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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 中國의 知識界와 辜鴻銘의 文化 保守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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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 中國의 知識界와 辜鴻銘의 文化 保守主義 *

-辜鴻銘 思想의 形成 過程과 特徵을 中心으로-

金 秀 英 (國民大)

1)

Ⅰ. 서론

Ⅱ. 국제적 명성과 국내적 위 상의 괴리

Ⅲ. 문화적 정체성의 결단

Ⅳ. 중국 문명과 국가종교

Ⅴ. 결론

I. 서론

‘근대 중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전통 문화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서구 문명이 중국에 전면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 청조 말기부터 오늘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식계가 풀어야 했던 핵심적인 질문의 하나이다. 이 문제가 중국의 지식계를 양분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갈등의 수면 위로 분명 하게 떠오르는 것은 19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 다. 이 때 전통 문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서구 문화의 전면적 수용 을 강하게 주장하는 신문화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들 신문화 지식인들의 주장이 1910-20년대를 거치면서 중국사 회에 급속하게 영향력을 행사해 나가자 이에 대항하여 전통 문화의 가

*이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 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9-362-B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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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옹호하는 ‘보수적’ 지식인 진영이 새롭게 재편성된다. 이러한 지 식계의 분열은 1920년대에 ‘東西文化論爭,’ 1930년대에 ‘中國本位文化 建設論爭’으로 이어지면서 중화민국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전 통의 가치’를 둘러싸고 전개된 지식계의 대립이 이렇게 중화민국의 시 기에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었지만1) 사실상 이는 중화민국의 시 기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중화민국 이전의 시기, 즉 아편전쟁 이후부터 청 제국이 붕괴되기까지의 시기에도 청조의 지식계는 서구 문물의 수용과 전통 문화의 보존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시키 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 말의 정치 세력들인 양무파, 변법파, 혁명파 인사들이 서로 대립적인 정치적 행위를 선택할 때에도 이들은 모두

‘전통과 근대화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문화적’ 숙제를 안고 출발했다.

아편전쟁이후부터 중화민국까지 중국의 근대 지식계가 풀어야 했던 숙 제, 즉 근대 중국을 건설하는데 ‘전통’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 찾기는 사실상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속 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 과 1990년대의 인문정신논쟁에서 ‘전통 문화의 자리매김’은 여전히 지 식계를 양분하는 논점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 문화’를 둘러싸 고 형성되어 갔던 근대 중국 지식계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본 논문이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 역시 가져다줄 수 있기를 희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 논문은 근대 중국에서 전통 문화의 가치를 옹호했던 대표적인 문화 보수주의자인 辜鴻銘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근대 중 국의 문화 보수주의 진영에는 淸流派, 國粹主義, 東方文化派, 學衡派, 論語派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세력들이 존재했다.2) 이들은 문화 보수

1) 중화민국의 역사 속에서 신문화 지식인들에 의해 첨예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문화적’ 대립은 이후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앞세운 정치적 세력들과 긴밀히 맞물리면서 적대적인 ‘정치적’ 대립으로 확대되어갔다.

2) 문화 보수주의에 대한 연구는 최근 들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 다. 특히 중문학과 동양사학 분야에서 중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됨으로서 많은 성과물이 나왔다. 근대 중국의 문화 보수주의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보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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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자로서 근대 중국의 건설을 위해 전통 문화의 역할이 중요한 공헌 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 문 화’의 구체적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서로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 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 문화 보수주의자들의 다양한 목소리 가운데에서 본 논문은 辜鴻銘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여 그가 중국 근대 지식계의 숙제, 즉 ‘근대중국을 건설하는데 전통 문화가 어떠한 역할 을 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어떻게 해답을 제시하는지 살펴볼 것 이다.

문화 보수주의자로서 辜鴻銘은 그의 기이한 외양과 행동으로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왔다. 1920년대에 이르면 이미 미개한 문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변발, 전족, 축첩제도를 여전히 전통 미덕으 로 찬양함으로서 그의 ‘문화 보수주의’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되기가 일쑤이었다. 그러나 본 논문이 그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辜鴻銘의 기이한 외양과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력에 나타나는 두 가지의 특이한 요인때문이다. 辜鴻銘의 이력에 나타나는, 동시대의 중국 지식 인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두 가지 특이한 요인은 첫째, 辜鴻銘의 국 제적 명성과 국내적 위상 사이의 괴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과 둘째, 중국인으로서 辜鴻銘의 정체성이 혈연이나 지연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 이 아니라 그의 의지적인 ‘지적 선택’의 결과이었다는 사실이다. 본 논 문은 이 두 가지 특이한 요소가 辜鴻銘의 사상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 끌어가고 있는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춘다. 본 논문의 첫 장에서는 辜鴻銘의 국제적 명성과 국내적 위상의 괴리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 는지를 살펴보고 두 번째 장에서는 辜鴻銘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내 보고자 한다.

는 글로써는 천성림, 「20세기 중국 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한국동양정치 사상사연구 5-1, 2006.03)와 전인갑, 「“적응담론”으로서의 문화 보수주의」

(東洋史學硏究 124, 2013.09) 등이 있고 중국학계의 연구로는 鄭大華ㆍ, 賈 小葉, 「20世紀90年代以來中國近代史上的激進與保守硏究述評」 (近代史硏究

(2005.0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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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이러한 ‘결단’의 동기가 辜鴻銘 思想의 주요 메시지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 의 과정을 통해 본 논문은 중국 근대 지식계의 숙제-근대 중국을 건 설함에 있어 전통 문화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辜鴻銘의 해법을 보여주고 이러한 그의 해법이 궁극적으로 중국 의 근대지식지형을 어떻게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밝혀 볼 것이다.3)

Ⅱ. 국제적 명성과 국내적 위상의 괴리

辜鴻銘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살았던 중국의 지식인 가운데 서구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1913년에 타고르와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국제적 명성이 상당했 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외국인들이 중국을 방문할 때에

“중국에 가서 자금성을 보지 않더라도 辜鴻銘은 꼭 보아야 한다”는 충 고를 받았다는 류노스게 아쿠타가와(芥川龙之介)의 경험담도 이를 뒷 받침한다.4) 辜鴻銘의 이름이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쓴 일

3) 辜鴻銘에 대한 국내 연구는 고영희ㆍ진성수, 「청말 지식인의 문화관-辜鴻銘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52, 2012.11)가 대표적이다. 이 외에 辜鴻銘 과 Arther H. Smith의 대표적 저서를 비교한 글인 이준태, 「20세기 초 중국 지식인의 ‘國民性’ 인식 -中國人的性格과 中國人的精神을 중심으로」 (중 국연구 49, 2010.07) 정도가 있다. 중국에서 출판된 辜鴻銘 연구는 黄兴涛 编,旷世怪杰: 名人笔下的辜鸿铭 (东方出版中心,1998); 朱介国,「辜鸿铭之 尊王思想研究」 (博士学位论文,中国文化大学,2008); 钟帆,「论近代中西文化 碰撞下的辜鸿铭西方形象建构」 (西南民族大学学报(人文社会科学版), 2012);

史敏,「辜鸿铭保守注意思想的中西文化构成解析」 (重庆社会科学 总第158期, 2008-1) 등이 있다.

