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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통해 본 唐 帝國의 南海諸國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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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Ⅰ. 서 언

Ⅱ. <使臣圖> 전통과 初唐期 회화 속의 南海 諸國

Ⅲ. 唐代 불교미술에 표현된 南海 諸國

Ⅳ. 맺음말

미술을 통해 본

唐 帝國의 南海諸國 인식 *

1)

姜 熺 靜 (西江大)

**

Ⅰ. 서 언

당은 수의 뒤를 아시아 대륙 일대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 외의 지역 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명실 공히 대제국의 토대를 닦았다.

그에 따라 당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세우고, 자신이 설정한 계위 에 맞추어 세계 질서를 정리하고자 했다. 제국이 확장됨으로 인해 다 시 당 황실은 자신들이 설정한 황제 중심의 정치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생겼다. 특정한 지역, 특 정한 종족에 국한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넓은 영토와 각지의 다양한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던 당 황실은 책봉과 조공을 효과적으로 활용함

*이 논문은 서강대학교 교내 신진연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연구임 (201010010.01).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HK교수

(2)

으로써 외적으로도 자신들의 정치, 외교적 우위를 과시하려 했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라고 해도 좋을 당 문화의 국제적 성격은 잘 알려 져 있으며, 당이 개방적인 정책으로 세계 각 지역과의 적극적인 교류 를 통해 문화적, 사회적 지배권을 강화한 것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면 당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는 미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특히 본고 에서는 당대 들어 비약적으로 관계 개선과 교류가 동시에 진행된 남해 諸國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당이 건국된 618년 이후, 盛唐 말인 현종 말년 759년까지 139년간 동남아시아에서 당에 공식적으로 사절을 보내 조공한 횟수가 125회에 달한다는 점은 당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공적인 관계가 거의 규칙적으로, 정시에 이뤄 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데 당의 남방에 위치한 국가들과의 교류는 대개 해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이뤄진 공적 인 관계는 해상교역로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하며 전개되었다. 특히 토 번이 실크로드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육로를 통한 서역과의 교류가 불 가능해진 당 중기 이후에는 해로를 이용한 교역이 불가피했다.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조공이나 교역의 횟수는 명백히 8세기에 증 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술상의 자료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 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초당기에 그려진 돈황 막고굴의 벽화와 유명 한 초당기의 화가 염립본 등의 전칭작으로 남아있는 <양직공도>, <왕 회도>를 비롯하여 몇몇 공예품에 묘사된 경우를 보면 일찍부터 당에 서는 남해에 위치한 여러 나라들을 중국과는 다른 ‘外國’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점령하고 복속되어야 하는 단순한 자신들 ‘영토’

안의 異民族이 아니라 책봉이라는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회유하고, 그 들로부터 조공을 받아야 하는 전혀 다른 나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당의 황실과 관료들이 의식했거나, 의식하지 못했거나 간에 스스 로를 다민족국가로 인식하고, 그에 적합한 정책을 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자신들이 생각했던 세계제국으로서의 당의 정체성과 구별되는 타국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이를 시각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이 스스로를 우

(3)

월한 존재, 다른 어느 나라보다 우위에 있는 국가로 생각한 것은 분명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복하거나 복속시켜야 하는 정치적 공동체로서 의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이들이 독립된 국가로서 정체성을 가지 고 있다고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당대의 미술을 통해서 그들이 묘사했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오는 공적인 측면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어느 쪽이든지 본고에서 거론하는 미 술은 상류층의 정형화된 미술로서 일정한 격식에 따른 것이었다고 생 각되기 때문이다.

Ⅱ. <使臣圖> 전통과 初唐期 회화 속의 南海 諸國

초당부터 중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당에 온 외국 사신을 그린 일종 의 사절도가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 중에는 독립된 회화작품 도 있지만 무덤 벽화나 석굴사원의 벽화도 있어서 개방적인 당 사회의 이국 취향이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고 시각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회화에 표현된 당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당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림 속에 그려진 당 주변의 다른 국가들 을 상징하는 사람들의 크기와 심리적 상태는 마치 당에 종속된 것처럼 보이게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그림의 구성과 표현 방식이 唐代 처음 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이전 시기부터 그려졌던 방식을 답습한 것이 기 때문에 唐代의 현실을 액면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 보기도 한다.1) 그러나 무엇보다 당대 이전에 국가들 사이의 일종의 1) 특히 이는 고종의 아들인 李賢 묘의 <禮賓圖>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인물의 국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예빈도>가 고구려가 이미 멸망한 706년 이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조우관의 인물을 고구려인으로 볼 수 없 다는 견해에 대한 반박으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金理那, 唐 美術에

(4)

계위를 반영한 회화가 어떤 방식으로 그려졌는지를 입증할 만한 증거 가 없거니와 이렇게 계위를 시사하는 회화가 당대에 활발하게 재생산 되었다는 점에 더욱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남아있는 이들 회화 중에는 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그림들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사절도에 그려진 대상들이 특정 지역의 작은 공 동체에서 온 사신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국가나 나라 단계에 이른 비교 적 체계적인 규모를 갖춘 집단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림을 그렸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당과 상대국가 간의 대등한 관 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이들이 공적인 관계를 맺 는 대상이라고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 들어 편찬된 史書에서는 당 주위의 외국과 인근 종족을 통합 적으로 파악하려는 편제가 보인다고 한다.2)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즉 정치적 사회구성과 통치체제를 갖추고 있는 집단과 지역을 함께 구 분하여 특별히 칭하는 ‘외국’이라고 통칭한 예는

사기

에서 보이기 시 작하는데 이때 사용된 ‘외국’의 용어는 중국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나라나 종족의 집단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夷狄, 蠻夷와는 구분될 수 있다고 한다.3) 그러므로 당이 주변 국가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로 명확하게 분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비교 적 독립적인 체제를 갖춘 ‘외국’과 정복, 내지 복속시켜야 할 대상으로 서의 ‘만이’로 나누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이라는 용 어 자체에는 이미 禮의 관념이 포함되어서 그들은 중국에 입조하는 職 貢의 주체로 파악되었다. 반면 蠻夷나 夷狄으로 지칭되는 종족이나 정 치적 집단에는 관작을 내리거나 ‘외교’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가령

송사

외국전에서 기술한 蠻夷傳 의 종족은 독자적 정치 체제

보이는 鳥羽冠飾의 高句麗人 -敦煌벽화와 西安 출토 銀盒을 중심으로- ( 基白先生古稀記念 韓國史學論叢(上), 일조각, 1994), pp.503-524 참조.

