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朝天客歸國詩章圖 의 제작 시기와 朝天客 분석
朴 現 圭 (順天鄕大)
Ⅰ. 서 론
Ⅱ. 서지와 작품 감상
Ⅲ. 그림 제작 시기 문제
Ⅳ. 朝天客 문제
Ⅴ. 朝天船 문제
Ⅵ. 결 론
Ⅰ. 서 론
1368년(홍무 1)에 朱元璋은 武昌의 陳友諒, 蘇州의 張士誠 등을 물리 치고 장강 유역과 남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자, 스스로 황제에 올라 명나라를 세우고 南京(應天府)을 수도로 삼았다. 곧이어 대규모 군사를 보내어 북벌을 도모하자, 원 順帝는 北京(大都)을 버리고 내몽 골로 이주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사실상 중국 대륙의 맹주가 되었다.
1382년(홍무 15)에 이르러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점거하여 마침내 전 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외국 국가에 사신을 보내어 건국 사실을 알리며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추진하였다. 외국 국가들도 사신들을 중 국 대륙으로 보내어 명나라와 통교를 하였다. 이때 고려(훗날 조선)도 바다를 통해 대명 외교 사절을 보냈다. 영락제에 이르러 명나라는 해 상을 통한 대외 교류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내신 鄭和는 영락제의 명을 받들어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여 바다를 통해 멀리 중동과 아프리
카 동북 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이후에도 명나라는 해상을 통한 대외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유구,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국가들은 빈번히 사신과 상인들을 명나라로 보냈다.
送朝天客歸國詩章圖 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행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외국 사신이 남경을 떠나는 장면을 담은 것인데, 당시 명나 라의 대외 통교와 남경의 도읍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과 실학박물관에서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를 전시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특히 연행 관련 학자들은 조선 사신의 대외 활동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고 보고 있다. 각종 도록이 나 선행 연구에서는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속 주인공 朝天客을 조선 사신으로 보고 있고, 제작 시기를 1392년(홍무 25)-1409년(영락 7) 또 는 17세기 전반기로 보고 있다.1)
그러나 필자가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에 그려진 남경 모습을 살펴본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그림의 제작 시기와 조천객에 대한 해석이 잘 못되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먼저 결론부터 도출하자면, 그림의 제작 시기는 1451년(경태 2) 이후에 만들어졌고, 그림 속의 주인공 조천객은 조선 사신이 아닌 다른 국가의 사신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래에서 필자가 고증한 바, 즉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시기와 조천객, 그 리고 조천객이 탄 朝天船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서지와 작품 감상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남경을 배경으로 명나라 관원들이 본국으 로 귀국하는 사신을 전별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현 소장처는 서
1)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고려ㆍ조선의 대외교류 (서울: 통천문화사, 2002.8), pp.98-99; 실학박물관 편저,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남양주: 실학박물관, 2010.10), p.52; 鄭恩主, 赴京使行에서 제작된 朝鮮使臣의 肖像 (明淸史硏究 33, 明淸史學會, 2010.4), pp.2-5.
<그림 1> 送朝天客歸國詩章圖
울에 소재한 국립중앙박물관이다. 형태는 권축본이며, 전체 크기는 103.6 × 163.0cm이다. 하단은 진한 채색으로 그린 그림이고, 재질은 명 주(絹)이다. 상단에는 그림의 내용을 알려주는 글씨가 쓰여 있고, 재질 은 종이이다.
상단 글씨는 크게 雲冠翁 梅厓의 화제와 金唯深에게 보내는 시편으 로 구분된다. 화제 ‘送朝天客/歸國詩章’은 상단 양편에 각 4글자씩 나 누어 크게 적어 놓았고, 그 끝에 篆字로 쓴 ‘雲冠翁梅厓書’와 ‘伯/行’(朱 方印)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화제 앞에도 ‘梅厓’(白長印), ‘雲冠/翁 羽’(朱長印)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시편은 상단 중앙에 행서로 적혀 있고, 그 끝에 ‘致監察御使日湖金唯深’과 ‘定/齋’(白長印)라는 인장이 찍
<그림 2> 明都城圖
혀있다. 시편 앞에도 ‘賜進士’(朱長印), ‘守宮/持人’(朱方印)이라는 인장 이 찍혀있다. 시편 글씨는 명나라 황실에 경의를 표시하는 대두법을 사용했다. ‘貢’, ‘帝’, ‘中朝’, ‘五雲’, ‘恩光’ 앞에서 행을 바꾸고 글자를 한 자 정도 높여놓았다.
운관옹 매애와 금유심은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어느 시대에 활동했 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금유심의 출신지 ‘日湖’는 절강 寧波를 지칭하 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불분명하다. 관직명 監察御使는 명대 都 察院 소속으로 조정 업무와 관리들을 감찰하는 직책이다. 監察御使 앞 에는 ‘致’자가 더 있다. ‘致’자에는 보낸다, 드린다는 뜻이 있다. ‘致監察 御使日湖金唯深’은 외국 사신이 감찰어사 금유심에게 시편을 보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2)
2) 시편 작가의 해석에 대해 필자는 당초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술에 따라 감찰어 사 금유심이 쓴 전별시로 보았으나, 심사자의 견해에 따라 외국사신이 감찰어
아래에 시편을 감상해본다.
海域航珍貢帝畿 해역을 귀한 항해하여 황성에 조공 와서 壯遊萬里恣輕肥 가벼운 갖옷과 살찐 말로 장유 만리하네 中朝禮樂歆才望 중조 예약은 명망 인재를 받아들이고 故國江山輝德輝 고국 강산에 빛나는 덕을 밝히네 鸚鵡洲邊孤樹杳 鸚鵡洲가 외로운 나무는 아득하고 鳳凰臺下五雲飛 鳳凰臺아래 오색구름은 날아가네 俄然爲報潮平候 갑자기 조수가 잔잔해졌다 알려와 滿載恩光向日歸 은총을 가득 싣고 해를 향해 돌아가네
시편 곳곳에는 외교적 언사로 한껏 꾸며져 있다. 사신의 본국은 해 가 뜨는 바다 저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사신은 만 리나 되는 먼 곳 을 마다하지 않고 늠름한 자세로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으로 들어왔 다. 이때 사신의 행차 모습은 화려하였다. 몸에는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찐 말을 데리고 왔다. 사신은 명나라 황성에 들어와 인재를 받아들 이는 중조의 문물을 살펴보고, 황제의 위덕이 먼 외국까지 미친다며 은근히 명나라를 치켜세우고 있다. 곧이어 사신은 황성에서 사행 업무 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다. 장강의 한 부둣가에서 선박을 타 고 출발하는데, 이때 금유심을 비롯한 명나라 관원들이 장강가에 나와 서 외국 사신을 배웅한다.