4) The Bambooa Sea, Archive for 'Ku Hung-ming' Category, https://thebamboosea.wordpress.com/category/the-book-grove-%E8%97%

8F%E4%B9%A6/ku-hung-ming/ 참조; 辜鴻銘 撰, 辜鴻銘文集 下 (黃興濤 等 譯, 海南出版社, 1996) p. 269와 고영희ㆍ진성수, 「청말지식인의 문화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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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의 글들이 서구인들의 관심을 대폭 끌면서이다. 1901년에 쓰인  Papers from a Viceroy's Yamen (尊王篇)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 이, 의화단 사건과 서구 문명에 대한 중국인의 견해를 알리고 있는 책 이다. 1906년에 톨스토이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辜鴻銘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의 내용은 독어, 불어, 영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빠르게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5) 톨스토이와 辜鴻銘의 관계는 한 번의 편지 왕래로 그치지 않았다. 1908년 8월 톨스토이가 80세 생일을 맞이하자 辜鴻銘은 저명한 중국인 문화 인사들의 서명이 담긴 축하 전보를 보내 기도 했다.6) 이 즈음에 辜鴻銘은 이미 유교의 주요 경전 중에 論語

(1898년), 中庸(1906년), 大學(1908년)을 영역하여 출판한 상태이 었으며 이 책들은 서구의 주요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7) 이 후에 쓰인 두 권의 책, 

Chinese Oxford Movement

(淸流傳)(1909 년)와 

The Spirit of Chinese People

(春秋大義)(1915년)은 서구에 서,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글들이 서구 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자 서구의 유명인사들이 그와 만나거나 편지로 교류하기를 원했다. 이 들 중에는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 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영국 작가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 일본 작가 류노스게 아쿠타가와(芥川龙之介) 등이 있었는 데 이들 모두 중국을 방문하여 辜鴻銘을 만난 후에 그 경험을 글로 남 기고 있다. 이러한 유명세로 인하여 辜鴻銘은 서구 작가들의 소설 속 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로즈 디킨슨(G. Lowes Dickinson) 의 

Letters from John Chinaman

에서 “Chinaman”은 辜鴻銘을 모 델로 하여 쓰인 것이었으며 서머셋 모옴의 중국 여행기인 

On a

辜鴻銘을 중심으로」 p.150 등 많은 글들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임.

5) 1906년 11월에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며 이어서 불어와 영어로 출판되어 나갔 다.

6) Archives for ‘Ku Hung-ming’, The Bambooa Sea, 앞의 웹사이트.

7) 1922년에 林語堂이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辜鴻銘의 저서들이 그 대학의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창경, 「辜鴻銘 약력」 (辜鴻銘 著 김창경 譯, 중국인의 정신, 예담, 2004),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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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Screen-Sketches of Life in China

에 나오는 “철학자”는 辜鴻銘의 글과 면담 내용에 기반하여 쓰인 것이다.8)

이상과 같이 辜鴻銘은 당대의 어느 중국인보다 높은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는 중국 내에서 줄곧 소외된 존 재로 있었으며 그의 사상을 인정하는 중국 지식인들 역시 많지 않았 다. 사실상 辜鴻銘은 양무운동, 신해혁명, 5.4신문화운동과 같은 주요 역사적 흐름의 한 가운데에 항상 있었다. 辜鴻銘은 1885년부터 청 정 부의 호광총독 張之洞 휘하에서 17년 동안 양무운동과 신정개혁을 추 진하는 일에 직접 가담했다. 그리고 1908년에는 청 정부의 외교부 시 랑에 임명되어 곧이어 붕괴될 마지막 왕조의 편에 서서 치열하게 혁명 파의 사상을 공격했다. 중화민국의 건립 후에 5·4신문화운동이 전국적 으로 확산되는 시기인 1915-1923년에는 이 운동의 진원지이었던 북 경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신문화 지식인과 문화 보 수주의자들의 논쟁이 전개되는 최전선이기도 했던 북경대학에서 복고 파의 상징인 변발을 한 채 급진적인 학생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다.

이렇게 근대 중국의 역사적 중심에 항상 서 있었지만 辜鴻銘은, 긍 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의 국제적 명성에 걸맞은 영향력을 중국의 지 식사회에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청조 말기에 양무운동과 신정개혁을 이끌어간 張之洞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고 하더 라도9) 그는, 스스로가 강조하듯이, 張之洞의 휘하에서 외국문서의 번 역을 담당하는 일개 막료일 뿐이었다. 같은 시기에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 康有爲, 梁啓超, 章炳麟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 서 유학하고 돌아온 嚴復 등의 지식인들이 중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지식 인을 대상으로 잡지를 창간하고 책을 출간했던 康有爲, 梁啓超, 章炳

8) Archive for ‘Ku Hung-ming’, The Bambooa Sea. 앞의 웹사이트.

