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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人의 南洋 移住와 近代 東南亞의 中國系 美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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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人의 南洋 移住와 近代 東南亞의 中國系 美術 *

1)

姜 熺 靜 (西江大)

Ⅰ. 서 언

Ⅱ. ‘남양’으로 간 중국계 이주민

Ⅲ. 페라나칸 문화 속 중국 전통

Ⅳ. 20세기 新移住 중국인의 시선과 ‘남양’ 이미지

Ⅴ. 맺음말

Ⅰ. 서 언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하여 세계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올 정도로 1970년대 이후 가속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단지 중국 만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부상과 급격한 경제발전 의 이면에는 중국이 개방을 하기 전부터 시작된 華僑자본의 유입이 있 었다. 그 중에는 대만과 동남아 화교들의 투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 한다.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을 지니고 있었던 화교들 의 경제력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은 것은 자명하다. 이들이 21세기 의 아시아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경제력을 가진 세력으로 성장한 것 은 중국 특유의 사회와 문화가 기반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 국 이외의 지역에서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화교들의 노력이 컸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4%밖에 되지 않는 중국계 인구

*이 연구는 2011 서강대학교 교내연구비(SRF-201114002.01) 지원에 의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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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도네시아 경제의 80%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화교, 혹은 華人 은 어떻게 동남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다지고, 경제적 성장을 거듭해 왔을까?1) 동남아에 뿌리를 내린 화인들의 역사적 궤적은 정치, 경제, 사회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어왔지만 미술에서의 접근은 거의 이 뤄지지 않았다.2)

본 연구는 정화의 원정 이후 지속되어온 중국인들의 남양, 즉 동남 아시아로의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남양 이미지 와 중국적 정체성이 표현된 미술을 통해 그 현재적 의미를 밝히려는 데 목적이 있다. 흔히 화교로 알려진 국외 거주 중국인들의 이주는 기 본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목적을 둔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이주라고 알려졌다.3) 그들은 공고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들 의 이주민 사회를 지키고, 스스로 결속을 강화했으며, 전통적인 방식으 로 이뤄지는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때로 는 배타적이고, 때로는 적절한 타협의 방법을 통해 현지에 정착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중국과는 삶의 여건과 방식이 전혀 다 른 동남아시아에 대한 일련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미지는 현 실적인 인식에 기초를 했으면서도 때로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그들의 의식을 투영한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명확하 게 드러나지 않는 ‘문명’의 고향 중국과 열대지방에 대한 폄하 의식이 포함되어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의 전제는 ‘近代’이다. 즉, 문명과 야만은 각각 근대와 전근대에 대비되는 것이다. 이때의 ‘近代 性’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이며, 자신들의 시대가 지나온 시간과 1) 화교라는 말 자체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화인 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도 이를 따라 화 인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한다.

2) 하다 제시카, ‘南洋風’ 싱가포르 근대미술의 시점 (미술사논단25, 2007 하 반기), pp.287-318과 그의 관련 연구, 일본에서의 전시가 비교적 근래에 이뤄진 것이다.

3) 화교와 화인, 해외 거주 중국인의 개념과 정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참조. 신 윤환, 인도네시아의 화교와 화교자본: 수하르또 집권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지역연구2권 4호, 1993. 겨울), p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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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적으로 다른 더 나은 것이란 의미이다.4) 그런데 동남아시아에 거 주했던 중국인들, 아니 화인들은 스스로 ‘근대성’을 지녔다거나 ‘문명’

이라고 자처한 흔적도 별로 없으며 제국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력한 중국 대륙 문화, 지식인의 磁氣場 아래 있었 고, 중화주의로 인한 우월감과 동남아 현지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전통 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본고에서는 19-20세기 전반기 동남아시 아 현지의 중국계 미술에 드러나는 현지인이면서 동시에 외지인이었던 화인들의 문화를 살펴보려 한다.

Ⅱ. ‘남양’으로 간 중국계 이주민

전통적으로 중국 사회는 동남아를 어떻게 구분하고 인식했는가?

1960년대까지 중국인들은 ‘동남아’를 넓은 의미에서 ‘南洋’으로 호칭하 고 싱가포르, 말레이 일대를 좁은 의미의 ‘南洋’으로 불렀다.5)

宋書

에도 나오는 南蠻, 蠻夷, 西南夷 등과 연계된 중국인의 기존 남양 관념 은 동양, 서양의 구분과 함께 점차 정교해졌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용 어 자체는 근대의 발명이 아니라고 알려졌다. 가령 명대에도 동양과 서양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람, 즉 몬순의 방향과 관계있다는 지적은 흥미롭다. 중국사람이 호칭한 것은 아니지만, 말레 이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말레이반도를 기준으로 그 서쪽을 風上, 동쪽 을 風下라고 불렀고, 이와 반대로 인도를 오가던 페르시아의 항해자들 이 인도 동남해안 동쪽을 風下, 서쪽을 風上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동·서양의 구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6) 오늘날 통용되는 동양, 서양

4) 박지향,일그러진 근대(푸른 역사, 2003), pp.27-32.

5) 王雲五,南洋華僑(上海: 商務印書館, 1993), pp.287-289.

6) 高桑駒吉, 赤土國考 (史學雜誌31; 宮崎市定, 南洋を東西洋をに分につ根 據に就いて ,東洋史硏究第七卷 第四號 (1942), pp.1-2 재인용). 宮崎市定은 이와 관련되는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면서 중국 정사 외국전에 나오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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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개념과 전혀 다르지만 바람의 위, 아래라는 말로 지리적 구분을 하 고 있었다는 점은 그만큼 계절풍에 의지한 항해가 중요했기 때문일 것 이다. 풍상, 풍하, 남양, 남만 어떤 이름으로 불렀든지 지리적 구획은 점차 오늘날의 동남아시아를 한정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정화(1371-1433)의 원정(1405-1433) 이후 활발해진 중국인들의 동남 아 이주는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15세 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많은 중국인들이 광뚱(廣東), 창조우(漳州), 취앤조우(泉州) 등지에서 수마트라의 팔렘방(Palembang)으로 이주해서 공동체를 이뤘다고 한다.7) 또 명청교체기를 거치면서 명의 遺民들이 접경지대인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대거 이주했는데 하티엔(Hatien)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海南 출신이었다.8) 특히 청조가 들어선 이후에는 만주족의 변발령에 반발하여 대규모의 집단 이주가 이뤄졌다고 한다.9) 중국인들의 이주는 1619년 네덜란드가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에 바타비아를 세움에 따라 팔렘방에서 바타비아 쪽으로 방향을 바꿨 고, 일거리를 찾아간 이주자들은 대개 목수, 은세공기술자, 벽돌공과 같은 기술자들이었다.

