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象臺座의 博山香爐, 그 이미지와 含意
林 玲 愛 (慶州大)
Ⅰ. 머리말
Ⅱ. 남북조시대 불상 대좌의 구성 : 박산향로, 獅子, 力士.
Ⅲ. 불상 대좌 박산향로의 상징
: ‘佛界 진입을 향한 열망’
Ⅳ. 삼단대좌로의 전환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동아시아 고대 불상의 대좌에는 ‘박산향로’가 있다. 6세기 불상 대좌 에서 박산향로가 등장하지 않는 예를 찾기 어려울 만큼 그 예가 많다.
박산향로는 늘 방형 대좌의 정 중앙에 놓이며, 그 좌우에는 각각 1구 씩의 獅子像과 力士像이 배치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박산향로가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5세기 중엽 불교미술이 점차 중 국화 되기 시작되던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6세기 전 시기에 걸 쳐 중국 전역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후 당대 가 되면 방형 불상 대좌의 중앙에 놓였던 박산향로가 사라지면서, 동 시에 대좌 자체가 상, 중, 하대로 구성된 삼단대좌로 바뀐다. 불상대좌 의 박산향로가 6세기라는 특정 시기에 특별히 유행하였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두고 단순히 불교에서의 ‘香華供養’과 관련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1) 물론 향을 사르는 일은 부처를 위한 대표적 공양 중 하나여서
현재에도 향로가 불단의 중앙에 놓일 만큼 예불에서 향공양이 차지하 는 역할이 크다. 하지만 단순히 부처를 향해 향화공양하기 위해 불상 대좌의 한 가운데 박산향로를 두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향로는 왜 하필 박산향로여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박산향로는 왜 5-6세기 불상 대좌에 국한되며, 이 후 7세기 삼단대좌가 등장하게 되면서 사라지는 가?2)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몇 가지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산향로는 전한 중기부터 후한에 걸쳐 중국 전역에 서 유행하였던 향로이다.3) 향로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애용되었던 박산 향로에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적지 않은 연구 성과가 있다. 이 글에서는 고대의 불상 조각가가 漢代에 특별히 유행 했던 박산향로를 5세기 중엽-6세기의 불상 대좌로 옮기면서 단순히 이미지만을 빌려 왔는지, 아니면 박산향로의 함의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지, 혹은 불상 대좌에 놓이면서 또 다른 상징성이 부여되었는지에 관해 알아보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필자의 의문은 단순히 향 공향을 의도하였다면 대좌의 박산향로가 왜 특정한 시기에 중국 전 역에서 등장하였다가 사라지며, 또 향로 중에서 하필 ‘박산향로’가 선 택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필자는 박산향로가 대좌 중앙에 놓인 것에서 5-6세기 동아시아 고대 불상이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어 떤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이는 지금껏 필자가 관심 가져
1) Schipper, Kristofer, The Taoist Body (Translated by Karen C. Duval,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22.
2) 물론 7세기 돈황석굴 당대벽화의 불상 대좌에서도 박산향로를 찾아볼 수 있 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큰 변화의 흐름에 주목하였으며, 몇몇 예외들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3) 중국의 박산향로에 관해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연구 성과가 있다.
이들 중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衫本惠司, 漢代の博山爐 ( 近畿古文化論攷, 奈良縣 敎育委員會, 1962), pp.525-536; 重田定一, 博山爐考 (史前學雜誌 15-3, 1959), pp.58-63; 조용중,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上),
(미술자료 53, 1993, pp.68-107;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下) (미술자 료 54, 1994), pp.92-140; 박경은, 博山香爐의 昇仙圖像 연구 (美術史學硏究
225·226, 2000), pp.67-101.
<도1> 불좌상, 4세기, 하버드대학 색클러미술관 (Rhie, Marylin M., Early Buddhist art of China and Central Asia 1, Leiden: Brill,
1999-2002, PL.1) 왔던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의 '전형'과 '변형'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一端이다.4)
Ⅱ. 남북조시대 불상 대좌의 구성
: 박산향로, 獅子, 力士
5-6세기 불상의 대좌는 예외 없이 방형의 대좌이다. 이 방형의 불상 대좌 에 향로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때는 대 략 5세기부터이다. 특히 6세기 방형 대 좌 중앙에는 일관되게 박산향로가 놓 인다. 물론 이보다 앞선 오호십육국시 기의 불상 대좌도 방형이었지만, 이 방 형 대좌에는 중앙에 연꽃이 있거나 혹 은 연꽃이 꽂힌 화병이 있고 좌우에 사자 한 쌍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5) 널리 알려진 하북성 석가장에 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동불좌 상의 대좌가 대표 예인데, 좌우의 사자 상 사이에 화병에 꽂힌 연꽃이 놓여있
다(도1). 같은 시기 유사한 예는 적지 않다. 이후 대략 5세기 중엽 경 의 불상 대좌에서부터 박산향로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太安3年(457 년)銘 석불좌상은 이에 해당하는 초기 예 중 하나이다(도2).6) 물론 좌
4) 임영애, 교류로 본 한국의 불교조각 (학연문화사, 2008), p.21.
5)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사자상은 4세기 오호십육국시대 불좌상의 방형대좌에 서 처음 보인다. 불교미술 및 능묘의 사자상에 관해서는 임영애, 月淨橋·春陽 橋의 ‘獅子 石柱’, 이미지와 의미 (신라문화 43, 2014), pp.120-127을 참조하 기 바란다.
<도2> 太安3年(457년)銘 석불좌상, 높이 41.5cm, 東京 개인소장 (松原三郞, 中國佛敎彫刻史論, 東京: 吉川弘文館, 1995, p. 27a)
<도3> 장천리1호분 예불도 모사 우의 사자상은 그 자리 그대로이며, 달 라진 것은 중앙의 화병이 사라지고 박 산향로가 등장한 것이다. 중앙의 커다란 박산향로를 향해 인물이 양 옆에 서있고, 그 뒤로 사자가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를 꿇어 엉덩이 를 붙인 소위 ‘蹲距形’의 자세로 앉아 있다. 동일한 구성은 고구려 장 천리 1호분의 예불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도3). 운강석굴에도 적지 않은 수의 향로가 등장하는데, 역시 불감 하단중앙이나 탑형 부조 하 단 중앙에 묘사되어 있다. 중앙의 커다란 박산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공양자들이 쭉 늘어서 있기도 하고, 앞서 본 것처럼 좌우 한 쌍의 사 자상과 함께 구성되기도 한다(도4).7)
6) 中國 新田集 소장의 금동불좌상을 가장 이른 예로 볼 수도 있지만(조용중, 앞 의 글, 1994, p. 102의 圖57),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고,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이 글에서는 제외한다.