9) 신정개혁의 일환으로 청조는 유학파들에게 과거 합격자의 자격을 부여하였는 데 이때 張之洞의 요청으로 辜鴻銘은 진사 자격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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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 嚴復 등과 달리 辜鴻銘은 중국 지식인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 았다. 이 시기에 그의 글들은 모두 서구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 으며 이들 서구인들에게 중국의 전통 문화를 정확하게 이해시키려는 목적, 더 나아가 중국에 대한 서구 지식인의 인식을 개혁하려는 목적 아래 저술되고 있었다.10) 이러한 저술들은 서구 사회에서 커다란 파장 을 일으켰음에도 중국내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 다. 1906년에 톨스토이가 辜鴻銘에게 보낸 편지 역시 5년이 지난 후 인 191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중국어로 번역되어 東方雜誌에 그 전 문이 실렸다. 그 때는 이미 톨스토이가 사망한 이후이었다. 서구인들 에게 辜鴻銘의 이름을 각인시켰던 그의 대표작인 The Spirit of Chinese People은 1915년에 영문 초판이 나온 지 3년이 지나서야  東方雜誌에 그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도 일본어로 쓰인 소개문 을 번역한 것에 불과했다.11)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東西文化論爭이 일어나면서 이 책의 내용이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르자 1922년에 北京 商務印書館은 재판을 내놓는데 이 역시 여전히 영문으로 출판됨으로서 중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당시에 辜鴻銘의 글이 신문화 지식인들의 통렬한 비판을 받기 시작하면서 중 국 지식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이후에 이들 신문화 지식인들에 대항하여 문화 보수주의 진영이 새롭게 형성되어 나가는 시기에 辜鴻銘은 중국을 갑자기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12)

결과적으로 보면 그토록 큰 국제적 명성을 얻었던 辜鴻銘이 근대 중국의 지식계에 미친 영향은, 그가 그러한 영향력을 원하지 않았건

10) 辜鴻銘은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글을 확인하기가 힘들 정 도이다.

11) 辜鴻銘의 The Spirit of the Chinese People은 1915년 北京每日日報에서 영어로 초판을 간행했다.

12) 1923년에 북경대학을 사직하고 중국을 떠나 일본과 대만에서 초빙 강사로 생활했으며 줄곧 가난과 싸워야 했다고 한다. 1928년에 다시 중국에 돌아오지 만 그의 사상을 중국사회에 알리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이 곧이어 외로운 죽음 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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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중국내 지식인들이 원하지 않았건 간에, 미미했다. 이렇게 辜鴻 銘의 국제적 국내적 위상에 큰 괴리가 나타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 이었을까? 辜鴻銘이 중국어보다 영어를 더욱 잘 구사했고 그의 저술 이 모두 영문으로 쓰였기 때문인가? 그러나 당시 중국 사회에서 활발 하게 번역서들이 출판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를 근본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어렵다. 辜鴻銘 역시 자신의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중국 사 회에 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 국 辜鴻銘의 국제적 명성과 국내적 위상의 괴리는 그의 저술 목적에서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辜鴻銘은 중국인이 아닌 서구 인을 대상으로 글을 썼고 그의 저술에는 중국인이 아닌 서구인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辜鴻銘의 이력에서 발견되 는 이러한 특이점은 그의 문화 보수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를 알려준다. 즉 근대 중국의 지식계에서 차지하는 辜鴻銘의 문화 보 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기타 문화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을 비교하기에 앞서, 반드시 그의 저술 목적과 그의 사상을 먼저 연결시 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辜鴻銘은 왜 중국 지식인들이 아닌 서구 지 식인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가 서구의 지 식인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辜鴻銘의 문화 보수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 리고 이는, 다음 장에서 논의되는, 辜鴻銘의 성장배경과 그가 중국인 으로의 정체성을 결단하는 내적 동기와 긴밀히 연결되고 있었다.

Ⅲ. 문화적 정체성의 결단

辜鴻銘이 북경대학에 영문학 교수로 부임하였을 때 중국인들은 그 를 “잡종”이라고 불렀다. 그가 중국인 부친과 서구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기 때문이었다.13) 인종적으로 중국인도 유럽인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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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辜鴻銘의 공식적인 국적은 영국이었다. 이러한 辜鴻銘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규정하고 중국 전통 문화의 정신을 알리는 중국문화의 대변자로 나섰다.14) 인종적, 국가적, 문화적 정체성이 상충하는 가운 데 辜鴻銘은 문화적 정체성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선택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적 국가적으로 ‘혼혈 영국인’인 辜鴻銘이 문화적 중국인으로서 재탄생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辜鴻銘은 1857년 7월 18일 말레이시아 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섬인 페낭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辜鴻 銘은 이 곳에서 중국 문화를 거의 알지 못한 채 자랐다. 1786년에 辜 鴻銘의 증조부가 페낭에 정착한 이래로 이 섬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중 국 이민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辜鴻銘의 가족들은 삼대에 걸쳐 중국과 고립되어 살아왔다. 따라서 辜鴻銘의 가족들이 알고 있던 중국 문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변형된 형태의 관습적 미신 이상의 것이 아니었 다.15) 당시 辜鴻銘이 배운 첫 번째 언어는 말레이이었으며 다음으로

13) 辜鴻銘과 함께 북경대학에서 근무했던 周作人에 의하면 辜鴻銘의 모친은 포 르투칼인의 피가 섞인 서양인이며 辜鴻銘이 대학에 온 초창기에는 “잡종 (crossbred)”이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辜鴻銘은 영국시민이었다.

Gotelind Muller, “Gu Hongming (1857-1928) and China’s Defence Against the Occident” (Univ. of Heidelberg, 2013) pp.5-6 참조; 독일어 논문을 Shubei Wu가 번역함. 독일어 원문은 “Gu Hongming(1857-1928) and Chinas Verteidigung gegen das Abendland” (Orientierrungen, Zeitschrift zur Kultur Asiens, Vol. 2006/1), pp.1-23; 周作人, 「北大頂古怪 的人物」 (黃興濤 編, 曠世怪杰), p.27; 辜鴻銘은 자신의 모친에 대하여 언급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Lo Hui-min, “Ku Hung-ming:

Homecoming”, East Asian History, No. 6 (December 1993) p.163; 고영 희, 진성수, 「청말지식인의 문화관 -辜鴻銘을 중심으로」 p.155 참조.

14) 1920년대 學衡派에 속한 문화 보수주의자이었던 吳宓은 大公報에 쓴 추 도사에서 “辜鴻銘이 진실로 중국문화를 대표하며 서구에서 중국을 알리는 유 일하고 유력한 선전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15) 말레이로 들어온 새로운 중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페낭에서 멀리 떨어진 조 지타운에 형성된 화교 마을에 군집해 있었다. Lo Hui-min, 앞의 글, p.167.