2) 김유철 하원수, 역자 서문 (동북아역사재단 편,宋書 外國傳 譯註, 동북아 역사재단, 2010), pp.7-9.

3) 김유철 하원수, 위의 책, pp.8-9.

(5)

를 확보하지 못하고 공동체 단위로 여러 곳에 분산 거주하며 이들은 중국과는 다른 독립적인 국가로서 국제적인 교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 라 중국의 지방 정치조직이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는 대상으로 나타난 다.4) 이처럼 명백히 정치적으로 다른 통치기구를 가지고 특정한 지역 을 점유하여 역사를 공유하고, 자기들만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종 족 집단을 외국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관찰자의 관점이 그 대로 <양직공도>나 <만이직공도> 등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대의 그림에 그려진 대상이나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관료였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주체, 즉 화가의 신분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림이 관료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당의 관리와 주변 국가의 사신이 그려진 그림을 기록 으로 남기거나, 감상, 혹은 향유하는 사람들은 곧 당의 엘리트층이고 정치적 세력과 권한이 있는 인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려진 대상과 대상간의 관계는 공적인 관계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공적인 관계’가 당대 그림에 그려진 표현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職貢圖>나 章懷太子墓 <禮賓圖>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大唐의 天下觀을 반영하는 정치적인 입장이 표 출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불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舍利分配 圖>, 혹은 <舍利奉送圖>, <維摩經變相圖> 유형이다. 전자의 유형은 朝貢, 또는 職貢의 사절들이 그려져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공적인 관계, 국가 간의 관계에 의한 계위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었다. 일반적으 로 고대 미술에서는 지위나 계급이 매우 중요하게 강조된다. 중요한 인물일수록 크고, 강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들의 상대적인 지위에 따라 그 크기가 정해지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다 양한 종류의 <皇帝․皇后禮佛圖>에 그려진 인물들의 크기에서도 드러 나듯이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의 크기와 명확도는 정확하게 그들의 지위와 비례한다.

4) 김유철 하원수, 앞의 책, p.8.

(6)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당대 회화에서의 남해 제국에 대한 인식 은 어떻게 확인될 수 있을까? 먼저

舊唐書

卷197에 실린 <외국사신 도> 관련 기록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貞觀3년(629)에 顔 師古가

周史

「王會篇」을 들어 周 武王 때 외국에서 사신이 내조했 다는 기록을 들고 이를 初唐의 현실에 견주어 당시 당에 왔던 만국 사 신들을 그림으로 그리길 청했다고 나온다.5) 같은 내용이

唐會要

宣和畵譜

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앞 시대의 기록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6) 단지

선화화보

에는 閻立德에게 그림을 그리 게 했다고 했지만 張彦遠의

歷代名畵記

에는 閻立本에게 <外國圖>를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원래 초당기에 그려졌을 <萬國使 臣圖>의 원본을 그린 화가가 염립본이었는지, 염립덕이었는지 혹은 두 사람이 모두 그렸던 것인지 혼동을 준다.7) 그런데

역대명화기

에는 염립본과 염립덕 형제가 모두 만국 사신이 당 조정에 來朝한 모습을 잘 그려서 누구의 그림이 나은지를 가릴 수가 없을 정도로 두 염씨의 작품이 모두 上品이라는 내용이 또 나온다.8) 아마도

역대명화기

의 이 기록은 두 형제들이 그린 외국 사신 그림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 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9)

역 대명화기

가 장언원이 활동했던 9세기 중엽 이전에 저술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염립본, 염립덕 형제가 생존했던 때로부터 불과 200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 다.10)

당회요

,

역대명화기

,

선화화보

등에서 이처럼 유사한 기록 5)舊唐書卷197, 列傳 147 참조.

6)唐會要卷99,宣和畵譜卷1 참조.

7)歷代名畵記卷9, <立德弟立本>, “天下初定 異國來朝 詔立本畵外國圖”.

8)歷代名畵記卷9, <立德弟立本>, “博陵大安 難兄難弟 (中略) 百萬朝貢 接應 門之位序 折旋矩度...備得人情 二閻同在上品.”

9) 이와 관련하여大觀錄石渠寶笈, 각종 인장과 題跋 등을 분석하여 정관 연간에 良工이 그렸다는 기록 등 <왕회도>류의 그림에 대한 언급 등을 분석 한 글로 이진민 남윤자 조우현, 王會圖 와 蕃客入朝圖 에 묘사된 三國使臣 의 服飾 硏究 (服飾51-3, 2001), pp.157-158을 참조할 수 있다.

10)역대명화기의 찬술 연대는 서문으로 미루어 적어도 당 大中1년(847) 이전

(7)

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것은 그림의 작품성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라 고 볼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림의 소재와 거기 그려진 사신들의 외형적 특징이 독특했기 때문이고 이는 외국 사신 특유의 풍속을 묘사 한 것에 기인하리라고 추측된다. 원본이 貞觀年間(627-649)에 그려졌 고, 정사에 기록이 나오며 후대의 화론서에 화가들의 이름도 언급된 것을 보면 비록 원본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그린 <사절 도>류의 그림은 초당기에 황실 차원에서 세계제국의 위상에 올랐던 당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그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7세기 전반에 서부 인도네시아에서 교역의 붐이 일었던 것을 염두에 둘 만하다.11) 당 태종이 636년에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곤륜국 의 하나인 甘棠에서 사신이 왔을 때, 이들이 왜 왔는지를 묻자 당이

‘지금 평화롭고 황실의 덕이 멀리 퍼졌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는다. 즉, 초당의 국력이 아시아 각지로부터의 사절단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12)

염립본의 전칭작으로 전해지는 <蠻夷職貢圖>는 원래 염립본이 그렸 던 그림을 후대에 모사한 것으로 생각되며 위의 기록을 뒷받침해줄 만 한 것이다(도1). 남해 어느 나라에서 오는 사절에 해당하는 인물과 그 의 권속 행렬은 자기 나라의 특산물인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 고 오고 있다. 실제로는 교역을 위해 가져왔을 조공 물품으로 다양한 물건과 동물들이 보인다. 행렬 앞 쪽으로는 산호를 받쳐 들고 있는 인물이 2 명 보이고, 그 뒤로는 코끼리의 상아를 든 인물이 각각 2명, 약재가 들 어 있는 듯한 항아리를 들고 가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있고, 그의

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 O. W. Wolters, Early Indonesian Commerce: A Study of the Origins of Srivijaya(Ithaca: Cornell University, 1967), pp.233-234 참조.

