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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 구연부단사선문토기/ 군산 가도 / 충남대학교박물관 * 구연부단사선문토기/ 군산 비응도 / 오른쪽 추정구경 44.4cm / 국립전주박물관
연속점열대문토기/ 인천 영종도 / 높이 15.0cm / 한양대학교박물관
구연부단사선문토기/ 군산 비응도 / 높이 28.6cm / 국립전주박물관
동일계토기同一系土器란 문양권文樣圈을 구획하지 않고 토기 전면에 같은 문 양을 시문한 토기로 구획반복문토기區劃反復文土器와 동일계 횡주어골문토기同一 系橫走魚骨文土器가 포함된다. 기형은 심발형深鉢形과 발형鉢形토기가 대부분이며, 호형토기壺形土器와 옹형토기甕形土器, 완형토기 가 소량으로 확인된다.
구획반복문토기區劃反復文土器6)는 금탄리Ⅰ문화층 출토 토기를 지표로 하여 금탄리Ⅰ식토기라 불리기도 하며, 띠대문으로 기면을 구획하고 사이에 무지 개문, 거치문鋸齒文,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등을 교대로 시문한 것이다. 남한지역 에서는 단사선문短斜線文으로 기면을 구획하고 사이에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을 채우고 저부에도 삼각집선문을 시문하거나 단사선문만 남기고 삼각집선문 이 생략된 것이 주로 출토된다.
동일계 횡주어골문토기同一系橫走魚骨文土器는 구연부와 동부에 다치구를 이 용한 어골문계의 조잡한 문양이 시문되는 것을 말한다. 동일계 횡주어골문 토기도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면에 단치구單齒具에 의한 횡주 어골문을 정연하게 시문한 토기를 금탄리Ⅱ식토기라 불린다. 토기 전면에 다치구多齒具로 정연하게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토기도 있으며 이처럼 토기 전 면에 단·다치구로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것을 전면횡주어골문토기全面橫走魚骨 文土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외에 구연부터 동부까지만 다치구多齒具또는 단치구單齒具로 횡주어골 문 또는 격자문 등을 시문한 토기도 있는데, 문양이 매우 조잡하고 찰과상의 시문방식이 나타난다. 이를 시도식 또는 서해안식토기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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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탄리Ⅰ식토기
구획반복문토기의 단사선문 구획
구획반복문토기의 삼각집선문
단치구의 정연한 횡주어골문 다치구의 정연한 횡주어골문 단치구의 조잡한 횡주어골문
同一系土器
동일계토기
대동강유역의 횡주어골문은 정연하고 전면에 시문된 것이 많고 한강유 역은 조잡하고 바닥이나 동체부 하부의 문양이 생략된 것이 많은 점이 다르 다. 이외에 변형횡주어골문이나 사선대문斜線帶文, 격자문格子文을 시문한 토기 도 나타난다. 구분계토기와 비교해서 태토가 사질에서 점토질로 바뀌고 비 짐은 점차 모래 한가지로 단일화된다.
구획반복문토기區劃反復文土器는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중기를 가름하는 지표가 되는 토기형식 중의 하나로 중서부지역의 서해안과 남해안, 중동부 해안지역에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구획반복문토기인 금탄리Ⅰ식토기는 북한에서는 궁산3기를 설정하는 표식유물로써, 남한에서는 군산 가도의 구연한정단사선문, 한강유역의 구분 문계 어골문, 영종도의 전면횡주어골문토기와 함께 신석기시대 중기 설정의 하나의 지표 토기로써 인식되었다(임상택 1999). 이에 대해 금탄리Ⅰ식토기 는 금탄리에서 오직 한개의 주거지에서만 다른 공반양식 없이 출토된 것으 로 이 주거지를 제외하면 어떠한 유적에서도 금탄리Ⅰ식토기가 주류를 이루 는 문화층이나 주거지가 없으며 금탄리유적의 1문화층과 2문화층의 구분이 확실한 중복관계나 층위적인 근거를 가지고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며, 금탄리Ⅰ식토가 하나의 분기를 설정할 근거가 미약하다고 비판하 였다(김장석·양성혁 2001).