멀리 아득한 장강의 사주에는 외로운 나무만 덩그러니 서있고, 시인 들의 명소인 봉황대에는 오색구름만 날아가고 있다. 시편 속의 鸚鵡洲 는 원래 武漢의 장강 사주를 지칭하나, 여기에서는 남경 옆 장강 사주 인 白鷺州를 지칭한다. 무한 옆에는 장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장강 가운데에는 토사가 쌓여 사주가 생겨났다. 사주의 이름은 앵무주이다.
후한 禰衡이 이곳을 배경으로 鸚鵡賦 를 지어 앵무주라는 이름이 처 음 생겼다. 760년(上元 1)에 시인 李白은 무한을 지나가다가 장강 속에 잠겨있는 앵무주의 풍광을 보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자신의 신세를 읊은 鸚鵡洲 를 지었다.3) 이 시는 훗날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
사 금유심에게 보낸 것으로 수정했음.
시편 속의 鳳凰臺는 남경을 지칭한다. 봉황대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봉황이 머물었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원래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 잡 았는데, 오대 때 축성 공사로 많이 훼손되었다. 이곳에 오르면 멀리 장 강과 鷺州를 바라볼 수 있어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았으 며, 특히 이백의 登金陵鳳凰臺 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남경의 상 징물이 되었다.4) 고려 말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鄭夢周도 귀국할 때 시 속에 남경의 상징물인 봉황대를 담았다.5)
다시 시 속으로 돌아간다. 외국 사신과 명나라 관원들은 홀연히 뱃 사람으로부터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말, 즉 선박의 출항 시각을 전해 듣는다. 예전에 뱃사람들이 장강을 건너갈 때 강물의 변화를 주의 깊 게 살폈다. 장강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수천 리 흘러와서 남경 지 역에 이르면 거대한 강줄기로 바뀌었다. 강폭은 상당히 넓고 물살은 매우 세찼다. 오늘날에도 소형 선박은 장강을 오르내릴 때 강물의 흐 름을 유심히 살피곤 한다. 외국 사신은 전송하는 명나라 관원들과 이 별을 하고 본국으로 떠날 선박에 올라야 한다. 이별의 장면은 통상적 으로 슬픈 감정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 시편에서는 외교적 언사를 구 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 명나라 황제의 은덕이 먼 외국 사신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입은 은덕을 얘기하며 명나라의 위엄이 온 천하에 미친다고 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남경 도읍지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다. 洪武京城圖志와 金陵古今圖考에는 명대 남경의 제반 모습을 담은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지도만 보아도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가 3) 李太白集注 권21, 古近體詩 중 鸚鵡洲 : “鸚鵡來過吳江水, 江上洲傳傳鵡 名, 鸚鵡西飛隴山去, 芳洲之樹何靑靑, 烟開蘭葉香風暖, 岸夾桃花錦浪生, 遷客此 時徒極目, 長洲孤月向誰明.” 주: “禰衡作 鸚鵡賦 於此洲, 因以爲名”(文淵閣藏四 庫全書本, 책1067, p.383).
4) 李太白集注 권21 古近體詩 중 登金陵鳳凰臺 : “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 江自流, 吳宮花草埋幽徑, 晋代衣冠成古丘, 三山半落靑山外, 一水中分白露洲. 總 爲浮雲能蔽日, 長安不見使人愁”(文淵閣藏四庫全書本, 책1067, p.380).
5) 圃隱集 권1 龍江關 : “蘭舟早發鳳凰臺, 城闕崔巍首重回, 欲爲鍾山題一句, 龍 江津吏苦相催”(한국문집총간본, 책5, p.579).
남경을 배경으로 삼은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남 경은 내성과 외성의 성곽이 두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읍지 북부와 서북부 지역에는 鍾山, 覆舟山, 鷄鳴山, 獅子山 등이 솟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도읍지 서편에는 강폭이 매우 넓은 장강이 흐르고 있고, 도읍지 안팎에는 秦淮河, 金水河, 護城河, 玄武湖 등 각종 수로와 호수 가 나 있다. 또 도읍지에는 황궁을 비롯하여 각종 관아, 사묘 등 건물 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각종 건물과 성문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각 종 건물과 성문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대체적으로 일정한 크기로 그려 놓고, 다만 황궁과 황릉은 다른 건물에 비해 크게 그려놓았다.
남경(응천부) 내성은 주원장이 稱帝 2년 전인 1366년(지정 26)에 朱 昇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조하기 시작하여 21년이 지난 1386년(홍무 19)에 완성되었다. 성곽은 매우 견실하고, 규모는 웅장하였다. 내성 성 곽의 대부분 구간은 기초 작업을 다진 후에 전돌로 성벽 양쪽 면을 쌓 고, 그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 일부 구간의 성곽은 동진 시대 만들어진 십리제를 이용하여 성벽 한쪽 면만 전돌로 쌓았다. 전체 둘레는 33.65km이고, 성곽의 높이는 14-21m이며, 아랫 부분의 성폭은 약 14m 이다. 성문은 모두 13개가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의 내성 은 기초석 위에 전돌로 차곡차곡 쌓아져 있고, 각 성문 위에는 붉은 누각과 녹색(또는 흑색) 지붕이 세워져 있다. 내성 13문 가운데 朝陽 門, 聚寶門, 神策門은 이층 누각, 나머지 성문은 모두 단층 누각 모습 이다. 正陽門의 바깥에는 甕城이 그려져 있다. 각 성문에는 이름을 기 입해 놓았는데, 동쪽 朝陽門만 이름이 빠져있다.