Lo Hui-min은 辜鴻銘에 대한 두 편의 논문을 출판한다; “Ku Hung-ming:

Homecoming” (East Asian History, No. 6, December 1993)와 “Ku Hung-ming: Homecomig(2)” (East Asian History, No. 9, June 199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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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이 방언이었다. 그리고 2년의 초등학교 과정을 통해 영어를 피상 적으로 배운 것이 그가 페낭에서 받은 교육의 전부이었다.16) 1869년 辜鴻銘이 농장주인 브라운 부부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떠날 때 그의 부 친은 조상의 위패에 분향하면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이 영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네가 중국인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 했다고 전해진다.17) 그러나 당시 13세의 소년 辜鴻銘은 중국의 고전 문명은 고사하고 한자로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혼혈 화교이었 다.

辜鴻銘이 유럽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인 페낭으로 돌아온 것은 그 의 나이 23세가 되는 1879년이었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졸업 학위를 받을 때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모두에 익숙했고 이 들 언어들이 제공하는 서양의 고전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지식 세계에는 서양 문명이외에 다른 ‘문명’이 존재 하지 않았다.18) 이는 辜鴻銘이 중국에 돌아와서 사귄 가까운 친구들 중에 중국인이 없었고 모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도 그가 중국인들보다 서구인들에게 더 친밀한 문화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9) 유럽에서 돌아온 辜鴻銘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 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유럽에서 돌아온 지 3년 이 넘었지만 나는 중국인의 사고와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본적이 없었 다. 따라서 그것(중국인의 사고와 철학)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 다”고 그는 말한다. 당시 자신은 그저 “가짜 서구인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 논문은 저자가 직접 辜鴻銘의 고향을 답사하는 등 그의 행적을 밟아나가 며 辜鴻銘의 저술 등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1차 자료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본 장에서 辜鴻銘의 성장과정과 중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내적 동기를 설명하는데 있어 이 두 편의 논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16) Lo Hui-min, 앞의 글, p.167.

17) Baidu百科-辜鴻銘.

18) Lo Hui-min, 앞의 글, p.167.

19) 중국에 돌아와 사귄 첫 친구는 영국인 Herbert Allen Giles(1845-1935)이 었다. Lo Hui-Min, “Ku Hung-ming: Homecomig(2)” (East Asian History No. 9, June 1995),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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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천치와 같았다”는 것이다.20) 이러한 辜鴻銘이 중국인으로 재탄생 하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두 번의 계기를 통해서이었다.

1879년에 福州에서 경험한 烏石山사건과 2년 후인 1881년에 싱가포 르에서 이루어진 馬建忠과의 만남이 바로 그 계기들이었다.

辜鴻銘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위의 두 계기 중에서 두 번째, 즉 馬建忠과의 만남에 주목한다. 사실상 이 만남이 갖는 중요성은 辜鴻銘 자신이 스스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辜 鴻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馬建忠과의 만남은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었다. ··· 나를 개종시켜 다시 중국인이 되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 馬建忠은 대화 중에 내게 싱가포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물었다. 그에게 내 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외 국인의 사무실에서 한낮 서기일에 만족해야 한다니 믿을 수 없다. 확신컨 대 당신이 그 직장에서 20년 동안 일한다고 해도 당신은 여전히 서기직 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당신은 유럽인이 되기 위해서 중국을 거부했지만 유럽인과 영국인들은 당신을 결코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이다.21)

辜鴻銘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고 있듯이, 馬建忠과의 만남은 辜 鴻銘을 “개종시켜 다시 중국인이 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馬 建忠과 대화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辜鴻銘을 “개종시켜 다시 중국인이 되게” 했던 것일까? 위의 회고록에서 이어지는 馬建忠의 충 고, 즉 “당신은 유럽인이 되기 위해서 중국을 거부했지만 유럽인과 영 국인들은 당신을 결코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대부분의 연구들은 그 답을 찾는다. 실제로 馬建忠의 충고는 중국에 돌아온 후에 辜鴻銘이 겪었던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의 대학 동료들이 영국의 식민정부에서 주요 직위를 맡아 나갈 때 辜鴻銘은 그 식민정부의 싱가포르 지부 산하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하

20) 앞의 글, pp.67-68.

21) 앞의 글, pp.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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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문서 담당 서기로 일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馬 建忠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연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辜鴻銘 이 중국인이 되기로 결심한 동기를 서구인들로부터의 차별과 개인적 성공의 좌절로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사실상 辜鴻銘은 중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주중 영국 대사이었던 토마스 웨이드의 초청 으로 북경에 있는 영국 공사관에서 그의 비서로 일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웨이드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북경을 떠난 후 싱가포 르 식민부에 정착할 때까지 몇 개월 동안에 중국에서 무엇을 경험했는 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辜鴻銘이 이후에도 웨이드의 도덕성과 공정성에 대한 존경심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22) 중국에 서 辜鴻銘과 교류하고 그를 인정한 사람들이 중국인이 아니라 웨이드 와 같은 서구인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辜鴻銘이 중국인이 되기로 결정한 이유가 인종적 차별과 이로 인한 개인적 좌절감 때문이라는 주 장은 쉽게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다.23) 辜鴻銘이 개인적인 성공에 연연 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후에 그가 쓴 尊王篇의 서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辜鴻銘은 중국 사회에서도 ‘유리천장’과 이로 인한 개인적 성공의 좌절을 겪고 있었지만 이것이 중국에 대한 그의 충성, 더 나아 가 그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전혀 영향을 미치고 있 지 않았기 때문이다. 尊王篇의 서문에서 辜鴻銘은 이렇게 말하고 있 다.

만약 누군가가 서태후의 정부에 불평을 말할 권리가 있다면 바로 나에 게 그 권리가 있다. 나는 서태후의 청 제국에서 지금까지 18년을 일했지 만 지금 이 순간에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직급에 머물러 있

22) 辜鴻銘이 북경의 영국 공사관을 그만 둔 이유가 인종차별에 의한 ‘유리천장’

때문이라고 추리하기에는 그가 이 곳에서 일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다.

아마도 일의 성격과 辜鴻銘의 성향이 맞지 않았거나, 辜鴻銘의 독특한 성격이 다른 이들과의 마찰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듯하 다.