안승모는 최근 금탄리1문화층에서 출토된 띠대문 구획과 자돌문계 구획 의 반복시문토기와 군산 노래섬 최하층에서 출토된 단사선문 구획의 반복시 문토기는 태토, 기형, 문양대 구성에서 공통성이 있어 구획반복문토기로 통 합한 후, 자돌문 구획의 Ⅰ류, 띠대문 구획의 Ⅱ류, 단사선문 구획의 Ⅲ류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암사동식 구분계토기, 금탄리식토기, 영선동식토기와의 동시기성을 언급하며 구획반복문토기가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중기 설정 의 기준으로 이용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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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격자문 사선대문
다치구의 조잡한 횡주어골문
더 나아가 남해안에서는 횡대구획이라는 문양구성이 융기문토기단계부 터 출현하여 영선동식토기 단계까지 지속되며, 구획과 채움에 이용된 문양 종류도 다양하다는 점을 근거로 중서부의 구획반복문토기가 남해안 영선동 식토기의 영향으로 발생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안승모 2002).
중서부지방의 구획반복문토기는 대체로 5,000~4,500B.P., 보정연대로 는 기원전 4천년기 전반에 해당한다.
동일계 횡주어골문토기同一系橫走魚骨文土器는 중서부의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중부내륙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 한 학계에서는 전면시문의 횡주어골문토기를 중서부지역 토기의 가장 이른 형식으로 보고 전면횡주어골문토기가 출토된 연도리, 청호리, 오야리를 구 분계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서울 암사동, 봉산 지탑리, 평남 운하리 궁산 등) 보다 빠르게 보았다. 그런데 북한에서 1960년대 금탄리유적의 발굴을 통하 여 전면횡주어골문토기와 함께 팽이형토기의 옹형과 기형이 유사한 횡주어 골문토기와 무문양토기가 금탄리 Ⅱ문화층에서 출토되면서 이를 신석기의 가장 늦은 단계인 궁산 4기로 편년하게 된다. 또한 남한에서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도패총에서 조잡한 다치횡주어골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패 총이 발굴되고 3,000B.P. 무렵의 방사선탄소연대가 검출되는 한편 암사동 과 미사리유적의 신석기문화층 상층에서 전면횡주어골문토기가 출토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영희가 처음으로 북한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횡 주어골문의 동일계로 대표되는 금탄리Ⅱ식과 시도식을 후기 양식으로 설정 한다. 이후 구분계를 전·중기, 동일계를 후기로 보는 편년이 일반적으로 받 아들여져 오고 있었다(안승모 1988·1993).
그러나 동일계 후기설은 최근 발굴조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수정되지 않 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임효재가 횡주어골문토기를 시문부위의 축소과정 이라는 형식학적, 문양론적 입장에서 전기까지 끌어올려 구분계토기와 같은 단계에 위치시킨 바 있듯이(임효재 1983), 동일계 횡주어골문토기는 소량이 지만 암사동유적에서 구분계토기와 함께 출토되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할 점 은 다치횡주어골문이 출토되는 충남해안지역의 관산리·관창리의 연대가 4,000~4,500B.P.까지 올라가고, 금탄리Ⅱ식에 가까운 전면횡주어골문토 기가 출토된 일산지구의 대화리층의 연대가 암사동의 연대치에 가깝게 나타 나는 것으로 동일계토기가 기존 편년의 중기 이전 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가능 성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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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의 태선침선문단계에서도 이른 시기부터 전면시문횡주어골문토 기가 구분계토기와 공반한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양상혁과 김장석은 시도식이 전기까지 올라갈 수 있고 암사동식도 후기까지 잔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기적 차이로 보았던 시도식과 암 사동식을 지역적, 계통적 차이로 간주함으로써 논의를 전면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중기 무렵부터 2부위구분계토기와 동일계토기 는 동시기에 존속하면서 후자는 주로 해안에서 성행하다가 후기에는 중서부 전역에서 구분계토기를 대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단치횡주어골문과 다치횡주어골문토기를 시기적인 차이로 본 견 해가 있었으나(임상택 1999), 최근에는 이를 지역적 분포차이로 보는 견해 가 제시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서해안지역 패총유적은 덕적군도를 중 심으로 이북은 단치시문의 비율이 높고 이남은 다치구에 의한 시문이 상대 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이 패총유적을 이용한 집단의 주거유 적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김장석·양성혁 2001).