중국에서 동남아로 진출한 화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일찍이 15-16세기부터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으로 이주한 중국 이민자 들과 그들의 후예, 그리고 19세기에 대거 이주한 중국인 집단이다. 19

을 들어 이와 같은 방위와 지리적 범주의 구분은 남북조시대까지도 거슬러 올 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피력했다. 실제로 필자가 확인한 바로 중국정사 외국 전에 동양, 서양, 남양의 용어들이 나오지만 오늘날과는 그 쓰임새가 달랐다.

7) 피터 리, 사룽과 케바야, 페라나칸의 패션과 정체성에 보이는 혼합성의 스펙 트럼, 1600-1950년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 국립중앙박물관, 2013), p.167. 여기서는 중국인 이슬람교도인 馬歡(1380-1460)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 했다.

8) 조흥국, 캄보디아 화인사회의 형성과 발전 ,국제지역연구제3권 제1호 (1999), pp.109-110.

9) 王介南撰,中國與東南亞文化交流志(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998), p.277. 1679 년의 楊彦迪을 비롯한 명의 장졸들이 베트남으로 이주한 일 등을 예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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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중엽까지는 교통 여건이 좋지 않고, 위험했기 때문에 중국인의 이주에 제약이 있었다. 이주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부 복건, 광주 출신 으로, 자바와 말라카 해협 일대에서 현지의 토착원주민 여성들과 결혼 하고 자리를 잡았다. 초기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중국인은 대부분 남성 이었고, 이와 같은 경향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의 대량 이주가 시작 되기 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현지 여성과 결혼한 것은 당연했 다.10) 바타비아에 이주한 중국인 남성들은 발리나 술라웨시, 이리안자 야, 혹은 미얀마에서 팔려온 노예 출신 부인을 두었다.11) 제국주의가 본격화함에 따라 중국인 공동체와 식민본국과의 협상을 비롯한 다양한 일처리를 위해 현지 중국인공동체의 대표에 해당하는 카피탄(kapitan) 을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몇몇 카피탄 관련 기록에 그들 의 부인이 발리나 술라웨시 출신 노예이거나 그 지역에서 중국인의 집 으로 입양된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12) 여성노예를 사서 해방시키 고, 중국인 이름을 붙여 결혼했던 것이다.

이처럼 결혼의 방식을 통해 현지에 정착한 사람과 그들의 후예를 페라나칸이라고 부른다.13) 원래 페라나칸은 말레이어로 “후손(현지에

10) 1682년 바타비아 거주 중국여성은 20명이 넘지 않았고, 1699년 중국여성이 바타비아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러 항구에 몰려 들었다는 일화는 동남아에서 중국 여성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피터 리, 앞의 글, p.169.

11) 당시 노예제도는 현지 관습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중국남성들은 이 가 운데 해방시킨 여성 노예와 결혼하고 이들에게 중국인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리, 앞의 글, pp.167-168.

12) 초기의 유명한 카피탄 벤콘(Bencon)의 부인 냐이 인쿠아(Nyai Inqua)는 발리 출신이고 발리에서 두 명의 딸을 입양하여 중국 이름을 붙여주었고, 또 다른 카피탄 顔二의 부인도 발리 출신으로 남편의 사후 카피탄 자리를 물려받았다.

피터 리, 앞의 글, pp.167-169.

13) 이들은 각각 필리핀에서는 메스티조(Mestizo),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민 후옹(Minh-Huong), 동인도에서는 페라나칸(peranakan), 말레이시아에서는 바 바(baba) 등으로 불린다. 현지 이주 외국인의 원래 출신 지역에 따라 중국계인 시나(Cina), 티옹호아(Tionghoa), 네덜란드계인 벨란다(Belanda), 일본계인 제 팡(Jepang) 등으로 불린다. 인도 힌두계 페라나칸(Indian Hindu Peranakans

=Chitty)과 역시 자위 페칸(Jawi Pekan)이라 불리는 인도 무슬림 페라나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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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태어난)”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지 역적으로 동남아와 붙어있는 중국계 이주민과 그 후예들이다. 따라서 페라나칸은 마치 중국계 혼혈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인들은 현지에서 출생한 이들을 土生華人이라고 부른다.14) 1991년을 기준으로 중국계 페라나칸과 화인들을 합친 인구로 보면 베 트남에 111만 6천명, 미얀마 49만명, 말레이시아 500만명, 인도네시아 600만명, 싱가포르 200만, 태국 645만명이라는 통계가 있다.15) 인도네 시아와 말레이지아에서는 중국계 페라나칸을 바바-뇨냐(Baba- Nyonya)라고 부르며, 말라카에서는 뇨냐-바바(Nyonya-Baba)라고 하 기도 한다.16) 이는 특히 말라야와 네덜란드령 자바 등에서 쓰이는 말 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러 세대에 걸쳐 말라카 해협에 거주하 면서 토착 여성과 결혼하고 교역에 종사하면서 영국인과 토착민, 중국 인과 토착민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나갔다. 중국계 페라나칸은 중국인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현지에 적 응하여 토착 생활을 하는 방식을 따랐으며 일반적으로 중국어와 원주 민어를 사용하거나, 뒤에는 영어와 중국어를 하는 이중 언어능력을 갖 췄다.17)

또 다른 부류는 영국이 중국인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식민지로 끌 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19세기에 이뤄진 대량이민 대열에 합류한 중 (Indian Muslim Peranakans)도 있다. 동남아로 간 중국인들에 대한 간략한 안 내는 王介南撰, 위의 책, pp. 276-280. 저자는 명대 중국인들의 이주로 형성된 중국인 마을의 가구 수가 천여 가구에서 수천 가구까지 이른다고 했다.

