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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중국의 한반도 정책과 비핵화

허만(Hermann)은 “외교 정책은 권위 있는 정책 입안자(또는 대표 자)가 대외적으로 시행하는 목표 지향적이고 문제 지향적인 프로그

램”으로 정의한다.4) 즉, 외교정책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대외 행동을

수반하는 일정한 목표 추구의 프로그램(계획)이며, 따라서 외교정책 은 그 나라의 국가이익, 외교정책 목표와 원칙 등을 통해 표현된다.

외교정책 목표와 원칙은 지도자들이 국가이익 실현과 관련된 정책 의 큰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5)

한편,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미‧일‧중‧러 4강의 영향력이 중첩 되는 곳으로 중국의 안보이익에 중요한 곳이며, 동시에 남북한 사이 에 군사적 갈등 상황이 지속되는 지역이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평화적 국제환경 조성”이라는 상위의 외교정책 목표에 의해 결정되

며, 한반도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 한반도의 비 핵화, 중국의 대한반도 영향력 유지 및 확대” 등을 들 수 있다.6) 이 러한 한반도 정책은 시기에 따라 변화, 조정되었고, 특히 북핵 위기 가 발생하면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유지’와 ‘한반도 비핵화’ 혹은

‘한반도에서 영향력 유지와 확대’라는 목표 사이에 갈등이 생겨났다.

4) Charles F. Hermann, “Changing Course: When Governments Choose to Redirect Foreign Policy,”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1990), p. 34.

5) 외교정책 기조란 외교정책 혹은 정책 행동의 주된 흐름이나 방향을 말한다. 외교정책 원칙은 정책 행동이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말하며, 외교정 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이전 단계에서 외교행위 전반에 걸친 방향, 구체적 내용과 실천적 전략, 전술을 국가차원에서 대내외적으로 공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치영,

󰡔중국외교정책론󰡕(서울: 도서출판 골드, 2004), p. 17.

6) 허문영‧유동원‧심승우, 󰡔북방삼각관계의 변화와 지속: 북한의 균형화 전략을 중심으로󰡕

(서울: 통일연구원, 2012), p. 92.

먼저, 탈냉전 시기 중국 정부는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 전면적 소 강사회를 실현하는 데 유리한 외부환경 조성을 위해서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지역질서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것을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경제발전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중 국은 한반도의 불안정이 중국 주도의 질서 형성에 부담을 주며, 중 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 라서 한반도의 불안정을 가져오는 북한의 긴장고조(핵무기와 미사 일 개발 등을 포함한 군사적 도발) 행위는 중국의 발전이익을 저해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또한 국제사회의 과도한 대북 강압조치도 중국의 안보이익을 침 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인식된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은 북한체제의 불안정을 예방하고자 하며, 북한체제의 붕괴보다 존속을 지지한다.

북한의 붕괴와 한반도의 급속한 통일은 전략적 자산을 상실하게 됨 을 우려하기 때문이다.7)

둘째, 한반도 비핵화는 최우선 정책목표인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유지를 위해서 준수되어야 하는 목표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지역 국가들의 핵을 포함한 군사력 증강의 구실로 작용하고 북미 관계를 악화시켜, 한반도와 동북아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8) 북핵 개발로 인한 동북아정세의 불안정과 군비증강은 중국에게 안보 민 감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은 북핵 문제의 대화(중국 주도의 6자회담 구도)를 통 한 평화적 해결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무력 등 강제적 수단 을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이 오히려 사태를 보다 악화시킬 수 있다고

7) 나영주, “중국 시진핑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핵문제,” 󰡔민족연구󰡕, 65권 1호 (2016), p. 71.

8) 신상진, “중국의 북핵 6자회담 전략: 중재역할을 통한 영향력 증대,” 󰡔국가전략󰡕, 제11 권 2호 (2005), pp. 36~37.

생각하기 때문에,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북핵 문제에서 미국이 유엔 안보리를 통해 북한에 대해 군사적‧ 경제적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중국이 발휘할 수 있는 외교적 역할 은 크게 제약받게 된다. 경제건설을 위한 대미 관계 안정과 중국 안 보의 완충지대로 북한에 대한 배려 사이에서 중국은 선택의 귀로에 처할 수 있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 와 안정유지에도 도움이 되고, 북핵 문제 해결과정에서 중국의 영향 력을 발휘하는 데에도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10)

셋째,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유지 및 강화를 위해 중국은 남북한과 균형외교를 추구하면서 지역적 차원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자국의 영향력에 놓여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한 구도일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 자신 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중국의 대북 영향력의 확대는 북중 간의 신뢰를 증진하는 것이며 북한과의 전략적 소통을 통해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경제지원은 대북 영향력 확대 측면에서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북한을 대상 으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북한을 압박할 수 있다. 중국은 북 한을 통해 미국 견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외교안보적 완충지대 로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아직 유효한 것으로 판단하며, 중장기적 으로 북한과는 정상국가 간 관계, 한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를 지향한다.

