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ation & Human Resource Develo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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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여성학자 노정혜
최근 의과대학 신입생 중 여학생의 비율이 50%를 넘어 섰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그 이유와 파장에 대 해 구구한 분석이 뒤따랐다. 이제
는 여성들의 전문직 진출이 늘게 된 사회현상의 반영이라는 것, 직 장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은 여학 생들이 의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선 호한다는 것, 또 한편으로는 의사 라는 직업이 이제는 점점 더 별 볼 일 없어지면서 (돈벌기가 어려워 지면서), 우수한 남학생들이 더이 상 선호하지 않게 되어 그 자리를
여학생들이 메꾸게 된 것이라는 등 갖가지 분석이 나 오고 있다.
그러나 여학생의 약진에 대한 분석이 어떠할지라도 정작 의과대학에서는 여학생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을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표 면적으로는 동기 남학생들이 군복무로 빠진 공백을 여 학생으로 모두 채울 수가 없지 않는가 하는 볼멘 이유 를 들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보다 더 뿌리 깊은 불 편함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이공계열 학과들의 경우도 여학생의 비율이 계 속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생물학과 화 학, 수학 등에 국한되어 있고, 물리학이나 공학은 여전히 여 학생의 진출이 매우 부진하다.
국가적으로 이공계의 전문인 력이 매우 필요하고, 우수한 여학생들이 이공계에 진출하 는 것은 국가적으로 볼 때 매 우 장려할 만한 일이지만, 그 것은 대의명분이고, 실제로 대 부분이 남자인 대학의 교수들은 여학생 제자를 적극적 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 한다. 그 이유는 가지가지이다.
일을 좀 하게 되면 결혼한다고, 아이가 생겼다고, 미련 없이 떠나 버리니까. 조금만 야단쳐도 울어버리고 삐 쳐 버리니까. 사제지간에 오고가는 정을 나눌 수 없으 니까. 힘든 일을 기피하고 쉬운 일만 하려고 하니까.
그리고 가장 힘든 점은 취직이 잘 안 되니까 ….
당찬 여학생들이 늘어나야 편견의 벽이 깨진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도 여학생이 점점 늘고 있다. 학부생
직 업 과 인 력 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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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명과학 분야 여성 과학자들의 모임인 여성 생명과학 기술포럼과 로레알 코리아가 매년 뛰어난 성과를 올린 여성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로레알 여성 생명과학상의 제 1 회 수상자로 선정된 서울대 노정혜 교수가 교육인적자원부(편) 땀방울에 그친 그녀들의 이야기Ⅱ, 2000에 쓴 글을 노정혜 교수의 동의를 얻어 전재하였다.
Krivet 광장
21세기 직업인상
도 그렇고 대학원생도 그렇다. 그러나 여학생을 미더워 하지 않는 속내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다. 여학생들 중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질 을 갖춘 학생들이 꽤나 많다. 똑똑하고 당차고 활달하게 자기를 표현하며, 하고 싶은 일을 끈기 있게 밀고 나가 는 듬직한 여학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이런 여학생들이 좀더 많이 나와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 주었으면 한다.
우리 나라 여자들은 드세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드 세게 덤벼들어 몰두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닌 이상, 나 는 이것을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인다. 경쟁을 통해 세계 정상에 오른 체육인이나 예술인들은 대개 여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 능력을 발휘하여 드세게(?) 일 에 매진한다면 여학생들을 못미더워하는 부정적인 견 해는 금새 잠재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공계 전문직에서 일하는 여성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 날수록 그러한 편견도 대부분 없어질 것이라 믿는다.
현재 4년제 이상 대학의 이공계열 학과 교수 중 여성 의 비율은 약 12% 정도이다. 10명 교수 중에 1명 정도 여자 교수가 고명(음식을 꾸미기 위해 음식 위에 뿌리 거나 덧놓는 양념을 말한다)처럼 끼어 있는 정도이다.
