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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천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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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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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미야 마나부 (新宮 學) 지음, 전순 동ㆍ임대희 옮김,  북경 천도 연구 –근 세 중국의 수도(首 都) 이전-

(서경문화사, 2016)

書 評

林 常 薰 (全北大)

北京은 明淸代 以來 首都로 정착 하여 왔다. 북경의 자부심을 대변하 는 ‘皇城脚下’라는 말에서 볼 수 있 듯이 북경은 현재도 중국의 ‘政治 中心地’로서 그 위상이 나날이 높아 가고 있다. 북경이 정확히 언제부터 수도로 정착되었는지, 그 과정은 어 떠하였는지,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 지 등에 관한 내용은 비단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중국에 관심이 있는 일 반인에게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 를 반영하듯 북경의 중요성은 일찍

다.1)

본서의 저자인 일본의 아라미야 마나부(新宮 學) 교수는 명과 같이 그 수도를 위도 상 8도, 남북으로 1000km 이상이나 옮긴 예는 세계 사에서도 매우 드문 경우라는 점과 遷都로 인하여 야기되었던 사회ㆍ경 제 전반에 걸친 시스템의 변경에 대 한 연구가 미흡하다는 점에 착안하 여 북경 천도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였다.2) 그 결과물인 北京遷都の硏究-近世 中國の首都移転3)는 아라미야 교수 가 그간 북경 천도에 관하여 집요하 게 연구해온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1) 북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內藤 湖南의 「北京城の沿革」 (太陽 1卷 1號, 1895)가 그 효시라고 볼 수 있 다.

2) 吳晗의 「明代靖難之役與國都北遷」

(淸華學報 10-4, 1935)에서 북경 천도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시작 되었다. 이 이후 북경 천도에 관한 전문 연구 서적으로는 1976년 파머 교수의 연구(Farmer, Edward L., Early Ming Goverment: The Evolution of Dual Capitals (East Asian Reserch Center, Havard Univ., 1976)가 있으며, 본서는 파 머 교수의 뒤를 이어 출간된 북경 천도에 관한 첫 전문 연구 서적이라 고 볼 수 있다.

3) 新宮 學, 北京遷都の硏究-近世中國 の首都移転(東京: 汲古書院,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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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연구서적으로, 明淸代史 연구자 뿐만 아니라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 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 중 하나이다. 마침 본서의 가치를 제대 로 판단한 한국의 全淳東ㆍ任大熙 교수가 아라미야 교수의 저서에 대 한 번역 작업을 실시해, 2015년 한 국에서 북경 천도 연구 – 근세 중 국의 수도(首都) 이전 -4)이라는 이 름으로 번역되어 한국의 독자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서 북경 천도에 관한 아라미야 교수 의 귀중한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소 개하여, 여러 先學ㆍ同學들과 공유 하고자 한다.

본서는 북경 천도 연구에 관한 연 구사를 정리한 서론과 본문 7장, 북 경 천도와 관련이 있는 3장의 附篇 과 결어, 부록, 후기, 옮긴이의 뒷글 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차는 다 음과 같다.

서론 북경 천도 연구 서설

제1장 초기 명조 정권의 건도문제 에 대하여

제2장 명초 연왕부를 둘러싼 여러 문제

제3장 북경 천도 – 永樂 천도 계획 의 여러 단계

제4장 북경순수와 남경감국

4) 아라미야 마나부(新宮 學) 지음, 전 순동ㆍ임대희 옮김, 북경 천도 연 구 – 근세 중국의 수도(首都) 이전 -(서울: 서경문화사, 2016)

제5장 남경 환도 제6장 홍희에서 선덕까지 제7장 북경 정도

부편 제1장 명초 북경의 부민층 강 제 이주에 대하여

부편 제2장 명말 청초기의 여러 사 료에 보이는 연왕부 = 서원소재 설의 재검토

부편 제3장 북경 천도 관계 연표 종장(결어)

후기 옮긴이 뒷글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본서는 시 간의 순서 즉, 명초 남경에 수도를 둔 洪武年間부터 북경의 수도 지위 가 확정되는 正統年間까지의 과정과 단계를 각 朝代別로 구분하였다. 아 라미야 교수가 생각하는 명대 북경 천도의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홍무제의 남경 정도 2. 영락제의 남ㆍ북경 兩京體

制(1403-1420)와 북경 천도 (1421-1424)

3. 홍희제의 남경 還都(1425)

→ 선덕제의 북경 정도 작업 (1426-1435)

4. 정통제의 북경 정도(1441- 현재)

북경 천도의 과정은 이렇게 간단 하게 요약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이러한 복잡한 과정이 숨어있었다.