12) O. W. Wolters, 위의 책, p.234. 다만 당시 동남아시아는 푸난(扶南)이 쇠퇴하 고 첸라(眞臘)가 강성해지기 전의 상황이었으며, 정치적인 힘이 분산되어 해상 교역을 주도할만한 세력이 아직 없었다고 한다. 월터스는책부원귀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또 푸난의 몰락과 함께 새로 등장한 세력 가운데 특기할 만한 곳은 몬족의 드바라바티로, 638년과 649년에 각각 당에 사신을 보냈다고 한다.

(8)

<도1> 전 염립본, <만이직공도>, 일본 교토 양족원 소장

뒤를 태호석이나 침향목으로 보이는 기다란 물건을 들고 가는 사람들 이 뒤따르고 있다. 그들 뒤,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사신으로 생각되는 인물이 말을 타고 간다. 그는 여기 그려진 인물들 가운데 가장 체구가 좋고, 옷을 갖춰 입었으며 그의 시종으로 생각되는 인물이 뒤에서 日 傘을 받쳐 들고 따라가고 있어서 사절단의 우두머리임을 암시한다.13) 그의 바로 뒤에는 공작의 깃털로 만든 孔雀扇과 기다란 파초잎, 상아, 뿔이 긴 얼룩무늬의 염소, 하얀 앵무새가 들어있는 새장의 행렬이 뒤 따른다.14) 이들 동식물과 물품들은 남해에서 중국으로 보내던 조공 물 품들이다.15)

宋書

,

南齊書

,

梁書

,

南史

등에는 남해의 蠻夷, 즉 南夷, 西南夷로 분류되었던 나라들이 보낸 사신과 그들이 가져온 품목 들이 기록되어있다.16) 이에 따르면 그들이 가져온 것은 약재, 향료, 침 향, 상아, 코뿔소 뿔, 하얀 앵무새, 보석류 등이 포함된다.17) 이 그림은 13) 왕이 法服을 입고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아마도 동남아 여러 국가에서 신분 이 높은 사람들은 불상의 대의와 같은 모양의 통견형 법의를 입은 것으로 추 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동북아역사재단 편,南齊書 梁書 南史 外國傳 譯註(동북아역사재단, 2010), p.249.

14) 婆利國 설명에서 왕 뒤에 孔雀扇과 白毦拂을 든 신하가 시립하고 있다는 기 록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조공 물품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역사재단 편, 위의 책, pp.184-185.

15)宋書南史에는 媻皇과 迦毗黎에서 각각 붉은 앵무새와 흰 앵무새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며, 임읍에서는 하얀 원숭이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 러므로 남해에서 보낸 특산물 가운데 동물로는 코끼리, 원숭이, 앵무새 등이 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16) 사서에 나오는 이들 품목들은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공적 인 교역에서 주로 관심이 집중되었던 특산물로 보인다.

(9)

염립본의 전칭작이라는 점에만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當代 남해 諸國과 중국 간에 이뤄진 교역과 그와 관련되는 기록들이 정확하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자료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그리는 전통은 이미 梁代부터 있었다. 현재 원본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대표적인 그림으로 <梁職貢圖>를 들 수 있 다. 이 그림은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지만 외국의 사신을 그린 그 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이면서 기록과 일치하기 때문에 표현 방식 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어왔는가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볼 필요가 있 다. 일종의 기록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양직공도>는 중국이 그들과 는 ‘다른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찰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그림 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관찰’과 ‘재현(representation)’은 그들 나름의

‘외국’을 바라보고 시각화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직공 도>나 <유마경변상도>에 표현된 인물들은 그들 자신들의 국가를 표 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고대 회화에서 계급은 인물 의 크기로 구분되지만 이와 같은 그림에서 인물들 간의 크기의 차이는 그들 상호간의 계위와 관계의 격차를 현실화시켜주기 위한 목적에 의 한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각 국의 성격과 특징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사절로 온 각 국 사신들을 통해 당 에서 인식하고 있었던 각 나라의 풍속과 위상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들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은 일반적인 고대의 인물 묘사에 보이는 계 급 표현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묘사된 인물로 대표된 각 나라 의 위상은 당의 관료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 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직공 도> 류의 그림이며, 이러한 그림은 梁代부터 궁정에서 그려졌던 것으 로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양직공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편의 관련 논문이 나와 있고, 이들은 주로 누가 그렸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은 무엇을 참고할 수 있는지가 논 17) 특산물 중에는 火齊珠 등의 각종 보석들이 포함되었으며, 그 외에 雜香, 蘇

合, 鬱金, 상아, 檳榔 등이 포함되어 있다.

(10)

<도2> <양직공도>, 1077년 모사본, 중국 남경박물관 소장

의되었다.18) 한편으로는 백제 사신이 그려졌다는 점에서 지금은 자료 가 별로 없는 삼국시대 복식사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그림으로 평가되 기도 한다.19) 이와 유사한 그림 자료로는 <王會圖>, <蕃客入朝圖>가 있는데, 이들 그림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나라의 사신을 그리고, 옆에 나라 이름과 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제작된 두루 마리 그림이다.

이들 <직공도> 류의 그림은 모두 후에 元帝가 된 양 무제의 아들 蕭繹(508-554)이 만든 <양직공도>의 모본으로 간주되고 있어서 당시 이 그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20) 모본들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여겨지는 <양직공 도>는 북송 熙寧 10년(1077)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주목을 받았다 (도2). 소역이 당시 양에 조공 온 사신들의 용모와 풍속을 관찰하고,

또한 두루 물어서 만들었다는 기록은 歐陽詢의

藝文類聚

에 나오며,

<왕회도>는 당의 염립본이 그린 <唐閻立本職貢圖>라는 이름으로

石 渠寶芨

에 나온다. 따라서 선행연구에 의하면 이들 세 그림은 양대에

18) 이와 관련한 세밀한 연구로 金鍾完, 梁職貢圖의 성립 배경 (중국고중세사 연구8, 2001), pp.29-65이 좋은 참고가 된다. 이 글에서는藝文類聚에 의거 하여 梁 元帝 蕭繹의 원본을 모사한 것으로 35개국의 사신이 그려진 것으로 보았다.

19) 이진민 남윤자 조우현, 앞의 글, pp.155-170.

20) 가장 먼저 이 그림이 소역의 <양직공도>를 원본으로 한 것이라는 점은 金維 諾에 의해 제기되었다. 金維諾, 梁職貢圖的時代與作者 (文物1960-7, 1960) 참조.