14) http://zh.wikipedia.org/wiki/%E5%9C%9F%E7%94%9F%E8%8F%AF%E4%B A%BA 참고.

15) 秦欽峙 等編著,東南亞十國槪覽(雲南人民出版社, 1992), p.356.

16) Baba-Nyonya는 특히 말라카, 페낭, 인도네시아에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 공 동체를 지칭하는 말로서 중국계 페라나칸 중의 하위그룹으로 볼 수 있다. 바바 는 외국 신사를 호칭하는 인도 어원의 말이고, 뇨냐는 외국 출신 기혼여성을 일컫는 말로 포르투갈어 도나(dona)에서 왔다고 추측된다. 피터 리, 앞의 글, p.173.

17) 그러나 싱가포르의 경우 독립 이후, 학교에서 보통화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말레이어는 대부분 잊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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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인이다. 영국과 함께 네덜란드,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확장되고 이들 이 점유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그들의 뒤를 따라 중국인들의 대규모 이주가 이어졌다.18) 물론 여기에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으 면서 악화일로를 겪고 있었던 청의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이 내적 요 인으로 작용했다. 대량이주는 교통 및 운송수단의 발달로 가능해졌으 며, 대규모 이주가 늘어감에 따라 여성들의 이주도 늘어났다. 이에 따 라 자연스럽게 중국계 페라나칸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주민 공동체가 발달하게 됐다. 중국인 여성이주자들의 수는 19세기에 들어서야 조금 씩 늘어난다.19) 이때의 이주에서 중요한 지역은 싱가포르였다. 1826년 영국이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 반도에서 해협식민지를 건설하고 1832년 싱가포르가 그 수도가 된 이후,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중국으 로부터 급속한 이주가 이뤄졌다. 처음에는 페라나칸 공동체에서 이들 을 포용할 수 있었지만 이주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중국인 공동체와 페라나칸 공동체는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20)

이들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중국 본토의 정서와 문화, 정체 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1949년의 중국 공산 당 승리에 뒤이은 본토의 공산화, 공산주의의 확산을 두려워한 인도네 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반중국적 정책으로 인해 중국적 정체성 은 변화를 겪게 된다.21) 그 중에는 중국 문화가 강화된 측면도 있고, 중국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현지화에 박차를 가한 경우도 있다. 이들을 페라나칸으로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않 은 전세계 글로벌화에서 동남아시아 거주 중국계 공동체의 유지는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향은 이미

18) 박사명·박은경·신윤환·오명석·전경수·조흥국,동남아의 화인사회(전통과 현 대, 2000), pp.13-15.

19) 1837년의 기록에 의하면 해마다 싱가포르로 오는 5000-8000 명 중국인 중에 여성은 40-5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태희, 위의 글, p.152.

20) 이태희, 앞의 글, pp.158-160. 이들은 말레이어로 또똑(totok)이라고 하거나 중국어로 신커(新客)라고 불렸다.

21) 중국적 정체성의 약화는 신윤환, 앞의 글(1993), pp.9-12에서 지적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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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대전 전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22)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일시적인 일본점령기의 탄압, 독립 이후 신생국가의 중국계 국 민들에 대한 통제와 차별로 자신들의 과거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려는 의지도, 그럴 필요도 없어진 데 주요 원인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동남아 화인 사회 역사에서 예술이 그다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적어도 명대 이래 전통 적으로 문인화를 중시했고, 회화와 서예가 중국문화의 핵심요소 중 하 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가 동남아 이주의 주된 원인이었던 탓인지 중국인들의 이주 역사가 상당히 긴 편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이 남긴 순수미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분적으로 공동체의 모임과 교육을 위한 회관과 종교 적인 용도의 건축은 남아있지만 조각이나 회화는 상대적으로 그 수가 매우 적고 남은 작품들도 대부분 19세기 이후의 예들이다. 그러므로 대규모 이주가 이뤄진 19세기 이후에야 중국적인 전통이 엿보이는 그 림들이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히려 페라나칸 문화를 중국 문화의 연장에서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 다. 중국인들만으로 이뤄진 화인공동체와 현지인과의 결혼으로 성립된 중국계 페라나칸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의 성격은 다르지만 문화에 있어서 중국적인 요소는 공통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점이 이들의 내적 결속을 강화하는 기제로, 더 나아가 경제적 기반을 탄탄 하게 만들어 지속적인 동남아 사회의 경제적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Ⅲ. 페라나칸 문화 속 중국 전통

22) 재키 융, 페라나칸의 예술과 문화, 페라나칸 박물관의 역사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 국립중앙박물관, 2013), pp.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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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기에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중국인, 즉 화인들이 중국문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내부적 결속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는지는 그들의 생 활문화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했듯이 이는 회화 나 조각의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페라나칸의 문화 및 현지 회관을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는 대규모 이주로 인 해 19세기 이후 동남아시아로 건너간 화인들과 그 공동체를 중심으로 20세기 이후 그려진 그림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양자는 맥락 (context)을 달리 하는 것이고, 각기 다른 각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전자가 공동체의 유지 및 교육, 생활에 필요한 가구, 용품들을 중심으 로 만들어진 데 비해, 후자는 본격적인 회화로 분류되는 창작활동의 결과물이다. (단락 바꿈)

전근대의 이주민들은 복건성, 광동성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정서 적인 면에서나 문화의 취향 면에서나 중국 남부지방의 특성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발리를 비롯한 현지 출신 중국인 의 부인들은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와 중국 푸젠성을 드나들며 사업을 운영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사업체를 운영하며 부를 쌓았다.23) 그들이 획득한 부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물품 구입을 가능하게 하기도 했는 데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도 많았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겼던 것들 은 남편의 고향인 중국의 전통과 관습을 자기화시킨 것들이었다. 중국 계 페라나칸들은 공동체를 형성한 역사도 오래됐지만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여 이를 특별히 페라나칸 문화로 지칭된다.24) 이들은 중국은 물 론이고 네덜란드, 영국 등 동남아를 식민지배했던 제국주의 본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통해 현지에 적응했다. 플랜테이션과 교역을 통해 구축한 이들의 부는 아버지의 나라에 해당하는 중국의 취 향과 맞물려 매우 화려한 생활문화를 추구했다. 온갖 색채를 동원한 중국풍의 호화로운 복식에는 자수를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페라나칸 23) 피터 리, 앞의 글, pp.168-171.

