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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이후 중국 국가이데올로기 형성과 대학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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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이후 중국 국가이데올로기 형성과 대학의 역할 *

- ‘국학’ 담론을 중심으로 -

1)

金 秀 英 (國民大)

Ⅰ. 서 론

Ⅱ. ‘국학’ 담론과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

Ⅲ. ‘국학연구’ 어휘의 지형과

1990년대 ‘국학’ 담론

Ⅳ. ‘국학열’ 어휘의 지형과 2000년대 ‘국학’ 담론

Ⅴ. 결 론

I. 서 론

1990년대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 는 ‘국학’ 담론의 배경은 상당히 복잡하다. 1980년대 말에 소련과 동구 권의 해체를 목격하고 곧바로 천안문운동의 정치적 풍파를 겪으면서 상당수 중국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 나갔다. 거기 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확산되기 시작한 시장경제는 물질숭배, 소 비문화, 이기주의 등의 새로운 문제를 중국 사회에 낳고 있었다. 중국 에서 적나라하게, 또는 더욱 왜곡되게, 재현되고 있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을 마주하면서 1980년대를 특징 지웠던 지식인들의 서 구문명에 대한 희망과 기대 역시 사라졌다. 마르크스주의도 서구문명

* 이 논문은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 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8-323-B00024).

(2)

도 중국사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자각과 함께 중 국 사회는 ‘가치관의 공백’을 경험해야 했다.

1920년대 초에 중국의 근대지식인들이 서구 자본주의 문명과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회의를 겪으면서 두 문명 모두를 비판하는 마르크스 주의에 기울어져 갔다면 1990년대의 중국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낳은 서구 문명에 대해 실망하고 회의하면서 자연스 럽게 서구문명과 대비되어온 중국 전통문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중국 사회에 나타나는 ‘국학’열은 개혁개방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중국사회의 근본적인 요구인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 관의 정립으로부터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에 대한 중국사회의 요구는 개혁개방이후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의 정립이 절실했던 국가권력의 요구와 시기적으로 중 복되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는 각각의 요구 를 충족시킬 이론적 경험적 자료를 찾기 위해 중국의 역사, 즉 전통문 화를 향해 나아갔다. 결국 1990년대 이후 등장한 ‘국학’ 담론은 중국의 전통문화라는 장에서 국가와 사회가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의 정립이 라는 문제를 놓고 때로는 서로 결합하고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전개 되어 나갔던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요구가 서로 중첩되어 있는 ‘국학’ 담론의 이면에는 상당히 이질적인 목표와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국학’ 담론의 이면에 뒤얽혀 있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관 계, 특히 국가와 사회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 서는 무엇보다 ‘국학’ 담론의 토대를 형성해왔던 중국대학들의 ‘국학연 구’를 분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중국의 대학은 국가와 사 회가 중첩되는 영역에 속해 있는 지식인 조직으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 문이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이후 중국의 대학은 모두 국가산하의 조직 으로 흡수되어 아직도 대학총장의 임명권과 당위원회 등을 통해 대학 1) 黄力之, 世纪末的‘国学热’之意识形态解毒 (

理论与创造

2001年 5期), p.11.

(3)

의 행정기능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개혁개방의 심화와 함께 국가로부터 독립된 중국사회의 영역이 점차 증대하기 시 작하면서 다양한 사회계층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대학 역시 이러한 사 회영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학교수들 역시 기본적으로 사상적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의 속성을 소지하고 있는 집단인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사회의 중첩영역에 위치한 지식인 집단 인 중국의 대학에서 진행되는 국학연구는 결국 국가 권력의 이데올로 기 형성과도 무관할 수 없으며 동시에 사회적 요구--국가의 이해관계 와 일치될 수도 모순될 수도 있는 요구들--와도 무관할 수 없다.

본 논문은 국가 이데올로기 형성과 대학의 역할을 설명함에 있어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나타나는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의 어휘지 형을 분석해 나갈 것이다.

2)

이러한 어휘들이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등장하는 빈도수를 기준으로 중국 국가이데올로기의 변화와 대학의 역 할을 관찰하는 방식에는 일면 논리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인민일보에 나타나는 어휘를 중심으로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의 변화 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곳에 나타나는 모든 어휘들의 빈도수를 비교하여 어휘들 간의 가치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과정이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학’이라는 어휘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분 석하는 타당한 변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담론적 어휘들과의 양적 비 교를 통해 분석변수로서의 질적 타당성을 증명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귀납적 접근방식이라고 정의한다면 본 논문이 택한 접근방식은 연역적 방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논문은 1990년대 이래로 중국이 자신의 정치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서 국 가주의(애국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하기 때문이 다. 애국주의 이념의 창출을 위해 중국 정부가 국학을 적극 부흥하려 했던 사실을 전제한다면 ‘국학’ 어휘는 중국 국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2) 학술논문의 경우 CNKI 내 학술논문(中国学术期刊网络出版总库, 中国博士学位 论文全文数据库, 中国优秀硕士学位论文全文数据库) 영역만을 선택하여 검색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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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어휘변수로서 충분히 선택가치가 있는 용어일 것이다.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을 포함하는 ‘국학’ 담론의 어휘 지형을 “국 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대학의 역할”이라는 주제와 연계시켜 살펴보 기 위하여 본 논문이 택한 어휘지형의 분석대상은 인민일보와 학술논 문이다.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로서 국가의 이념 과 정책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으며 학술논문은 학술 사상을 표출하는 대표적 공간으로서 대학의 이념과 정신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인민일 보와 학술논문의 영역에서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의 어휘지형은 각 각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들이 나타내는 차이점 혹은 유사점은 국가 와 대학의 관계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국학’과 ‘연구’의 두 단 어가 결합된 ‘국학연구’가 하나의 어휘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이며 이러한 어휘의 ‘합성’은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것인가?