(11)

그려진 원본을 각각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에 모사한 것이기 때문에 각 국 사신들에 대한 비정이 반드시 원본과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21) 이들 <직공도> 류의 그림에 쓰인 題記는

梁書

諸夷傳 의 전거였다고 알려졌지만 그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여겨진다.

가장 오래된 모사본으로 알려진 원 남경박물관 소장의 <양직공도>

와 대만 고궁박물원의 <왕회도>에는 현재 13개국의 사신이 그려졌고, 그 중에 南海의 나라에 해당하는 것은 狼牙修國 한 곳에 불과하다. 낭 아수국은 랑카수카(Lankasuka)를 한역한 말이며 凌牙斯加로 쓰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말레이 반도, 파타니(Pattani)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나 라이다.22) 중국의 사서에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강 성한 제국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명맥을 유지했 던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원본에는 어떤 나라들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번객입조도>에는 낭아수국 외에 林邑, 干陀, 扶南이 포함 되어 있다(도3). 잘 알려진 대로 임읍은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오늘날 의 다낭 남쪽 호이안(Hoi An)에 있었던 참족의 나라이고, 간타, 혹은 干陀利는 슈리비자야(Srivijaya)가 세력이 커지기 전에 있었던 나라이 며 부남은 해상 교역을 발판으로 발달한 캄보디아의 고대 해상제국으 로 추정된다.23) 원본 그림에는 이들 나라 외에 어떤 나라들이 포함되 21) 이에 대해서는 深津行德의 연구가 잘 정리되었다. 深津行德, 臺灣故博物院所 梁職貢圖模本似ついて (調査硏究報告44, 學習院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9).

22) 오늘날의 랑카위 및 크라 지협 일대와 가까운 말레이 반도의 고대 왕국이라 고 생각된다. 말레이 기록에는 원래 케다(Kedah)에 수도를 정했다가 Pattani로 옮겼다고 한다. 바가닷타(Bhagadatta) 왕이 515년, 523년, 531년 양으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케다연대기에 대해서 O. W. Wolters, Early Southeast Asia: Selected Essays (Ithaca: Cornell University, 2008) 참조.

23)舊唐書(卷197) “林邑國 漢日南象林之地 在交州南千餘里...自林邑以南 皆卷髮 黑身 通號爲崑崙”,南史(卷78) “扶南國 在日南郡之南 海西大灣中 去日南可千 里 在林邑西南三千里” 간타는 임읍이나 부남보다는 덜 알려졌는데, Kadaram 의 음역으로 생각되며 표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되어 斤陁利, 干陁利 등으 로 나온다. 수마트라에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말레이 반도설도 있다. 5세기 중

(12)

<도3> <번객입조도>, 10세기 초,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 나라들이 당시 양에 사신을 보냈거 나, 적어도 이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양의 황실에서 알고 있었으리라 는 추정은 가능하다.

梁書

에서의 이 나라들에 대한 소개는 대개 '南 海洲에 있으며'로 시작하고 있어서 중국에서 볼 때, 그 남해 일대에 펼쳐진 대륙과 섬나라로서 그들 나름대로 일종의 ‘지리적 범주화’를 하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양서

外夷傳 에 기록이 남겨진 나라 는 낭아수국, 임읍, 간타리, 부남으로 <번객입조도>와 일치하며 그림 으로 그려지지 않았으나 기록으로 소개된 나라는 婆利國이다.24) 아마 도 이들에 대한 정보는

양서

가 편찬되었던 당대까지 전해졌던 것으 로 보이며, 일부는 당대까지 존속했다고 생각된다.25) 낭아수는 세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지는 상황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던 것으로 보이며 부 남은 전혀 종족이 다른 첸라(眞臘)에 의해 6세기경에는 이미 쇠퇴일로

엽부터 중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팔렘방(Palembang)이나 잠비(Jambi)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슈리비자야 이전에 먼저 번성했던 나라라 할 수 있다.

24) 파리는 발음상의 유사성 때문에 발리(Bali)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고대에 번성했던 빠레(Pare, 오늘날의 Mojokerto)라고 보기도 한다.南史 外國傳 譯 에서는 후카미 스미오를 인용하여 자바에 있었던 나라라고 추정했다. 동북 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p.277.

25) 중국 역사 기록에 남해 여러 국가, 즉 동남아 諸國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그 중에는 시대의 부침에 따라 등장하고 사라지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오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기에만 있었던 나라라고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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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었고 당대에는 거의 존재가 불확실할 정도였다.26) 그러므로 부남 의 사신을 모본인 <번객입조도>에 그린 것은 실제 그들이 왔다는 것 을 알고, 나라의 이름만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간타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간타리의 쇠퇴로 인해 초당 기에는 일시적으로 인도네시아 서부에 힘의 공백이 있었다는 견해가 이를 뒷받침한다. 607-610년에 교역을 트기 위해 隋의 사절로 이 지역 에 갔던 常駿이 간타리 같은 중심국이 없다고 했던 것도 유념할 만하 다.27) 즉, 644년에 말라유(Malayu)가 당에 사신을 보내기 전까지 이 지역에는 이름을 남길 만한 정치적 구심체가 별로 없었다고 판단된다.

이 그림들은 무엇보다 당시의 眞作은 아니지만 충실한 모본으로서 의미가 있으며, 정형화된 사신도의 형식을 갖춘 그림으로 주목할 만하 다. <양직공도>에 묘사된 낭아수국 사신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면 분 명 인도나 서역의 사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서 그들의 풍속 적인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도4). 개별 사신 뒤에 낭아수국이라고 써있으므로 분명하게 국적이 밝혀진 이 사신은 거의 羅形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낸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한 눈에 피부빛이 검은 종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여러 사신들이 두건을 쓰고 있지만 낭아수국의 사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맨 머리에 맨 발이다.

상체에는 기다란 스카프 같은 천을 비스듬하게 두르고, 하의로는 역시 천을 둘러서 바지처럼 만든 옷을 입고 있으며 발에는 발찌가 있는 독 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낭아수국 사람들의 실제 복식 풍습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이 그림은 기록화적인 성격

26) 푸난의 뒤를 이어 첸라가 같은 지역을 점유하고 나라를 발전시켰으나 푸난과 첸라의 종족은 각각 말레이계 해상민족과 몬-크메르어를 쓰는 대륙계 종족으 로 문화상 계승된다고 볼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개설로는 최병욱,동남아시 아사 -전통시대(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6), pp.42-48, 87-89 참조.