남경(응천부) 외성은 주원장이 내성만으로는 도성의 방어에 취약하 다며 1390년(홍무 23)부터 축조되기 시작했다. 외성의 전체 둘레는 약 60km이며, 전체 모습은 비교적 원형에 가깝다. 성곽은 주로 종산, 幕 府山, 雨花臺 등 남경 외곽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토성으로 축조했 고, 전략 요새 지역은 내성처럼 전돌로 축조하였다. 전돌 축성 부분은 약 1/3 정도이다. 성문은 모두 18개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에는 江東門만 이름을 표기하고, 나머지 성문은 모두 명기하지 않았
다. 강동성과 그 부근의 성곽은 내성처럼 전돌로 견실하게 쌓아 놓은 모습을 그려 놓았다. 나머지 구간은 흙색 담장 위에 검은색 선으로 길 게 성곽 표시로 해 놓고, 성문 부분만 전돌로 쌓아 놓은 모습을 그려 놓았다.
황궁은 남경의 동부 지역에 치우쳐 있고, 내성 정양문을 축으로 삼 아 大明門(훗날 洪武門으로 개칭)부터 昇天門, 端門, 午門을 거쳐 北安 門에 이르기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중 국 전통의 궁전 설계 양식인 남북중축선의 설계 양식을 답습한 것이 다. 황궁 대명문과 승천문 사이에는 T자(황궁에서 보면 凸자) 형태로 궁장을 쌓아 거대한 궁정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광장 밖에는 조정의 주요 관서, 즉 좌측에는 문반의 관서, 우측에는 무반의 관서가 배열되 어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의 황궁은 원래 모습보다 더 크 고 넓게 그려 놓았고, 특히 성문은 마치 거대한 모습으로 크게 그려 놓았다. 궁정 광장은 T자 형태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양쪽에 세운 華 表의 모습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광장 밖에는 조정의 문·무반 등 주 요 관서들을 열거해 놓았다. 일부 관서명은 약칭하거나 동음 간체자로 대체했다.6)
十廟는 帝王廟, 城隍廟, 眞武廟 등 여러 개 묘를 함께 모신 사당이 다. 1388년(홍무 21)에 주원장의 칙령으로 鷄鳴山 아래에 지어졌다.
1853년(함풍 3) 태평군 계축난 때 소실되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에는 神策門 옆 계명산 아래에 마치 황궁처럼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고, 입구 현판에 ‘拾廟’라고 적은 건축물이 보인다. 그림 속의 십 묘는 과장해서 크게 그렸고, 사당 숫자도 건물 명칭처럼 10개가 들어 서있다.
明孝陵은 주원장과 馬皇后의 무덤이다. 1381년(홍무 14)에 황궁과 인접한 鍾山에 황릉을 짓기 시작했고, 이듬해 마황후가 돌아가자 이곳 에 묻었다. 마황후의 시효가 ‘孝慈’이였기에 능호를 孝陵이라고 불렀다.
6) 예를 들면 무반 앞쪽의 中軍都督府를 中府로 약칭했고, 문반 뒤편의 詹事府의
‘詹’자를 동음간체자 ‘占’자로 표기했다.
1398년(홍무 31)에 주원장이 돌아가자 이곳에 마황후와 합장을 하였다.
1413년(영락 11)에 大明孝陵神功聖德碑 를 세우면서 황릉의 모든 역 사를 마쳤다. 황릉의 전체 구조를 대략 살펴본다. 황릉 외곽에는 황릉 전 지역을 보호하고 외인들의 출입을 금하고자 皇墻을 쌓았다. 황릉 입구에는 황릉의 기점을 말하는 下馬坊이 있고, 그 옆에는 1531년(가 정 10)에 세운 神烈山碑와 1641년(숭정 14)에 세운 禁約碑가 있다. 하 마방의 서북쪽에는 황릉의 대문인 大金門이 있다. 대금문에서 신도를 따라가면 제례를 지내는 장소인 享殿이 나오고, 또 향전에서 신도를 따라가면 능침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세운 寶城이 나온다. 보성 정면에 는 明樓가 세워졌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의 명효릉은 내성 朝陽門 바깥의 종 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황릉의 전체 모습을 보면 모든 건물과 구조 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황릉 외곽에는 붉은 색 담장 이 종산 아래까지 둘러싸여 있어 황릉의 보호 경비가 엄격하고 전체 면적이 매우 컸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황릉 입구에는 3칸짜리 패루 가 있고, 그 옆에 ‘下馬’라고 적은 커다란 비석이 우뚝 서있다.7) 패루 뒤편에 ‘皇陵’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는 건물은 大金門으로 보인다.
大金門에서 북쪽으로 신도가 뻗어 있고, 신도 끝에 享殿으로 보이는 건물이 세워져 있다. 또 享殿에서 다시 북쪽으로 신도가 뻗어 있고, 신 도 끝에 붉은 색 담장으로 된 寶城과 누각 형태의 明樓가 보인다. 그 림 속의 제반 황릉 건물은 명효릉의 실질 모습과 비교적 흡사한 편이 나, 다소 과장되게 그렸다.8)
당시 남경 장강가에는 수로를 관장했던 관아가 설치되어 있었다. 龍
7)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 下馬 비석의 모습은 명효릉 유적의 실제 모습 과 많이 다르다. 현존 하마방은 양쪽 기둥을 세운 패루 형태이다. 높이는 7.85m이고, 너비는 4.94m이다. 패루 가운데 옆으로 ‘諸司官員下馬’ 6자가 새겨 져있다. 이와 반면에 현존 神烈山碑는 높이가 4m인 한 개의 비석으로 되어있 다. 그림 속 하마 비석은 오히려 현존 산렬산비의 모습과 닮았다.