24) 2013년 3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과 공동으로

<페라나칸 미술 특별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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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 은도금 머리장식, 19세기말, 싱가포르 국립박물관.

여자들이 입던 사롱 케바야는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유 행했는데 이는 원래 아랍풍의 복식이 동남아 현지에서 변형된 것이라 고 한다.25)

중국계 페라나칸 문화는 각종 의례를 통해 번성하고, 또한 의례용 미술을 만들어냈다. 이 의례에서 중요한 것은 혼례와 장례이다. 이 두 가지는 워낙이 보수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계 페라나칸 문화 에서도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혼례와 장례에 쓰이는 물건과 생활용품 인 장신구, 가구에서 중국 전통의 영향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 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강렬하고 대조적인 색의 사용, 불로장생의 기 원과 관련 있는 중국적인 소재의 채용, 도자와 가구의 활용이 포함된 다. 그러나 현지에 적응한 문화답게 중국인 특유의 붉은 색도 썼지만 그 못지 않게 핑크색이 많이 쓰인 점, 푸른 빛이 강한 비취색을 주조 색으로 쓴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정교한 세 공술이 발달했던 현지에서 만든 금은공예품도 적지 않다. 이처럼 중국 적인 성격이 강한 도자기류와 이슬람 문화요소를 갖춘 금속공예품들이 공존하는 것은 페라나칸 문화의 혼종성(hybrid)을 잘 보여준다.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 물관 소장의 신부 머리장 식은 기본틀을 면으로 만 들고 은에 도금한 후, 다 이아몬드와 각종 구슬, 벨 벳으로 호화롭게 꾸민 혼 례용 장신구로 일종의 족 두리이다(도1). 19세기말 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꽃 과 장식 도안들이 화려하

25) 피터 리, 앞의 글, pp.166-179. 케바야가 이슬람 술탄의 외투인 카바(Qaba)에 서 유래했다는 것은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국립중앙박물관, 2013),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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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침실 인테리어, 20세기초, 싱가포르 박물관.

<도2> 금제 장신구, 19세기말, 싱가포르 아시아문명박물관.

게 꾸며졌으며, 외형적으 로는 중국적인 특색을 지 녔으면서 동남아 현지의 토착공예기술이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꽃잎 끝부 분까지 살아있는 섬세한 세부 묘사, 금도금한 부분 과 은도금한 부분이 섞여 금은의 색이 적절하게 조 화를 이루고 있어 화려하 면서 정갈한 느낌을 동시

에 준다. 이보다 훨씬 화려한 금제 장신구도 페라나칸 문화의 호사스 러움을 잘 보여준다(도2).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중앙에 반원형의 루 비를 박아 포인트를 주었다. 제작은 위의 머리장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루비 둘레에 보석 상감을 하고 그 주위를 꽃잎 형태와 원 형 연주문으로 에워쌌다. 이러한 장식대로 문양을 구성하는 것은 금속 공예품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마치 눈을 도안화한 듯한 형상에 내부에는 주로 唐草文을 양각으로 새겨서 표면 전체를 메웠다. 중국적 이라기보다는 현지 이슬람의 공예품을 보는 듯 하지만 루비의 붉은 색 이 금색 바탕 위에서 더

욱 도드라져 보인다.

살짝 보랏빛이 도는 핑 크색과 푸른 빛이 강한 청록색 천으로 꾸며진 실 내장식은 페라나칸 미술 의 특징을 더 잘 보여준 다(도3). 침상 위의 목조 천개를 정교하게 조각하 여 장식하고 커튼처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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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늘어뜨린 것이나 아랫부분이 넓게 삼각을 이룬 장식띠는 중국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중간색에 해당하는 녹두색 침대커버와 핑 크톤의 장막, 청록색조의 벽면 장식천은 동남아 현지의 색감을 반영한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 쓰이는 색들은 선명도가 높고 색이 훨씬 선명 해서 색상들이 강한 대조를 이루는 경우가 많고 대비되는 색들을 통한 깊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침실 인테리어에 서 볼 수 있듯이 페라나칸 미술은 녹두색과 탁한 노란색과 같은 중간 색을 섞어서 핑크와 청록색의 강한 대비를 중화시키는 효과를 주는 게 특징이다. 여기서 즐겨쓰는 색들은 명도와 채도가 적당히 낮아서 화려 하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침상과 천개, 벽면의 장 식천, 장막, 침대보, 가구의 기본틀은 남부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 과 다르지 않다. 천개 표면을 벽돌처럼 직사각형으로 구획하고 민담, 고사 등의 다양한 내러티브(narrative)를 도식화하여 새겨넣거나, 장막 과 침대보 등에 모란, 당초문으로 수를 놓은 점, 벽면을 메운 청록색 천에 봉황, 기린 등 중국 전통의 상서로운 짐승을 수놓은 점은 분명 이 페라나칸 미술이 중국 문화에 잇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러나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천과 도자기의 색깔을 중간톤으로 써서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것은 현지화된 특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상서로운 동물을 주된 장식 소재로 쓰는 것은 상서로운 동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그대로 차용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중국계 페라나칸 문화의 정신적 지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전통의 일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자수로 만든 걸개이 다(도4). 작은 창이나 벽에 걸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이 자수제품은 맨 위에 막대를 넣을 수 있도록 가운데를 비우고 원통형의 긴 홈을 두 고 박았으며 위아래 2단으로 나누어 각각 수를 놓았다. 윗단에는 일렬 로 늘어선 8명의 사람이 있는데 이는 명대 이후 중국에서 유행한 팔선 도(八仙圖)로 보인다. 인물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도상의 특 징이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8선에 포함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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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삼성제단보, 20세기초, 페라나칸박물관.

