譯 註
『청명집』 호혼문 卷八 (下)
(名公書判淸明集 卷之八, 下)
任大熙(慶北大)․朴玖澈(釜山大) 호혼문(권8-28) 검교(檢校)
1)한 문통판(聞通判)의 재산이 그 조
카의 음모로 빼앗기다. (檢校聞通判財産爲其姪謀奪)
聞通判平生淸若自立, 鄕曲所共知之. 今不幸歿於官所, 其家惟一婦一孫, 惸 惸嫠幼, 孤影悽然, 過者見之, 猶爲不忍, 矧如同氣之至愛, 猶子之至情乎. 扶持 之, 保護之, 以慰泉下之望, 此實天下之大義也. 今乃幸其人之云亡, 睥晲歸槖 之物, 盻盻然惟恐謀奪之不亟. 且其家貲産素微, 所餘俸給, 一入豺虎之吻, 死 者何以葬, 生者何以養. 有如目今所失一箱物, 委官驗之, 初無外賊來蹤, 非家 人之謀, 而誰爲之乎. 舐糠及米, 勢所必至, 辨之不早, 禍必燎原. 見委察推躬親 屈致季知縣․王宗敎․潘縣尉․湯將仕集會其家, 點對元檢校數目, 嚴與封樁.將來准備襄事支遣之外, 以其餘金悉爲買田, 活其孤幼, 如見留日用婢僕之類, 亦合量爲支給, 其他蠶食于旁, 一切屛去之, 毋以姑息爲事. 一死一生, 乃見交 情, 季知縣․諸寓公疇昔風誼之厚, 藹著旦評, 必能相與協心經紀而保全之. 煩 察推更爲轉致此意, 實州家之公禱也. 切幸介注.
문통판(聞通判)은 평생 청렴하고 빈곤하게 생활하였는데, 이는 마을 사람 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지금 불행하게도 임지(任地)에서 사망하였는데, 그 집에는 부인 한 명과 손자 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걱정하는 과부와 어린아이의 쓸쓸하고 처연한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물며 형제의 지극한 사랑과 조카2)의 지극한 정(情)에서 1) 檢校는 미성년인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 혹은 정당한 승계자가 나타날 때까 지 공권력에 의해 재산을 조사하고 보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교에 관해서는 加藤繁「宋代の檢校庫について」『支那經濟史考證』東洋文庫, 1964 참조.
2) “同氣之至愛, 猶子之至情”; 同氣는 형제, 猶子는 『禮記』檀弓에 의하면 喪服 兄弟의 자식을 가리킨다.
8-28 계보도
처 문통판
조 카 死
손 자
재산문제 관여
본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을 돕고 보호하여 이로써 사망한 자의 바
램에 위안을 주는 것이야말로 실로 천하의 대의(大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죽은 것을 기회로, 그의 남겨진 재산을 엿보면서,3)오직 그 재산을 빨리 빼앗지 못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또한 그 집의 재산 은 본래부터 조금밖에 되지 않았으며, 남겨진 봉급마저 승냥이나 호랑이같은 자의 입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죽은 사람은 어떻게 장례지내며, 산 사람은 어 떻게 생활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현재 잃어버린 상자 하나가 있는데, 관청에 위탁해 조사해 본 결과, 애초부터 밖에서 도적이 들어온 흔적도 없는 데, 집안 사람의 음모가 아니라면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겨를 핥다가 쌀 까지 먹는다”4)는 말과 같이, 사태는 반드시 급박한 상황에 이를 것이므로, 신속하게 손을 쓰지 않으면, 화(禍)는 반드시 들판에 번지는 불과 같을 것이 다.
지금 관찰추관(觀察推官)에게 위임하고, 몸소 계지현(季知縣), 왕종교(王 宗敎),5)반현위(潘縣尉), 탕장사랑(湯將仕郞)6)에게 부탁해서 그 집에 불러들 여,7)원래 검교해 둔 재산의 수량과 품목을 일일이 대조하고, 엄중하게 봉인 하여 보관해 둔다(封樁). 장차 장례 비용(襄事)8)으로 준비해 두는 외에, 나머 3) “歸橐之物”; 본래는 토산물이라는 의미이지만 유산의 의미이다.
4) “括糠及米”; 『史記』吳王濞傳에 “里語有之, 舐糠及米, 糠在外, 米在內”라고 되 어 있다. 겨를 끝까지 핥으면 쌀이 나온다는 뜻으로 점차 점차 침식해 들어간 다는 것을 의미한다.
5) “宗敎”; 敦宗院敎授의 약칭이다. 敦宗院은 宗正司 소속으로 황족의 고아나 夫·
子孫을 잃은 사람들을 수용해서 교육한 시설을 말한다.
6) “將仕郞”; 남송시대에 있어서 문관의 최말단 기록관. 恩蔭이나 買官 등으로 수 여되었다.
7) “屈致”;『三國志』蜀書 卷5, 諸葛亮傳. “此人可就見, 不可屈致”이라고 되어 있 다.
8) “襄事”; 장례를 지칭하는 말로,『左傳』定公 15년에 “葬定公, 雨, 不克襄事, 禮
지 돈은 모두 전지(田地)를 구입하고, 또 어린 고아를 부양하며, 현재 잔류하 여 부리고 있는 하녀와 종들에게도 필요한 금전을 계산해서 지급해야 한다.
그 외 옆에서 양식만 축내는 자들은 모두 쫒아내며, 임시방편적으로 일을 처 리해서는 안 된다.