‘국학’은 중국에서 근대국가의 성립이래로 사용되어온 어휘로서 대학과 국가의 오랜 역사적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어휘이며 ‘국학열’은 90년대 이후 중국사회의 전통문화 열풍을 지칭하는 신생 어휘로서 중국 사회 속에 전파되는 ‘국학’의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어휘이다. 따라서 ‘국 학’과 ‘국학열’의 어휘지형을 배경으로 대학에서 진행되었던 ‘국학연구’

의 지형을 분석할 경우 국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정에서 국가--대학 --사회의 세 주체가 어떠한 구조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 을 것이다.

Ⅱ. ‘국학’ 담론과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

<표 1-1>과 <표 1-2>는 ‘국학’의 어휘가 인민일보의 표제나 전문 속에 나타난 빈도수를 ‘국학연구’와 ‘국학열’의 빈도수와 함께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다. <표 2-1>과 <표 2-2>는 앞의 표에 나타난 어휘지형

(5)

0 5 10 15 20

1949 1951 1953 1955 1957 1959 1961 1963 1965 1967 1969 1971 1973 1975 1977 1979 1981 1983 1985 1987 1989 1991 1993 1995 1997 1999 2001 2003 2005 2007 2009

인민일보(표제)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

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사용된 ‘국학’ 어휘의 사용 점유율 을 표시한 것이다.

<표 1-1> 인민일보의 표제 속에 ‘국학’의 어휘가 포함된 글의 수

<표 1-2> 인민일보에서 글의 전문 속에 ‘국학’의 어휘가 포함된 글의 수

0 50 100 150 200

1949 1951 1953 1955 1957 1959 1961 1963 1965 1967 1969 1971 1973 1975 1977 1979 1981 1983 1985 1987 1989 1991 1993 1995 1997 1999 2001 2003 2005 2007 2009

인민일보(전문)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

<표 2-1> <표 2-2>

9% 5%

1%

15%

24%

46%

1950-60 1961-70 1971-80 1981-90 91-2000 2001-10

국학(제목)

인민일보

10% 5% 6%

15%

23%

41%

1950-60 1961-70 1971-80 1981-90 91-2000 2001-10

국학(전문)

인민일보

(6)

<표 1-1>과 <표 1-2>에서 알 수 있듯이 인민일보에서 ‘국학’ 어휘 의 사용 빈도수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기를 중심으로 달라지기 시 작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전에는 (건국초기와 대약진운동 직전에 조금 증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국학’ 어휘의 사용량이 상당히 저조하게 나타나지만 개혁개방 이후인 1980년대부터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표 2-1>과 <표 2-2>에 따르면 ‘국학’ 어휘의 사용 점유율이 1980년 대는 15%(제목)와 10%(전문)로 나타나는데 이는 개혁개방 이전 시기 의 최고점인 9%(제목)과 10%(전문)보다 각각 6%(제목)와 5%(전문)씩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증가추세는 1990년대에 더욱 늘어나 80년대보 다 9%(제목)와 13%(전문)가 증가한 24%(제목)와 23%(전문)의 어휘 점유율을 보인다. 2000년대는 1990년대보다 22%(제목)와 18%(전문) 증가하여 46%(제목)와 41%(전문)의 어휘지형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 다. 인민일보가 국가이념과 정책의 창구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국학’

어휘지형에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중국 국가의 이념과 정책이 개혁 개방을 전후하여 바뀌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1980년대 이후부 터 중국의 국가 이념과 정책이 ‘국학’ 담론과 연결되기 시작하고 있으 며 이러한 관계는 1990년대 중반이후 빠르게 심화되고 있고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절정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인민일보에서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하는 ‘국학’ 어휘의 사용을 중국 국가이념의 생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자칫 무 리가 따를 수 있다.

3)

실제로 1980년대에 중국 지식인의 대다수는 전통 문화(국학)를 비판하기 위하여 서구의 학문(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 려 했었고 이러한 지식인들의 선택은 중국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배경 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서학’의 수 용은 결코 정부의 ‘국학’에 대한 관심과 상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의 개혁개방 정책이 궤도에 오르는 시기인 1984년에 당 총서기 후야오 3) 이러한 주장은 기원을 찾아가는 역사적 방법론이 초래하는 왜곡을 자칫 반복

할 수 있다.

(7)

방은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 량수밍과 함께 중국문화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취지 아래 ‘중국문화서원’을 개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리저허우 교수 등이 1985년 1월부터 강좌를 개설하여 중국문화 와 비교문화를 강연하기 시작했다. 중국문화를 비교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은 1986년에 ‘문화: 중국과 세계’ 편집위원회 가 서양근대의 중요한 인문과학 저술을 번역 출판하는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체계적으로 번역된 많은 서양의 역서들이 80년대 말까지(천안문 운동까지) 중국사회로 쏟아져 나오면서 중국 지 식인 사회에서 서구문화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의 ‘사상적 개방’은 서구문화 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에 대 한 관심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었으며 양자는 ‘새로운 중국 문화’의 건 설이라는 궁극적 목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984 년 북경대학에서 中國文化書院을 개원하는 것을 기점으로 이와 유사한 연구소들이 여러 대학에서 속속 조직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연구소들 --東方文化書院(인민대), 東方文化比較硏究中心(북경사대), 中國思想文 化史硏究室(청화대)--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1980년대 인민일보에서

‘국학’의 어휘지형이 서서히 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민일보가 아닌 학술논문에서 ‘국학’의 어휘지형은 어떻게 나타날까?

0 500 1000 1500 2000 2500 3000

국학(학술논문)

주제 제목

<표 3-1> 중국 학술논문에서 ‘국학’의 어휘를 주제 또는 제목으로 하는 글의 수

(8)

<표 3-2> 학술논문과 인민일보에 ‘국학’을 제목으로 하는 글의 비율

<표 3-3> 학술논문의 주제나 인민일보의 전문에 ‘국학’을 포함한 글의 비율

<표 3-1>은 학술논문에서 1980년대 이후 ‘국학’을 주제로 하거나 제 목으로 하는 논문의 숫자를 연도별로 살펴본 것이고 <표 3-2>와 <표 3-3>은 ‘국학’ 어휘가 학술논문과 인민일보의 제목이나 주제에 나타나 는 숫자를 10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기가 차지하는 비율을 측정한 것 이다.