23) Lo Hui-min 역시 서구인들에게서 느낀 차별을 辜鴻銘이 중국인의 정체성을 선택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앞의 글,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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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관세청에서) 4등급 조수들이 받는 보수보다 더 적은 보수를 받으면 서 말이다.”24)

서구인으로부터의 차별과 개인적 성공의 좌절이 辜鴻銘을 중국인이 되도록 한 결정적 동기가 아니라면 馬建忠과의 대화 중에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일까? 어떻게 馬建忠은 辜鴻銘을 “개종시켜 다시 중국인이 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싱가포르에서 馬建忠과의 만남을 辜 鴻銘은 자신의 인생을 바꾼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馬建忠의 일기에서 辜鴻銘과의 만남이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았 던 점을 고려해 보면 馬建忠은 辜鴻銘과의 만남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 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5) 따라서 馬建忠의 어떤 말이 辜鴻銘의 마음을 움직였던 간에 馬建忠 자신은 그러한 영향력을 의도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馬建忠은 자신이 의식 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 辜鴻銘을 ‘문화적 중국인’으로 재탄생 시키고 있었던 것일까? 辜鴻銘과 馬建忠의 대화를 ‘문화적’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나온다.

馬建忠과 辜鴻銘은 모두 서구에서 유학을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馬建忠은 1877년에 유럽으로 파견된 첫 번째 중국 유학생 단체의 일 원이었고 파리 정치대학에서 법학학위를 받은 후에 李鴻章 아래에서 양무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26) 馬建忠과 辜鴻銘의 대화는 중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 馬建忠의 만다린이 상당히 서툴렀기 때 문에 프랑스어만이 둘 사이에 유일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 이다.27) 이들의 대화에는 서양 문명과 중국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포

24) Ku Hung Ming, Papers from Viceroy's Yamen(尊王篇) 「Preface」, p.

xv.

25) Lo Hui-min, “Ku Hung-ming: Homecomig(2)”, p.86. 馬建忠의 일기에는 辜鴻銘의 사촌이었던 재력가 Koh Seang Tat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었던 반면에 辜鴻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26) 첫 유학생 그룹에는 옌푸도 끼어 있었다. 옌푸는 영국의 그린위치 해양 대학 에서 수학했다.

27) “당시 馬建忠이 만다린에 상당히 서툴렀다”고 辜鴻銘은 회고한다. 아마도 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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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되어 있었지만 이 대화는 오히려 두 사람의 문화적 간극을 더욱 크 게 느끼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馬建忠은 로마시대의 역사 가 타키투스(Tacitus)가 누구인지도 몰라 辜鴻銘을 내심 크게 놀라게 했으며 辜鴻銘은 자신이 읽은 유일한 중국 문학작품이 자일스(Giles) 가 번역한 聊齋志異라고 말함으로서 馬建忠을 탄식하게 했다.28) 따 라서 두 사람 사이에서 “인생을 바꿀 만 한” 문화적 소통은 서구 문명 이나 중국 문명에 대한 심오한 지식의 소통에서 나올 수 없었다. 馬建 忠과 대화 중에 辜鴻銘의 마음을 요동시켰던 것은 두 사람의 유일한 문화적 접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이었다.

馬建忠은 17세기에 천주교로 개종한 가문의 자손이었다. 천주교 신 부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 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중국 고전 교육도 철저하게 받았다. 중국 고전에 대해 무지한 辜鴻銘에게 馬建忠은 聊齋志異는 “진정한 문학”

이 아니라고 하며 唐宋八家를 읽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기독교 도인 그가 (중국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陸贄의 글을 “성경”처럼 받아 들인다고 고백했을 때 辜鴻銘은 큰 충격을 받는다.29) 비록 辜鴻銘이 기독교도는 아니었지만 성경이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 독교 문명 속에서 자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고전을 성경처럼 받아들인다는 馬建忠의 고백이 왜 辜 鴻銘을 중국인으로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고 있는가? 이는 2 년 전인 1879년에 福州에서 일어난 烏石山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1879년에 유럽에서 페낭으로 돌아온 辜鴻銘은 곧바로 중국 푸저우 로 향했다.30) 공교롭게도 당시 푸저우에서는 烏石山 사건의 마지막 재

鴻銘 자신은 북경 영국 공사관에 머물던 시절에 북경어를 어느 정도 터득했던 것 같다.

28) Lo Hui-min, “Ku Hung-ming: Homecoming(2)”, p.86.

29) 앞의 글, p.87.

30) 푸저우에는 이복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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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烏石山 사건은 영국 선교사가 烏石山에 있는 도교 사원을 교회용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부당한 방식으로 이를 취득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막 돌아온 辜鴻銘에게 烏石山 사건이 특별히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不義와 거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바로 “자기희생의 메시지를 설파하려고 중국 에 온” 선교사들이라는 사실이었다.31) 또한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에서 오히려 영국의 식민부 관료들이 선교사들보다도 더욱 정의를 구 현하는 모습을 辜鴻銘은 목격했다. 이는 그에게 중국이 당면한 위험의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다. 즉 중국에게 더욱 위 험한 존재는 군함이 아니라 군함 뒤에 있는 선교사들이라는 것이었다.

이후에 辜鴻銘이 영문 잡지에 투고한 상당수의 글들이 중국에서 활동 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그의 인식에 서 비롯되고 있었다. 1879년 말에 辜鴻銘은 烏石山사건을 보고 느낀 분노를 시에 담아 Hongkong Daily Express에 기고한다. “백 척의 군 함”을 등에 업고 “말과 행동이 다른” 선교사들의 위선을 통렬히 비난 하면서 “갈릴리의 어부들을 이끌었던 정신”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선교사들을 향하여 辜鴻銘은 다음의 구절로 시를 끝맺고 있다.

우리는 성직자들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다.

머리를 민 성직자건 아니건 간에.

....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학과 우리를 성장시킬 지식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은 심장과 정의를 가진 통치자

회호리 바람이 먼지들을 날려 보내듯이 우리 땅에서 당신들을 쓸어버 리기 위하여.32)

31) 烏石山 사건에 대한 辜鴻銘의 시 참조. Hongkong Daily Express (1879).