막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북경 은 중국의 수도’라고 생각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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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 하에서 아라미야 교 수는 북경 천도와 그로 인한 사회 전반의 변화와 그 영향 등에 대해 기술해 나갔다.

먼저 서론에서 그는 북경 천도에 관한 여러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소 개하였다. 첫째로 소개했던 ‘靖難之 變’ 연구로부터의 접근 방법은 북경 천도의 여러 문제들을 영락년간으로 제한하는 협의의 政治史 경향을 가 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둘째로 일 본 학계에서 유행했던 ‘명초 정권 확립 과정’으로부터의 연구는 광의 의 정치사로 볼 수 있지만, 洪武ㆍ 建文ㆍ永樂으로 이어지는 명초의 역 사를 단절 혹은 연속인가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천도 문제가 다 루어져 북경 천도의 전면을 확인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는 문제점을 밝 혔다. 또 최근 유행하는 세 번째 방 법은 근세사회사 또는 동아시아세계 속에서 북경 천도를 평가한다고 한 다. 이는 ‘大漢族主義’의 함정에 빠 지기 쉬운 중국사 연구를 상대화하 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한다. 이 러한 북경 천도에 관한 연구의 성과 와 한계를 발판으로 아라미야 교수 는 북경이 수도로 확정되는 正統年 間까지 확대하여 북경 천도의 전체 상을 실증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천도는 정치는 물론 경제ㆍ사회의

전반에 걸친 시스템의 변경, 심지어 는 동아시아 세계사의 전개에도 영 향을 끼치므로 더욱더 거시적인 시 각으로 북경 천도 문제를 다루었다.

아라미야 교수가 각 朝代別로 정 리한 각 장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1장에서 는 영락년간 실시된 북경 천도의 역 사적 의의를 규명하기 위해 홍무제 만년의 ‘북방 천도 계획’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아라미야 교수는 그간 吳晗, 단조 히로시(檀上 寬) 등 학자 들이 明史卷115, 「朱標傳」을 근 거로 주장한 홍무 24년 황태자 朱標 의 陝西 파견이 홍무제의 長安으로 의 천도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는 학 설을 반박하였다. 그는 明實錄 등 많은 관련 사료를 비교ㆍ검토하여 황태자를 장안에 파견한 목적이 北 邊을 중심으로 分封된 諸王들을 견 제하고, 북변 방위 상황을 시찰하는 데에 있었다고 밝혔다. 아라미야 교 수는 또 황태자가 파견된 홍무 24년 에는 이미 홍무제의 능묘인 孝陵 축 조가 행해지는 등 수도 남경의 제반 인프라가 완비되는 상황이었던 점, 황태자 파견 한 달 전인 7월에는 富 民層의 남경 강제 이주가 실시되었 던 점 등을 통해 장안 천도 계획은 홍무제의 의지라기보다는 황태자의 의지였을 뿐이며, 정작 홍무제 자신 은 남경의 수도로서 지위를 공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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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고 주장 한다.