9) 2006년 제1차 북핵 실험 직후, 중국 외교부는 북핵 3원칙으로 “한반도 비핵화, 한반도 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유지 그리고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통해 협상과 대화로 해결”을 제시하였다. “刘建超: 六方会谈仍是解決朝核问题的有效途徑,” 󰡔人民日報󰡕, 2006.10.10.

10) 신상진, “중국의 북핵 6자회담 전략: 중재역할을 통한 영향력 증대,” pp. 36~37.

나. 중국의 입장과 역할변화

(1) 1차 북핵 위기와 중국의 역할: 방관자

북한은 1974년 국제원자력기구(Interational Atomic Energy Agency: 이하 IAEA), 1985년 「핵확산방지조약(Nonproliferation Tratey: 이하 NPT)」에 가입하였다. 이후 1992년 1월 「핵안전조치 협정(Safeguard Agreement)」에 서명한 후, IAEA 사찰을 받는 과 정에서 북한의 핵개발의혹이 부각되었다. 이에 북한은 특별사찰을 요구받게 되자, ‘부당한 주권 침해’라고 반발하면서 1993년 NPT 탈 퇴를 선언함에 따라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1992년 IAEA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특별 사찰을 받 을 것을 북한에게 요구하였다. 사찰은 1992년부터 6번에 걸쳐서 이 루어졌으나, 1992년 7월 사찰 보고서에 기술된 것과 실제 플루토늄 의 양이 상이한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북한이 미신고 시설 사찰 을 거부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됐다. 그러던 중 1993년 3월 에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자 북한은 1993년 3월, NPT 탈퇴 선언을 하였다.11)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이 5월 11일 IAEA 사찰을 받을 것과 NPT 탈퇴를 취소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북미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긴장완화를 위해 6월 2~11일 뉴욕에서 처음으로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이에 대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한 미국 정 부의 단호하고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면서,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을 하게 되면 곧바로 일본 의 재무장을 초래하여 지역 안정과 평화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하 였다.12)

11) 󰡔연합뉴스󰡕, 1993.3.13.

클린턴은 “북한이 핵을 개발해 사용하려 한다면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다”라며 강력 경고했다.13) 미국은 북한 핵시설에 대한 타격 계

획을 수립하고 추진했으나 전쟁 시 돌아올 막대한 미국의 피해로 인 해 이를 중지하였다.14) 결국 위기는 김일성-카터 회담에서 해결된 다. 회담에서 북한은 미국의 군사공격 중지와 경수로 지원 조건과 북한 핵동결, NPT 복귀와 IAEA 사찰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협상 타 결을 약속하였다.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에서 북미 「기본합의서 (Agreed Framework)」를 채택하고,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면, 이 에 대해 미국이 경제적 보상과 대북한 안전 보장을 제공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와 남북대화의 지속 추진을 약속함으로써 제1차 북핵 위 기는 종결되었다.

1993년 3월부터 시작된 1차 북핵 위기는 한중수교 이후 새롭게 정 립되는 북중 관계를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고, 중국외교에 새로운 과 제를 부여하였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표명하면서도 북핵 문제는 무력사용과 경제 제재와 같은 강제적인 수단보다는 북미 간 직접 대화와 같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하였 다. 따라서 제1차 북핵 위기에 대해 중국은 사실상 ‘방관자’로서의 역할과 입장을 추구하여, 북핵 문제를 북미 당사자 간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당시 중국 은 북미 간 적극적 중재 노력을 하기보다 서방의 대북압박과 제재에 대해 반대 입장을 천명하면서 주변정세 안정에 유리한 조치를 취하 는 소극적 행보를 보였다.

12) “미국 클린턴 대통령, 북한의 핵개발 강력 경고,” 󰡔MBC󰡕, 1993.7.3.

13) “클린턴 대통령 북한 핵개발 경고 발언,” 󰡔MBC󰡕, 1993.7.10.

14) 실제로 1994년 9월,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2척과 함정 33척이 원산 인근 동해에 집결해 북한을 압박했다. 핵시설 타격중지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클린턴 회 고록에 언급된 94년 영변폭격 중단배경,” 󰡔연합뉴스󰡕, 200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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