32) 이 시는 1879년 말에 Hongkong Daily Express에 출판된다. 고훙명의 시는 서구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당시 주중 영국대사인 Thomas Wade는 이 시를 읽고 저자를 수소문하여 辜鴻銘을 찾아낸 후에 그에게 북경 영국 공사관에서 자신의 비서로 일할 것을 제의한다. Li Hui-min, “Ku Hung-ming:

Homecoming(2)”,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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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879년 말에 辜鴻銘은 이미 ‘우리’와 ‘너희’로 편을 나누고 있었다. 자신을 중국인 속에 포함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향한 그의 분노가 곧바로 辜鴻銘을 중국 고전의 세계, 즉 중국 문명의 세계로 이끌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에 馬建忠을 만날 때까 지 “지난 3년 동안” 辜鴻銘은 여전히 “중국인의 사고와 철학에 대하 여 아무것도 모르는” “가짜 서구인”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馬建忠이 전달한, 중국 고전과 성경의 가치가 같다는 메시지, 즉 성경이 했던 역할을 중국 고전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선교사들이 굳이 중국에 남아있을 이유를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1879년에 선교 사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辜鴻銘의 마음속에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

의 정체성이 1881년에 馬建忠과의 만남을 통해서 중국 고전의 새로운 가치-중국 고전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자 辜鴻銘 은 중국 문명의 세계로 서슴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馬建忠과 만난 지 3일 만에 辜鴻銘은 싱가포르 식민부에 사표를 던 져버리고 곧바로 고향인 페낭으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그는 가족들에 게 “앞으로 변발을 기를 것이며 중국옷을 입을 것”임을 선포한다. 영 국 국적의 혼혈 화교인 辜鴻銘이 문화적 중국인으로서 다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Ⅳ. 중국 문명과 국가종교

중국 고전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후에 나타나는 辜 鴻銘의 저술들 속에서 핵심적 내용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상 이 믿음은 앞으로 전개될 辜鴻銘의 삶 자체를 이끌어가는 결정적 요인 이 되기도 한다. 1881년에 馬建忠과의 만남 이후에 辜鴻銘은 영자신 문인 子林西報에 「중국학」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중국 문명을 서구 인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4년 후인 1885년에 호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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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張之洞의 휘하에 들어가 양무운동과 관련된 통역과 번역사무를 보 면서 동시에 중국의 고전을 연구, 번역하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1898년에 論語의 영문 번역본을 출간하고 있으며 이어서 1906년에 中庸, 1908년에 大學의 영문 번역본을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 고전의 영문 번역을 통해서 辜鴻銘이 서구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중국 문명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 번역본들이 전달하고 있 는 메시지는 辜鴻銘을 중국인으로 재탄생 시켰던 계기--중국 고전과 성경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자각--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 까?

辜鴻銘은 당시에 서구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었던 제임스 레게 (James Legge, 1815-1897)의 四書 번역본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고 믿었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고자 論語, 中庸, 大學을 번역했 다고 한다. 그렇다면 辜鴻銘이 제임스 레게의 번역본에서 발견한 치명 적인 오류란 무엇일까? 두 사람의 번역에 내재된 근본적인 차이점을 찾아내기 위하여 辜鴻銘과 제임스 레게의 사상적 배경을 먼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제임스 레게는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중국 선교사이 었고 이들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환멸이 바로 辜鴻銘을 중국인으로서 재탄생시킨 동력이었다. 중국인의 개종에 헌신해온 기독교 선교사인 제임스 레게와 중국 고전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중국 고전이 성경과 동등한 기능을 가진다는 믿음을 가진 辜鴻銘이 四書를 번역할 경우에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개념이 바로

‘天’과 ‘天命’이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아래의 두 인용문은

論語와 中庸에 나오는 ‘天’과 ‘天命’에 대한 구절과 이에 대한 辜 鴻銘과 레게의 번역을 보여준다.33)

論語, 「季氏」: 孔子曰 君子有三畏, 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 道.

33) 다음에 인용될 구절과 이에 대한 번역은 고영희, 진성수의 앞의 논문 p.

168면에서 재인용. 인용문에서 강조는 본 저자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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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레게: There are three things of which the superior man strands in awe. He stands in awe of the ordinances of Heaven. He stands in awe of great man. He stands in awe of the words of sages.34)

辜鴻銘: There are three things which a wise and good man holds in awe. He holds in awe the Laws of God, persons in authority, and the words of wisdom of holy men.35)

中庸, 「第一章」: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제임스 레게: What Heaven has conferred is called the Nature; an accordance with this nature is called the Path of duty; the regulation of this path is called Instruction.36)

辜鴻銘: The ordinance of God is what we call the law of our being. To fulfill the law of our being is what we call the moral law. The moral law when reduced to a system is what we call religion.37)

위의 論語 인용문에서 공자는 군자가 敬畏하는 세 가지 대상을 열거하면서 그 중에서 첫 번째로 天命을 거론하고 있다. 이 때 레게는 天을 “Heaven”으로 그리고 天命을 “the ordinances of Heaven”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辜鴻銘은 이러한 레게의 번역을 거부하며 天을

“God”으로 그리고 天命을 “the Laws of God”으로 번역하고 있다. 레 게가 기독교의 유일신(God)과 유교의 天(Heaven)을 다른 언어로 분명 하게 구분하고 있는 반면에 辜鴻銘은 유교의 天을 기독교의 유일신과 같은 어휘인 God으로 표현함으로서 유교의 天이 기독교의 유일신과 동일한 가치를 지님을 알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게와 辜鴻銘의 불일치는 이후에 이어지는 天命에 대한 번역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

34) James Legge, The Chinese Classics (台北: 敦煌書局, 1977). p.313; 고영 희, 진성수, 앞의 글, p.168.

35) Ku Hung-Ming, “The discourses and Saying of Confucius” (辜鴻銘文 集 下, 海南出版社, 1996), p.475; 고영희, 앞의 글, p.168.

36) James Legge, 앞의 글, p.383.

37) Ku Hung-ming, “the Universal Order or Conduct of Life”, 辜鴻銘文集

下,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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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辜鴻銘은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율법(“Laws of God")을 그대로 가져와 天命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레게는

“ordinances of Heaven”이라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의 율법 (Laws of God)과 유교의 天命이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한 것임 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레게의 번역은 유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고 바로 이러한 레게의 전제를 辜鴻銘 은 치명적인 번역 오류의 근원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中庸 인용문에서는 天命과 더불어 유교의 핵심개념들-性, 道, 敎-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레게와 辜鴻銘 번역의 불일치가 궁극적 으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天, 性, 道, 敎에 해당하는 어휘로서 레게는 Heaven, Nature, Path of Duty, Instruction을, 辜鴻銘은 God, law of our being, moral law, religion 을 선택하고 있다. 레게가 선택한 어휘들은 유교의 사상을 神이나 宗 敎와 상관없는 자연적, 세속적 본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는 것들인데 반하여 辜鴻銘은 노골적으로 유교를 宗敎(religion)로 번역하고 있다.