<표 3-1>에서 알 수 있듯이 학술논문에 나타난 ‘국학’ 어휘의 지형 역시 2000년대에 어휘 사용량이 가장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 민일보의 어휘지형과 같다. 그러나 인민일보의 경우 ‘국학’ 어휘의 사 용 점유율이 80년대에 15%(제목)와 10%(전문), 90년대에 24%(제목)와

(9)

23%(전문), 2000년대 46%(제목)와 41%(전문)로 일정하게 누진적 비율 로 증가하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학술논문의 경우에는 80년대에 1%

(제목)와 4%(전문), 90년대에 11%(제목)와 12%(전문), 2000년대에 84%(주제)와 88%(제목)로 1980년대와 1990년대가 상대적으로 아주 적 고 80%이상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어휘 사용이 2000년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국학’에 대한 상대적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인민일보가 학술논문보다 더 높았고 2000년 대에는 학술논문이 인민일보보다 더 높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를 조 금 확대해석하여 본다면 1990년대의 ‘국학’붐은 국가 주도에 의해, 2000년대의 ‘국학’붐은 대학 주도에 의해 일어났다고 일단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나타나는 ‘국학’의 어휘지형 속에 내재된 이러한 대학-국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살펴보기 위해 서는 ‘국학연구’와 ‘국학열’ 어휘의 지형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국 학’ 어휘의 사용 추세가 확실한 동력을 얻게 되는 1990년대에 ‘국학연 구’와 ‘국학열’의 용어가 인민일보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표 1-1> 이 시기부터 대학의 ‘국학연구’와 사회의 ‘국학열’이 중국정 부의 새로운 이념 생산 기제와 긴밀히 연계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Ⅲ. ‘국학연구’ 어휘의 지형과 1990년대 ‘국학’ 담론

<표 4-1>과 <표 4-2>는 학술논문과 인민일보에 나타나는 ‘국학연 구’ 어휘의 사용 빈도수를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고 <표 4-3>과 <표 4-4>는 ‘국학연구’ 어휘가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사용된 횟수를 10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기가 차지하는 비율을 측정한 것이다.

(10)

<표 4-1> 중국 학술논문에서 ‘국학연구’ 어휘를 제목이나 주제로 한 글의 수

0 10 20 30 40 50 60 70 80 90

국학연구(학술논문)

제목 주제

<표 4-2> 인민일보에서 ‘국학연구’를 제목이나 전문에 포함한 글의 수

<표 4-3> 학술논문과 인민일보에서 ‘국학연구’ 어휘를 제목으로 하는 글의 비율

(11)

<표 4-4> 학술논문의 주제나 인민일보의 전문에 ‘국학연구’를 포함하는 글의 비율

<표 4-1>에 의하면 ‘국학연구’ 어휘는 1980년대 이래로 학술논문의 주제로서 간헐적으로 등장해 오다가 1994년에 갑자기 그 사용량이 비 약적으로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국학’을 주제로 하는 논문의 숫자가 매년 30-50편씩 출판되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국 학연구’를 주제로 하는 논문은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극히 소수 만이 출판되고 있는 것이다

4)

(‘국학연구’를 제목으로 하는 논문은 1980 년대가 마감하는 1989년에 1편이 나타나며 ‘국학연구’를 주제로 하는 학술논문의 수는 연평균 3편을 밑돌다가 1993년에 들어서 9편으로 소 폭 늘어난다). 이렇게 1990년대 초반까지 극히 저조했던 ‘국학연구’ 어 휘의 사용이 1994년에 이르러 갑자기 학술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의 연구소들이 생 산하는 국학 연구가 1994년에 ‘국학연구’라는 하나의 어휘 아래에서 영

주제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국학 21 23 41 33 44 50 46 37 45 58

국학연구 1 2 1 4 0 6 3 0 4 0

주제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국학연구 4 6 9 30 23 20 8 24 14 10

국학 65 80 99 123 143 136 118 132 119 195 4)

(12)

향력 있는 학술문화 현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음이 그 이유라면 그러 한 학술배경의 변화를 낳은 원인은 무엇일까? 앞 장에서 언급한 ‘국학’

의 어휘지형에서 1990년대의 ‘국학’붐이 국가의 주도아래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1994년 이후 갑자기 증가한 ‘국학연구’ 어휘의 사용 역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한 결과이었던 것인가?

1994년에 인민일보와 학술논문 모두에서 갑자기 늘어나는 ‘국학연구’

어휘의 사용은 북경대학의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에서 발행한 학술잡 지

국학연구

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991년에 북경대학은 명예 교수인 장다이넨(張岱年)을 중심으로 원로중견학자들이 모여

國學叢 書

를 펴내고 이듬해인 1992년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을 설립한다.

5)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93년에는 대형학술간행물인

국학연구

제 1집 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인민일보가 ‘국학이 수도에서 다시 살아나 다’라는 논평을 실으면서 전국적으로 ‘국학’ 연구가 학술계의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2-3년 동안 북경대학의 ‘중국전통문화연 구중심’이 이루어낸 업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전통문화연구 중심’은 출판사들과 합작하여 중국역사문화지식총서 100권을 편집 출 판하였고 1993년에는 미국남해공사와 합작하여

중화문화강좌

TV 시리즈 100편의 촬영을 끝냈으며 1995년에는 중앙 텔레비전 해외센터 와 합작하여

中華文明之光)

150집을 제작해냈다. 이러한 대외적인 활동과 함께 ‘중심’의 연구결실인 대형학술잡지

국학연구

역시 국내 외 학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켜 나갔다. 1990년대 중반 급작스 러운 ‘국학연구’의 어휘지형의 확대는 이렇게 각 종 매체와 재원을 동 원한 중국정부의 전폭적인 ‘국학연구’ 진흥정책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 던 것이다. <표 4-2>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당시의 ‘국학연구’ 열풍 은 1992년 인민일보에서 처음으로 ‘국학연구’ 어휘가 등장하고 이듬해 부터 어휘 사용량이 조금 늘어나면서 1994년에 정점에 도달하는 배경 이 된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가 왜 이 시기에 이르러 갑자기 ‘국학연 5) 중문과의 저명학자인 위안싱페이가 중심주임과 연구원장을 맡았다(吴同瑞,

解说北大国学研究院 ,

科学时报

2006-3-14).

