; 補農書校 釋 總論 第7段, p.151, “且如匹夫匹婦,男治田地可十畝.”
132) 李慧, 論淸代山東農副産品的外銷 (2012), pp.11-12.
133) 加藤繁, 滿洲に於ける大豆豆餠生産の由來に就いて (支那經濟史考證(下), 1953), pp.696-697.
134) 加藤繁, 滿洲に於ける大豆豆餠生産の由來に就いて , p.698.
있다.135)
淸初 만주의 關內外의 무역은 육로와 해로의 두 노선이 있었다. 육 로는 대부분 山海關을 거치고, 해로는 牛莊을 중심으로 요동반도의 각 항구를 거치는데, 이중에서도 해로무역이 아주 왕성했다. 그러나 康熙 원년(1662) 遷界令이 선포되면서 해로무역은 기본적으로 중단되었 다.136) 때문에 해금령이 해제되기까지 강남지역 두병은 주로 산동, 강 소 등지에서 대운하를 통해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137)
상해를 중심으로 沙船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강희 23년 해금령이 해제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건륭 12년에 山東의 凶荒을 구제하기 위 해 봉천의 쌀로서 구제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을 보면 만주의 곡물 移出이 아직 용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건륭 14년 이 되면 盛京將軍 阿蘭太의 주청에 의해, 이전에 육로 반출만 허락했 던 米, 豆를 각 州縣에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러 海口에 입항한 상선이 回航할 때가 되면, 大船은 황두 200석을, 小船은 황두 100석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확대하였다.138) 그리고 건륭 37년에는 황두, 豆餠 각 1石마다 稅銀 1分 1厘를 과세하는 것으로 이 제한마저 철폐되었다.
이에 따라 商船은 자유롭게 黃豆, 豆餠을 販運할 수 있게 되면서 공물 해상이출의 금지는 저절로 해소되었다.139) 그 결과 乾嘉 때에는 上海, 乍浦의 두 항구에 5천여척의 선박이 정박하고, 소주의 船廠에는 해마 다 천여 척이 건조되었다고140) 한다.
당시 만주에서의 移出品은 黃豆, 豆餠, 芝麻, 江米 이외에 棉花, 麻 類, 山繭, 山紬, 襍糧 등이고, 移入品은 緞子, 紬子, 白布, 茶葉, 砂糖과 135) 加藤繁, 康熙乾隆時代に於ける滿洲と支那本土の通商について (支那經濟
史考證(下), 1953).
136) 山海關榷政便覽 卷4.
137) 閔耕俊, 淸代 江南沙船의 北洋貿易 (明淸史硏究 17, 2002), pp.144-148.
138) 加藤繁, 앞의 논문, 康熙乾隆時代に於ける滿洲と支那本土の通商について , pp.597-600.
139) 加藤繁, 앞의 논문, 滿洲に於ける大豆豆餠生産の由來に就いて , p.602.
140) 山口迪子, 淸代の漕運と船商 (東洋史硏究 17-2, 1958); 衣保中, 中國東 北農業史 (吉林文史出版社, 1995), p.259.
다수의 藥品 잡질류였다.141) 하지만 南貨의 경우 배가 비어있는 경우 가 많았고, 건륭 말 이후 북쪽에서 남쪽으로 회항하는 배에는 關東의 黃豆, 豆餠이 大宗을 이루었다는 것은 沙船 운행의 목적이 바로 豆餠 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42)
이 두병이 청초 이후 강남지역에 유입되면서 가축의 사료와 각종 농작물의 비료로 활용되어 부업생산과 농업생산력의 제고에 큰 작용을 했었다. 그 후 20세기까지 東北지역의 대두와 두병은 江浙, 閩廣지역을 넘어 한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에까지 수출되어 東아시아 자본주의 형 성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143)
141) 加藤繁, 위의 논문, 康熙乾隆時代に於ける滿洲と支那本土の通商について , p.613.
142) 籌辦夷務始末 同治朝 (1930) 卷7, p.50; 衣保中, 앞의 책, 中國東北農業史
, p.260.
143) 鄧亦兵, 淸代前期全國商貿罔絡形成 (浙江學刊 2010-4), pp.23-24.; 堀和 生, 東アジア資本主義史論(Ⅰ․Ⅱ) (ミネヴァ書房,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