7) 필자는 지상사원, 석굴사원이나 佛碑像과 같은 각종 조상비 등이 서로 규모는 다르지만, 조각을 배치하는 원리는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2차원의 공간에 새겨진 각종 조상비는 3차원의 지상사원이나 석굴사원을 개착하기 어 려운 경제적 여건일 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며, 이들을 축소된 지상사원 혹은
<도5> 박산향로, 하북성 滿城 劉勝墓, B.C.2세기 후반, 높이 26cm, 석가장 하북성박물관
(임영애)
<도4> 운강석굴 제12굴 주실 남벽제2층서측 불감 (中國石窟 雲岡石窟 2, 平凡社, 1989, 圖9)
대좌 중앙의 박산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대에 유행하였던 통상적인 박 산향로의 모양 그대로이다(도5).8) 아래로부터 향로를 받치는 승반, 가 늘고 긴 기둥, 그리고 山모양 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지 차이가 있 다면 향로 주위로 연꽃이 피어오르고 있다든지, 이 향로를 누군가가 받들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향로를 머리에 이기도 하고, 양 손으로 받들기도 하며, 어떤 경우는 2명의 인물이 함께 향로를 받든다. 사천성 성도 출토 齊 永明8年(490)의 불상 대좌에도 박산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도6, 7). 이 인물은 모든 경우에 다 등장하는 것은
석굴사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8) 東晉 孝文帝(373-396) 張敞이 지은 晉東宮舊事에 비로소 박산향로라는 명칭 이 시작되었고, 이후 6세기 전반 梁 昭明太子, 銅博山香爐賦와 傅縡,博山香 爐賦의 기록 등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박산향로’라는 명칭이 정작 한 대 문헌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어 이 향로를 ‘박산향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향로의 명칭은 크게 중요하 지 않으며, 다만 이 향로의 특이한 형상이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에 더 큰 관심 이 있다.
<도6> 석조상, 남조,제(永明8年 490년), 사천성 성도시 서안로 출토, 64×45.6cm,
사천성 성도시 문물고고연구소 (NHK,
中國文明展, 2000, 圖99)
<도7> <도6>의 하단 부분 아니며, 확보된 대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본격적인 유행은 6세기부터이다.
이때부터는 박산향로의 크기가 커 져 방형 대좌에서 향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대좌마다 새겨진다.
6세기 불상 대좌에는 남조와 북조를 막론하고 나란히 박산향로가 쓰였 다. 이 시기 불상 대좌에서 향로가 놓이지 않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그 숫자가 많다. 이들 중 특히 2012년 하북성 임장현 習文鄕에서 대거 출토된 백옥상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기년이 있는 예가 많고, 이곳이 동위, 북제의 수도인 鄴에 인근한 사찰로 6세 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9) 역시 승반 위 에 기둥, 연화문의 爐身과 山모양 뚜껑으로 구성된 박산향로가 대좌 중앙에 배치되어 있으며, 승반에서 피어오른 연꽃이 향로를 감싸고 있
9) 2012년에 출토된 업성 불상을 조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신 중국사회 과학원 고고연구소 柳慶柱 前소장님께 이 글을 빌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河北省文物硏究所 鄴城考古隊, 河北臨漳縣鄴城遺 址北吳藏佛敎造像埋葬坑的發現與發掘 (考古 2012-4), pp.3-6.
<도8> 道智造釋迦像, 東魏 武定4年(546), 2012년 하북성 임장현 習文鄕 출토, 업성박물관 (임영애)
<도9> 李迴香造太子思惟像, 東魏 武定2年(544), 2012년 하북성 임장현 習文鄕 출토, 업성박물관 (임영애)
기도 하다(도8, 9). 또 몸을 반쯤만 내민 동자가 머리와 양 손으로 향 로를 이고 있다(도10). 동일한 구성은 남조의 齊, 梁代 불상이나 보살 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역시 단조롭게 여겨질 만큼 패턴은 모두
<도11> 석조상, 梁 中大通5年(533), 사천성 성도 만불사지 출토, 사천성박물원 (임영애)
<도10> 대좌, 東魏, 2012년 하북성 임장현 習文鄕 출토, 업성박물관 (임영애)
유사하다. 대표적으로는 사천성 성도 만불사지에서 출토된 梁 中大通5 年(533)像이 있는데, 역시 동자형 인물이 머리에 커다란 박산향로를 이 고 앉아 있다(도11). 이들은 대부분 통통하고 배가 볼록한 전형적인 동 자형으로, 양대에 번역된
阿吒婆拘鬼神大將上佛陀羅尼經
에는 머리에 향로를 이고 공양하는 이들을 天人이라 하였다.10)향로를 중앙에 둔 대좌의 형식은 불상과 보살상을 불문하고 동일한
패턴을 지니고 있어 특정 존명에 한정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석가상, 아미타상, 미륵보살상, 관세음보살상 등 다양한 존상의 대좌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박산향로가 등장한다. 이처럼 특정 존상을 가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역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면 6세기 불상 대좌의 박산향로는 존상과 지역을 초월하여 크게 유행하였던 현상임이 분명하다. 이들 중 명문이 남아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주로 조상과 부모를 포함한 가족의 추선공양을 위한 것임이 확인된다.11) 이는 이어서 살펴볼 도교의 造像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가족의 구제를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단순히 죽은 이를 사후세 계에서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가 죽은 이의 죄를 대신 없애주어 천상계나 인간계에서 환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 미이다.12) 물론 이러한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살아있는 자, 즉 후손의 안전과 영위를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13)
10) T1238, 1:0180b24, 梁失 譯, 阿吒婆拘鬼神大將上佛陀羅尼經 一卷, “神前作一 天頂戴香爐供養”; 같은 내용은 善無畏(637-735)가 번역한 阿吒薄俱元帥大將上 佛陀羅尼經修行法儀軌에도 있다(T1239, 中:0193c16 卷中, “神前作一天頂戴香 爐供養”).
11) 예를 들면, 이 글의 도6은 사천성 성도 서안로에서 출토된 齊 永明8年(490) 불상인데, “齊永明八年庚午歲十二月十九日比丘釋法海與母爲亡父造彌勒成佛石像 一驅願現在眷屬七世父母龍華三會希登初首一切衆生普同斯願”의 명문이, 하북성 景縣에서 수집된 武定8年(550) 불삼존상 대좌에는 “武定八年歲次午三月卅日丁 卯···淸信士佛弟子張道明夫妻造白玉像一”의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12) 森由利亞, 道敎と死 -天上の權威と死者世界 (吉原浩人 編, 東洋における死 の思想, 東京: 春秋社, 2006), p. 78.