서울대학의 경우 자연과학대학 전체 교수 180명 중 여 성교수는 4명뿐이다. 공과대학은 250여 명 중 여성은 아직 정식교수라 할 수 없는 기금교수(基金敎授) 1명뿐 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본이 되어
야 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감으로 자리잡는다. 어서 빨 리 이공계 전문직 여성들이 대학에서, 연구소에서, 또 기업에서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별로 내세울 것 없 지만 내 자신의 경험담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공부와 사귐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대학생활
우리 부모님은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셨는데, 큰딸인 나부터 막내인 아들까지 모두 전문직을 가진 사회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맏이인 내가 말을 잘한다고(?) 법관 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하 였다. 그러자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길 바라셨다. 그러 나 피를 보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던 나는 스스로 의 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보다는 생명현상에 대한 공부가 훨씬 하고 싶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자연계열(그 당시는 공대와 자연 대, 약대 포함)에 입학한 나는 관악캠퍼스가 맞이한 첫 신입생 학번이었고, 1,100여 명의 자연계열 신입생 중 14명뿐인 여학생의 한사람이었다.
대학 첫해는 스스로 모든 것을 시도해 보려는 의욕이 풍선처럼 팽창된 때였다고 기억된다. 어떤 클럽활동을 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였고, 고심 끝에 고등학교 선 배의 권유로 연극반에 들어갔지만,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우리 나라 여자들은 드세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드세게 덤벼들어 몰두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닌 이상,
나는 이것을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로 받아들인다. 경쟁을 통해 세계 정상에 오른 체육인이나 예술인들은 대개 여자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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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 후에는 그만두었다. 이공계 대학교재가 전부 영어 로 된 원서이고, 특히 복잡한 생물학 교재를 이해하려니 언어의 장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자적인 영어공부를 해 보겠다고 몇몇 친구들과 영어시사잡지를 독해하는 모임을 꾸며서 끙끙거리기도 하였다. 좀더 멋 진 테니스를 치기 위해 여러 테니스장을 전전하며 힘에 부치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한달도 못되어 반정부 데모 진압을 위한 휴교령이 내렸을 때에도 그저 즐겁기만 했던 단순 하고 순수한 시절이었다. 7년 후에 남편이 될 남자친구 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이 때의 대인 관계는 어찌 보면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거나 그 친구 들의 친구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 어졌다.
2학년이 되면서 학과를 선택하였다. 미지의 연구대상 을 구하던 내게 미생물학은 큰 매력이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공과목의 실험들을 배우면서 처음 하게 된 실험이나 리포트 작성 때문에 애를 먹었지 만, 대학원생 조교들이 보여 준 인간미는 여태껏 입시공 부에 찌들어 좁아진 나의 시야를 띄우기에 충분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주로 비슷비슷한 친구들과 서로를 비교 하거나 농담 따먹기 정도의 대화밖에는 할 수 없었던 우 정의 스펙트럼이 이제는 나와 전혀 다른 성장배경을 가 진, 또한 대부분이 남자들인 학교 친구들의 생각과 이 상, 또 사는 모습을 겪으며 한 차원 더 넓어졌다고 생각 된다. 강의실에서의 공부는 시국에 대한 데모와 잦은 휴 교령으로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고, 자연히 우리는 뜻 맞는 선배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독학으로 전공서 적들을 공부하였다. 그 당시 종로 무교동에 범문사라는 외국서적을 취급하는 책방이 있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이 좀 생겼을 때 범문사에 들려, 제목을 읽기만
도 쉽지 않은 책들 속에서 골라낸 전공서적 특유의 책 냄새와 책장 넘기는 손맛은 잔잔한 기쁨 중의 하나였다.