27) 월터스의 책에서 상준의 기록이 계속 언급된다.隋書에 의하면 그는 수 양 제의 사절로 607년에 동남아시아에 갔으며 처음에 赤土에 갔다고 한다.

Wheatley에 의하면 적토는 말레이 반도 남동쪽 파타니 남부라고 추정된다. 그 의 여정은 안남에서 참파를 거쳐 적토로 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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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낭아수국 사신, <양직공도> 부분 을 갖고 있어서 아무런 편견이

나 감정적인 묘사가 없으며 오 히려 사신 그림 뒤에 다른 나 라 사신과 각각의 나라에 대한 설명을 길게 기록한 것이 이채 롭다.28) 여기서 보이는 낭아수 국 사신의 정형화된 외모가 당 대의 다른 미술에서도 재현된 다.

<직공도>류의 그림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일 일이, 독립적으로 그려서 오늘

날의 증명사진처럼 기록화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신을 받는 주체가 되는 중국과 주변국과의 관계는 묘사되지 않았다. 이 점은 아 마도 실제로 이들 그림이 그려진 시기의 문제의식과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초당대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진 당과 주변국 사신이나 인 물들의 묘사와는 대조적이다. 즉, 전자가 각국 사신의 ‘묘사’에 주안점 을 둔 것이라면 후자는 국가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둔 것이다. 여기 서 주목할 만한 것은 ‘관계’를 시사하는 구성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초 당기 불교회화에 먼저 나타난다는 점이다.

Ⅲ. 唐代 불교미술에 표현된 南海 諸國

당대 화가들이 보고, 생각하고, 표현했던 남해 여러 나라, 즉 오늘날 의 동남아시아는 어떤 성격의 나라, 혹은 지역으로 묘사되었는가를 살 28) 그림에 쓰여진 글에는 ‘낭아수국은 남해 중에 있으며, 광주에서 2만1천리 떨 어진 곳에 있으며 나라의 크기는 동서로 30일 거리, 남북으로 20일 거리’라는 설명과 함께 낭아수국의 특징을 적고 있어서 지리지의 성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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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보기 위해서 먼저 돈황 막고굴에 그려진 <維摩經變相圖>를 보겠다.

<유마경변상도>는

維摩經

의 내용 가운데 유마와 문수보살의 대담 장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유마경

은 在家信 者인 유마의 지혜가 현명한 문수보살을 능가할 정도라는 시사를 함으 로써 출가하지 않은 세속의 신자들도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내 용으로, 이를테면 재가신자를 두둔하는 경전이다. 즉, 불교가 중국에 소개된 이후, 가족과 君臣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이념과 대치되는 出家에 대한 가치를 적당히 절하함으로써 중국적 불교의 기반을 닦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전으로 남북조시대 이래 특별히 각광을 받았 다. 그에 따라 유마경은 여러 가지 방식의 미술로 표현되었는데, 그중 에서도 유마와 문수가 대담을 나누기 시작하는 <文殊師利問疾品>이 대표적인 소재가 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문수가 유마거사에게 병문안 을 가려고 하자, 범천, 제석천, 사천왕 등이 妙한 법문을 들을 수 있으 리라고 기대하며 따라가는 내용이 나온다.29)

<도5> 유마의 청중들, 642년, 막고굴 제 220굴, 동벽 남측

<도6> 문수와 청중, 642년, 막고굴 제 220굴, 동벽 북측 초당기의 대표적인 굴로서 642년의 조성연대가 밝혀진 막고굴 제 29)한글대장경: 維摩詰所說經(동국역경원),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kyoun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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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굴에는 유마와 문수가 문답을 나누는 <유마경변상도>가 그려졌 다.30) 제220굴 동벽 남측에는 유마상이 있고(도5), 동벽 북측에는 문수 상(도6)이 각각 그려졌는데 이들 유마와 문수 아래에는 각각 그들의 문답을 듣는 청중들이 그려졌다. 먼저 문수보살 하단에 그려진 청중 가운데 가장 중앙에 그려진 인물은 한 눈에 중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 아볼 수 있다. 황제 주위에는 각자의 계위에 맞게 신하들이 늘어서 있 다.31) 면류관을 쓰고서 붉은 복식을 입은 황제가 두 팔을 벌린 모습은 이전의 <歷代帝王圖卷>에 그려졌던 역대 황제들의 모습을 연상시킨 다. 그의 반대편에 대칭이 되는 위치에 그려진 인물들은 앞에서 거론 했던 <양직공도>나 <번객입조도>에 그려졌던 사신들을 한데 모아놓 은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은 각양각색의 특이한 복색을 한 모습으로 그들의 다양한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에서 한 눈에 중국계 인물이 아니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관과 장신구, 신발과 손에 들고 있거나 걸친 물건들은 이들이 주변 국가에서 온 사신의 형상임을 보여준다.

이는 한편으로 유마와 문수의 대담이 중국만이 아니라 四海 대중들에 게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안으로 보이기도 하 고,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변한 당 사회의 개방성과 자신감을 방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유마경

에는 병문안 을 가는 문수보살을 따라나선 존재 중에 속세의 인물은 들어있지 않다 는 것이다.32) 또한 문수가 유마의 방에 들어서서는 侍子도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는 모습에 놀란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여기 표현된 세속의 인물들은 경전의 내용과는 사실상 관련이 없으며 그나마 가능 30) Ning, Qiang, Art, Religion and Politics in Medieval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4), pp. 57-63.

31) 이와 같은 구성이 唐的 天下를 과시하는 것이라는 점은 김리나 교수의 지적 이다. 김리나, 앞의 글, pp. 503-524.

32)문수사리문질품 에서부터 이어지는 대목에는 범천, 제석천, 사천왕, 타방의 보살들이 따라갔다거나 다른 국토의 불이나 보살, 천인에 관한 언급만 있을 뿐, 세속의 왕과 군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혹 方便品 의 문병 장면을 그린 것이라 하나 문수와의 문답 장면이 명확하기 때문에 국왕, 諸臣이라 보기는 어 렵다. 노태돈,예빈도에 보인 고구려(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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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7> 유마와 청중, 8세기, 막고굴 제103굴, 동벽

한 것은 문수보살을 따라서 법문을 기대하고 온 인물들로 보아야 한 다.