8) 王煥鑣, 明孝陵志 (南京: 南京出版社, 2006.9), 명효릉 사진 및 楊新華, 盧海 鳴, 南京明淸建築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8), pp.595-615 참조.
江關은 장강의 통행과 교역을 담당했던 관아이며, 오늘날 南京港 부근 이다. 江東驛은 외국 상인들이 머물며 교역을 행했던 장소이며, 오늘날 江東門 바깥 三汊河 부근이다. 寶船廠은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했던 장 소이며, 오늘날 三汊河 하류 寶船遺址公園 일대이다. 고려 정몽주는 남 경에서 장강을 통해 귀국할 때 용강관에서 선박을 타고 출발했다.9) 명 鄭和도 선단을 이끌고 외국으로 나설 때 보선창에서 선박 건조와 수리 를 마친 후 바로 옆 용강관에서 바다 입구를 향해 출발했다.10) 송조 천객귀국시장도 그림에는 강동문 바깥에 江東橋로 추정되는 석교가 있고, 석교의 건너편에는 여러 관아들을 그려져 있다. 이 관아들은 주 로 수로와 교역을 관장하는 부처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외국 사신을 전별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화공은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특정 장면을 과장시키는 기법을 도입했다. 본국으로 귀국하는 외국 사신과 전송하는 명나라 관원의 모습을 마치 돋보기로 확대시키듯 크게 그려 놓았다. 외국 사신과 뱃사람들은 선박에 타고 있고, 금유심을 포함한 명나라 관원들은 관복을 입고 장강가에 서 있다. 명나라 관원들 뒤에 는 시종들이 물건을 들고 있고, 石城門 아래에는 성문을 지키는 병사 가 서 있다. 또 외국 사신이 타고 갈 선박의 모습도 크게 그려 놓았다.
선박의 이물이 뾰족하게 솟아 있고, 뱃전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또 장강의 강변에는 한 정자가 그려져 있다. 정자 아래에는 떠나는 자 와 전송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고, 그 옆에 한 시종이 서 있다. 이 장면은 외국 사신과 명나라 관원들이 출항하기 에 앞서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던 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9) 圃隱集 권1 龍江關 (한국문집총간본, 책5, p.579) 참조.
10) 鄭和航海圖 (명 茅元儀, 武備志 권240, 占度載・航海 ); 自寶船廠開船從 龍江關出水直抵外國諸番圖 (中華書局本, p.23) 참조.
Ⅲ. 그림 제작 시기 문제
여기에서 먼저 선행 학자들의 논지에 대해 살펴본다. 국립중앙박물 관은 2002년 8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고려ㆍ조선의 대외교류”라 는 특별전을 열어 관련 유물 350여점을 선보였는데, 여기에 송조천객 귀국시장도 가 들어가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해제에서는 17세기 전반기 북경을 배경으로 해로로 사행한 조선 사신을 그린 작품으로 추 정했다. 17세기 전반기에 후금이 강성해져 요동 지역을 점거하자 조선 사신은 부득불 해로를 통해 명나라 북경을 오갔다. 그림 속의 도성은 북경의 紫禁城이고, 선박에 오른 인물은 조선 사신이다. 금유심은 해로 를 통해 명나라에 조회를 왔다가 돌아가는 조선 사신을 전송하며 시를 지었고, 또한 화가는 이 광경을 묘사하여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해 로로 사행한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유일한 장면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11)
금년(2010) 鄭恩主는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시기와 그림 배 경에 대해 새롭게 해석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1392년(홍무 25) 부터 1409년(영락 7) 사이의 작품으로 南京城을 배경으로 명 관원이 조선 사신을 전송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아래에 정은주의 논리 를 정리해본다. 남경은 1356년(원 至正 16)부터 1421년(영락 19) 북경 으로 천도하기까지 명나라의 도성이었다. 처음에는 金陵, 명대에는 應 天府, 남경으로 개칭하였다. 그림 속의 황성 모습은 북경성이 아닌 남 경성이다. 황궁 화표, 다리, 궁전, 내외성의 성곽은 모두 남경성의 모습 이다. 1392년(홍무 25)에 외성의 宮薔을 중건했고, 황궁 밖 T자형 광장 을 조성했다. 화면에서는 외성 江東門, 황궁 밖의 T자형 광장이 정확 히 나타나 그림의 제작 상한은 1392년(홍무 25) 이후로 추정된다. 명나 라는 건국 직후부터 고려와 외교를 맺었다.12) 1392년(태조 1) 이성계가 11) 국립중앙박물관 편저, 고려ㆍ조선의 대외교류, p.99; 국립중앙박물관 사이트
(http://www.museum.go.kr), 유물마당/주요유물/송조천객귀국시장 해제.
12) 정은주는 고려가 바닷길을 경유하여 명나라 남경으로 사신을 보낸 연도를
조선을 건국한 이후에도 바닷길을 경유하여 명나라 남경으로 계속 사 신을 보냈다. 1409년(태종 9)부터 조선 사신은 육로를 통해 명나라로 들어갔다. 그림의 제작 하한은 1409년 이전으로 추정된다.13)
실학박물관은 금년(2010) 10월 30일부터 내년 2월 28일까지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이라는 특별전을 연다. 특별전에는 연행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장본 送朝天客歸國詩章 圖 사진도 그 중의 하나이다. 특별전 도록과 전시 판넬에 적힌 송조 천객귀국시장도 해제는 정은주의 주장을 받아들여 조선 초기 바닷길 을 이용하여 남경으로 들어간 사행 기록화이며, 그림의 제작 시기는 1392년(홍무 25) 이후부터 1409년(영락 7) 사이로 추정된다고 했다.14)
다음으로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부분의 제작 시기에 대해 알 아본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상단에는 글씨가 있고, 하단에는 그림 이 있다. 아래의 고증은 혹시 그림 부분과 글씨 부분이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를 고려하여 논술 대상을 그림 부분으로 제한 한다.
선행 학자들은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의 제작 시기를 1392년(홍 무 25)부터 1409년(영락 7) 또는 17세기 전반기로 기술했는데, 이는 잘 못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림 속에 그려진 남경 건축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속에는 남경 건축물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들 건축물 가운데 明孝陵, 大報恩寺, 承恩寺 등 세 곳을 통해 그림의 제작 년도를 새롭게 밝혀본다.