는 인물도 지역마다 연 구자마다 다르게 보고 있으며 각 신선들의 지 물이나 자세 역시 조금 씩 다르다. 그렇기 때문 에 동남아시아에서 만들 고 사용되었기에 8선을 비정하기 어렵다고 말하 기는 무리가 있다. 팔선 은 주로 중국의 전설적 인 도교 선인들 8인을

묶어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팔선은 먼저 종리권(鍾離權)을 비롯하여 기행을 일삼았으나 후에는 병자들을 구해주는 역할을 맡게된 (이)철괴 ((李)鐵拐), 악공들의 수호신격인 한상자(韓湘子), 악극을 후원하는 조 국구(曺國舅), 당대의 도사였던 여동빈(呂洞賓), 노인들을 지켜주는 장 국로(張國老), 꽃꽃이의 선인 남채하(藍采何), 유일한 여성인 하선고(何 仙姑)를 가리킨다.26) 중국에서 여동빈은 칼과 채찍을 들고 있는 학자 풍으로 묘사되고, 진주조개가 주는 영생을 얻어 세상을 떠다니는 신선 이 됐다는 하선고는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여성으로 도 보기도 하고, 남성으로도 보기도 하는 남채하는 원래 꽃바구니를 들거나 이를 곁에 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자수 걸개에는 여 성이 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이 각각 남채하와 하선고로, 여기서 남채하는 여성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편 끝에 있는 여성이 하선고라고 생각된다. 왼편에서 네 번째 인물은 커다란 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호리병에 자기 영혼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철괴일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오른편에서 두 번째 인물이 대금과 같은 악기 26) 중국사학회 편, 강영매 옮김,중국역사박물관8 (범우사, 2004), p.52; 중국 사학회 편, 강영매 옮김,중국역사박물관9 (범우사, 2005), p.14; 정병모, (다할미디어, 2011), pp.288-29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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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 사슴무늬 제단보, 19세기말, 페라나칸박물관.

를 불고 있는 것을 보면 한상자인 듯하다. 실제 이러한 팔선 모티프는 페라나칸의 자수 제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 중요한 소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아랫단의 세 인물도 대표적인 도교의 신선으로 보인다. 원래 도교 3대 신선은 원시천존(元始天尊), 태상천존(太上天 尊), 영보천존(靈寶天尊)이지만 여기서는 그들이 한 화면에 묘사되었다 고 보기 어렵고 중국에서도 그런 예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도 교의 삼성(三星)을 좀 더 크게 나타냈을 뿐이라고 본다.27) 복록수(福祿 壽)의 삼성 가운데 왼편 첫 번째의 머리가 크고 하얀 수염이 가득한 인물은 조선시대 김명국의 그림으로 유명한 수노인(壽老人)에 비정할 수 있고, 관복을 입은 가운데 인물은 녹성(祿星), 그 옆의 인물은 복을 주는 복성(福星)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삼성과 팔선을 수 놓은 이 자수 걸개에는 도교적인 신상을 소재로 수명과 장수, 복을 비는 중국의 민 간신앙적 요소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예와는 달리 역시 명도와 채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바탕천에 몇 가지 되지 않는 제한된 색의 중간톤 비단실을 이용하여 전체적으로 은은하고 우아한 인상을 준다. 위, 아랫단 중간에 구획 역할을 하는 짧은 수술이 달려 단조로움 을 깰 뿐이다.

이와 비슷한 상서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자수 걸개가 있다(도5). 크기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용도는 같기 때문 에 위의 걸개와 비슷한 형 태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가운데 원형의 문양대를 두 르고 사슴과 학이 마주보고 있는 수를 놓아서 마치 관 복의 흉배를 보는 듯하다.

27) 김탁,한국의 관제신앙(선학사, 2004), p.104; 장언푸, 김영진 옮김,한 권 으로 읽는 도교(산책자, 2008),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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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청색 바탕천 아랫 부분 모서리에는 두 마리의 기린이 위에는 역시 두 마리의 봉황이 각각 대칭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사이에는 연꽃과 나비, 벌레가 있어서 초충도(草蟲圖)처럼 보인다. 윗단 붉은보라색 바 탕의 천에는 가운데 연꽃을 중심으로 양쪽에 새 두 마리를 나타냈다.

화면 구성이나 묘사된 소재가 마치 십장생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원래 십장생은 도교에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하는 10가지를 함 께 묶어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는 거북이·사슴·학·소나무·대나무·불로 초·산·내·해·달이 들어가거나 해·돌·물·구름·소나무·대나무·거북 ·학·산·

불로초를 치기도 한다. 거북이나 학은 대개 오래 사는 동물로 알려졌 으며, 사계절 상록수인 소나무, 대나무, 자연의 기본 요소로 변하지 않 는 해, 달, 구름, 물, 바위 등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의 수복장수를 바 라는 염원을 투영한 것이다. 이 자수걸개에는 해, 달, 구름,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등은 보이지 않으나 중국의 전통적인 길상(吉祥)을 표 현한 것은 분명하고 이 길상들은 모두 壽福 富貴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쓰였다. 이는 위에서 거론한 팔선 삼성과 함께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으 로 페라나칸이 상당히 중국 전통에 기반을 두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면 페라나칸 문화를 중국 문화의 한 변종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색채 사용과 선호하는 소재,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 금속공예품의 기형과 의장에서 현지 문화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 20세기 新移住 중국인의 시선과 ‘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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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로의 대규모 이주가 진행된 19세기 이후 중국인 공동체 내부 의 결속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대규모 이주로 인해 기존 동남아의 페 라나칸 중국인 공동체와는 다른 성격의 중국인 공동체가 형성됐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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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신커(新客華人을 의미)라고 불렸다. 1893년 청조가 이주금지조치 를 해제함으로써 합법적인 이주가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여성들의 이 주 또한 늘어났기에 현지 여성들과의 결혼이 필요하지 않게 된 점도 중국계 페라나칸과 신커가 분리된 배경에 있다.28) 대규모 이주가 이뤄 진 후에 중국인들은 순수 중국인 혈통의 가계를 꾸리고 그들의 공동체 를 영위했다. 싱가포르의 경우에 1940년대 무렵에는 전체 인구의 75%