辜鴻銘에 의하면 “神의 명령(天命)은 존재의 법칙(性)이 되고 존재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도덕 법칙(道)이며 도덕 법칙이 제도화 된 것이 종교(敎)”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儒敎는 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인간을 도덕적으로 성화시키는 “종교”라는 것이다. 중국 고 전의 번역을 통하여 辜鴻銘이 서구 세계에 전달하려고 한 메시지는 중 국 고전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바로 그 믿음이었다.

이러한 辜鴻銘의 메시지는 1915년에 출판된 그의 마지막 저서 

The Spirit of Chinese People

에서 완전한 이론의 형태로 성장되어 나타난다. 당시 서구의 지식계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은 오늘까지도 辜鴻銘의 대표적 저술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영어와 중국 어로 된 두 개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명인 “The Spirit of Chinese People”이 “무엇이 중국인의 정신(본질)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면 중국명인 “春秋大義”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주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인의 정신, 즉 중국 문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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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原華)은 유교에, 더 나아가 유교의 “春秋大義”에 있다는 것이 다.38)

 The Spirit of Chinese People 에서 辜鴻銘은 유교의 위대함

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은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일반적인 유럽의 시각 에서 볼 때 정확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유교의 위대함이 바로 여 기, 즉 종교가 아니라는데 있다고 말한다. 사실, 유교의 위대함은 종교 없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39)

“중국인들은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자가 중 국인에게 사회종교 또는 국가종교를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辜鴻 銘은 주장한다. 바로 이 국가종교야말로 공자가 중국 문명에게 제공한 가장 큰 공헌이라는 것이다. 辜鴻銘에 의하면 공자는 그의 생애의 마 지막 책인 春秋에서 국가종교가 무엇인지 가르치려 했다. 공자가 자 신의 책의 이름을 春秋라고 지은 것도 “춘추시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했던 진정한 도덕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싶었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40) 春秋는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와 문명의 역사 이다.” 공자는 이렇게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와 문명이 가져온 모든 고통과 참혹함의 진정한 원인을 추적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진정한 개념이 없다는 데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다시 말 해 “사람들이 국가, 국가의 지도자, 그리고 그들의 통치자에게” “마땅 히 행해야 할 의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와 문명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1) 사람들로 부터 “자신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 즉 (사회와 국가에 대한) 도

38) “진정한 중국인(real Chinese)”은 The Spirit of Chinese People에서 중 국 문명의 본질을 체화한 중국인으로서 자주 사용되어지는 개념이다.

39) Ku Hung-ming, The Spirit of Chinese People, with an essay on Civilization and Anarchy (Peking: the Commercial Press, 1922), p.16.

40) 앞의 글, pp.26-27.

41) 앞의 글,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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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 행위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은 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 간 안에 내재된 도덕심(Honor)”이라는 것이 공자의 국가종교가 기독 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辜鴻銘은 강조한다. 신의 권위에 복 종하여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서구 교회의 역할을 중 국의 국가종교에서는 가정과 학교가 “인간 안에 내재된 도덕심”에 의 존하여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 때 이 역할은 일차적으로 가정이, 그리 고 부수적으로 학교가 담당한다. 이는 왜 중국에서 각 가정마다 조상 의 위패와 사당이 있으며 학교마다 사당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것이 다.42) 이러한 국가종교 덕분에 중국에서는 공자이후 2500년 동안 오 늘의 유럽에서와 같은 군국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辜鴻銘은 주장한 다. 물론 중국에 전쟁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쟁들은 어 쩌다 발생하는 것이었지 유럽과 같이 항상 전쟁의 위협을 마주하며 살 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국가종교는 성직자와 경찰 또는 군대 없이도 중국인들로 하여금 질서를 유지하게 할 수 있게 했 던 종교”가 될 수 있었다고 辜鴻銘은 결론짓는다.43)

V. 결론

辜鴻銘의 사상이 중국 근대 지식계의 형성에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 였는가의 문제는 학계의 진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해 왔다. 이는 아마도 그의 주장들이 정치적 사상적으로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나타나 기 때문에 중국 지식계의 ‘근대’를 탄생시키는데 긍정적 역할을 했다 고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辜鴻銘은 그의 유명세에 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하고 싶어 했던 메시지의 내용보다 그의 ‘기괴 한’ 외모와 말에 더 많은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 모른다. 辜鴻

42) 앞의 글, p.64.

43) 앞의 글, pp.III,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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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은 황제제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에도 청의 변발을 고수 하고 청의 유민으로 자처하면서 청 황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 공화 혁명 이전과 이후를 통하여 그는 일관되게 중국 문명, 즉 유교 문명의 숭배자이었고 그 문명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지켰다. 이런 그의 행동과 사상이 중국 지식계의 ‘근대’를 탄생시키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중국 지식계의 탄생을 정치적 시각이 아닌 문화적 또 는 문명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辜鴻銘의 역할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 다. 중국의 근대 지식계를 창출함에 있어서 ‘중국 문명과 서구 문명의 관계’ 또는 ‘전통과 근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辜鴻銘 역시 동시대의 많은 개혁적 지식인들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인식 선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양무파, 변법파, 혁명파, 그 리고 혁명 이후에 문화 보수주의자라 불리는 동방문화파와 학형파 등 의 중국 근대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 중국 문명의 수호와 서구 문명의 수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중국 문명과 서구 문명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당한 이견을 포함하고 있었지 만 말이다. 어쨌든 辜鴻銘 역시 중국 문명의 수호와 서구 문명의 수용 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이들 근대 중국 지식인 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辜鴻銘의 태도는 아래의 글 -변법파 지식인들의 維新運動과 이를 제 압한 서태후의 쿠테타에 대한 辜鴻銘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 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정말로 비극적인 일은 중국이 자신의 문명을 버리 고 근대 유럽 문명을 수용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체 청 제 국에서는 근대 유럽 문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단 한명의 지식인도 없다 는 사실이다. ··· 비성숙한 지식인(변법파)들은 황제의 한마디 명령으로 중국을 유럽화하기를 원한다. 만약 서태후가 자신의 조카의 손에서 통치 권을 빼앗고 이들 이른바 개혁파들을 강하게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면 세 계는 지금 중국이 자신의 집에 있는 가구를 모두 부수고 종이로 만든 가 구와 집에서 살려고 하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목격할 것이