남북조시대인 6세기에도 유마경변상도에 해당하는 표현이 佛碑像과 석굴사원의 조각에서 보이지만 어느 쪽에서도 유마와 문수 두 인물의 묘사에만 중점을 두었을 뿐이고, 그들 사이의 문답을 듣고 있는 청중 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고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경전의 내용 중에 속세의 인물을 거론한 부분이 없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 다. 그러므로 유마 ․ 문수 아래 그려진 세속의 청중들을 각 인물들의 특징을 잡아 그들의 각기 다른 외모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당대 들어 새롭게 나타난 관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황제와 권속들의 묘사는 틀에 박힌 듯, 정형화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양 벽 면의 인물 군상들을 종합하면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느낌을 준 다. 이는 이전 시기 중국미술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세계만을 묘 사하던 데 그치지 않고 보다 넓은 세계

로 시야를 넓혔다는 점에서 당대 인식 의 지평이 넓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 은 유마 아래의 청중 가운데 맨 앞에 표현된 나형의 인물들이다. 이들 인물 은 유명한 막고굴 제103굴 <유마경변 상도>에도 그려졌다(도7). 이들은 재단 이 된 옷을 걸치지 않고, 상반신에는 기다란 천을 비스듬하게 걸쳤으며, 하 반신에는 천을 이용하여 짧은 바지처럼 만든 것을 입었다. 그들 뒤로는 키가 좀 더 크고, 흰 피부에 코가 높으며 이 목구비가 뚜렷한 서역계 인물과 북방계 인물들이 묘사되었다. 앞에 그려진 나

형의 인물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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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8> 사자국 사신,

<번객입조도> 부분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미뤄볼 때,

더운 지방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 다. 다음으로 막고굴이 불교사원이니만치 여기 그려진 인물들은 아마도 불교 문화 권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면 이들은 아마도 인도나 스리랑카, 혹은 동남아시아에서 당에 온 사신이라고 추측 할 수 있다. <유마경변상도>에 그려진 인 물들은 이들 중 어느 나라에서 온 인물이 라고 해도 납득이 갈 것이다. 그런데 같은 더운 지방에서 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즉 사자국 사신은 나형으로 그 려지지 않았다.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을 충실히 모사한 것으로 생각되는 <번객입 조도>의 사자국 사신을 보면 이들은 어느

정도 재봉을 한 복식을 입은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어 주목이 된다(도 8). 사자국, 즉 스리랑카에서 온 사신들은 피부를 검은 빛으로 나타냈 지만 낭아수국 사신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나형 상반신에 천을 둘러 짧은 바지처럼 만든 옷을 입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재단과 봉재의 과정을 거친 복식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낭아수국과 사자국 사신의 생김새와 복식, 장신구에 구분을 두어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유형화되어 중국에서 계속 재현되었다.

그러므로 막고굴 제220굴 <유마경변상도>에 그려진 나형의 인물들 은 천축이나 사자국, 즉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온 인물들이 아니라 동 남아시아에서 온 사신들이라고 보는 편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점 은 또 한편으로 인도 조각에 보이는 하의 표현과는 분명 차이가 난다.

기본적으로 인도 조각에 보이는 하의는 천을 그대로 접어서 치마처럼 만들고 허리부분을 띠로 묶는 형식을 취한다. 즉, 하의를 길게 내려뜨 린 치마처럼 입은 모습이다(도9). 그러나 <유마경변상도>에 그려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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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9> 하의 입는 법(인도 및 동남아 일부)

<도10> 하의 입는 법(동남아)

림을 보면 유마 아래 있 는 사람들 가운데 앞쪽에 그려진 인물들은 긴 치마 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짧은 바지 형태의 옷을 입고 있다. 천을 무릎 높 이로 두르고 한쪽 끝은 두 다리 사이로 빼서 뒤 편 허리춤에 집어넣는 방 식으로 하의를 입은 모양 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현 재도 동남아시아 대륙부, 즉 미얀마에서 태국, 캄보 디아, 라오스에 이르는 지 역에서 하의를 입는 방식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도 10).

이 두 가지 하의 입는 방식의 차이는 의생활이 근본적으로 달랐던 데서 오는 문화와 전통의 차이 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맨 앞에 그려진 짧은 바지 형 태의 하의에 상반신이 나형인 인물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사원에 그려진 불교 경전의 변상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 쉽지만 사실상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을 나타낸 것이며 이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일 이다. 이와 관련되는 몇 가지 다른 미술의 예로 볼 때도 이들 동남아 시아에서 온 사신들은 특별히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확정하기는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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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온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한 가지로

양서

부남전 과 임읍전 의 기 록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푸난과 임읍 사람들은 폭이 넓은 吉 貝(karpāsa)를 허리에 두르는 방식으로 옷을 입는데 이를 干縵, 또는 都縵이라고 부른다고 했다.33) 길패, 혹은 古貝로 음역되는 카르파사는 솜이나 면화를 의미하는데 면화가 조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貝’를 썼다 고 한다. 그러므로 길패는 흔히 천의라고 부르는 스카프형의 면직물이 었다고 생각되며 이를 가볍게 상체에 두르거나 짧은 반바지처럼 허리 아래로 둘러서 옷의 형태를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면화 농사를 하거나 면직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중국 의 기록으로 보면 적어도 4세기경에는 이미 남해 諸國에서 면직물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34) 또한 직접 생산한 면직물이나 인도에서 수 입한 면포가 중국에 조공한 물품 중에 속해 있었던 것이 각종 사서에 서 확인되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은 모두 고패나 길패라고 기록되었고, 부남, 訶羅陀, 丹丹 등이 조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35)

도만은 오늘날 동남아 지역 사람들이 입는 사롱(sarong)이라고 보기 도 한다.36) 사롱은 긴 치마처럼 생긴 동남아 전통의 민속 의상에 해당 한다. 그러나 음역으로 생각되는 간만이라는 용어만으로 이것이 어떤

33)양서에서 낭아수국 설명에서는 干縵이라고 썼고, 婆利國 설명에서는 都縵 이라고 썼다. 임읍의 풍속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허리 아래로 천을 두른다고 되 어 있는데 양쪽 다 바로 앞부분에 길패로 만든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실질 적으로 간만과 도만은 같은 옷을 다르게 부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동북아역 사재단 편, 앞의 책, p.249).

34) 면화 재배 및 면직물 생산이 어떤 역사를 갖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1200년대 중국,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간의 무역에서 동, 구리와 면직물 교역이 이뤄졌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발리와 동 자바 저지대의 면직이 소금, 염장생 선, 중국의 철제품과 함께 교역이 되었다. Lynda Norene Shaffer, Maritime Southeast Asia to 1500 (New York: M. E. Sharpe, Inc., 1996), pp.84-85.

35) 동북아역사재단 편, 앞의 책, 관련 항목 참조.