가 중국인이었을 정도로 유입되는 중국계 인구의 수가 비약적이었음은 분명하다.29) 20세기초 자바에도 중국인 이주민의 수가 크게 늘어나 이 들을 페라나칸과 구분하여 또똑(Totok)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국에 서 태어나 중국어를 썼고 매우 중국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19 세기에 새로운 노동인력이 유입됨에 따라 내적, 외적의 갈등이 증가하 고 페라나칸과 신이주 중국인 공동체 사이에 분화가 가속되었다. 여기 에는 경제권의 장악을 둘러싼 갈등도 원인이 있지만 중국 대륙의 정치 적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30)

이러한 新 이주사회의 형성에 따라 이전의 페라나칸과는 다른 문화 를 창조했는데 그 중 하나가 본격적인 회화의 등장이다. 중국풍이 강 한 그림을 그렸던 화인화가들은 당시 급변하는 사회에서 ‘남양풍’의 정 립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이 생각한 남양은 넓게는 동남아 일대를 좁 은 의미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를 의미했다. 이들 화인화가들에 의해 표현된 남방 이미지는 남방이 곧 자신들이 처한 현실세계라는 점 에서 조선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의 남방 관념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겪었지만 오늘날까지 지

28)清實錄德宗景皇帝實錄 327卷 ‘光緒十九年八月’의 조칙. 분리 배경에 대 해서는 신윤환, 동남아의 화인: 아세안 4개국 사례 비교연구 시론 (고우성 외,동남아의 정치경제: 산업화와 발전전략, 21세기한국연구재단, 1995) 참조.

29) Cheng Siok Hwa, “Demographic Trends” (Chen, P.S. J. ed., Singapore:

Development Policies and Trend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69.

30) Ching-Hwang Yen, The Chinese in Southeast Asia and Beyond (Singapore: World Scientific Printers, 2008), pp.26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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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되는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문제의 하나이다.

이주조치가 해제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고 제2의 중국계 인구가 늘어나면서 1910년대 이후에는 싱가포 르와 말레이 반도에 정착한 사람들 사이에 서양회화를 배우는 인구가 늘어났다. 동남아 대부분의 지역이 서구의 오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 하고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이 중국을 통해 들어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동남아시아의 근대 미술이 주목을 받은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1997년 일본에서 대대적인 동남아시아 미술 전시회가 열리면서 세인들 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전시는 후쿠오카 시 미술관에서 열렸으며 이를 기초로 한 연구가 출간됨으로써 동남아 시아의 남양풍 근대미술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31) 연구와 전시는 마치 동남아의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듯이 주로 싱가포르가 주 도하는 형국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독립이 오래지 않은 싱가포르의 정 치적 특성상 20세기초 회화를 주로 그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분류를 하지 않는다. 즉, 당시의 그림들을 ‘남양 풍’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그린 것인지 중국계 페라나칸인지, 혹은 대규 모 이주세대인 중국인 화가인지는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32) 굳 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는지 모른다. 실용적인 입장에 있었던 중국계 페라나칸들은 점차 중국어를 잊어버리고 사업을 하거나 전문직을 찾았 기 때문이다.

남양에 거주한 중국계 화가들 대부분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동남아로 이주하지 않았더라도 장기간 체류 하면서 그들이 본 것을 그려낸 중국인 화가들의 그림도 있다. 청대 이

31) 전시는 <東南アじア近代美術の誕生>으로 후쿠오카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後 小路雅弘žRawanchaikul壽子 編,東南アじア近代美術の誕生(福岡: 福岡市美 術館, 1997)이 출간되었다.

32) 오히려 명확한 분류 없이 영어를 쓰는 영어계 화인과 중국어를 쓰는 華語계 화인으로 나누고 있는데 당시 사회상에 비춰볼 때, 영어계 화인은 곧 페라나칸 이라고 생각된다. 하다 제시카, ‘南洋風 싱가포르 근대미술의 시점 (미술사 논단, 한국미술사연구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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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 중국화단의 주류는 상해 일대에서 활동한 해파(海派)라든가 영남화 파(嶺南畵派)처럼 중국 남부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친지나 아는 사람을 통해 동남아, 특히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일대 로 가서 장기체류하는 일이 가능했다. 류하이스(劉海粟, 1896-1994)와 쉬베이훙(徐悲鴻, 1895-1954)은 각각 유럽에서 귀국하는 도중에, 그리 고 전시회를 열기 위해 싱가포르에 장기체류했던 사람들로 근대 동남 아 화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페라나칸들과 달리 이 시기 의 중국인들은 중국인끼리 결혼하거나 아니면 신랑, 혹은 신부감을 찾 아 중국의 고향으로 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으로 중국 의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화 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중국과 싱가포르를 왕래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전시회를 열었기 때문에 20세기 전반의 동남아 화단 에서 중국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고, 화가들 스스로 중국을 모국으 로 여기고 그 연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남양의 미술이 본국 과 같은 흐름을 타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그와는 다른 것이라고 강조했 다.3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점차 ‘남방’의 독자성을 부각시켜야할 필요 에 직면했고 ‘남양’이라는 지역의 특색이 작품 속에 드러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즉 소위 ‘남양’ 미술은 중국과 같으면서 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루쉰의 영향이 컸다. 1920-30년대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된 미술운동의 핵심에 루쉰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미술가들이 중국화단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쉰이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그들의 커뮤니티가 굳건했던 남 방을 또 하나의 중국으로 여긴 듯한 서간문이 알려졌는데 여기서 그는 지방색을 나타내는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34) 그러면 이 지방색은 무엇인가? 문맥에 따르면 이때의 지방은 남양이므

33) 하다 제시카, 위의 글, p.291.