13) ‘나는 삼가 땅에 엎드려 章을 올리노니, 素車白馬將軍, 兵士 10만인에게 청하 며, 또 太玄君 1인, 官將 120인 등이 일제히 강림하여 死者의 혼이 영원히 三 塗(지옥, 餓鬼, 畜生)을 떠나 그 이름이 六天의 명부에 기록되기를 청하며, 중 죄로부터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太玄眞符>를 天地水 三官의 정부, 女靑勅書, 地下二千石, 丘丞墓伯, 十二塚神, 泰山二十四獄, 東嶽泰山地獄, 中都地獄··· 라 는 자들에게 내려, 완전하게 死者를 해방하고, 冥界를 떠나 福堂에 昇天하여 의식을 받아 편안히 살고, 산 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 오’(“···放遣亡人永離幽塗 昇天福堂 衣食自然 不得注訟生人恩惟”, 赤松子章 曆 6, 正統道藏 11-223); 조성우, 中世 中國 生死觀의 一面과 道敎: 殃禍의 觀念을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5, 2011), pp.185-222.
<도12> 도교삼존상, 北周 天和3年(568), 東京藝術大學大學美術館(大阪市立美術館,
道敎の美術, 2009, 圖72)
대좌의 박산향로는 꼭 불상 대좌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어서 도교 의 碑像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도교는 5세기 무렵 종 교로 체계화되면서 노자의 이미지가 형상화되었지만, 역시 6세기에 가장 많은 예가 남아있다. 太上老君이라 고도 불리는 노자의 이미지는 부처 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머리에 관을 쓰고 있고, 수염이 있으며, 오 른손에 부채 즉 麈尾를 들었다는 정 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14)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서 안비림박물관의 노자·석가 碑像이 다.15) 북위 熙平2年(517)에 제작된 높이 2미터의 碑像인데, 앞면에는 노자의 상이, 뒷면에는 부처의 상이 새겨져 있다. 앞서 언급한 머리의 관과 수염의 차이가 없었다면 노자 상과 불상을 판별하기 어렵다. 노자 와 부처의 대좌 부분에도 역시 동일 한 박산향로가 새겨져 있다. 도교상 만 단독으로 제작된 경우에도 대좌에는 늘 동일한 박산향로와 사자가 있다. 동경예술대학 소장 天和3年(568) 石造老君像에도 머리에 관을 쓰 고 오른손에 주미라고 불리는 부채를 든 노군 아래 역시 박산향로와 사자로 구성된 대좌를 확인할 수 있다(도12).
14) 도교의 碑像과 불교 碑像의 상통하는 특징에 관해서는 James, Jean M.,
"Some Iconographic Problems in Early Daoist-Buddhist Sculptures in China”
(Archives of Asian Art 41, 1989), p.72를 참조하기 바란다.
15) Stephen Little, Taoism and the Arts of China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0), pp.166-168.
<도13> 己丑銘 아미타불비상, 689년경, 높이57.5cm, 국보 제367호, 국립청주박물관
(임영애)
<도14> <도13>의 하부 (임영애)
한편 통일기 신라의 불상에서도 동일한 구 성을 찾아볼 수 있다.16) 바로 연기지역의 연 화사 무인명(678)불비상, 기축명 불비상(689년), 연화사 석조칠존상인 데, 향로는 연꽃 받침과 기다란 기둥,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동체로 구성되어 있다(도13, 14). 앞서 5세기 중-후반경의 장천리 1호분 예불 도 대좌에서도 동일한 구성이 있었지만, 이후 연기지역 불비상의 등장 이전까지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6세기 한국의 불교조각이 영성하여 동 일한 형식의 대좌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형식의 불비상이 존 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 이러한 구성의 대좌가 유행하는 시 기가 6세기이며, 이미 7세기경에는 대부분 삼단대좌로 전환되었지만 永淳元年(683)銘佛碑像처럼 7세기 후반까지도 잔존했던 점을 상기하면
16) 한국에서 불교조각에 표현된 향로에 주목한 연구는 두 편이 있다. 임소연, 新羅 下代 香爐 圖像 硏究: 石造物에 나타난 浮彫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 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8), pp.1-144; 지강이, 우리나라 초기 불상의 기능 과 그 의미: 불교조각에 나타난 향로를 근거로 하여 (인문사회과학연구 10-1, 2009), pp.43-58. 이 중 뒤의 논문은 불교조각 내에서 향로가 놓인 위치 나 박산향로와 병향로 등을 구분하지 않고 기술하고 있는데, 대좌에 놓인 향로 와 승려나 天人이 손에 쥐고 있는 병향로를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는 곤 란하다고 생각한다.
기축명 불비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17)
지금까지 불상의 대좌에 박산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상, 그리 고 그 양끝에 역사상이 배치되는 구성을 보았다. 이들이 서로 어떤 관 계에 있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만, 이들이 서로 어떠한 연 관성을 지니는지 단정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조합이 6세기 불교조각의 대좌에서 일관되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사자 상의 경우 이미 4세기 불상부터 박산향로의 등장과 무관하게 대좌의 좌우에 등장하던 것이어서 사자와 박산향로를 관련지어 생각하기는 어 렵기 때문이다. 통상 사자는 벽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낙양가람기
에 “4월 4일 이 불상이 行像을 나갔는데 악을 물리치는 獅子가 그 앞을 인도하였다”라는 구절을 주목해 볼 수 있 다.18) 또
益州名畵錄
에도 남조 양무제시기의 저명한 화가인 장승요 (506-549)가 그린 사자그림이 벽사와 재앙을 몰아내는 기능이 있었다 고 전한다.19) 물론 대좌에 한 쌍의 사자상을 두는 경우는 이미 인도의 불좌상 대좌에도 있기는 하지만 그 예가 드물어 대좌에 빈번하게 쓰일 만큼 인기를 끌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4-6세기에 걸쳐 중국 불상 대좌에는 사자상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필자는 이를 漢代 화상석에서 서왕모가 앉아있던 龍虎座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여지가 있 다고 본다. 서왕모의 자리 좌우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과 호랑이를17) 연기지역 불비상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논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곽 동석, 연기지방의 불비상 (백제의 조각과 미술, 공주대학교박물관·충청남 도, 1991), pp.173-210; 정은우, 연기 불비상과 충남지역의 백제계 불상 (백 제문화 32, 2003), pp.89-98; 김주성, 연기불상군 명문을 통해 본 연기지방 백 제유민의 동향 (선사와 고대 15, 2000), pp.61-83; 박영민, 충남 연기지역 납석제 불상군 연구 (동악미술사학 11, 2010), pp.125-155; 홍련희, 7세기 연기지역 아미타불상의 서방정토도상연구 (불교미술사학 11, 2011), pp.71 -105.
18) 洛陽伽藍記 卷1, 城內 長秋寺, “作六牙白像負釋迦在虛空中 莊嚴佛事 悉用金 玉 作工之異 難家具陳 四月四日此像常出 闢辟邪師子導引其前.”