(13)

구’에 전례 없는 대대적인 관심을 쏟으며 그 결실을 사회적으로 확산 시키려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1992년에 조직된 ‘중국전통문화중심’은 그 설립취지에서 “文, 史, 哲, 考古學 등의 우수한 학술을 발휘하고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전파하며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과 학술사업의 발전을 촉 진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6)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회주 의 정신문명’과 ‘우수한 전통문화’는 바로 1992년 이후 중국정부가 만 들어내고 있었던 ‘애국주의’ 국가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이었다. 개혁 개방이후 중국 정부의 체제 이데올로기 건설은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어 왔다. ‘사회주의 정신문명’이라는 개 념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79년 9월 공산당 제 11기 4중전회의에서이었 고 이것이 당이 공식문건으로 처음 채택되는 것은 1986년 9월 제12기 6중 전회의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의 지도방침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 에서이었다. 이 문건은 사회주의 도덕건설의 기본으 로서 다섯 가지의 요소--愛祖國, 愛人民, 愛勞動, 愛科學, 愛社會主義 --를 선포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까지도 여전히 국가 ‘이 념(ism)’으로서는 유일하게 사회주의만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념의 지속성’은 10년 후인 1996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기 6중 전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결의된 문건인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 강화의 몇 가지 중요 문제에 관한 중공당 중 앙위원회 결의 를 보면 사회주의 도덕건설의 중심에 ‘애국주의, 집체주 의, 사회주의’의 세 이념이 새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애국 주의’가 중국의 새로운 국가이념의 하나로서 공식적으로 결의되고 있 었던 것이다.

중국정부는 사실상 1994년에 爱国主义实施纲要 를 공표하면서 애 국주의, 집체주의, 사회주의를 사상교육의 삼위일체로서 전국적으로 이 미 선전, 시행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중화민족의 역사와 6) 吴同瑞, 让传统文化研究从课堂和书zai 解放出来 (

北京大学学报(哲学社会科

学版)

1994年 第6期), p.20.

(14)

전통문화의 교육을 적극 활용하도록 권장해 왔다. 중국에서 공자학술 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1978년 10월이었지만 이 대회가 정부의 주도하에서 치러지게 되는 것은 爱国主义实施纲要 가 선포되고 바로 두 달 뒤인 1994년 10월에 이르러서이었다. 1994년 10월 북경에서 열 린 공자학술대회는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거대한 국제행 사로 치러졌다.

7)

1994년 이란칭(李岚清) 부총리는 중국의 우수한 문화 전통을 선양하는 것이 사회주의 정신문명의 건설에 급무임을 밝히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대학의 ‘국학연구’와 ‘애국주의’

국가이념이 이 시기부터 이미 공식적으로 연계되어 나가고 있었다. ‘중 국전통문화연구중심’의 주임이었던 위안싱페이(袁行霈)의 글은 1990년 대에 애국주의 국가이념을 조성함에 있어서 대학과 국가의 협력관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방송국과 영화사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수억 명의 인원을 수 용할 수 있는 거대한 교실을 건립하였다. 경제체제의 개혁은 반드시 정 신영역을 일깨우게 한다. 군중에게 애국주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교육할 때 우수한 전통문화, 특히 전통미덕에 내재되어 있는 힘이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8)[저자강조]

국가와 대학의 긴밀한 협조아래에서 1994년에 연간 30편으로 크게 늘어났던 ‘국학연구’ 주제의 학술논문은 이후 곧바로 감소세로 전환하 기 시작한다. <표 4-1>에 나타나듯이 연간 30편미만을 훨씬 밑도는 이러한 감소세는 2000년도 초반을 넘어 2005년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 러나 2006년에 접어들면서 1994년의 최고치를 넘어서는 45편을 기록하 기 시작하며 이듬해인 2007년에는 79편으로 다시 ‘국학연구’ 어휘의 사 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국학연구’ 어휘의 확대된 지 형은 2011년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인민일보의 경우에는(<표 4-2>)

7) 김수영, 1990년대 ‘인문정신’의 보편주의와 국가 이데올로기의 실용주의 (

중국근현대사학회

, 2005.12), pp.214-218.

8) 吴同瑞, 앞의 글에서 발췌, p.20.

(15)

1998년 이후부터 2003년까지 ‘국학연구’ 어휘가 거의 언급되지 않다가 2004년부터 다시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2006-7년부터 다 시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학술계의 ‘국학연구’는 (1990년대 중반의 ‘국 학연구’와 마찬가지로) 인민일보에서 먼저 언급되면서 나타났던 현상 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후반의 ‘국 학연구’는 1990년대와 흥미로운 차이점을 갖고 있다. <표 4-3>과 <표 4-4>를 보면 인민일보의 경우 ‘국학연구’ 어휘의 사용비율이 1990년대 에는 55%(제목)와 49%(전문)를 점하고 2000년대에는 45%(제목)와 51%(전문)를 점함으로서 1990년대가 2000년대보다 전반적으로 근소하 게 앞서고 있다. 이러한 인민일보의 어휘지형과 달리 학술논문의 경우 에는 1990년대에 46%(제목)와 24%(주제), 2000년대에는 53%(제목)와 72%(주제)를 점함으로서 1990년대보다 2000년대에 ‘국학연구’ 어휘의 사용이 상대적으로 훨씬 크게 차지하고 있다.