동일계토기의 등장은 대체로 4,000~4,500B.P., 보정연대로 기원전 3,500~3,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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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계토기 출토 유적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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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획반복계토기(1~8)·동일계토기(9~`25) 출토 유적 목록
연번 | 유적명 | 출토 상황 | 조사연도 | 조사기관 | 참고문헌
1 사동구역 금탄리 주거지 1955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1964 『금탄리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10 2 파주 주월리 지표수습 1996 경기도박물관 1999 『坡州 舟月里 遺蹟』
3 양양 용호리 생활면 2002 강원문화재연구소 고동순 2002 「양양 용호리 신석기유적」『2002년 가을 학술대회』강원고고학회 4 양양 오산리 주거지, 지표 1981~1983 서울대학교박물관 1984 『鰲山里遺蹟』
1984 서울대학교박물관 1985 『鰲山里遺蹟Ⅱ』
1985, 1987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鰲山里遺蹟Ⅲ』
5 오이도 가운데살막 패총 1999 서울대학교박물관 2001 『오이도 가운데살막패총』
6 군산 노래섬 패총 1994·96·97 원광대학교박물관 2002 『노래섬』
7 군산 가도 야영지·노지·패총 1993·1994 충남대학교박물관 2001 『駕島貝塚』
8 통영 욕지도 패총 1988~1989 국립진주박물관 1989 『欲知島』
9 옹진 연평도 주거지 2000~2001 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소연평도패총』
2002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연평 모이도패총』
10 파주 주월리 지표수습 1996 경기도박물관 1999 『坡州 舟月里 遺蹟』
11 부천 시도1지구 패총 1970 국립중앙박물관 1970 『시도패총』12
12 인천 영종도 송산 노지 1995~1996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1996 『영종도 송산 선사유적』
13 영종도 는들 주거지·수혈 1999 서울대학교박물관 1999 『영종도 는들 신석기유적』
14 오이도신포동B패총노지·패총 1988 서울대학교박물관 1988 『烏耳島貝塚』
15 시흥 별망 패총·노지 1978 서울대학교박물관 김원룡 1979 「초지리(별망)패총 발굴조사보고」『한국고고학보』7 16 춘천 내평 주거지·노지 1971 서울대학교·문화재관리국 한병삼 외, 1974, 『팔당·소양댐 수몰지구 유적발굴종합조사보고』
17 원주 법천리 포함층 1999~2001 국립중앙박물관 윤형원 2001 「원주 법천리 수습 신석기시대 유물」『韓國新石器硏究』2 18 제원 점말 동굴 1977~1980 연세대학교박물관 1980 『점말용굴 발굴보고』
19 제원 황석리 포함층 1983 충북대박물관 1984 『충주댐 수몰지구 문화유적발굴조사 종합보고서』
20 안면도고남리 패총 1996~1998 한양대학교박물관 1988~1998 『안면도 고남리 패총』1~8차 21 보령 관산리 포함층 1994 고려대학교박물관·충남대학교박물관 1994 『보령 관산리 선사유적』
22 보령 관창리 포함층 1994 고려대학교박물관·아주대학교박물관 2001 『관창리 유적』
23 서산 대죽리 패총 1999 한서대학교박물관 2001 『대죽리 유적』
24 군산 노래섬 패총 1994·96·97 원광대학교박물관 2002 『노래섬』
25 군산 가도 야영지·노지·패총 1993·94 충남대학교박물관 2001 『駕島貝塚』
인천 삼목도 유적은 영종도 국제공항의 건설로 현재는 육지화된 삼목도의 북동쪽에 해발 121m의 산 정상에서 나 지막한 해안단구로 이어지는 완경사면 말단에 위치한다. 