19) 陳耀文 撰, 天中記 卷60 (江蘇廣陵古籍刻印社, 1988), 黃攜復, 益州名畵錄 참조.
두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고대 불상의 대좌 좌우에 한 쌍의 사자상 을 배치하는 형식이 특별히 유행하였던 것은 아닌가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고를 마련하려 한다. 대좌 양끝의 금강역사상도 마찬가지이다.20) 6세기 대좌의 양 끝에 금강역사상이 배 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이 시기 금강역사상의 인기가 특별히 높았음 을 알려준다. 이와 같이 중앙의 박산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사자상과 금강역사상이 배치되는 구성은 이 시기 대좌의 한 패턴으로 자리 잡게 되지만, 이들 간의 연계성을 찾기는 어렵다.
Ⅲ. 불상 대좌 박산향로의 상징
: ‘佛界 진입을 향한 열망’
5-6세기 불상 대좌의 중앙에 왜 하필 ‘박산향로’가 놓이는가? 부처를 위한 대표적 공양 중 하나인 ‘향공양’이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면서 이 를 대좌에 표현한 것인가?21) 같은 맥락으로 불교에서 향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가장 으뜸이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인가? 또는 향로는 향을 피워 악귀를 쫓음으로써 부처가 머물고 있는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기구로 인식했 기 때문인가?22) 아니면 선학이 제시한 견해처럼 박산향로의 외형이 불교의 상징인 연화, 특히 ‘연화가 반개되지 않은 봉우리’와 닮아서인 가?23) 다시 말해 ‘중국 향로로 남북조시대까지 사용되고 있던 박산향 20) 7세기 사천왕상이 유행하기 이전, 6세기 사자상과 금강역사상이 동반되는 양 상에 관해서는 임영애, 황룡사 중금당 佛眷屬 16존상의 복원 -불제자상, 금강 역사상과 獅子像 그리고 공양자상- (신라사학보 38, 2011, pp.318-329)을 참 고할 수 있다.
21) Schipper, Kristofer, 앞 글, p.22.
22) 임소연, 앞 글, p.22.
23) 조용중 선생의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下) (미술자료 54, 1994), p.96)는 박산향로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불상대좌의 박산
로의 爐身이 우연하게도 불교의 상징적인 꽃인 연화 봉오리와 닮아 있 었던 관계로 향로공양의 향로로 많이 채택되었으며,24) 마침 6세기 불 교가 널리 확산되면서 향을 사르는 그릇인 향로의 수요가 늘어난 것이 대좌의 박산향로 유행을 가속화시킨 결과인가?25)
박산향로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전되었다. 특히 1993년 백제금동대 향로가 발견된 이후 한국에서의 박산향로 연구는 크게 진척되었고, 일 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국내외의 연구 성과도 많다.26) 선학들의 연구는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박산향로’에 ‘昇仙사상’이 함축되어 있다는 큰 인식 틀에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한다.27) 박산향로 가 승선사상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 형상이 화상석이나 중국 고대 문헌에서 이야기하는 곤륜산과 닮아있기 때문이다.28) 고대 중국 향로가 연잎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을 두고 향로를 연화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 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조용중, 앞 글, 1994, p.96).
24) 조용중, 연화화생에 등장하는 장식문양 고찰 (미술자료 56, 1995), pp.
81-125; 이후 연화화생산, 즉 ‘연꽃으로부터 산이 화생되는 도상’이 불교 전래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수정하였다(조용중, 蓮華化生山 도상과 그 교호에 관 한 연구 , 미술자료 60, 1998, p.62, 각주18).
25)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박산향로는 기본형은 그대로이지만 동체에 연화가 결부 된다. 이를 ‘연화형박산향로’라고 일컫고 기왕의 박산향로와 구분지우려 한 선 학의 연구결과가 있다(조용중, 앞 글, 1994, p.94).
26) 백제금동대향로를 미술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대표적인 국내 연구 성과로는 최응천, 백제 금동용봉향로의 조형과 편년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 로 발굴 10주년 기념 연구논문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3), pp,102-123; 주경 미, 백제 불교금속공예의 양상과 특징 (인문사회과학연구 10-1, 2009, 부경 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pp.26-29; 조용중, 백제금동대향로에 관한 연구 -도상 해석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65, 2000), pp.1-34; 김자림, 박산향로 를 통해 본 백제금동대향로의 양식적 위치 고찰 (美術史學硏究 249, 2006, pp.141-162 등이 있다. 박산향로가 승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 는 이미 널리 알려진 보편적 결론이지만, 이를 보다 면밀하게 검토한 연구로는 박경은의 글을 꼽을 수 있다(박경은, 앞 글, pp.67-101).
27) Erickson, Susan N., “Boshanlu –Mountain Censers of the Western Han Period: A Typological and Iconological Analysis” (Archives of Asian Art 45, 1992), pp.6-28.
28) 박산향로가 곤륜산을 상징한다는 대표적인 견해는 重田定一의 앞 글(p.59)인 데, 필자는 그의 견해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인들은 곤륜산이 바로 대지의 중심이며, 그곳이 세상의 지축이라고 생 각했다.29)
爾雅
나
淮南子
를 비롯한 중국 고대 문헌에 따르면 곤륜 산은 삼단의 구조이며, 각 단에 오를 때마다 신비로운 능력을 부여 받 으며, 정상에 이르면 결국 天帝가 머무는 천상세계로 진입하게 된다고 여겼다.30) 서왕모는 바로 그 정상에 거주하는데,31) 곤륜산의 정상에 서왕모가 자리한 형상은 이미 漢代 화상석에 잘 표현되어 있다. 흥미 롭게도 화상석에 새겨진 서왕모의 곤륜산은 앞서의 문헌기록대로 삼단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양은 흡사 불상의 대좌와 같다. 삼단의 구성 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허리가 잘록한 형상을 하고 있어 더욱 흥미 롭다. 예컨대 후한대 강소성 서주 화상석의 상단에는 허리가 잘록한 높은 대좌 위에 서왕모가 앉아 있다(도15). 이들 서왕모가 앉아 있는 곤륜산의 이미지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불상의 대좌와 유사하 다.32) 즉 반원형의 상대와 하대, 폭이 좁은 기둥모양의 중대는 불상의 29) 太平御覽 卷38, 河圖括地象 , “崑崙之山爲地首 上爲握契 滿爲四瀆 橫爲地軸 上爲天鎭 入爲八柱.”