9)

학술논문과 인민일보에 나타나는 ‘국학연구’의 어휘지형을 종합해 보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국학연구’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거의 같거나 전자가 조금 앞서고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술계에서는 2000년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국 학연구’에 쏟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2000년대 후반에 ‘국학연구’의

국 학 국학연구 국학열

전문/ 주제 인민 학술 인민 학술 인민 학술

1980-1990 10% 4% 0% 4% 0% 0%

1991-2000 23% 12% 49% 24% 22% 16%

2001-2010 41% 88% 51% 72% 78% 84%

국 학 국학연구 국학열

제목 인민 학술 인민 학술 인민 학술

1980-1990 15% 1% 0% 1% 0% 0%

1991-2000 24% 11% 55% 46% 0% 12%

2001-2010 46% 84% 45% 53% 100% 88%

9) ‘국학열’ 어휘의 경우 인민일보에서 100%(제목)와 78%(전문), 학술논문에서 88%(제목)와 84%(주제)의 어휘 사용량을 점유함으로서 압도적으로 2000년대 에 집중되어 있다. 아래 표 참조.

(16)

<표 5-1> 인민일보에서 제목이나 전문에 ‘국학열’을 포함하는 글의 수 성장은 학술계 자체의 동력이 국가의 개입보다 더욱 강하게 작용한 것 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2000년대 후반에 대학의 ‘국학연구’붐이 1990년대와 달랐던 또 다른 한 요소는 ‘국학연구’ 어휘의 사용이 정점에 올랐던 2007년 이후에도 (1990년대와 같은 급속한 감소현상이 뒤따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국학 연구’의 어휘 사용량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0)

앞서 가정한 대로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하는 ‘국학연구’의 성장이 국가의 개입이 아닌 학 술계 자체의 동력에 더욱 의존하고 있었다면 그 동력은 밑으로부터, 즉 중국 사회로부터 나오고 있지 않았을까? 다음 장에서 살펴볼 ‘국학 열’의 어휘지형은 바로 이러한 ‘사회와 대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실마 리가 되어준다.

Ⅳ. ‘국학열’ 어휘의 지형과 2000년대의 ‘국학’ 담론

국학연구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주제 11 19 20 17 26 45 79 69 69 84

제목 3 3 1 1 0 4 6 5 7 9

10)

(17)

<표 5-1>과 <표 5-2>는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나타나는 ‘국학열’

어휘의 사용 빈도수를 연도별로 나타낸 것이고 <표 5-3>과 <표 5-4>

는 ‘국학열’ 어휘가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사용된 횟수를 10년 단위로 나누어 각 시기가 차지하는 비율을 측정한 것이다.

<표 5-2> 중국 학술논문에서 ‘국학열’을 제목이나 주제로 하는 글의 수

<표 5-3>

<표 5-4>

(18)

‘국학열’의 어휘가 인민일보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994년으로서 글 의 전문 속에 포함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글의 제목으로서는 2006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학술논문의 경우에는 1994년까지 전무하다가 1995년에 26편(주제)과 11편(제목)으로 갑자기 다수의 논문 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 이듬해인 1996년에는 1편(제 목)과 17편(1996년)으로 학술계의 관심이 급속하게 줄어든다. 이후에도 극히 저조한 상태로 2004년까지 지속되다가 2005년부터 서서히 증가하 기 시작하여 2007년에 다시 30편으로 크게 늘고 있다. 다시 말해 ‘국학 열’ 어휘는 인민일보와 학술논문 모두에서 1995-96년에 일시적으로 반 짝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진 후 2006년부터 인민일보와 학술논문 모 두에서 다시 눈에 띄게 사용되기 시작하여 2007-8년에 정점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표 5-3>과 <표 5-4> 역시 인민일보와 학술논문 모두 에서 ‘국학열’의 어휘가 압도적으로 2000년대에 집중되고 있음을 재확 인하게 해준다.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어휘지형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뚜렷한 차이점 역시 보유하고 있다. 즉 인민일보의 경우 2007년을 정점으로 곧바로 ‘국학열’ 어휘의 사용률이 감소하고 있는 반면에 학술논문에서는 2007년 이후부터 2011년에 이르 기까지 ‘국학열’에 대한 어휘 사용빈도수가 전혀 감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 언급한 ‘국학연구’의 어휘지형과 이를 연결시켜 본 다면, 2000년대 후반에 학술계에서 ‘국학연구’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 게 했던 힘은 (1990년대와 같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부터가 아니 라) 중국사회의 ‘국학열’에 대한 학술계의 관심으로부터 더 많이 나오 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나타나는 ‘국학열’은 어떠한 사회적 내용을 담고 있 었을까? 다시 말해 1990년대의 ‘국학열’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 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일까? 왜 이 시기 ‘국학열’은 어휘지형 속에서 일시적으로 반짝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아래의 문 장은 1995년 봄에 쓰여진 어느 한 목격자의 체험담으로서 당시의 ‘국

(19)

학열’의 모습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몇 년 전만 해도 누가 ‘국학’을 크게 떠든다면 사람들을 무척 놀라게 했다.