서 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9기의 주거지와 적석유구가 확인되 어 서해도서지역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신석기시대 대규모 주거유적의 발견이라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 유적에서는 구연부 단사선문과 단·다치횡주어골문 이 시문된 2부위구분계토기와 단·다치횡주어골문이나 사 선대문이 시문된 동일계토기가 한 주거지에서 공반하는 양 상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이 두 토기양식은 각각 내륙과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시기적으로도 선후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해온 기존의 연구에 대해, 최근 동일계토 기가 보다 이른 시기부터 등장하여 구분계토기와 공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어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 에서 삼목도유적의 자료는 적절한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중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구분계토기는 감소하고 후기를 대표하는 동일계토기가 출현하여 증가해 가는 과도기적 양상이 삼목도유적 자료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동일계토기와 공존하는 기간의 구분계토기 는 이부위시문의 증가, 구연단사선문의 문양대 수 증가, 동 체부 다치횡주어골문의 증가, 구연한정시문 등의 변화양상 을 나타내고 있다. 삼목도와 같이 양 토기양식이 공존하는 유적들이 좀더 조사되어 그 양상이 보다 명확해진다면 중 서부지역 신석기시대 중기의 설정 문제와 관련한 논의도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삼목도의 절대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3,500~3,000년 사이이다.
인천 용유도 유적은 인천시 중구에 속한 용유도의 북 서쪽 해안일대에서 조사된 유적으로 용유도 을왕동과 용유 도 남북동 두 지점으로 나뉘어 있다. 남북동유적은 단순 야 외노지유적이며 을왕동유적은 소규모의 패총과 야외노지가 결합된 유적이다.
남북동유적에서는 동일계의 서해안식 단치횡주어골문 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 외에 횡사선대문·
다치횡주어골문·격자문·난선문亂線文등도 소량 확인되며, 구연부에 격자문, 동체부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한 구분계토 기도 극히 일부 출토되었다. 절대연대는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누어져 기원전 3,500~3,000년과 2,500~2,000년 사 이에 해당된다.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영종도 는들의 절대 연대폭(기원전 3,300~3,000)을 고려한다면 남북동유적은 기원전 4,000년기 후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을왕동은 단치시문의 난선문, 횡주어골문과 함께 무문양토기가 많은 양상으로 오이도 뒷살막패총과 유사하며 절대연대는 대체 로 기원전 2,500~2,000년 사이이다.
이 두 유적을 통해 서해안 일대에서 점차 구분계 문양 배치가 사라지고 단치횡주어골문 등 동일계 위주로 문양구 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용유도에서는 구연 바로 아래에 점열문을 시문한 토기가 출토되어 주목된다. 외면에서 내면으로 눌러 시문하 였는데 반관통되어 내면이 불룩하게 솟아있고, 동상반부에 세침선으로 격자문을 불규칙하게 시문하였다. 신석기시대 토기의 기형이지만 문양시문방법이 공열토기와 흡사한 것 으로 향후 유사자료의 축적이 기대된다.
임상택·양시은 2002, 「인천 용유도 신석기유적 발굴조사 개보」,
『해양 교류의 고고학』(제26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집)
임상택, 2004, 「물자의 이동, 집단의 이동 - 신석기시대 중서부지역 교환 망의 양상과 변동 -」, 『고대 문물교류와 경기도』(제32회 한국상고사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Ⅱ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인천삼목도와용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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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_ 신석기시대토기의변천- 중서부
* 인천 삼목도 출토 토기
* 인천 용유도 출토 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