남경 종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황릉, 즉 명효릉 이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 명효릉의 모습을 살펴보면, 멀 리 종산 아래까지 외곽 황장을 깔끔하게 쳐놓은 점을 보아 황릉의 모
1370년(공민왕 19; 홍무 3)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은 1369년(공민왕 18; 홍무 2)에 처음 이루어졌다. 明太祖實錄 홍무 2년 8월 갑자일 참조(中央硏究院歷 史語言硏究所本, 책3, p.858).
13) 鄭恩主, 赴京使行에서 제작된 朝鮮使臣의 肖像 , pp.2-5.
14) 실학박물관 편저,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p.52.
든 시설이 완정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준다. 명효릉은 1381년(홍무 14) 에 짓기 시작하여 1382년(홍무 15)과 1398년(홍무 31)에 각각 마황후와 주원장을 묻으면서 황릉의 모습이 갖추어졌지만, 황릉 시설에 관한 모 든 역사는 1413년(영락 11)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예를 들면 1404 년(영락 2) 겨울에 날씨가 추워 황장 축조에 나선 건설 인부들을 모두 군사로 교체하는 등 황릉의 전반적인 공사가 매우 늦게 진행되고 있었 다.15) 정은주는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기간을 1392년(홍무 25) 이후부터 1409년(영락 7) 사이로 추정했다. 명효릉의 최종 완공 시점은 정은주가 주장한 제작 시기보다 몇 년 후이다. 물론 이러한 추정 방법 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림 속 명효릉의 모습이 완정하게 그려졌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주관적인 평가가 남아 있다. 따라서 명효릉이라는 증거만으로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가 1413 년(영락 11) 이후에 제작되었다고 단정하기 힘든 점이 있다.
대보은사는 오늘날 남경시 中華門(옛 취보문) 바깥 동남쪽에 자리하 고 있다. 중화문에서 長干橋를 지나면 雨華路이고, 雨華路 뒤편이 바로 대보은사가 있는 옛터이다. 중화문 위에서 바라보면 대보은사터의 전 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보은사는 중국 남방에서 첫 번째로 세 워진 사찰이다. 247년(오 赤烏 10)에 오주 孫權은 康僧會가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받들어 建初寺를 세웠다. 그 후 사찰은 여 러 번 불태워지고 다시 세워졌고, 사찰명도 여러 번 바뀌었다. 동진 때 는 長干寺, 1018년(북송 天禧 2)에는 天禧寺, 1288년(원 至元 25)에 元 興天禧慈恩旌忠寺로 개칭했다. 원나라 말 전란 중에 사찰은 불타버렸 다. 1382년(명 홍무 15)에 주원장은 3년에 걸쳐 사찰을 준공하였다. 사 찰이 완공되자 주원장은 친히 어제문을 짓고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1408년(영락 6)에 천희사는 한 승려의 방화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되는 대참사를 맞이했다.
15) 明太宗實錄 영락 2년 11월 병진일조: “上御奉天門, 召成國公朱能諭曰: 今天 氣愈寒, 民築孝陵垣墻者, 可悉罷歸. 未畢之工, 令軍士畢之”(中央硏究院歷史語言 硏究所本, 책10, p.626).
<그림 3> 大報恩寺 장면
곧이어 영락제는 고려 출신 생모 䂵妃의 소생이라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숨기고 황위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불타버린 천 희사를 다시 한 번 중건 작업에 나섰다.16) 이때 영락제가 행한 사찰 중건 작업은 단순히 예전의 사찰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여 사찰의 크기와 규모를 크게 확충시키고 건물 의 모습과 자재를 궁궐에 준해 건설하여 거대한 사찰로 만들었다. 사 찰 북쪽에는 九級八面의 琉璃寶塔을 중건했다. 유리보탑은 영락제로부 터 第一塔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훗날 남경을 방문한 서양인들로부터 남경을 상징하는 표지탑으로 여겨졌다. 1413년(영락 11)에 영락제는 대 보은사 중건 과정을 언급하고 사찰명을 천희사에서 대보은사로 바꾼다 16) 朴現圭, 제주도 法華寺 三尊佛像과 南京 大報恩寺의 관계 (中國史硏究
58, 中國史學會, 2009.2), pp.129-154.
<그림 4> 承恩寺 장면
는 칙령을 내렸다.17) 대보은사 중건 작업은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려 영락제 재위 기간에 완성하지 못하고, 1428년(宣德 3) 손자 宣德 帝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
1856년(咸豊 6) 天京의 변 때 태평군의 의해 유리보탑은 파괴하고, 사찰 건물은 크게 훼손되었다. 1865년(同治 4)에 李鴻章이 폐허화된 사 찰터에 金陵機器製造局을 세웠다. 그 후 이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각 종 유물들은 철저하게 훼멸되어 오늘날 옛 터에는 영락제비와 선덕제 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최근 남경시는 남경을 상징하는 대보은사를 복 원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선 민가들을 철거하고, 남경시 考古隊가 유적 조사에 나서 많은 유물들을 발굴했다.
승은사는 오늘 날 남경시 三山 街 동북쪽 承恩 里에 자리하고 있다. 승은사의 역사는 명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은사 는 원래 명 宣德 帝(宣宗)를 모신 내관 王瑾(원명
은 陳蕪)의 저택이었다. 왕근 사후에 저택을 사찰로 삼았다. 1451년(景
17) 金陵梵刹志 권31 聚寶山報恩寺 중 重脩報恩寺勅 : “朕卽位之初, 遂勅工 部修理, 比舊加新, 比年有無籍僧本性, 以其私憤, 懷殺人之心, 潛於僧室放火, 將 寺焚毁, 崇殿修廊, 村木不存, 黃金之地, 悉爲瓦礫, 浮圖燬燼, 頹裂傾敞, 周覽顧 望, 丘墟草野. 朕念皇考、皇妣罔極之恩, 無以報稱, 況此靈跡, 豈可終廢? 乃用軍 民人等, 勤勞其力, 趨事赴工者, 如水之流下, 其勢莫禦, 一新刱建, 充廣殿宇, 比之 于舊, 功力萬倍, 以此勝因. 上荐父皇母后在天之靈, 下爲天下生民祈福, 使雨暘時 若, 百穀豐登, 家給人足, 妖孽不興, 災沴不作, 乃名大報恩寺”(天津人民出版社本, p.465). 이 칙령은 1413년(영락 11)에 만들어졌다.