맹자

 

논어

를 종일 연구하는 친구는 학교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고 깔보임을 받았으며 가족마저 그를 버렸다. 그러나 1992년부터

‘국학’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우선 북경대학에서 ‘국학’이 나타나고 이후 유학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생기며 곡부의 공자제사도 빈번히 일 어났다. 어느 학자는 “21세기가 동방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경국, 서법, 국화, 고금문 번역이 성행하고…가장 중요한 것은 經史 子集을 청년들의 필독서로서 교수들이 추천하고 있다는 것이다.11)

위의 체험담의 저자는 “1992년부터 ‘국학’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말 하고 있다. 1992년은 북경대학에서 ‘중국전통문화중심’을 설립하고 국 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대대적인 ‘국학연구’와 ‘국학’의 사회적 전파 를 전개하기 시작한 해이었다. 실제로 당시 ‘중심’이 제작한 TV시리즈

中華文明之光

은 중국에서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방송에 올린 첫 번 째 사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의 어휘지형에서 ‘국학열’ 어휘의 생명력이 단기간 존속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하듯이 1990년대에 ‘국학열’

의 사회적 전파는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당시 북경대학에서

‘국학연구’를 이끌고 있었던 장다이넨(張岱年)의 증언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1994년 북경대학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은 대형잡지

국학연구

를 출 판했고

인민일보

는 ‘국학이 燕院에서 일어나다’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그 이전 요령교육출판사에서

國學叢書

를 출판하여 이미 십여종에 이르 렀다; 江西百花洲文艺出版社는

國學大師叢書

를 발간했다; 동시에 학술 계 역시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간행물, 즉

전통문화와 현대화

 

중국문화 연구

 

동방

 

심근

등의 여러 종류를 출판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사람들은 ‘국학열’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 면 전국에서 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실 단지 소수로서 차가운 걸상에 앉아 있으려 하는 사람들이다.12)

11) 孙郁, 我看国学热 (

中国政党干部论坛

1995年 6月), p.46.

12) 張岱年, 国学与时代 (

中国社会科学研究生院报

, 1995年 5期), p.1. 장다이넨

(20)

1990년대의 국학열에 대한 장다이넨의 회상은, 앞에서 인용한 체험 담에서도 얼핏 나타나듯이,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영역에 국한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학술영역 내부에서조차도 국학연구는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주제이었음을 장다이넨은 고 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군중들에게 애국주의”를 교육하기 위하여

“수억 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거대한 교실을 건립”하고 “전통미덕에 내 재된 힘”을 이용하기 위하여 ‘국학’지식을 활용하려 했지만

13)

이러한 국가 주도의 ‘국학’열은 국학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사회적 확산 노력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학 연구자들을 “차 가운 걸상”으로부터 “대중속의 뜨거운 무대”로 끌어내는 힘은 국가의 개입이 아닌 사회의 수요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는데 이는 200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중국사회의 ‘국학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의 이러한 ‘국학열’은 국학의 대중화와 시장화를 수반하 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후반에 ‘국학열’을 언급하는 많은 글들은 대체로 두 가지 현상에 특히 주목한다. 첫째는 국학의 시장화이고 두 번째는 대학의 국학전공제도의 설치이다. 국학의 시장성이 사회적 관심을 크게 끌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07年中国作家富豪榜

에 CCTV

百家讲坛

의 인기 강사 이중텐(易中天)과 위단(于丹)의 이름이 오르면서일 것이다.

中国作家富豪榜

은 중국작가들 중에서 판세소득이 전국 25위 내에 드 는 사람들을 매년 조사하여 소개하는 잡지로서 2006년에 처음으로 출 판되었다. 그리고 2007년도

中国作家富豪榜

에 ‘국학’ 연구자의 이름 이 두 명이나 올라갔고 게다가 위단의 수입은 전국 2위를 기록하고 있 었다. 하문대학 교수인 이중텐(易中天)의

품삼국(品三國)

은 2007년 1 월 당시 이미 150만부 이상이 팔렸고 북경사범대학 교수인 위단(于丹) 이 언급한 국학대사총서의 첫 권은 1993년 8월

熊十力평전

으로 출판되었고 요령교육출판사의

국학총서

는 1993년 12월 출판되었다.

13) 吴同瑞, 앞의 글에서 발췌, p.20.

(21)

于丹论语心得

은 2006년 초판에서부터 무려 60만부를 찍어내고 있 었으며 현재까지 60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고 한다. 위단의 판촉사 인회에 몰린 군중은 아직도 장안의 화제로 기록되고 있다.

14)

당시 ‘국 학’의 인기는 중국의 서점들에서

논어

 

도덕경

등 각종 전통사상서 들의 판매량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만들었다. 중국학을 가르치는 학 원들 역시 속속 설립되었고 비싼 수강료에도 불구하고 수강자들로 가 득 찼다. 2005년 11월에 북경대학에서 시작한 ‘乾元國學敎室’은 학비가 2만 4000원이었으며 2006년 9월 상해 복단대학에서 개설한 국학반은 학비가 3만8000원으로서 근로자들이 1년 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럼에도 수강자들이 넘쳐났다.

15)

중국 사회의 국학열은 책과 학원을 넘 어 중국 관광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7년 악록서원을 찾은 관광 객의 숫자가 60만 명을 넘어선 것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16)

이러한 국학열풍은 중국 사회에서 漢服을 입고 성인식을 거행하는 새로운 유 행을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이었다.

2006∼7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국학의 대중화와 시장화는 중국 사회에 디지털 정보통신기술이 확산되면서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기 존의 TV와 달리 인터넷과 휴대폰은 디지털 정보기술을 사용하여 지식 정보를 유통시킴으로서 지식정보의 대중화와 시장화를 전례 없는 속도 로 이루어내게 했다. ‘휴대폰국학(手机国学)’와 ‘국학망(国学网)’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 기술이 대학의 국학연구와 접목되면서 나타난 사회현상 이기도 했다. 북경대학 ‘乾元國學敎室’은 매월 10위안을 내면 매일 휴 대폰으로 경사자집의 한 구절과 간단한 해설이 담긴 국학지식을 전송

14) 위단은

于丹论语心得

의 초판 직후인 2006년 11월 북경 중관춘에서 열린 판 촉사인회에서 9시간동안 12600권의 책에 사인을 하는 기록을 세우고 2007년 1 월 난징의 신화서점에서 열린 판촉사인회에서는 2시간 동안 2000권의 책에 사 인을 했다(노컷뉴스, 2007.1.1. 베이징=CBS 김주영 특파원 기재.

http://www.

cbs.co.kr/nocut/show.asp?idx=404436).