36) 위의 책, p.249 주)3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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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1> 삼폿, 동남아 복식 모양의 옷이었는지 확실하게 말하기

는 어렵다. 이와 관련되는 참고자료 로 7세기의 캄보디아 조각을 근거로 복원한 복식 그림을 보면 오늘날 삼 폿 칸 크핀(sampot can kpin)이라고 불리는 복식과 유사하여 눈길을 끈 다. 힌두 조각이 입고 있는 이 옷은 그림 속의 하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도11).37) 삼폿이라는 옷은 길이와 넓 이에 따라 대략 2-4M에 달하는 직사 각형의 천을 이용해서 옷을 만들었다 고 하며 비슷비슷한 형태의 옷을 아 마도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옷이 <양 직공도>에 그려진 낭아수국 사신이

입은 옷과 비슷하기 때문에 사서에 보이는 간만이라는 옷은 사롱이라 기 보다는 삼폿에 가까운 형태였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직공도>와 막고굴의 <유마경변상도>에 보이는 형상은 모두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 여 막고굴 제220굴의 <유마경변상도> 하단에 그려진 검은 피부의 사 람들을 곤륜노의 도상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어 흥미롭다.38) 다만 이들 이 모두 곤륜노라는 것인지, 즉 맨 앞에 그려진 공양하는 모습의 작은 인물만 곤륜노라고 한 것인지, 검은 피부의 사람 모두를 곤륜노라고 한 것인지, 곤륜인과 곤륜노를 구분한 설명인지는 명확하게 읽히지 않

37) 일찍이 그롤리에 등이 이를 주목하여 복원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점에 대 해서는 Emma C. Bunker Douglas Latchford, Adoration and Glory: The Golden Age of Khmer Art (Chicago: Art Media Resources, Inc., 2004), pp.

34-37.

38) 허형욱, 곤륜노 도상에 관한 연구 (불교미술사학4, 2006), pp.91-93.

(22)

는다. 크기가 작은 인물이나 큰 인물이나 생김새와 복식이 비슷한데, 이들을 모두 곤륜노라고 한다면 뒤편의 인물들을 사신이나 왕자로 보 는 일반적인 견해와 상충되는 점이 있다.39) 반대편에 있는 문수보살 아래에 당 황제와 권속들이 그려진 것과 비교하면 유마거사의 아래편 에도 그와 신분이 동등하거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계위의 사람들을 그렸어야 한다고 본다. 좁은 의미에서 곤륜노는 무엇인가를 받들고 있 는 모습의 나형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곤륜의 도상 을 일반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40) 바꿔 말한다면 ‘곤륜’이라는 정의 에 의해 광범위한 동남아시아 인물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인식과 그 변화상을 축소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미 漢代 이래 중 국의 각종 사서에서는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 고, 그들과 교류가 있었으며 때로는 南夷로, 때로는 西南夷로 각각 다 르게 분류하고 그들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그렸던 경험 이 있었다.

이들 <유마경변상도>에 그려진 인물들을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온 사신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게 해주 는 또 다른 근거가 시안의 교통대학 부지 북부에서 1979년에 출토된

<都管七箇國銘六瓣銀盒>에서 보인다(도12)41) 현지에서 발굴된 3점의 은합 가운데 하나인 이 합은 6개의 꽃잎이 달린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이를 가장 외함으로 하고, 그 내부에는 다시 鸚鵡文銀盒과 龜甲 文銀盒이 있었으며, 그 내부에 2매의 수정구슬과 1개의 마노가 들어있 었다. 6개의 꽃잎과 중앙의 꽃술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각기 다른 나라 39) 경전의 내용에 명확하게 왕과 대신들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그림을 각국 왕자도 혹은, 각국 사신도라고 보고 있다.

40) 허형욱 선생이 앞의 글에서 설명하고 있는 곤륜노의 도상에 대해서는 수긍이 간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검은 피부에 짧은 바지형 옷을 입고 있는 곱슬 머리의 인물은 모두 곤륜노인가, 아니면 곤륜인인가, 그 구분의 근거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41) 張達宏․王長啓, 西安市文管會收藏的幾件珍貴文物 (考古與文物, 1984); 田 中一美, 都管七箇國盒の圖像とその用途 (佛敎美術210, 1993), pp.15-30 참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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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2> <도관7개국명6판은합>, 당, 시안 교통대학 부지 북부

출토, 서안시문물원림국 소장

의 이름이 새겨 져 있다. 6개의 나라는 高麗, 즉 고구려와 인 도로 추정되는 婆羅門國, 土蕃, 疎勒, 白拓△國, 烏蠻國이다. 이 들 나라들은 당 이 설치했던 도 호부가 관할하

던 나라, 즉 당이 생각한 세계관에 포함되며, 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 하’에 해당한다는 견해가 피력된 바 있다.42)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중 앙 부분에 새겨진 나라와 그 나라 인물이 주체로 묘사된 장면이다. 중 앙의 인물은 코끼리를 타고 遠行을 하고 있는 모습이며, 맨 앞에는 그 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소위 ‘곤륜노’ 도상이 새겨졌다. 당연하게도 중 앙 부분은 당 자신을 표현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을 것 같지만 이 경우 에는 특이하게도 ‘崑崙王國’이라는 명문과 함께 ‘將來’라는 글자가 보인 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이 부분은 당시 곤륜이라고 불렸던 동남아시아 의 한 지역에서 사리가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사리기라고 생각 된다.43) 주위의 6개 은판에 새겨진 나라들은 각각의 특수한 상황을 반 영하는 선각이리라고 추정되지만 크기가 작아서 어떤 모습인지 명확하 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 7장면으로 분할하여 특색 있게 표현한 것은 나머지 6개 나라가 중앙의 곤륜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나 누어 가졌다는 설화적인 상상, 즉 중국판 分舍利 장면이라고 보는 추 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44) 문헌이나 명문을 통해 여기서 말하는 곤 42) 노태돈, 앞의 글, pp.39-40.

43) 田中一美, 앞의 글, pp.15-30.