泰 2)에 조정으로부터 승은사라는 사찰명을 하사 받았다.18) 1599년(만 력 27) 마테오리치(利瑪竇)가 남경에 들어왔을 때 승은사에 머물면서 관원과 문인들을 만났다. 1900년(광서 26)에 대규모 화재로 소실되고, 일부 석재들은 민가의 건축재로 사용되었다. 최근 승은사 옛 터에서 터파기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1백여 년 전에 사라진 사찰의 잔해물들 이 무더기 발견되면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장차 남경시박물관에서 승은사 유적지의 발굴 조사에 나설 예정이다.19)
다시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로 돌아가서 그림 속의 대보은사와 승은 사를 찾아본다. 그림의 하단 부분에는 남경 내성인 취보문과 호성하 (秦淮河), 석교(長干橋)가 있고, 석교 건너편에 탑이 우뚝 솟아있는 사 찰이 있다. 탑 아래에는 ‘報恩寺’라는 사찰명이 적혀 있다. 여기의 報恩 寺는 大報恩寺의 약칭이다. 그림 속의 대보은사는 도성의 여타 사찰이 나 도관에 비해 크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는 탑신은 붉은 색으로 그리고, 상륜부 寶蓋와 寶珠 부분은 누런색을 띠 며 빛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보은사가 특수한 지 위에 있는 사찰임을 엿볼 수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의 서쪽에는 石城門과 淸江門20)이 보 인다. 이들 성문의 안쪽에 소재한 朝天宮과 王府園 사이에는 여러 건 물들이 나열되어 있다. 조천궁은 오왕 夫差가 성을 쌓은 冶城山에 자 리 잡았고, 오늘날 남경시박물관으로 활용되는 현존 건물은 1384년(홍 무 17)에 중건되었다. 왕부원은 주원장이 吳王일 때 거주했던 궁궐이 며, 오늘날에도 이 일대의 지명에 옛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림 속의 왕부원은 궁궐 주위에 사각 담장을 쳐놓고 있다. 왕부원의 서편에 ‘承
18) 金陵梵刹志 권23 承恩寺 중 王㒜 承恩寺記略 : “承恩禪寺在南京舊內之 旁, 前御用監王公瑾之故第. 公旣歿, 改宅爲寺, 勅賜今額”(天津人民出版社本, p.424). 이 문장은 1467년(성화 3)에 작성되었다.
19) 薛林, 南京發見承恩寺遗址: 將進行全面考古發掘 , 新華網(www.news.cn), 2006년 2월 15일.
20) 남경(응천부) 내성을 축성할 때 성문 이름은 淸凉門인데, 1379년(홍무 12)에 淸江門으로 개명하였음.
恩寺’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힌 한 건물이 보인다. 승은사 건물 모습 은 일반 사찰 건물과 비슷하다.
대보은사라는 사찰명은 1413년(영락 11)에 처음으로 지어졌고, 승은 사라는 사찰명은 1451년(경태 2)에 처음 지어졌다. 송조천객귀국시장 도 그림 속에 대보은사와 승은사가 그려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 아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상한은 승은사가 세워진 1451년(경태 2)으로 정할 수 있다.21) 또 그림의 제작 하한은 명나라 멸망 시점을 넘지 않는다. 그림 속의 각종 관아 건물은 명나라 때 세워졌던 것이고, 명효릉을 皇陵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상 종합하면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의 제작 시기는 1451년(경 태 2) 이후부터 17세기 전반기 명나라가 멸망하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만약 제작 시기를 축소해야 한다면, 그림 속의 관아 건물이 온전한 점 으로 보아 남경의 도읍지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 즉 명나라 중반 기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Ⅳ. 朝天客 문제
본 절에서는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에 등장하는 외국 사신, 즉 조천 객의 실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현재 국 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소장처는 그림 속의 조천객이 어느 국 가의 사람인지를 해석할 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실 학박물관은 모두 그림 속의 조천객을 조선 사신으로 보았고, 정은주도 조선 사신으로 보고 자기 논술을 펼쳐나갔다.
21)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 三山門 바깥에 普惠寺와 西城이 보인다. 명 葛寅亮의 金陵梵刹志 권28 普惠寺 에 의하면 사찰은 1403년-1424년(영락 연간)에 唱經樓를 세웠고, 1457년-1464년(天順 연간)에 중수하고 사액을 받았 다(天津人民出版社本, p.448). 다만, 보혜사가 사액을 받기 이전에 사찰명이 무 엇인지에 대해 구체적 기록이 없어 본문에서 고증 자료로 활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필자는 혹시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가 현 소장처와 무관한 제삼국의 인사들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없는지에 대한 역발상 화두부터 던져본다.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이 제삼국에서 수집한 유물이 다수 보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일본학 자 大谷光瑞가 돈황, 투루판 석굴 등에서 가져온 유물들이 한국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이들 유물의 제작은 옛 한국인과 전혀 무 관한 것들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조천객은 과연 조선 사신일까? 이번에 송 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시기가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이러한 의문 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명 나라 시대에 고려・조선 사신들이 남경을 드나들었던 시기와 사행 노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명 태조 주원장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직전부터 남경을 수도로 삼았 다. 영락제에 이르러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는 작업이 결행되었다. 영락 제는 즉위 초기부터 자신의 세력 근거지인 북경을 수도로 삼을 계획을 수립했고, 1406년(영락 4)에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북경에 궁궐 신축에 나섰다. 1421년(영락 19)에 북경 奉天殿(현 太和殿)에서 정식으로 천도 행사를 치르고 북경 시대를 열었다. 천도 이후에도 남경은 양경제의 운영 방침에 따라 여전히 또 하나의 수도로 남았다.