34) 1934년 목판화가 陳煙橋에게 보낸 루쉰의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지방색 이 있는 것이 쉽게 세계적인 것이 된다.’는 구문이다. 張望 編,魯迅論美術(北京: 人民美術出版社, 1982), p.278(하다 제시카, 위의 글, p.29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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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동남아 현지의 성격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읽을 수 있다. 흔 히 지방색을 논할 때, 지방 출신이거나 오래도록 현지에 거주한 사람 들에 의해 발현될 수 있다는 점에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남양의 지방 색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언급한 페라나칸은 이러한 창작 대열에 끼 어들지 않았으므로 이때 남양의 지방색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인 신이 주민들의 고민거리였다. 이들은 제2의 고향인 남양에서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기 위한 고민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 신이주 중국 인 화가에 의한 남양 묘사는 이국 취향에 의한 타자의 형상화라고 볼 수 없고, 또 다른 자기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장진옌(張金燕, 1902-1980)이 남양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릇 예술가는 실제 남양의 사 물, 남양에 사는 사람을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 다.35) 그러나 이 시기 싱가포르 등지에서 그려진 회화는 열대 선주민 여성을 제재로 한다는 점에서 중국인 화가가 도식 그대로 자신을 중심 에 두고 그 주변 섬에 사는 선주민을 주변화, 즉 타자화 하는 구조 위 에 성립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이주민에 의해 성립된 남양미술 역시 서양 제국주의에서 바라본 시각과 크게 다르다고는 하 기 어렵다. 하다 제시카는 이를 ‘남양풍’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파 악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방식의 재현은 결국 타자화된다는 점에서 다 른 담론 체계의 필요성을 시사할 뿐이다. 그는 말라야반도,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타자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자기’를 획득 하는 구조를 통해 남양미술이 이뤄지며 그런 의미에서 서구미술, 중국 미술과 다르고, 남양다운 요소가 융합된 독자의 예술로 성장했다고 보 았다.36) 과연 이주하거나 혹은 장기간 체류했던 중국인 화가가 이 딜 레마를 수용할 수 있었을까? 화인 화가와 남양의 풍물이 중심과 주변 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면 남양미술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그 재현(representation)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남 35) 南洋與文藝 ,新國民日報副刊荒道(1927.4/1) (하다 제시카, 위의 글,

p.291에서 재인용.)

36) 하다 제시카, 위의 글, pp.2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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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장루치, <바타크인 노부>, 1940년 전후, 원본불명 는다.

소위 남양양식은 남양미술학교(南洋美術學校) 초대 교장이었던 림학 타이(林學大, 1893- 1963)에 의해 시작됐다고 본다.37) 그런데 그와 그 의 유파에 의해 고안된 남양풍 회화는 낭만적인 열대 정서와 이민족 여성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림학타이의 작품은 현재 전하지 않 고 역시 원본은 현 소재지를 알 수 없으나 장루치(張汝器, 1904-1942) 의 <바타크인 노부>에서 이를 미뤄 짐작

할 수 있다(도6). 1940년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에는 깡마른 체 구의 이국적인 노파가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여기에는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은 보이지 않으며, 그렇다 고 해서 동질감 또한 보이지 않는다. 다 만 노파의 강렬한 시선이 관찰자의 발길 을 잡아끌 뿐이다. 노파와 주변 배경에서 는 아무런 이국적인 낭만도, 열대의 흥취 도 보이지 않는다. 뼈가 드러나는 신체와 검게 탄 피부, 꼿꼿한 자세와 시선이 주 는 강한 긴장감이 사실주의 회화처럼 보

인다. 서양의 다양한 미술사조들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한 시기에 그려진 그림치고는 전혀 그런 실험적인 자세도 보이지 않고, 중국 전 통회화의 요소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장루치라는 화가 자신이 보 고 있는 남양의 현실일 뿐이다.

중국 출신 동남아시아 거주민에 의한 시각적 재현은 열대의 낭만을 반복함으로써 고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남방’을 지향했 으면서도 예술의 보편성, 예술지상주의를 강조하면서 고갱의 타히티 37) 하다 제시카, 위의 글, p.289. 림학타이를 비롯하여 싱가포르와 동남아에서 활 동한 많은 화가들의 이름은 보통화 발음과는 다른데 대부분 자신들의 출신인 광둥이나 푸젠어 발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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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7> 종쓰빈, <쌀찧기>, 1953, NUS 미술관 그림에서 볼 수 있었던 타자의 시선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당시 4대 화가로 분류된 종쓰빈(鐘泗濱, 1917-1983), 류캉(劉抗, 1911-2004), 천원 시(陳文西, 1906- 1992), 천쭝쉬(陳宗瑞, 1910-1986)가 있다.38) 종쓰빈 이 그린 <쌀찧기>라는 그림은 발리의 여성들이 절구에 쌀을 찧는 모 습을 묘사한 것이다(도7). 먼저 이주해

서 현지인과 결혼한 중국인들 중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순히 현지의 주 민 뿐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사고파는 노예를 구입하여 결혼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노예 가운데 발리 출신 여성들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 이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힌두교도여서 결혼생활이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9) 아마도 같은 이유로 중국인 이주민 공동체에서 발리 출신 여성들 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종쓰빈의 그림도 그들의 현실을 반영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원시성을 드러내는 벌거벗은 모습, 단순한 윤곽선 처리는 고갱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작렬하는 태양과 드넓게 펼쳐지는 망망대해, 사철 푸른 야자수와 끝없이 계속되 는 모래와 평온한 현지의 생활방식에 보내는 이방인의 시선은 거주자 이면서 동시에 외지인이었고, 또한 급격한 부의 축적으로 주인이 되고 있었던 중국 화인들에게는 자신들과의 동일시를 위한 방편의 하나로 구체화됐다고 볼 수 있다. 달리 생각한다면 이는 그들이 현지에 적응 하고, 현지 풍토를 즐기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전통 적인 화론에서 핵심은 ‘와유(臥遊)’가 아니었던가? 가보지 않은 산과 38) 이들의 그림은 하다 제시카, 위의 글, p.293 도)1 참조하기 바란다.