44) 노태돈, 앞의 글, pp.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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륜이 남해 중의 어느 나라라고 확정하기 어렵지만 唐에서는 곤륜으로 부터 사리를 가져온 일화가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해 제국 에서 중국으로 보낸 조공품 중에는 의외로 佛齒舍利, 佛頂骨 등이 포 함된 예가 있다. 사리에 해당하는 이 품목이 어떻게 동남아로 전해졌 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중국의 불교도들에게 천축에서 전해진 眞 身舍利인가도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사서에 기록되었듯이 남해 제국에서 중국으로 불사리나 불탑, 불상이 전해졌던 것이 당대 들어 더욱 중시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돈황 막고굴 <유마경변상도>와 <도관7개국명6판은합>에서 알 수 있듯이 면직물을 이용해 하의를 짧은 바지처럼 만들어 입고, 상반신을 나형으로 묘사한 인물들은 의외로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계제국을 이뤘던 당 에서 중시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이처럼 중요한 위치에 그려지거나 묘 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마경변상도>와 <도관7개국명6판은 합>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미술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측 천이 즉위하기 전까지 당 황실이 그다지 불교 친화적인 정책을 펴지 않았고, 당 건국 이후 도교 우선 정책을 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 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7세기 이후 불교미술에서 동남아시아 가 중시되었던 것은 불교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 아 간의 교류가 점증하고 있었고, 특히 동남아시아 諸國을 중요한 불 교문화권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송사

에서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사신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고, 이들은 정식으로 국가를 대신하는 사신이 아니라 僞 使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위사라고 해도 당시 송대부터 동남 아시아와의 교류가 확장되었고, 이것이 상업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각종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45) 상업적 교 류를 목적으로 위사를 가장했다면 동남아시아의 정치체계는 중앙집권 45) 동북아역사재단 편,宋書 外國傳 譯註, 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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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성격이 강하지 않았거나 상업적 교류를 앞세웠다고 볼 수 있으 며, 그에 따라 해상 교역과 상업적 목적을 위한 중국과의 교류를 계속 늘린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각종 <조공도>나 <직공도> 류의 그림에 나오는 동남아시아 사신의 존재는 그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기존 연구에서는 四海가 직공한다는 관점에 적합하게 해석되었 을 뿐, 이들 사절의 비중이 서역이나 동북아시아의 사신들과 다르지 않았던 점은 지적되지 않았다. 서역 및 동북아 諸國과 동등하게 여겨 졌던 동남아 사신은 실제 이들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그들이 가 지고 오는 물품의 물질적 가치, 중요도에 따르는 실리적인 기준에 따 라 이들 나라들이 동등하게 중시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조공하러 온 사신도라는 관점에서 중화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 한다면 당시 각 국의 외교적 위치와 그 위치에 이르게 된 배경을 이해 하기 어려울 것이다.

Ⅳ. 맺음말

통일의 대업을 먼저 완수한 것은 隋였지만 세계 제국으로의 성장은 확실히 당대에 이뤄진 일이다. 제국이 확장됨으로 인해 당은 스스로의 정치권력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정당화가 필요했다. 한족들은 오랜 세 월 동안 중화와 주변 세계를 한족과 비한족의 세계로 규정했다. 胡라 고 알려진 非漢族은 東夷 · 西戎 · 南蠻 · 北狄으로 분류되었는데, 당 대에 들어서면 이들 이민족 가운데 南蠻으로 불리던 사람들에 대한 언 급이 늘어난다. 이전까지 북방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중국 사회에 남방 의 여러 나라, 종족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는 해 상 교역의 발달로 인해 남해 諸國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고 교역량과 교역 대상이 증가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해 국가에 대한 관심 은 그들의 특산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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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남조에서 독점할 수밖에 없었던 교역 물 품이 조공의 형식으로 통일 제국 당의 황실에 전해진 데 기인하기도 한다. 다른 어느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당은 주변의 ‘외국’을 미술로 표현했다. <직공도> 류의 그림들과 막고 굴의 <유마경변상도>에는 세계제국 당에 조공하러 온 사신과 그들의 외모를 기반으로 한 만국 인물이 묘사되었다. 특히 기존의 중국미술에 서 보기 어려웠던 나형의 인물들은 남해, 즉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 들을 나타낸 것이다. 이들은 곱슬머리에, 천을 허리에 두른 간만이라는 하의를 입은 모습으로 시각화되었다. 이들에 대한 정보와 관심은 이미

<양직공도>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막고굴 벽화와 염립본 전칭작에서는 당 제국과의 관계를 시사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킨 모습이 나타난다. 즉, 남해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당의 인식은 진귀한 물품이 나는 곳이며, 이 특산물을 조공하러 오는 나라였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당시의 동남 아시아는 힌두교가 번성했던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당에서는 불 교가 융성한 나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도관7개국명6판은합>에 서 볼 수 있듯이 사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불교문화가 남해로부터 유입 되었던 사정으로 인해 불교가 매우 융성한 곳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으 로 보인다. 이 점은 송대 이래 남해로부터 남조에 사신이 오면 대개 불교식 관념에 충실한 표문을 받쳤던 것과도 관련이 된다. 당에서 본 남해 제국은 각 나라들이 위치한 곳이나 성격에 관계없이 ‘진귀한 토 산품이 나는 불교국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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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Recognition of Southeast Asia during Tang Dynasty through its Art

Kang, Hee Jung

Completing the reunification, Tang has grown into a global empire. The expansion of Tang made the country justify a new concept on their own political power. In those circumstances, the references to the various aspects of the Southern barbarian people (南蠻), among the barbarians in and around China, increased more and more in this period. It shows that their relationships between Tang and the Southeast Asian countries became more important than ever. The imperial court of Tang let the famous painters like Yen, Li-pen(閻立本) make the paintings of envoys from elsewhere outside of Tang. One can be informed the dynamic international trade by the folding scroll paintings of envoys and the mural paintings of

Vimalakirti Nirdesa Sutra

on the walls of Mogao Gu (莫高窟) in Tang dynasty. Especially the naked black men in those pictures, who was not depicted in the past, show us the representation of Southeast Asian people. They were drawn with curly hair and special shorts called

Tuman

(都縵) made with karpãsa(a kind of cotton). The Clothing, looked like Indian dhotī, was a sort of traditional costume in the mainland Southeast Asia. It is clear that Tang people discerned the Southeast Asia from South Asia and the other countries inside China. They believed th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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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 Southeast Asia had belief in Buddhism, even if the truth was different. For Tang, the countries in Southeast Asia were the Buddhist countries having their own precious specialties.

주제어: 직공도, 염립본, 유마경변상도, 낭아수국, 길패, 곤륜 關鍵詞: 職貢圖, 閻立本, 維摩經變相圖, 狼牙修國, 吉貝, 崑崙

Keywords: the paintings of envoys, Yen, Li-pen, the mural paintings of Vimalakirti Nirdesa Sutra, Lankasuka, karpãsa, Kunlun

(원고접수: 2011년 5월 2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5월 26일, 수정원고 접 수: 6월 18일, 게재 확정: 6월 25일)

Referen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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