제2장에서는 홍무 이래 北平(후의 북경)에 있는 燕王府에 대해 살펴보 았다. 그간 연왕부는 紫禁城 내 太 液池 서쪽, 즉 ‘西苑’에 위치하였다 고 이해되어 왔다. 이에 아라미야 교수는 明太祖實錄과 高麗 使臣 權近의 奉使錄 등 사료를 검토한 결과 연왕부가 元朝의 구 簫牆 내에 위치하고 그 宮城이 太液池 동쪽의 大內 궁성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 다. 또한 홍무제의 연왕 분봉 당초 부터 연왕을 특별 우대하지 않았다 는 점을 주장하면서 일반적으로 연 구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사실을 상 기시켜주었다. 즉, 實錄은 황제 사후 에 편찬되기 때문에 편찬시의 제약 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연왕 의 특별 대우를 밝히는 과정에서 아 라미야 교수는 영락년간에 3번 수정 된 명태조실록을 세밀히 검토하 며, 각각 西安ㆍ太原ㆍ北平에 분봉 된 秦王ㆍ晉王ㆍ燕王의 3왕은 홍무 제가 누군가를 특별 대우하기 위함 이 아니라 아들 중 둘째 이하에게 순서대로 맡긴 것에 불과했음을 밝 혔다. 원대의 궁성을 그대로 이용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護城河를 건설하지 않 았을 정도로 재정적 원인을 우선시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점도 주장하였

다.

제3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북경 천 도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아라미 야 교수는 북경 營建을 단순한 궁전 건설로 보지 않고 관련 공사ㆍ정치 적 사건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해 천 도 과정의 전체상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사람’과 ‘물류’의 이동에 주목하여 복잡다단했던 천도 과정을 일정 정도 재현하는 것에 성 공하였다. 또한 북경 천도의 과정을 4단계로 세분하고, 거기에 靖難之變 이후 부흥책이 추진되던 시기를 전 단계로 추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정난의 변 후의 부흥책’을 천도의 전단계로 설정하여 영락 5년경까지 부흥책이 거의 완료되었음 살펴보았 다. 제1단계로는 영락제가 즉위 후 곧바로 북평을 북경으로 승격하고 남경과 함께 ‘南北 兩京體制(홍무 35년 7월-영락 4년 윤7월)’가 이루 어졌던 기간을 설정하였다. 제2단계 (영락 4년 윤7월-10년 3월)에서는 본격적으로 북경 궁전의 건설이 시 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영락 5년 7 월에 사망한 서황후와 영락제 자신 의 능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홍무 제의 효릉이 있는 남경을 제치고 북 경으로 결정했던 것을 통해 그의 북 경 천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살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제3단계(영 락 10년 3월-14년 10월)에서는 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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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을 일시적으로 정사를 돌보았던 視朝所로 건설하였고, 이를 이후 계 속된 자금성 건설의 서막으로 인식 하였다. 마지막 제4단계(영락 14년 10월-18년 12월)에서는 최후의 순 행인 제3차 순행과 이때 실시된 자 금성 건설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관청 등이 건설되었다. 영락19 년 정월 元旦에 북경의 奉天殿에서 朝賀儀式이 정식으로 거행되면서 북 경 천도는 완성되었으며, 제국의 두 중심(남ㆍ북경)이 이때 처음으로 일 원화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아라 미야 교수는 재미있는 관점을 제시 한다. 즉, 천도 이전 황제의 제1ㆍ2 ㆍ3차 북경 巡幸 기간 동안 각각 天 壽山 영조ㆍ서궁 건설ㆍ봉천전 완성 에 따른 원단 조하의 결정 등 중대 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순행이 단순한 퍼레이드가 아닌 일 종의 북경 천도의 ‘촉진제’ 작용을 했다는 점이다.

영락제는 재위의 거의 반에 해당 하는 9년간 북경을 순행하였고, 이 기간 동안 황태자는 監國으로서 수 도 남경을 留守하였다. 제4장에서 살펴본 내용은 북경의 황제와 남경 의 황태자 사이의 미묘한 권력 분할 과 마찰 등을 살펴보았다. 아라미야 교수는 영락제가 순행 시 반포했던

巡狩事宜와 留守事宜를 검토하

며, 북경과 남경, 황제와 황태자의 권한이 어떠한 과정으로, 또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자세히 살펴보았 다. 초기에는 정보가 이원화되어 권 력 분산 및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대립을 유발하기도 하였으나, 영락 15년의 유수사의가 반포됨에 따라 사후 보고를 포함한 모든 정보를 북 경의 황제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북경과 남경의 이원 체제, 즉 황태자의 남경감국체제는 결국 영락 19년 봉천전의 원단 조하 의식 거행 이전에 남경의 황태자와 황태손을 북경으로 불러들이며 끝이 났다.