30) “곤륜의 언덕은 아래로부터 倍의 높이까지 올라가면 이곳을 凉風의 山이라 일컫는다. 여기까지 오르면 不死를 얻는다. 이어서 그 倍의 높이까지 올라가면 懸圃의 山에 이른다. 여기까지 오르면 ‘靈’이 되어서 바람과 비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된다. 다시 倍의 높이를 오르면 거기가 上天이며, 그곳에 이르면
‘神’이 된다. 이곳을 太帝(天帝)가 머무르는 곳이라 일컫는다”(爾雅 釋丘, “丘 一成爲敦丘 再成爲陶丘 再成銳上爲融丘 三成爲崑崙丘”; 淮南子 墬形訓, “崑 崙之丘 或上倍之 是謂凉風之山 登之而不死 或上倍之 是謂懸圃(之山) 登之乃靈 能使風雨 或上倍之 乃維上天 登之乃神 是謂太帝之居”); 南一朗, 西王母と七夕 傳承 (東京: 平凡社, 1991), p.146.
31) 山口柚美子, 西王母と崑崙山 -その結合過程を檢討する (漢文學會會報 16, 國學院大學, 1971); 曾布川 寬, 崑崙山と昇仙圖 (東方學報 51, 京都, 1975;
中國美術の圖像と樣式 硏究篇, 東京: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pp.63-117 재 수록); 曾布川 寬, 崑崙山への昇仙 (東京: 中公新書, 1981); Fracasso, Riccardo, “Holly Mother of the Ancint China: A new Appreoach to the Hsi-Wang-Mu Problem” (T'oung Pao LⅩⅩⅣ, 1988), pp.15-16; Wu Hung (巫鴻), “Xiwangmu,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Orientation 18, no.4, 1987), pp.24-33; James, Jean M., “An Iconographic Study of Xiwangmu During the Han Dynasty” (Artibus Asiae Vol. LV 1/2, 1995), pp.17-41.
32) 물론 화상석에 표현된 서왕모의 대좌는 지역마다 일률적이지 않다. 서왕모의
<도15> 화상석의 서왕모 부분, 後漢, 116×101cm, 銅山縣 北洞山, 徐州漢畵像石藝術館 (中國畵像石全集
第4卷, 山東美術出版社, 2000. 圖101) 대좌를 연상시킨다. 그가 머무는
곤륜산을 이처럼 허리부분이 잘 록하게 처리되어 있는 이유는 아 래에서 쉽게 위로 올라갈 수 없 도록 하기 위함이다.33) 거리도 멀지만, 설령 그곳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접근 자체가 어려운 곳 이었다.34) 물론 쉽게 올라갈 수 없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 은 아니며, 至難한 과정을 거쳐 서왕모가 사는 그곳에 가고자 했 던 것이 바로 고대 중국인들의 바람이었던 것이다.35)
바로 이러한 곤륜산과 박산향 로의 형상은 서로 닮아있다.36)
대좌가 생략되어 있는 경우도 많으며, 특히 섬서 지역 화상석은 높고 구불구불 한 모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사천 지역 화상석에는 대좌 좌우에 용 과 호랑이가 배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왕모가 앉아 있는 대좌를 표현하는 경 우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외 없이 높이가 높고, 가운데 부분이 잘록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33) 水經注 卷1 所引 東方朔神異經 , “崑崙有銅柱. 其高入天, 所謂天柱. 圍三千 里. 圓周如削.”
34) 문헌기록에서도 곤륜산이 얼마나 접근하기 어려운 곳인지 잘 알려준다 (山 海經 海內西經, “海內崑崙之虛, 在西北, 帝之下都. 崑崙之虛, 方八百里, 高萬刃.
上有木禾, 長五尋, 大五圍. 面有九門, 門有開明獸守之, 百神之所在 ··· 赤水出 東南隅, 以行其東北”).
35) 필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씨름도 역시 피장자가 승선을 위한 통과 의례로 파악하였다(임영애,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대중국의 서왕모신앙 -씨름 그림에 나타난 ‘西域人’을 중심으로- (강좌 미술사 10, 1998.9), pp.157-179;
林玲愛, 高句麗古墳の角抵圖に登場する西域人のイメジ (美術硏究 397, 東 京國立文化財硏究所, 2009.3), pp.161-177).
36) 한편 곤륜산이 호로형 구조를 가졌다고 보기도 한다. 崑崙(kun-lun), 葫蘆 (hu-lu)는 같은 계열의 어휘이며, 동시에 곤륜이 호로의 모양을 띈 것은 우주
그런데 이 곤륜산은 또 불교의 수미산 관념, 그리고 불상의 삼단대좌 와도 상통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이미 필자의 이전 논고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다.37) 고대 중국인들에게 박산향로가 어떤 의미인지 5세기 불교조각의 제작자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박산향로 는 전통적으로 곤륜산이자, 나아가 불교에서의 수미산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박산향로를 승선의 매개체라고 생각했던 만큼, 불상 대좌 중앙 에 박산향로를 둠으로써 그 위에 있는 부처 세계로의 진입을 꿈꾸었다 고 생각한다. 이 때 물론 곤륜산,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불교의 수미 산과도 닮은 박산향로의 이미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겠지만, 부 처에게 분향을 행한다는 향로의 기능도 부분적으로 연관이 있었을 것 이다. 도교의식 중에 ‘眞人을 만나기 위해 향로를 사용’하였다 라든 지,38) “신은 향을 피우며 몸과 마음과 목숨을 ‘대도’에게 바칩니다. 엎 드려 태상의 삼존에게 귀의합니다. 바라건대 이 공덕이 저의 7대 부모 에게 돌아가서 그들이 여러 고통에서 벗어나서 천당에 올라가 편안하 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와 같은 기록은39) 선계와의 연결과 관련 지어 해석해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永元8年(96) 綵德 자궁과 동일시되는 호로의 무한한 생명력이 죽은 이의 재생과 不死, 至福을 보 증하는 낙원세계를 가져다준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본 것이 다(이성구, 中國的 聖所觀念의 女性原理 ,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2-2, pp,13-14). 이는 곤륜이 산의 이름이 아니라 동굴을 지칭한다고 본 것 인데, 박산향로의 가는 기둥이 낙원에 도달하기까지의 좁은 동굴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中野美代子, ひょうたんのある風景 -中國人の宇宙觀 , ひょ うたん漫遊錄, 東京: 朝日新聞社, 1991, p.50). 곤륜산과 박산향로의 가는 기둥 이 좁을 동굴을 상징하든, 올라가기 어려운 기둥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곳에 도 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37) 임영애, 곤륜산, 수미산 그리고 삼단팔각 연화대좌 -삼단팔각 연화대좌에 담 긴 상징 (강좌미술사 34, 2010), pp.9-32 ; 박경은의 논고에서도 역시 곤륜 산과 수미산이 서로 동일시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음에 주목하였다(박경은, 앞 글, pp.92-97).
38) 正統道藏 3-269, 元始上眞衆仙記; 正統道藏 6-620, 登眞隱訣.