려말 선초 시기에 고려・조선 사신이 명나라 수도를 오갔던 사행 노선은 크게 수로 전용, 육수로 겸용, 육로 전용으로 나뉜다. 1369년 (공민왕 18)부터 1372년(공민왕 21)까지 고려 사신은 선박을 타고 한반 도에서 장강 남쪽 해역까지 이어지는 해로와 장강 유역의 내수로를 통 해 명나라 남경으로 오갔다. 1372년(공민왕 21)에 정몽주 일행이 해로 를 통해 귀국하다가 許山 앞 바다에서 조난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사행 노선이 육수로 겸용으로 바뀌었다. 한반도에서 요동까지는 육로, 발해만 묘도열도는 해로, 산동반도에서 강소 북단까지는 육로, 강소 북 단에서 남경까지는 내수로를 이용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도 사신 들은 육수로 겸용 노선을 따라 남경을 오갔다. 1409년(태종 9; 영락 7)
에 영락제는 조선 權永均에게 사신 경로를 해로(실은 육수로 겸용 노 선을 지칭함)에서 육로로 바꾸라는 칙령을 내렸다.22) 이 시점부터 조 선 사신은 한반도에서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오갔다.
천도 직후 황태자(훗날 洪熙帝)는 옛 수도 지역의 동향과 민심을 살 피기 위해 남경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1417년(태종 17)과 1419(세종 1)에 조선 천추사가 황태자를 예방하기 위해 남경을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23) 이때에도 조선 사행 노선은 한반도에서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간 뒤 다시 남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해로를 이용했던 초기의 사행 노선과 다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의 배경은 남경이고, 제작 시기는 1451년(경태 2) 이후이다. 그림 제작 시기에 조선 조정은 명나라로 사 신들을 무수히 보냈지만, 모두 북경까지만 들어갔고, 남경을 드나든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17세기 초반 후금(청)이 요동반도를 점거하자 조선 사신들은 부득불 해로를 이용해서 명나라로 드나들었지만, 최종 목적 지는 여전히 북경이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이 제작된 이후에 조선 사신들의 사행 노선으로 미루어보면, 그림 속의 조천객은 조선 사신이 아닐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렇다면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조천객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
금유심에게 보낸 시편에서는 사신이 해를 향해(向日) 바다 건너 본국 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조천객의 본국은 남경에서 해가 떠는 지역, 즉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지도상에서 본다면 유구나 대만 지역이 남경의 동쪽 지역에 해당된다. 당시 유구는 독립된 국가로서 자주 명 나라로 사신을 보냈다. 이들의 사행 노선을 보면 유구에서 선박을 타 고 절강이나 복건에 상륙한 다음 내륙으로 들어와 남경을 통해 북경으 로 들어갔다.
물론 여기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옛 사람들은 오늘날 22) 太宗實錄 9년 윤4월 을축일조(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본: 이하동일) 참조.
23) 태종실록 17년 윤5월 계해일조, 세종실록 1년 2월 기해일조 참조.
사람과 달리 방위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 남경의 동쪽 지역은 유구와 대만 외에 조선과 일본도 포함된다. 중국 사람들은 왕왕 조선과 일본 을 해동이라고 표현한다. 남경에서 해를 향해 가는 방향은 유구를 지 칭할 가능성도 있지만, 조선 내지 일본을 지칭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 서 시편 문구 속의 방향을 가지고 조천객의 국적을 풀이하는 방식도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필자는 일전에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를 소 장하게 된 과정에 대해 문의를 해 보았으나, 원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 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에 등장하는 금유심, 매애공에 대한 인물에 대해서도 밝혀진 바가 없다. 현재 관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송조 천객귀국시장도 의 조천객이 어느 특정한 국가의 사람이라고 단정하기 가 힘들다. 다만, 하나 분명한 것은 15세기 중반 이후 조선 사신은 남 경을 들린 적이 없기 때문에 조천객이 조선 사신일 가능성은 다소 낮 은 편이다.
Ⅴ. 朝天船 문제
본 절에서는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속에 조천객이 탄 선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장강에는 본국으로 귀국하는 조천객을 싣고 출 항하는 선박 한 척이 있다. 선박에는 조천객을 비롯한 뱃사람들이 타 고 있다. 조천객은 관복을 입고 고물 갑판에 서서 전송자를 바라보고 있다. 뱃사람들은 출항을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한 사람은 선실에 올라 돛을 올리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래에서 돛줄을 잡아 당기고 있다. 또 두 사람은 고물 양편에 서서 선박을 깊은 곳으로 이 동하고자 장대를 물속에 집어놓고 힘차게 밀고 있다.
조천객이 탄 선박은 비록 화공이 그림의 포인트를 강하게 주고자 다소 과장해서 그렸지만, 선박의 제반적 모습은 명대 선박의 특징을
<그림 5> 朝天客과 朝天船 장면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고물은 앞쪽이 지나칠 정도로 높이 솟아있고, 고물 끝부분에 전경을 바라보기 위한 선실을 만들어 놓았다. 또 뱃전 에는 덩굴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해놓았다. 조선의 전통 선박인 판옥선 은 조천객이 탄 선박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고물이 다소 올 라가지만 지나치게 높이 솟아있지 않고, 따로 선실을 만들지 않았다.
또 뱃전에는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천객이 탄 선박은 어느 나라 선박인가? 명 王圻와 王思 義가 편집한 三才圖會가 있다. 이 책자에 수록된 각종 선박 그림들
<그림 6> 명 참선 을 살펴보면 조천객
선박과 매우 닮은 선박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선박은 바 로 站船이다. 참선 은 명나라 관부에서 수로 역참을 오가면 서 타고 다니는 관 용 선박이다.24) 고 물은 뾰쪽하게 올라 가 있고, 끝부분에 선실을 만들어놓았 다. 또 뱃전에는 조 천객이 탄 선박과 매우 흡사한 덩굴무 늬로 화려하게 장식
해 놓았다. 그러므로 조천객이 탄 선박은 명 관부 선박인 참선으로 보 인다.