15)

http://blog.naver.com/sunonthertree/10020671354.

16)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0300033, donga.com [뉴스]-“中서

붕괴 ‘서원 원형’ 한국이 보존”.

(22)

해주는 사업을 시작했으며

17)

바이두는 검색엔진에 ‘국학’채널을 첨가했 다.

18)

인터넷으로 ‘국학’이 인기 검색어가 되면서 “国学辣妹” 현상 등

‘국학’의 오락화가 심화되어나가자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의견이 찬반 으로 나뉘면서 2000년대 후반 ‘국학’ 담론의 또 다른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2008년 북경대학 교수인 리이(李怡)와 캉리롱(康莉蓉)는 국학의 대 중화와 상업화에 대한 우려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늘의 ‘국학’ 활동은…더 이상 지식인 개인의 정신적 사유가 아닌 경 제행위…에 수반되어 나타난다. 더욱이 2005년에 전세계공자제례대전를 치른 이후에 ‘국학’은 점점 ‘한류’나 ‘초녀(超女)’19)와 같은 유행문화로 바 뀌었으며…유명대학들이 국학원을 설립하고 ‘매체국학대사’를 선출하며 각종 ‘국학반’이 학생을 모집하면서 ‘국학’은 점점 더 도구화되고 시대적 유행이 되었다. [중국문화의 정신적 근원인] 문화유산은 현대 상업계로 진입하였으며…이러한 논리아래에서 국학은 자아소멸과 자기부정을 시작 한다.20)

그러나 같은 해에

中国社会导刊

에 출판된 복단대학 연구원 허아 이궈(何爱国)의 글은 국학의 시장화에 대한 긍정적 견해를 다음과 같 이 주장하고 있다.

국학의 세속화, 대중화, 시장화와 ‘생산력’화에 대해 어떤 사람은 불안 을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경박함을 지적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이해와 동의를 표시한다. 사실 오락화된 국학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 17) 蓝慧, 手机国学短信传播经典智慧 (

亚洲周刊

20-16, 2006.4.23); 박경석,

중국의 ‘문화적 보수화’와 한중역사논쟁 (

동북아역사문제 -주요현안분석

), p.1.

18) 국학의 오락화의 일례로 ‘国学辣妹’가 빠른 속도로 인구에 회자되어 나갔다.

이러한 국학의 대중화와 오락화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何爱国, 第三次国学浪 潮:復古还是復兴 (

中国社会导刊

2008年 7期), p.21.

19) 超女는 超级女声 의 약칭으로서 중국호남위성TV에서 여성을 상대로 2004-6년 동안 개최한 대중가수선발대회이다.

20) 李怡, 康莉蓉, 新时期文化思潮中的‘启蒙’,‘国学’与‘新国学’ (

学术月刊

, 2008.

9).

(23)

행되고 보급되다보면 마침내 대중이 수용하기 가장 쉬운 방식이 찾아질 것이다. 오락과 매체는 국학이 역량을 늘리기 위해 선택한 현대적 방식일 뿐이다. ‘국학열’이 장기간 뜨거울 수 있으려면 반드시 당대 생활과 분리 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21)

2000년대 후반에 중국 사회의 ‘국학열’에 관한 글들이 주목하고 있었 던 또 하나의 현상은 대학의 국학연구 제도화이었다. 국학연구의 제도 화는 국학의 시장화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근대적 학문의 극복, 즉 중국학문의 본토화라는 학문적 요구와 더욱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왜 냐하면 ‘국학열’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2000년에 이미 북경대학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은 ‘국학연구원’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기존의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연구를 ‘국학’이라는 학문분류 체계 안으로 통합 흡수시켜나갔고 2002년에는 학교의 비준을 거쳐 직 접 박사생을 선발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경대학은 인문학 과의 우수한 학자들로 하여금 지도교수를 맡게 하고 문, 사, 철, 고고 학의 여러 전공에서 제공하는 과목으로 교과목을 구성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학제 간 논문주제를 선택하게 하여 여러 학과를 포괄하는 종합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다.

22)

학제 간 종합연구와 국학전공제도를 향한 북경대학교 ‘국학연구원’의 행보는 곧바로 다른 대학들의 모델이 되어 나갔으며 마침내 2009년에는 인민대학에서도 국학전공을 개설하게 된 다.

23)

21) 何爱国, 第三次国学浪潮:復古还是復兴 (

中国社会导刊

2008年 7期), p.21.

22) 吴同瑞, 解说北大国学研究院 (

科学时报

2006-3-14); 북경대국학연구원 성 립 15주년기념좌담회: 2007.6.17 북경대학백년강당 (광명일보 2007.6.18).

23) 北京行政学院学报에서 詹杭伦는 国学的学科定位问题探索 라는 글에서 “조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중국인민대학은 국학원을 세우고 국학전업, 본, 석사 연속과정인 6년제 학생을 모집했으며 박사생을 배양하도록 준비하고 있고 박 사이후연수생을 모집하려한다”고 말하면서 “이는 현행 대학체제의 일대 창신 이며 개혁이다”라고 찬사를 보낸다[詹杭伦, 国学的学科定位问题探索 (

北京 行政学院学报

2007年 1期), p.1]. 같은 시기에 호북성의 華中科技大에서도 국 학연구원이 창설된다.