39) “臣等燒香 歸身歸神歸命大道 身等首體投地 歸命太上三尊 願以是功德 歸流七 世父母乞免離十苦八難 上登天堂 衣食自然 常居無爲”( 太極眞人敷靈竇齋戒威儀 諸經要訣 , 正統道藏 9-867).
<도16> 淸潤墓門의 좌우 화상석, 後漢, 130×32cm, 섬서성 淸潤縣 출토, 淸潤縣文物管理所 (中國畵像石全集 第5卷,
山東美術出版社, 2000. 圖201-202) 楊孟元 화상석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 입구에 해당하는 폭 37cm 가량의 석판에는 아래에 박산향
로 그리고 오른쪽 상단에 곤륜산 위에 앉아 있는 서왕모가 있다.
동일한 구성은 섬서성 淸潤墓門 석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도 16), 이는 박산향로 위쪽으로 곤 륜산에 앉아 있는 서왕모의 세계 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 석할 수 있다.
서왕모, 곤륜산, 박산향로와 관 련된 신화와 신앙은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 다. 특히 서왕모의 존재는 고대 중국인들에게 아주 중요하였다.
서왕모는 한때 도교의 종교 체계 에 포섭되어 도교의 신으로 숭배 되기도 하였지만, 잘 알려진 대 로 남북조시대에는 불교가 성행
하고 동시에 도교가 체계화되면서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갔다.40) 이후 서왕모는 불상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과 불 상 대좌의 박산향로는 무관하지 않다.41)
앞서 보았던 것처럼 대좌 중앙의 박산향로는 도교, 불교를 가리지 40) Suzanne Cahill, Transcendence and Divine Passion;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in Mediev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p.32-43.
41) 임영애, 중국 초기 불교조각의 남방루트 재검토 , 위의 책, 2008, pp. 25-48
; 결국 서왕모가 지녔던 권위와 지위는 지상에서는 불상으로 전이되었으며, 분 묘미술에서는 묘주도로 계승되어 그 주도적인 지위를 넘겨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한정희, 중국분묘 벽화에 보이는 墓主圖의 변천 , 미술사학연구
261, 2009, pp.115-116).
않으며, 불교 안에서도 특정한 존상에 한정되지 않고 쓰였다. 이는 5-6 세기에 대좌 박산향로가 특정 종교나 종파를 초월하여 민간부터 중앙 관료, 황실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유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불 상의 명문을 통해 조상과 부모를 위한 추선공양, 그리고 자신과 후손 의 안녕이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중국사회는 대혼란에 빠지 게 되고, 전란과 기근이 반복되면서 인구도 급감하게 된다. 4세기 후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불교와 도교의 생사관에 변화가 시작된다. 지식 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교가 수용되고, 중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윤회 전생, 인과응보를 해설한 책이 저술되며,42) 불교의 윤회전생, 인과응보 의 사상은 도교의 생사관에 영향을 준다.43) 이러한 관념은 5세기에 접 어들면 안정기에 이르게 되면서 부모를 비롯한 조상을 위해 상을 만들 면 그 공덕으로 승선하여 부처의 세계로 진입하여 천상에서 다시 태어 난다고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고대 중국인의 생사 관념 과 열망이 그대로 반영된 예가 바로 대좌에 박산향로이며, 박산향로가 대좌 중앙에 자리잡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부모를 포함한 가족 을 위한 추선공양은 이 시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특별할 것도 없다. 다만 5-6세기 불상 제작자들은 불교의 이상향을 위해 기왕에 있 던 곤륜산-박산향로-수미산 관념을 선택하여 이를 대좌에 이미지화하 였고, 이후 하나의 패턴으로 크게 유행하였던 것이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처음에는 박산향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를 정확히 인 식하고 선택하여 대좌에 새겨 넣으며 의미를 부여하였을지도 모르나, 대좌의 한 형식으로 고정된 이후에는 관습적으로 쓰였을 뿐이며, 여전 히 그 함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42) 郗超의 奉法要 (弘明集 卷13), 慧遠의 三報論 (弘明集 卷5)이 있다 (都築 晶子, 道敎の死生觀 -佛敎との關わりから- , 林智康, 井上善幸, 北岑大 至 編, 東アジア思想における生死觀と超越, 京都: 方丈堂出版, 2013, p.48).
43) Zürcher, Erik, “Buddhist Influence on Early Taoism” (T'oung Pao, vol.66, 1-3, 1980), pp.84-147.
<도17> 불삼존상, 7세기, 西安博物院 (奈良國立博物館, 大遣唐使展, 2010,
圖107)
<도18> 불좌상, 북제, H.85cm, 산동성 제성시 출토 (山口縣立萩美術館·浦上記念館,
『山東省 石佛展』, 2008, 圖48)
Ⅳ. 삼단대좌로의 전환
앞서 기술한 대로 특히 6세기 불상 대좌에는 불상, 보살상의 종류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박산향로가 등장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당대가 되면 대좌의 박산향로가 사라지고 중대가 잘록한 삼단대 좌가 출현한다는 것이다.44) 물론 당대에도 서안박물관의 불삼존상(도 17)이나 永淳元年(683)銘佛碑像처럼 造像碑와 같이 여전히 대좌의 박 산향로가 등장하는 예가 잔존하기는 하는데, 이들 부조들은 대좌의 박 산향로가 삼단대좌로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박산향로가 삼단대좌로 바뀌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44) 물론 7세기이후 당대 돈황석굴의 불상 및 불화 아래 대좌, 그리고 송, 요, 금, 원대 이후 불상의 대좌에도 드물지만 향로가 등장하는 예들이 있지만, 앞서 이 글의 각주 2에서 언급한 것처럼 커다란 흐름의 변화에 주목한 것이어서 이 후 의 몇몇 예외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도20> 賈士達等造阿彌陀 佛坐像, 上元元年(674), 南宮后底閣村出土, 하북성
석가장박물관 (임영애)
<도19> 불삼존상, 703-704, 섬서성 서안시 寶慶寺, 개인소장
(奈良國立博物館, 大遣唐使展, 2010, 圖67)
있겠지만, 당대에 독립적인 환조 불좌상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 한 것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부조가 아닌 환조로 독립적인 불상을 제 작하게 되면서 삼단대좌의 형식을 새롭게 고안해 내었는데, 이 때 그 들이 본 뜬 것이 바로 방형대좌 중앙에 부조로 표현되던 박산향로의 승반, 기둥, 爐身의 삼단구성이 아닌가 한다. 산동성 제성시에서 출토 된 북제의 불좌상(도18), 703-704년에 만들어진 서안시 보경사에 있는 불삼존상(도19, 20)은 연화삼단대좌와 박산향로가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성임을 잘 보 여준다.