다만, 여기에 고려해야 할 문제가 파생된다. 바다 건너 중국으로 들 어온 외국 사신은 통상적으로 본국에서 타고 온 선박을 타고 귀국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명 관부 선박을 타고 본국으로 귀국하는가 하는 문 제가 파생된다. 조천객이 타고 온 선박이 파손되어 명 관부 선박을 빌 러 타고 가는 것인지? 명 화공이 조천객이 탄 외국 선박을 직접 목도 하기 않고, 단순히 명 관부용 선박을 차용해서 그렸는지? 여기에 관해 구체적인 자료를 찾지 못했다.
만약 참선이 명나라 수로 역참 사이를 오가는 관부 선박인 점을 고 려한다면, 조천객은 남경에서 바다 입구까지의 내수로 구간은 명 관부 24) 三才圖會 器用 권4 站船 : “此官府所坐之船, 謂之站者, 就驛中之程言耳”
(續修四庫全書本, 책1234, p.272).
선박인 참선을 이용하고, 바다 입구에서 본국까지의 해로 구간은 사신 으로 올 때 타고 온 자국 선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해상에서 운행된 선박과 내수로에서 운행되는 선박은 많은 차이가 있다. 일반적 으로 바다에서 운행되는 선박은 첨저선일 경우가 많고, 내수로에서 운 행되는 선박은 평저선일 경우가 많다. 선저가 평평한 선박만이 하상 수위가 낮은 강이나 운하를 지나갈 수 있다. 앞으로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고증이 필요하다.
Ⅵ. 결 론
본 논문은 명나라 화공이 외국 사신을 전별하는 모습을 담은 사행 그림의 제반 모습을 분석한 논문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는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의 상단에는 雲冠翁 梅 厓의 화제와 金唯深에게 준 시편이 적혀 있다. 그림 배경의 지역은 應 天府(南京)의 도읍지와 장강 일대이다. 외국사신, 즉 朝天客이 장강에 서 본국으로 귀국하고자 선박에 올랐다. 이때 금유심을 포함한 명 관 원들이 나와 조천객을 배웅하고 있다. 그림 속의 남경은 각종 성곽, 관 아, 황릉, 사묘 등 제반 모습이 구비되어 있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그림 부분의 제작 시기는 1451년(경태 2) 이 후부터 17세기 전반기까지이고, 그 중에서도 명나라 중반기일 가능성 이 높다. 그림 속의 大報恩寺는 1413년(영락 11)에 개명된 사찰명이고, 琉璃寶塔은 이때 중건되었다. 承恩寺는 1451년(경태 2)에 세워진 사찰 이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주인공인 조천객은 현 소장처와 달리 조선 사신이 아니고 제삼국의 사신일 가능성이 있다. 명 선덕제 이후, 즉 송조천객귀국시장도 의 제작 시기에는 조선 사신들이 해로를 통해 남경을 드나든 적이 없었다. 조천객이 탄 선박은 조선의 전통 선박이 아니고, 명 관부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站船이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고려・조선 사신들이 남긴 사행록(일명 燕 行錄)에 대한 관심이 무척이나 높다. 사행록은 고려와 조선의 대중국 교류, 중국의 외교 사정, 사행 노선의 풍속 등 제반 사항에 대해 사신 들이 보고 들었던 기록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자료 가치가 높 다. 使行圖는 사행의 모습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자료 가치가 높다. 이와 반대로 중국에서 외국과 통교하면서 많은 사행록을 남겼는데, 이 또한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비록 송조천객 귀국시장 이 외국사신의 행차를 그린 명나라 그림이지만, 명나라의 대 외 외교, 남경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어 자료 가치가 높다.
[燁爀之樂室; 庚寅初冬初九]
(中文提要)
送朝天客歸國詩章圖 的製作時期和朝天客的分析
朴 現 圭
本論文對收藏在首爾國立中央博物館的 送朝天客歸國詩章圖 的製作時 期和主人公朝天客進行了分析. 送朝天客歸國詩章圖 是以應天府(南京)爲 背景的, 記錄了明朝官員們爲外國使臣餞行的場面. 在畵的上方有雲冠翁梅 厓寫的名爲“送朝天客/歸國詩章”的畵題及金唯深寫作的爲外國使臣餞行的 餞别詩.
送朝天客歸國詩章圖 中的城市, 并不是京師(北京), 而是應天府(南京).
圖畵的製作時期, 是在1451年(景泰2年)-17世纪前半期期間, 尤其是明朝中 期. 直到現在, 人們都把它的製作時期誤認爲是在1392年(洪武25年)-1409 年(永樂7年), 或17世纪前半期. 圖畵中的大報恩寺是在1413年(永樂11年)改 名的寺刹, 承恩寺是在1451年(景泰2年)建的寺刹.
送朝天客歸國詩章圖 的主體可能和現在的收藏處(韓國)不一致. 主人 公朝天客不是朝鲜使臣, 很可能是第三國家的使臣. 在圖畵的製作當時, 朝 鲜使臣們通過陸路前往的地方只有京師(北京), 而且并未曾通過海路前往應 天府(南京). 朝天客乘坐的船不是朝鲜的傳統船舶, 是明朝官府人員乘坐的 站船. 送朝天客歸國詩章圖 在研究明朝的對外外交, 應天府的樣子時, 是 很有價値的資料.
주제어: 송조천객귀국시장도, 남경, 응천부, 조천객, 사신, 국립중앙박물관 關鍵詞: 送朝天客歸國詩章圖, 南京, 應天府, 朝天客, 使臣, 國立中央博物館 Keywords: Song jocheongaek gwiguk sijangdo(送朝天客歸國詩章圖), Nanjing(南
京), Yingtianfu, jocheongaek, envoy, National Museum of Korea
(원고접수: 2010년 12월 3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1년 2월 1일, 수정원 고 접수: 2월 14일, 게재 확정: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