제5장은 영락제 사후 洪熙帝의 등극에 따라 남경 還都의 결정과 함 께 陪都로서 북경에 다시 ‘行在’라는 명칭이 붙어지는 이른바 ‘수도=북경’

의 지위가 동요하는 과정에 관한 내 용이다. 천도 완료 후 3개월 후인 영락 19년 4월 8일, 자금성의 핵심 건물인 三殿, 즉 奉天ㆍ華蓋ㆍ謹身 殿이 소실되었다. 삼전의 소실 원인 에 관한 기록은 명측 사료에는 부재 하나, 朝鮮王朝實錄에 ‘벼락’이 주 원인이었음이 명기되어 있다고 한 다. 이를 계기로 남경 환도의 여론 이 거세졌으며, 뒤를 이은 홍희제 대에는 실제로 남경 환도를 준비하 였다. 이 부분에서 아라미야 교수는 영락제가 사망 시까지(영락 20년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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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ㆍ22년) 몽골 親征을 거듭한 원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 였다. 즉, 그간 몽골 친정에 대해 미 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의 ‘쿠빌 라이 칸의 재탄생’, 단조 히로시(檀 上 寬)의 ‘명 중심 동아공동체 재편’

이라는 학설에 자신만의 ‘삼전 소실 로 인한 천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함’이라는 학설을 추가 하여 더 폭넓은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영락제 사 후 홍희제는 곧바로 남경 환도를 추 진하였다. 홍희제는 홍희원년 3월 28일 남경 환도 정식 결정, 4월 4일 남경황성 수리 명령 등 환도에 열을 올렸으나, 남경 환도 결정으로부터 불과 40일 후 급사하였고, 선덕제가 뒤를 잇자 남경 환도는 사실상 폐기 되었다. 그러나 遺詔에도 남경 환도 를 명시한 것으로 보아 홍희제의 환 도 의지는 상당히 강력하였던 듯하 다.

제6장에서는 홍희제의 결정이 선 덕년간에 백지화되고 북경이 定都되 어 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홍희제의 급사 후, 남경에서 유수하던 황태자 가 선덕제로 즉위하였다. 선덕제는 선황의 유조 준수를 천명하였지만, 남경 환도 계획은 즉위 초부터 수정 되어갔다. 여기에서 아라미야 교수 는 선덕제가 조부 영락제의 총애를 입으며 어려서부터 영락제와 함께

북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남경을 그 다지 친숙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추정하였다. 천수산에 홍희 제의 獻陵을 건설하고, 선덕 3년 이 후 남경 황성의 수리를 중지시키며, 북경행부와 행후군도독부의 폐지를 更正함에 따라 남경 환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마지막 장인 제7장에서는 宣德에 서 正統에 이르기까지 소실된 三殿 二宮(乾淸宮ㆍ坤寧宮)의 재건, 수도 의 공간 정비 과정과 북경 定都를 살펴보았다. 아라미야 교수는 영락 19년 봉천전에서의 조하의식에 ‘천 도 완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과 같이, 정통 6년에 이루어진 봉천전 의 재건과 조하의식에도 중대한 의 미를 부여하였다. 즉, 영락 19년 4 월 봉천전이 소실된 이후, 21년만에 재건을 마치고 정통 6년 11월 초하 루에 조하의식을 치루면서 수도 북 경의 동요는 끝나게 되었고, ‘행재’

라는 관명도 제거되어 북경은 명실 상부한 수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후 북경은 청대에도 수도로서의 지 위를 잇게 되나, 정통 14년에 발생 한 土木堡之變으로 일시 흔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북경은 이미 수도로서의 완전한 기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환도의 여론이 대세를 이루 지는 못 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라미야 교수는 명초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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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서 북경 정도까지의 과정을 양 경체제 창시기 → 북경 천도 → 남 경 환도 → 북경 정도의 단계로 나 누어 이를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북 방 유목민족의 대두 이후 중국 사회 는 분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장기간 군사력이 뛰어난 ‘北’과 생산 력이 높은 ‘南’ 사이에서 ‘政治’와