39) 이태희, 페라나칸의 역사 (싱가포르의 혼합문화 페라나칸, 국립중앙박물 관, 2013),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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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혹은 가봤으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산하를 그림으로 그 리고 감상한 것이 중국의 전통적인 산수화관(山水畵觀)이었다고 한다 면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인 셈이다.

1920년대 새로 이주한 중국 출신 화가들은 남양을 제2의 고향으로 간주하려는 의식이 강했는데 이들의 성향은 남양에 있는 현지인만이 알 수 있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 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의 현지인이 토착민이었다고만은 볼 수 없다. 20세기 전반기의 국제사회는 세계대전과 동남아 식민지의 독립, 중국 공산화로 이어지는 혼란이 이어졌고, 그에 따라 중국 이주 민들의 혼란이 중국을 고향으로 할 것인가, 정착지인 동남아를 본국으 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현 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지 거주 중국인들에게 당면한 문제였고, 이 의 해결은 자신들의 삶의 여건에서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실존과 관 련된 문제들이 산적하게 되고, 현지 거주민으로서의 삶을 담보로 한 사회 변동 앞에서 더 이상 타자로서, 혹은 낭만으로서의 ‘남양’은 존재 하지 않았다.

V. 맺음말

중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는 정화의 원정 이후 더욱 가속되었다. 16세 기 이후, 동남아로 이주한 중국 남성들은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여 공 동체(community)를 이뤘다. 이들은 페라나칸(peranakan)으로 불리며,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의 경제력은 동남아 일부지 역의 경제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이미 1866년에 중국계 상 인들은 싱가포르 선박의 2/3를 소유했고, 대규모 신이주가 진행된 20 세기까지 그들의 경제력은 확장되었다. 중국계 페라나칸과 새로 이주 해온 중국인들 사이에 분열과 마찰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든지 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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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려는 노력을 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중국계 페라나칸들은 중국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혼례, 장례를 치뤘으므로 그들의 의례용품과 일상생활용품에 중국의 전통이 반영된 것은 당연하다. 중국계 페라나 칸들의 미술에는 봉황, 용 등의 상서로운 상징이 표현되었다. 불교와 도교의 영향도 적지 않아서 가정에 관음보살상을 모셔두거나, 장수와 복을 비는 신선을 수놓은 장식들도 만들었다. 경제력을 갖춘 페라나칸 들은 중국 푸젠에서 도자기를 사오거나 주문하기도 했는데 이들 도자 기는 중국에서 만들었지만 핑크색과 연두색으로 문양을 그려 페라나칸 중국인의 취향을 보여준다.

19세기 이후 새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신커(Shinke)라고 불렸다. 이 들은 페라나칸 여성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중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자 신들만의 공동체를 꾸렸다는 점에서 앞 시대에 이주한 중국인들과 차 이가 있다. 따라서 중국적인 성격이 더욱 강한 문화를 지속할 수 있었 다. 중국을 통해 본격적인 회화를 그리는 방법을 배운 것도 이때이다.

처음에는 동남아 현지의 낭만적인 열대를 그리다가 점차 자신들이 처 한 현실로 눈을 돌려 격변하는 세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그림과 판화로 만들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영국왕의 중국인’이라고까지 불렸던 페라나칸과 입장이 전혀 달랐다. 중국계 페라나칸과 신커들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기도 했지만 각자 처 한 입장이 전혀 달랐다. 이들 동남아를 표현한 미술과 동남아 거주 화 인의 문화는 복잡하게 형성된 화인들의 다문화(multi-culture)를 잘 보 여준다. 본 연구는 시론에 불과하지만 동남아 거주 화인의 문화를 집 중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계기와 문제의식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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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inese Migrations to the South Seas(南洋) and Chinese Art in Modern

Southeast Asia

Kang, Hee Jung

Chinese migrations to the Southeast Asia had become more active after Cheng ho’s expedition. After the 16th century, those immigrants from the southern provinces of China married local women and built their own community. They were called

"Peranakans" or “Baba-nyonya” in Malay, and they had developed a unique mixture of Chinese and local culture. Ceremonies including wedding and funeral followed the Chinese tradition. It was reasonable for the ceremonies and objects from daily life to reflect such tradition. Auspicious symbols such as phoenix and dragon were depicted in Chinese Peranakan arts. Also, under the influence of Buddhism and Daoism, many families housed and worshiped statue of bodhisattva Avalokiteshvara(觀音). They also owned decorative items embroidered with Daoist Immortals(神仙) for longevity and good fortune. Wealthy Peranakans bought or ordered potteries from Fujian, China. However, even though these potteries were made in China, pink and yellowish green motifs painted on them reflect the Chinese Peranakans’ taste.

Meanwhile, Chinese immigrants who moved after the 19th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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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called “Shinke”. The difference can be seen from that not only they married Peranakan women but they also married Chinese women to form their own community. Therefore, they were able to sustain the culture that was greatly influenced by Chinese characteristics. During this period, rather than in the West, they learned how to paint from China. At first, they naively painted romantic features of tropical areas, but soon their paintings start to reflect the reality that they were facing. Paintings and woodblock prints depicting difficulties in rapidly changing world are the good examples. Considering this, Shinkes’ position wa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at of Peranakans, who were called "the Chinese people of the King of England". Arts depicting Southeast Asia and the culture of Chinese-Southeast Asians set a good example for reflecting confusion of their identity of that time.

주제어: 동남아시아, 페라나칸, 화인, 토생화인, 신객, 남양풍 關鍵詞: 東南亞細亞, 페라나칸, 華人, 土生華人, 新客, 南洋風

keywords: Southeast Asia, Peranakan, Chinese in Southeast Asia, Shinke, Nan-yang style.

(원고접수: 2013년 3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4월 13일, 수정원고 접 수: 4월 17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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