후배들의 실험을 지도하던 대학원생 조교들은 그 당시 우리에겐‘영원한’지도자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술을 잘 못하지만 학교 밖에서의 대화는 주로 막걸리집 이나 소주집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나 자신도 타칭 술꾼 (?)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당시 많은 친구들이 야학에서 근로자들을 교육시 키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나도 친구들을 따라 야학에서 영어나 생물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는 정치적인 관 심보다는 무언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초보적인 정의감 때문이었다. 좋은 선배들과의 만남, 공부와 인간관계에서 많은 배움들이 있었던 시기 를 거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유학과 결혼
대학을 다니면서 전공공부를 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 은 마음이 굳어졌으나, 그 당시 상황으로 우리 나라에선 아직 대학원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학 을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인생의 설계가 잘 맞춰지지 않았다. 부모님의 염려는 자연히 결 혼에 관한 것이었고, 동갑인 남자친구는 군대문제가 벽 에 부딪혀 전혀 무슨 눈앞의 설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 우리는 매 우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우선 둘 다 공부를 계속할 것 이란 전제에 합의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에 안 가도 되는 내가 먼저 유학을 하며, 몇 년 후가 되든지 함께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서로를 기다려 주자는 것이 었다. 일단 그런 원칙을 세우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4년의 기간동안 주로 공부와 유학준비에 전념할 수 있
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지원했던 미국의 몇 대학 에서 답장이 왔다. 장학금을 줄 수 있는 학교 중에서 생 물학분야와 기계공학분야(남자친구의 전공) 교수가 가 장 많은 위스컨신 대학을 골랐다. 서울에서 대학원에 진학한 남자친구와 약혼을 하고, 졸업한 해 8월에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위스컨신 대학(北美의 대표적 종합대 학)의 분자생물학 대학원과정에 입학하여 강의를 듣고, 실험실 순례를 하던 첫해에 겪었던 어려움은 상상 이상 으로 컸다. 공부를 꽤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렇 지가 못했다. 그러니 자연 입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날이 거의 없었고, 자신의 왜소함과 부족함을 뼛속까지 느껴 보는 경험을 하였다. 지도교수를 정하고 논문주제 를 잡아 실험을 시작한 후에도, 내면적으로는 이러한 낮아짐과 좌절 사이를 맴도는 과정을 오래 겪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도 농담 한마디 겨우 알아듣기 힘들고, 남들은 쉽게 하는 정보교환과 토론도 말이 따라주질 않 아 끙끙 매노라면, 그나마 간신히 지탱하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져 버리기 일쑤였다. 중ㆍ고등 학교 때 영어경시대회에 단골로 출전하던 과거의 경력도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낮아진 마음으로 정직하게 노력한 대가는 서 서히 그러나 확실히 찾아 왔다. 말 잘하는 미국친구들이 얻지 못하는 실험결과를 차츰 얻게 되면서, 실험실 동료 들과 지도교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
한 일이었다. 좋은 논문들을 내면서 다시금 새로운 자신 감을 찾았고, 지도교수의 신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만일 초기의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못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 되어서 지금은 오히려 그 때의 고생에 감사하고 있다.
친구 같은 남편, 가족 같은 친구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고 3년째 되던 때, 아버지의 갑 작스런 수술로 나는 급히 귀국을 하였고, 군대에 갔다 예상 밖으로 빨리 제대한 남자친구를 만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라는 가족들의 재촉 속 에 우리는 서둘러 결혼을 하였고, 아버지의 병상을 지 키지도 못하고 떼밀려 떠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 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나는 다시 얼떨떨한 상태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다른 학교에는 원서조차 내 지 않고 곧바로 내가 있는 학교로 뒤따라 왔다. 이 때부 터 서로 친구같이 받쳐 주며 공부하게 되면서 대학원 생활의 어려움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어느 틈에 우리는 두 아이의 부모가 되 었다. 첫아이는 대학원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간에 태어났고, 둘째 아이는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 연수 (post-doctoral training) 과정 중 그나마 약간 여유 있 던 때에 태어났다. 한참 열심히 일해야 될 때 첫 아이 낮아진 마음으로 정직히 노력한 대가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찾아 왔다. 말 잘하는 미국친구들이 얻지 못하는 실험결과를 차츰 얻게 되면서, 실험실 동료들과 지도교수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좋은 논문들을 내면서 다시금 새로운 자신감을 찾았고, 지도교수의 신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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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임신하고 놀라서 끙끙 대다가 가까이 살던 친한 언 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분이 자 기 일처럼 기뻐하며 격려해 주던 것은 큰 힘이 되었다.
아이는 하나님의 축복인데, 첫아이를 가지고 당황하고 걱정하던 그 때의 철없음이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다.
지금도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문제로 지레 겁을 먹 고 주춤거리는 후배와 제자들을 보면,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리 막중 한 일의 무게가 무거워도, 아이를 키우며 얻는 기쁨은 고된 가운데에서 맛볼 수 있는 사는 즐거움이다. 선배 나 친척 등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 발을 붙이고 7년 을 지내는 동안 나는 또 친형제와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독신일 적에는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친구들 과의 우정이 고달픔을 덜어 주었는데, 가정을 가진 후 에는 가족 대 가족으로 만난 좋은 친구들이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나이와 성장 배경은 달라도 우리 부부와 아이들의 거의 모든 일을 함께 나누며 지낼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은 가정과 일의 성취 못지않게 중요한 축복이라 생각 한다. 이웃 또는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의 의미 를 알게 된 것은 박사학위를 받은 것 이상의 값진 소득 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운명처럼 중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남편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
고, 또 동료들이 그렇다.