‘經濟’가 분리되었다. 당 멸망 이후 지속된 이러한 ‘제2차 南北朝’5)의 분열 형세는 元 世祖 쿠빌라이에 의 해 종식되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 한 원대에도 사회 저변에는 분열 시 대의 遺風이 남아있었고, 원의 멸망 후 남북 통일의 사업은 명조에게 넘 어갔다. 홍무제는 里甲制 실시와 中 都 건설을 통해 ‘南北一元化’를 완수 하려고 하였지만, 중도 건설을 포기 하고 남경에 정착하면서 다시금 ‘南 京=京師體制’로 회귀하였다. 그 뒤를 이은 영락제는 남북일원화를 추진하 던 홍무제와는 달리 북경 천도를 단 행하여 다시금 경제와 정치를 분리 하였지만, 漕運 등의 정비를 통해 남북이 이어지고 相補 기능을 가진 새로운 시스템, 즉 ‘북경 시스템’을 만들었다. 아라미야 교수는 북경 천 도의 과정이 곧 북경 시스템이 완성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며, 북경 정 5) 愛宕 松男ㆍ寺田 隆信, 中國の歷史

 6,〈元ㆍ明〉(東京: 講談社, 1974), p.272.

도가 완수된 정통년간에 이르러 북 경 시스템 역시 완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명조의 뒤를 이은 청조 역시 이 북경 시스템을 유지하며 결국 18 세기 말까지 북경 시스템은 성공적 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영락제의 북경 천도 원인 을 밝히는 과정에서 미야자키 이치 사다의 주장6)을 수용하며 거기에 자신의 주장을 덧붙였다. 즉, 명과 원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영락제의 대외 확장은 그가 스스로 쿠빌라이 칸을 승계하기 위한 행동이었고, 북 경 천도의 단행은 ‘華夷一統’을 중시 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 만, 정통 6년 土木堡의 變 발생 이 후 유목민족과의 힘의 上下關係에서 현저히 뒤떨어지게 되자 화이일통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고, 방어를 위주로 한 한족 중심으로 전환되면 서 결국 이때서야 완전히 원과 단절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상으로 아라미야 교수는 본서에 서 북경 천도와 관련한 일련의 과정 을 천도를 단행했던 영락제 개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명조의 기반이 확 립되는 홍무년간부터 북경이 수도로 정착하는 정통제까지 그 범위를 넓 6) 宮崎 市定, 「洪武から永樂へ -初期 明朝政權の性格」 (東洋史研究 27 –4,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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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며, 명대 경제ㆍ사회의 변화 등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아라미야 교 수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천 도는 결코 하나의 단순한 정치적 사 건이 아닌, 명대 전반에 걸친 거대 한 변화를 일으킨 중대사였음을 확 인할 수 있었다.

아라미야 교수는 이러한 북경 천 도로 인한 거대한 변화를 곧 ‘북경 시스템’ 구축의 완료로 보았다. 즉, 북방 유목민족의 대두 이래로 지속 되어 온 ‘정치중심의 북’과 ‘경제중 심의 남’이 명대에도 계속 분열을 이루지만, 기존의 단순한 분열과는 달리 명대에는 북경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상보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다.7) 아라미 야 교수는 경제와 정치가 분리된 남 과 북을 연결하는 북경 시스템의 주 요 수단으로 漕運制度을 지목하였 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북경 시 스템의 확립을 위해 조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게 되면서 명의 대외 정책의 노선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영락년간 이 루어진 정화의 남해 원정 등에 투입 된 명의 대규모 수상 수송력과 그를 지탱하는 재력은 천도 후 북경 시스 템의 유지를 위해 쏟아야만 했고,

7) 북경 시스템에 관한 내용은 본서 p.

83; p.508 참고.

북경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선덕년간을 기점으로 원정이 중지되면서 명의 대외 정책이 확장 에서 폐쇄로 돌아서게 되었다고 보 고 있다.