(24)

Ⅳ. 결 론

인민일보와 학술논문에 나타나는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의 어휘지 형은 ‘국학’ 담론을 둘러싸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대학의 역할이 어떠한 관계를 이루어 왔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 째, 개혁개방이후부터 중국정부는 국가의 정책과 이념을 건립함에 있 어 ‘국학’ 담론에 확연하게 의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둘째, 인민일보 의 어휘지형에서 ‘국학’ 어휘의 사용 추세가 확실한 동력을 얻게 되는 1990년대에 ‘국학연구’와 ‘국학열’의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함을 보면 이 시기부터 대학의 ‘국학연구’와 사회의 ‘국학열’이 중국정부의 국가이념 생산기제와 긴밀히 연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셋째, 학술계의 국 학연구는 199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중후반에 갑자기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하는 국학연구의 확산이 일시적인 현상으 로 그쳤던 것과 대조적으로 2000년대 중후반에 나타나는 국학연구의 확산은 2011년까지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국학연구’의 어휘 지형을 ‘국학’과 ‘국학열’의 어휘지형과 비교해 보면 1990년대에 갑자기 증가하는 대학의 국학연구는 각종 매체와 재원을 동원한 중국정부의

‘국학’ 진흥정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고 2000년대 중후반에 확산되는 학술계의 국학연구는 중국사회로부터 일어나는 ‘국학열’에 대한 학계의 자발적인 관심과 반응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2000년대 후반에 중국사회에서 크게 일어나는 ‘국학열’은 주로 시장과 대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국학의 대중화와 대학의 국학전 공제도가 그 동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전개된 ‘국학’ 담론의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아마도 국학전공제도 속에 내포된 ‘학문의 본토화’와 그 속에 내 재된 ‘근대성 극복’의 노력일 것이다. 2000년대에 학술계에서 크게 증 폭하는 국학연구는 사실상 1920년대에 북경대학을 위시하여 전개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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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國故整理運動’과 많은 점에서 비견될 수 있다. ‘국고정리운동’은 중 국사회의 급격한 전환기에 선 중국 지식인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설립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고 이러한 노력이 대학의 학술연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 중국 지식인들의 국학연구와 동일 하다. 그러나 이렇게 목적과 주체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2000년대의 국학연구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향점을 향하고 있었다.

1920년대의 지식인들이 중국학술의 ‘근대화’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2000년대의 지식인들은 국학의 제도화를 통하여 ‘근대성’의 극복을 구현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학전공 학과의 설립이 현행 대학체제의 일대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과학=전문화(분 과화)라는 근대적 사유를 벗어나려는 실험이기 때문인 것이다. 최근 국학연구의 의의를 논하는 많은 글들이 현대성과 전통의 결합, 서구와 동양의 결합 등 근대의 이분법적 구도를 극복하려는 점에 초점을 맞추 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2000년대에 국학연구는 중국의 대학이 단순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식공장의 기능을 넘어서고 있으며 더 나아가 변 화하는 중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 집단의 기 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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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摘要)

中国改革开放以后国家意识形态的形成与高校的 作用

- 以‘国学’话语为中心 -

金 秀 英

20世纪90年代开始, 中国社会出现了一股‘国学热’, 这股‘国学热’源于新的 价值观和世界观的确立, 而这新的价值观与世界观也是改革开放以后急剧 变化的中国社会最根本的需求.

有意思的是, 从时期上来看, 中国社会所强烈要求的对新的价值观的确立 与改革开放后国家权力机构迫切想要确立的新的国家意识形态的要求之间 出现了重叠. 国家与社会为了各自寻找满足其要求的理论或实际经验将目 光转向了历史, 即传统文化.

90年代以后出现的‘国学’话语就是在中国传统文化这样一个平台上展开 的, 通过这个平台国家与社会就新的价值观与世界观的确立问题时而对话, 时而竞争. 可想而知, 包含着国家与社会双重要求的‘国学’话语背后, 必定 会存在不同的目标, 也存在深刻的利害关系. 为了正确解读‘国学’话语背后 的各种利害关系, 特别是国家与社会不同的利害关系, 最重要的就是要先分 析作为‘国学’话语基础的中国各高校的‘国学’研究情况. 因为中国的高校就 是在国家与社会双重范畴内培养知识分子的组织机构. 在这双重范畴内, 中 国高校这样一个知识分子集团内部进行的‘国学’研究必将与国家意识形态的 形成有着千丝万缕的关系, 同时与社会要求(这一要求与国家利害关系可能 一致, 也可能不一致)之间也有着深刻的关系.

本文主要是将“国家意识形态的形成与高校的作用”这一主题与包括‘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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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

‘国学研究’

‘国学热’在内的‘国学话语’联系在一起进行分析, 本文的分 析对象为

人民日报

与学术论文. 因为

人民日报

是中共中央的机关报纸, 代表着国家理念与国家政策. 而学术论文作为表达学术思想最具代表性的 空间, 也代表了高校的理念与精神.

那么‘国学’

‘国学研究’

‘国学热’分别在

人民日报

与学术论文上是怎么 表现出来的呢? 通过其所表现出的区别或者相似之处又能怎样解释国家与 大学的关系呢? 由‘国学’与‘研究’两个单词组成的‘国学研究’, 又是从何时开 始作为一个完整的词汇而发挥其功能的呢? 这种词汇‘合成’又具有哪些社会 意义呢?

‘国学’是中国近代国家成立以来一直使用的词汇, 这一词汇蕴含着大学与 国家悠久的历史关系. 而‘国学热’自90年代出现以来, 已成为代表中国社会 传统文化的新词汇, 同时也是展现‘国学’传播对中国社会影响力的词汇. 因 此分析以‘国学’

‘国学热’为话语背景的高校‘国学研究’, 也将会就国家意识 形态形成过程中国家-高校-社会三个主体结构之间的联系情况作出解释.

주제어: 인민일보, 어휘지형, 애국주의, 국학, 국학연구, 국학열, 대학, 근대성 關鍵詞: 人民日报, 词汇地形, 爱国主义, 国学, 国学研究, 国学热, 大学, 现代性 Keywords: People's Daily, Chinese Academy, Nationalism, Guoxueyanjiu,National

Studies(Guoxue), Chinese Learning Fever(Guoxuere), Chinese Higher Education, Modernity, Chinese State Ideology

(원고접수: 2012년 3월 6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4월 16일, 수정원고 접 수: 4월 24일, 게재 확정: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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