일터에서
학위를 받고 박사후 연구원으로 지내고 있을 때 가까 이 지내던 언니가 신문광고를 가지고 왔다.
서울대학교에서, 그것도 내가 졸업한 학과에서 교수 를 공채한다며, 내가 전공하고 있는 분야를 뽑는 것 아 니냐며 기대 섞인 눈으로 나를 살폈다. 그 때까지 나는 모교에 돌아가서 가르칠 것이란 생각은 해 본 적이 없 었고, 그저 거의 맹목적으로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모집공고를 보고 서류를 낸지 한참만에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선발이 됐으니 임용수속을 밟으라는 소리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지만, 출중한 남자선배들을 제치 고 학번도 어린 여자를 학과교수로 뽑은 데에는 내부적 으로 큰 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7년의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한 나를 맞는 선배 교수 들의 눈빛 속에는 나에 대한 기대와 염려가 함께 배어 있었다. 그 때 내 마음엔 그들을 오빠들 같이 생각하자 는 묘한 가족의식이 발동했다.
그렇다. 일터의 동료들은 큰 의미의 가족이다. 그렇 다면 나도 그들에게‘여자’가 아닌‘누이’로 여겨져야 한다. 86년에 조교수로 부임한 후 11년 동안 나는 학과 지금도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문제로 지레 겁을 먹고 주춤거리는 후배와 제자들을 보면,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리 막중한 일의 무게가 무거워도, 아이를 키우며 얻는 기쁨은 고된 가운데에서 맛볼 수 있는 사는 즐거움이다.
지금도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문제로 지레 겁을 먹고 주춤거리는 후배와 제자들을 보면,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리 막중한 일의 무게가 무거워도, 아이를 키우며 얻는 기쁨은 고된 가운데에서 맛볼 수 있는 사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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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문제로 지레 겁을 먹고 주춤거리는 후배와 제자들을 보면,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냥 부딪쳐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리 막중한 일의 무게가 무거워도, 아이를 키우며 얻는 기쁨은 고된 가운데에서 맛볼 수 있는 사는 즐거움이다.
의 막내 교수로, 여성이라는 인식보다는 그저 누이로, 학생들에게는 큰누나나 언니 같은 기분으로 지내 왔다.
드디어 몇 해전 후배 교수가 부임하면서 나는 그에게 누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배 입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떠밀려 올라가면서 어느 틈에‘중견’이란 소 리를 듣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 실험실엔 15명의 대학원생들이 각자의 연 구주제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기 위해 분주히 일하 고 있다. 학교에서의 나의 일과는 그들과의 아침인사로 시작하고, 그들과의 저녁인사로 끝이 난다. 나의 학창 시절때 보다 훨씬 더 발랄하고 거침없는 나의 후배들은 내가 공부하던 때보다 훨씬 편리하지만 더 힘든 세상을 살고 있다. 나는 그들의 기가 꺾이지 않고 일할 수 있도 록 울타리가 되어 주면서, 그들도 스스로 자신의 울타 리를 세워 독립해 가는 것을 돕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가정을 벗어난 여성들의 발걸음을 반기지 않는다. 흔드는 바람과 차가운 곁눈
질, 썰렁한 외면과 낯 뜨거운 비웃음들이 도처에 도사 리고 있다. 걸어가다 넘어지면 당연한 일이고, 걷다가 뛰면(튀면?) 별꼴이라 평가받는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 어도 이러한 거부반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가 깊이 서려있는 현실의 모습이다. 그나마 약간 다행인 것은 이런 거부반응이 예전엔 대낮에 거리낌없이 표출 되었지만, 이제는 웬만해서는 드러내 놓고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어차피 모자란 구 석 투성이인데, 이걸 한탄하고 푸념하는 것은 아무 의 미가 없다. 발랄하고 당찬 어린 후배들은 자신이 좋아 하는 일을 붙들고 절대 꺾이지 말고 당당히 걸어가길 바란다. 남들의 평가보다는 자신의 평가를 더 중하게 생각하면서…. 마음만 굳게 먹으면, 가족과 일, 그리고 친구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마음 먹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