이처럼 곤륜산 [박산향로], 수미 산, 삼단대좌는 기본적으로 동일 한 구성이다. 고 대 중국인들은 곤륜산을 쉽게 오를 수 없는 이 상 세계로 인식 하였다. 삼단인 데다가 중단이 잘록하여 쉽게 오를 수 없지만 그곳에 도달하기를 염원했다. 곤륜산 이미지는 박산향로라는 기물로 재현되기도 하였고,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불교의 수미산 이미지에 투영되기도 하였다.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곤륜산도 수미산도 모두 ‘우 주의 축’이며, 세상의 중심이라는 공통관념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 이다. 실제로 서왕모가 위치해야할 장소에 불상의 이미지를 대체한 후 한대의 수많은 예들은 이후 중국인들이 곤륜산과 수미산을 동일한 관 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알려준다.45)
필자의 이전 논고에서 불상의 삼단대좌가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견해 를 이미 제시한 바 있지만,46) 이와 관련하여 6세기 불상 대좌 중앙에 놓였던 박산향로가 사라지면서 거의 동시에 중대가 잘록한 삼단대좌가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5세기 전반에도 중대가 잘록한 삼단의 대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평 면이 박산향로처럼 원형이 아니라 방형이 기본이며, 삼단팔각 연화대 좌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단계라 할 수 있다. 삼단연화대좌가 널리 애용된 시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7-8세기이며, 이전 시기 불상 대 좌의 박산향로가 삼단대좌로 전환된 것이다. 물론 삼단팔각 연화대좌 의 성립에 곤륜산[박산향로] 이미지만이 반영되었다는 단선적인 시각 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단팔각 연화대좌’ 형식의 성립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관념과 이미지가 바로 곤륜산 이미지가 투영된 대 좌의 박산향로, 그리고 수미산 이미지였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Ⅴ. 맺음말
이 글은 박산향로가 고대 불상의 대좌 중앙에 자리하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불상에서 삼단대좌가 등장하면서 박산향로가 사라지 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인지에 관해 알아보려 한 것이다.
중국 고대의 불교미술 제작자들은 인도의 불교개념들을 중국식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漢族의 모티프를 빌었다. 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지만, 가장 눈에 뜨이는 예 중 하나가 바로 불상 대좌의 박산향로였다. 그들에게 박산향로는 이미 익숙한 모티프 였으며,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5-6세기 불상 제작자들이 이와 같이 곤륜산[불교에서는 수미산]으로 45) 임영애, 앞 책, pp.25-48.
46) 임영애, 앞 글(2010), pp.9-32.
상징되는 박산향로를 선택하여 대좌에 이미지화하였던 이유는 마치 서 왕모를 찾아 험난한 여정을 거처 곤륜산에 오르는 것처럼 박산향로의 정상에 오른다면 결국 부처가 사는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상 대좌에 표현된 박산향로를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그들의 인식을 불상에 어떻 게 표현하였는지, 다시 말해 불상에 예배하면서 그들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함축적 의미에 관해 알아보았다.
불상의 대좌는 단순히 불상을 봉안하기 위한 받침대가 아니며, 그 안에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6세기 중국 전역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던 대좌의 박산향로는 당시 중국 고대인들이 생각 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을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다. 중국 고대 의 불상 제작자들은 박산향로라는 禮器를 통해 그들이 인식하고 있던 보편적 상징체계를 알려주려 하였다. 물론 이 글에서 살펴본 것은 주 로 불상의 대좌였지만, 이는 불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둘 것이 아니 라 동아시아의 전통 관념에서 이해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간과해 서는 안 될 것은 처음 박산향로를 대좌에 새겨 넣었을 당시 제작자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겠지만, 이후 일정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 함의는 잊은 채 관습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통일기 신라의 삼 단팔각연화대좌나 승탑, 석등 등에도 향로가 새겨지기도 하지만, 이들 은 이미 장엄 요소 중 하나가 되었으며, 작가가 여전히 그 의미체계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자는 지금껏 불교미술과 전통미술의 어떠한 교호관계를 지니는지 눈여겨 보아왔다. 다시 말해 전통미술이 불교미술에 어떻게 투영되었 으며, 또 그 반대의 흐름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5-6세기 불상의 대좌에 새겨진 박산향로와 당과 통일기 신라 대좌로 가장 애용 되었던 삼단팔각 연화대좌는 바로 중국 고대인들의 사고체계와 관념이 불교미술에 반영된 주목할 만한 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연구가 과연 작품의 본질을 완벽하게 규명해낼 수 있는가? 미하엘 립만의 지적처럼 이러한 연구 방법은 어쩌면 미술품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심미적 가
치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종교미술 에 한해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작품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며, 이를 통해 고대인들의 사유 체계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참고문헌>
赤松子章曆 6.
正統道藏 11-223.
正統道藏 3-269, 元始上眞衆仙記.
正統道藏 6-620 登眞隱訣.
天中記 卷60.
洛陽伽藍記 卷1 城內 長秋寺.
山海經 海內西經.
水經注 卷1 所引 東方朔神異經 .
爾雅 釋丘.
太平御覽 卷38 河圖括地象 .
T1238, 1:0180b24, 梁失譯, 阿吒婆拘鬼神大將上佛陀羅尼經 一卷.
T1239, 中:0193c16 卷中 阿吒薄俱元帥大將上佛陀羅尼經修行法儀軌.
김자림, 박산향로를 통해 본 백제금동대향로의 양식적 위치 고찰 (美術史學硏 究 249, 2006)
박경은, 博山香爐의 昇仙圖像 연구 (美術史學硏究 225·226, 2000)
이성구, 中國的 聖所觀念의 女性原理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012 -2)
임소연, 新羅 下代 香爐 圖像 硏究: 石造物에 나타난 浮彫를 중심으로 (고려대 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2008)
임영애,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대중국의 서왕모신앙 -씨름그림에 나타난 ‘西域人’
을 중심으로- (강좌 미술사 10, 1998.9)
임영애, 곤륜산, 수미산 그리고 삼단팔각 연화대좌 -삼단팔각 연화대좌에 담긴 상징 (강좌미술사 34, 2010)
임영애, 月淨橋·春陽橋의 ‘獅子 石柱’, 이미지와 의미 (신라문화 43, 2014) 임영애, 황룡사 중금당 佛眷屬 16존상의 복원 -불제자상, 금강역사상과 獅子像
그리고 공양자상- (신라사학보 38, 2011)
임영애, 교류로 본 한국의 불교조각 (학연문화사, 2008)
조성우, 中世 中國 生死觀의 一面과 道敎: 殃禍의 觀念을 중심으로 (중국고중
47) 미하엘 립만(Michael Liebmann), 송혜영 옮김, 도상해석학 (도상학과 도 상해석학, 사계절, 2008), p.274.