아라미야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 은 명대사 연구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몇 가지 쉽게 수 긍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특히 북 경 시스템을 뒷받침하던 명대의 조 운 제도에 대한 설명은 읽는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본서에서는 선덕년간에 이루어진 조운 방식의 개선과 조량액의 변화에 대한 이전 의 연구 성과8)를 인용하는 데에 그 쳤다. 또한 아라미야 교수는 북경 시스템의 완성으로 조운제도 역시 완비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북경 천도의 완수 이후 남북을 연결 하는 대운하의 ‘河患’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바다로의 해운이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였다.9) 이러한 예들은

‘북경 천도의 완성 = 북경 시스템의 완료 = 조운 제도의 완비’라는 그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 용 중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아라미야 교수가 제

8) 星斌夫, 明代漕運の硏究 (東京:

學術振興會, 1963)

9) 曺永憲, 「明 後期 ‘短命’으로 끝난 漕糧의 海運과 그 의미」 (歷史敎育

 10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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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 원과 명의 연속성 문제 역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미야 자키 이치사다의 주장10)을 적극 수 용하면서 원명의 연속성을 강조하였 다. 영락제의 대외 확장은 쿠빌라이 칸의 뒤를 잇는 행동이고, ‘華夷一 統’을 위해 북경으로 천도하였으며, 정통 6년 土木堡의 變 발생 이후 화 이일통보다는 방어를 위주로 한 한 족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결국 이때 서야 완전히 원과 단절되었다고 주 장한다. 이는 먼저 아라미야 교수 자신이 언급한 선덕년간 북경 시스 템 구축을 위해 조운에 막대한 재정 을 투입하며 영락년간의 확장에서 폐쇄로 돌아서게 되었다는 주장과 맞지 않는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선 덕년간부터 이미 화이일통을 포기하 고 한족 중심의 폐쇄로 전환된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선덕년간 이루어 진 대외 원정의 정지, 여진 및 조선 에 대한 소극적인 정책11)에서도 명 의 폐쇄적인 성격을 여실히 확인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본서에 앞서 북경 천도에 관하여 연구했던 파머 교수

10) 宮崎 市定, 앞의 논문(1969).

11) 于曉光, 明朝與朝鮮圍繞女真問題 的交涉研究(1368-1619年) (山東大 學 博士學位論文, 2006); 林常薰, 「 明代 朝鮮 宮女의 性格」 (東洋史學 硏究 122, 2013).

역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파머 교수는 북경 천도를 통해 북변 방어 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국내 통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는 점에서 원명의 단절을 주장했던 것이다.12) 아라미야 교수가 생각하 는 대로 화이일통을 위해 북경 천도 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청대에 까지 계승되었다는 주장이 더욱 설 득력을 얻으려면 보다 다양한 관점 에서 이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이 러한 소소한 문제점들은 북경 시스 템, 원명의 연속성 문제라는 큰 그 림을 그리며 그 안에서 북경 천도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각 제도 등에 대한 보다 세심한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아라미야 교수는 거대한 주제인 ‘북경 천도’의 전체상을 밝히 기 위해 치밀한 계획 아래, 긴 시간 에 걸쳐, 철저하게 연구를 진행해왔 다. 본서는 그 結晶體로서 북경 천 도뿐만 아니라 북경의 역사 그리고 명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매 우 유익한 저서라고 생각한다. 비록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였지만, 이는 본서의 주된 논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북경 시스템’은 향후 학계에 큰 영

12) Farmer, 앞의 책(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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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끼칠 과제라고 생각하며, 이에 관한 많은 연구를 기대해 본다. 또 한 본서는 일본 책의 한국어 번역본 임에도 불구하고 읽기에 별 어색함 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 교 정 작업을 거쳐 일본식 표현의 한국 화, 오탈자와 띄어쓰기 등을 바로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譯 者 全淳東ㆍ任大熙 교수 및 번역에 참가한 모든 이들의 수많은 노고가 느껴진다.

주제어: 북경, 천도, 명청대, 북경 시 關鍵字: 北京, 遷都, 明淸兩朝, 北京스템 Keywords: Beijing, The Transfer of體制 the Capital, The System of Beijing (원고접수: 2016년 3월 21일, 심사완 료 및 심사결과통보: 6월 15일, 수 정원고접수: 6월 24일, 게재확정: 6 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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