(23)

다.44)

이 글을 정치적 시각으로 본다면 辜鴻銘은 서태후의 편에 서서 변 법파의 개혁을 좌절시킨 보수적 세력에 속한다. 그러나 문화적 시각으 로 본다면 辜鴻銘은 청 제국에 서양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 음을 한탄하는 개혁 지향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辜鴻銘은 변법 파들이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수용 하는 서구 문명이 ‘종이’로 만든 가짜이었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법파에 대한 辜鴻銘의 비판에 동의하건 안하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가 중국 문명만이 가치있는 문명이라고 고집하는 ‘수구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辜鴻銘의 태도는 李鴻章과 그 휘하의 양무 파에 대한 평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辜鴻銘에 의하면 李鴻章과 같은 양무파들은 중국 문명에 대한 오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인물들 이었다. 마치 “서구의 물질문명 숭배자들이 중국을 깔보듯이” 리홍장 과 같은 부류들은 “중국 문명만을 고집하며 서구 문명을 깔본다”는 것 이다.45) 李鴻章과 같은 인물은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라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진 만다린”일 뿐이라고 辜鴻銘은 비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개혁운동은 청일전쟁이후 李鴻章의 시대가 막 을 내리면서 시작된다고 辜鴻銘은 주장한다. “청일전쟁이후에 중국에 서 처음 개혁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때 이에 참가한 지식인들”을 辜鴻 銘은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과 “무늬만 그럴듯한 비 성숙한 지식인(snob-literati)”이 그들이다.46) 그리고 앞서 말한 변법 파 지식인들이 바로 후자에 해당하고 있다. “진정한 지식인”은 張之洞 과 같은 지식인들로서 이들은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사회 속에서 중국

44) 앞의 글, p.4.

45) Ku Hung-Ming, “Abolishing the Yellow Streak” (The North China Standard, http://thebamboosea.wordpress.com), pp.3-4.

46) 辜鴻銘은 snob-literati 대신 scribe(필경사)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즉 지식 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이를 베끼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앞의 글,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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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 생존해 나가기 위하여 서구 문명의 최상의 것들을 수용하려”하 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47) 결국 辜鴻銘 역시 “서구 문명의 최상의 것 을 수용”하려 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중국 문명의 본질을 지키고 서양 문명을 수용하기를 원했던 동시대의 다른 중국 지식인들과 같았 다. 그러나 이들 중국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선택했던 것과 달리 辜鴻 銘이 혁명이후에 淸流民의 길로 나아갔던 것은 “근대 유럽 문명을 진 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중국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의 판단 때문이었다. 중국 문명에 “서구 문명의 최상의 것”을 접목시 키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면 辜鴻銘에게 남은 길은 서구 문명에 “중국 문명의 최상의 것”을 접목시켜서 중국 문명을 구하는 것 이었다. 1915년에 The Spirit of Chinese People와 春秋大義의 두 이름을 가진 책이 출간된 이유이다.

중국 문명과 서구 문명의 ‘보편적’ 가치 속에 ‘근대’를 이끌어갈 생 명력을 불어넣으려 했던 辜鴻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중 국의 지식계라는 공간적 틀을 넘어서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辜鴻銘 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전통과 근대의 경계를 넘는 시각이 필요하다 는 인식은 1918년에 북경을 방문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辜鴻銘을 만난 후에 서술하고 있는 다음의 회고록에서도 재확인된다.

자그마한 체구의 노쇠한 학자는, 회색 변발을 여전히 그의 작은 붉은 청대 모자 아래 말려 올린 채, 많은 현명한 말을 했다. 그는 진정으로 현 명한 사람이었다 --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일 정 도로. 그는 전통시대 사람(old school)도 근대 사람(new school)도 아니 었다. 그는 그의 지성이 닿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시대를 초월한 존재 (timeless sort)이었다.48)

47) 앞의 글, p.4.

48) Frank Lloyd Wright, Frank Lloyd Wright: An Autobiography (Pomegranate Communications, 1932), pp.460-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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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摘要)

近代中国知识界与辜鸿铭的文化保守主义

-以辜鸿铭思想的形成过程和特征为中心-

金 秀 英

在近代中国的建设过程中, 特别是鸦片战争后西方文明很快地传入中国 的情况下, 中国传统文化履行着怎样的作用, 是中国知识界需要解决核心 问题中的一个. 围绕这个问题, 当时中国知识界出现了激烈的矛盾, 始与辛 亥革命后一群知识分子彻底拒绝传统文化并且要求全面接受西方文明. 这 些知识分子主张新文化运动, 要对中国社会发挥急速的影响力. 与之对抗 的则是呼吁传统文化价值知识人的阵营, 近代中国知识界以“传统”的作用 为中心明确地分裂开来. 这样的知识界分裂体现为从1920年代的‘东西文化 论争’到1930年代的‘中国本位文化建设论争’事实上这恰好贯通了中华民国 的历史. 中华民国知识界保持明确的战线以传统文化论争为中心的理由是, 在同等时期它衔接着自由主义和社会主义尖锐的政治矛盾. 不管是怎样的 理由围绕着‘传统’与‘近代中国的建设’问题而展开知识界的对立, 是中华民 国期间显露出最尖锐的事实. 但这样的对立并不仅限于中华民国时期, 中 华民国之前即从鸦片战争以后开始, 到清朝末期也是围绕接受西方文化和 传统文化价值的问题, 它成为了划分清朝知识界的主要指标. 清末时期的 政治势力洋务派, 变法派, 革命派的知识分子在建设自己理念基础的时候

‘传统文化’常常是重要核心部分内容. 不管怎么说这是近代中国知识界要完 成的作业, 即近代中国的建设过程中究竟怎样理解“传统”的意义和作用, 这样的问题好像依然也持续出现在中华人民共和国的历史当中. 细看1960 年代的文化大革命和1990年代人文精神论争的话, ‘传统文化的地位’依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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