세사연구 25, 2011)
조용중, 백제금동대향로에 관한 연구 -도상 해석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65, 2000)
조용중, 蓮華化生山 도상과 그 교호에 관한 연구 (미술자료 60, 1998) 조용중, 연화화생에 등장하는 장식문양 고찰 (미술자료 56, 1995) 조용중,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上) (미술자료 53, 1993) 조용중, 중국 박산향로에 관한 고찰(下) (미술자료 54, 1994)
주경미, 백제 불교금속공예의 양상과 특징 (인문사회과학연구 10-1, 부경대학 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09)
지강이, 우리나라 초기 불상의 기능과 그 의미: 불교조각에 나타난 항로를 근거 로 하여 (인문사회과학연구 10-1, 2009)
최응천, 백제 금동용봉향로의 조형과 편년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10주년 기념 연구논문자료집, 국립부여박물관, 2003)
한정희, 중국분묘 벽화에 보이는 墓主圖의 변천 (미술사학연구 261, 2009) 南一朗, 西王母と七夕傳承 (東京: 平凡社, 1991)
都築 晶子, 道敎の死生觀-佛敎との關わりから- (林智康, 井上善幸, 北岑大至 編,
東アジア思想における生死觀と超越, 京都: 方丈堂出版, 2013)
山口柚美子, 西王母と崑崙山 -その結合過程を檢討する (漢文學會會報 16, 國 學院大學, 1971)
衫本惠司, 漢代の博山爐 (近畿古文化論攷, 奈良縣 敎育委員會, 1962)
森由利亞, 道敎と死 -天上の權威と死者世界 (吉原浩人 編, 東洋における死の思 想, 東京: 春秋社, 2006)
林玲愛, 高句麗古墳の角抵圖に登場する西域人のイメジ (美術硏究 397, 東京國 立文化財硏究所, 2009.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河北省文物硏究所 鄴城考古隊, 河北臨漳縣鄴城遺址北 吳藏佛敎造像埋葬坑的發現與發掘 (考古 2012-4)
中野美代子, ひょうたんのある風景 -中國人の宇宙觀 (ひょうたん漫遊錄, 東 京: 朝日新聞社, 1991)
重田定一, 博山爐考 (史前學雜誌 15-3, 1959)
曾布川 寬, 崑崙山と昇仙圖 (東方學報 51, 京都, 1975; 中國美術の圖像と樣式
硏究篇, 東京: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재수록) 曾布川 寬, 崑崙山への昇仙 (東京: 中公新書, 1981)
Erickson, Susan N., “Boshanlu –Mountain Censers of the Western Han Period: A Typological and Iconological Analysis” (Archives of Asian Art 45, 1992)
Fracasso, Riccardo, “Holly Mother of the Ancint China: A new Appreoach to the Hsi-Wang-Mu Problem” (T'oung Pao, LⅩⅩⅣ, 1988)
James, Jean M., “An Iconographic Study of Xiwangmu During the Han
Dynasty” (Artibus Asiae, Vol. LV 1/2, 1995)
James, Jean M., “Some Iconographic Problems in Early Daoist-Buddhist Sculptures in China” (Archives of Asian Art, 41, 1989)
Schipper, Kristofer, The Taoist Body (Translated by Karen C. Duval,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Stephen Little, Taoism and the Arts of China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2000)
Suzanne Cahill, Transcendence and Divine Passion;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in Mediev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Wu Hung(巫鴻), “Xiwangmu, the Queen Mother of the West" (Orientation, 18, no.4, 1987)
Zürcher, Erik, “Buddhist Influence on Early Taoism” (T'oung Pao, vol.66, 1-3, 1980)
(Abstract)
Boshanxianglu of Buddha Pedestals, and Its Images and Implications
Lim, Young Ae
The pedestals of ancient East Asian Buddha statues have
‘Boshanxianglu (博山香爐)’ on them. It is so common that it is hard to find a case without Boshanxianglu among the pedestals of Buddha created in the 6th century. Boshanxianglu is always placed at the right center of the square pedestal, and a lion image and a Vajrapani image are placed, respectively, on its left and right. A remarkable fact is that the use of Boshanxianglu is concentrated on a specific period of time. It began to appear when Buddhist arts were gradually localized in China in the mid 5th century, and enjoyed its highest popularity in all parts of China throughout the 6th century. Interestingly, however, entering into the Tang Dynasty, Boshanxianglu disappeared from the center of the square pedestal of Buddha and at the same time the pedestal itself was transformed into a three‐step form, having top, middle and bottom layers. This study started from the questions of why Boshanxianglu began to appear on the pedestals of Buddha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and what was the reason for its disappearance along with the emergence of three‐step pedestals in the 7th century.
Ancient Buddhist artists in China borrowed the motifs of
traditional Han people in order to express Buddhist concepts from India in a way understandable to Chinese. Although there are innumerable cases of such, one of the most notable examples is Boshanxianglu on the pedestals of Buddha. In general, Boshanxianglu was thought to symbolize Mt. Kunlun(崑崙山), and it was believed that Xiwangmu(西王母) stayed on the summit.
Buddhist image makers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chose Boshanxianglu symbolizing Mt. Kunlun [or Mt. Sumi(須彌山) in Buddhism], and visualized it on the pedestal. It was because they believed that if one climbed up to the top of Boshanxianglu like climbing up Mt. Kunlun through a rugged journey in search of Xiwangmu they would enter the realm where Buddha was living.
The pedestal of Buddha was not simply a base for enshrining a Buddhist image, and it contained many symbolic meanings.
Especially Boshanxianglu on the pedestal greatly popular throughout China in the 6th century is an exemplary case representing well ancient Chinese’s concept of the world after death. Through the ritual vessel(禮器) Boshanxianglu, Buddhist image makers in ancient China tried to express the universal symbolic system perceived by them. Of course, what was examined in this study was mainly the pedestal of Buddha, but the findings should be understood not within the boundary of Buddhism but based on East Asian traditional concepts.
주제어 : 고대 불상, 승선, 박산향로, 곤륜산, 서왕모, 화상석, 수미산, 불상대좌, 삼단대좌
關鍵詞 : 古代 佛象, 昇仙, 博山香爐, 崑崙山, 西王母, 畵像石, 須彌山, 佛象臺座, Keywords : Ancient Buddhist image, Ascending to Heaven, Boshanxianglu,三段臺座
Chinese incense burner, Kunlun Mt, Xiwangmu, Han Pictorial Stone Relief, Sumi Mt., Sumeru Mt., pedestal of Buddha, three-steps pedestal
(원고접수: 2014년 6월 30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4년 8월 8일, 수정원 고 접수: 8월 19일, 게재 확정: 8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