생사(生死)의 길을 달리할 때야말로, 비로소 사람들의 진정한 정(情)을 알 게 되는 법이다. 계지현(季知縣)과 향리를 떠나 있는 관리(寓公)들은 예전부 터 두터운 우의로 높은 평판을 받고 있으므로,9)반드시 마음을 합하여 재산 과 유족들을 지켜줄 것이다. 관찰추관을 번거롭게 하면서 다시 이런 의도를 전달하는 것은 진심으로 본관(州家, 즉 知州)이 바라는 바이다. 아무쪼록 힘 써주기를 바란다.
고유(孤幼)
호혼문(권8-29) 부동산(業)을 공유했다면, 동산(財)도 공유해 야 한다. (同業則當同財)
채구헌(蔡久軒) 但觀鄰證單狀, 李春五․春六居大瓦屋, 而牛畜多, 阿鄭․阿陳․牛俚居小 茅屋, 並無一物, 以此便見大段不均. 縱往年已分析, 而年俚一分實未均其利.
春五․春六當念牛俚乃同祖之親, 旣已同業, 必當同財. 帖縣尉同曹隅官照單 狀所載, 將三家物力除田産之外, 應係米穀․孳牲之類, 並混作三分, 內牛俚一 分, 分明具單入官, 責阿陳收掌撫育. 所有契照就李春五兄弟索出, 封寄縣庫, 給據與照, 候出幼日給還. 各責狀申.
이웃에 있는 자가 증언한 진술서(單狀)10)만 볼 때, 이춘오(李春五)와 이춘 也”라고 되어 있다.
9) “藹著旦評”; 旦評은 月旦評. 후한의 許邵가 매월 삭일에 鄕黨의 인물을 품평한 고사이다.
10) “單狀”; 간단한 진술서. 申狀. 『長編』권8, 乾德5년 4월 己卯에는 “有司言, 朝 廷自削平川峽, 卽頌刑統編勅於管內諸州, 具載建隆三年三月丁卯詔書, 及結狀條 樣, 而州吏弛怠, 靡或遵守, 所決重罪, 祇作單狀, 至季末來上, 狀內但言, 爲某事處 斬, 或徒流, 皆不錄罪款, 及夫所用之條”라고 되어 있고,『吏學指南』의 狀詞에 는 簡略之義라 되어있다.
이춘오 이춘육 이우리
부 유 가 난
8-29 계보도
육(李椿六)은 큰 기와집에 살면서 소도 많지만, 정씨아낙네와 진씨아낙네, 그 리고 이우리(李牛俚)는 작은 초가집에 살면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이로 보아 대단히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지난해 가산분할을 했다고 하지만, 이우리의 몫은 실제로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이춘오와 이춘육 은 마땅히 이우리도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부동산을 공유 하고 있는 이상, 반드시 동산도 공유해야 한다.
현위와 조우관(曹隅官)11)에게 공문을 보내고, 진술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 에 의거하여, 세 집의 재산(物力)12)중에서 토지·가옥(田産)은 제외하고, 곡 물과 가축의 종류는 모두 합쳐서 삼등분 하여, 그 중 이우리의 몫은 모두 분 명히 서류를 갖추어 관청에 제출하고, 진씨아낙네에게 이를 책임지고 관리하 고 (이우리를) 양육하게 한다. 계약서와 관련서류는 이춘오 형제로부터 찾아 내어, 현의 창고(庫)에 봉인(封印)한 다음 보관하고, 이에 관한 공문서와 증 명서를 주어, 이우리가 성인이 되면 돌려주도록 한다. 각자에게 서약서(責狀) 를 받아내고 이를 보고하라.
호혼문(권8-30) 비유(卑幼)를 부추기고 꾀어 재산을 갈취하다 (鼓誘卑幼取財)
黎定夫等六名利孫某之幼, 敎其私輒將田業, 就張上舍·宋通判宅倚當,生錢 共一百二十貫足. 非所使用內, 黎定夫等三名解受孫某錢會, 係欺詐取財, 從盜
11) 隅官은 남송대에는 도시를 隅라는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는데, 隅官은 이 지역 의 放火를 담당한 하급관리였으며, 점차 경찰업무까지도 겸하는 경우도 많았 다. 종래의 廂이 隅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12) 業은 토지와 가옥을 포함하는 부동산을, 財는 동전이나 지폐 등을 포함하는 동산을 의미한다. 物力은 業과 財의 총칭으로 생각된다.
손 모 장 씨 계정부,하모,유경사 등
재산갈취 8-30 계보도
論. 黎定夫贓滿三十貫八百, 合配本州. 夏某贓滿一十五貫二百, 合徒二年. 劉 庚四贓五貫五百文, 合徒一年半. 餘敎誘卑幼, 非理費用財産,合杖一百, 編管隣 州. 李楶受孫某奇錢, 共官會五百二十貫, 據孫某及其母阿楊所供, 並係李楶留 此錢, 欲爲鬻擧, 以事體稍重, 未欲盡情根究. 蕭子章只就李楶名下借錢, 已還, 尙可闊略. 孫某有母在, 而私以田業倚當, 亦合照瞞昧條, 從杖一百. 劉順爲牙 保, 亦當同罪. 雖犯在赦前, 然黎定夫等詐欺得財, 陪渉卑幼, 以破壊人家財産, 殘害人家子弟, 豈容罸不傷其毫毛. 案備所供, 申使府取自施行. 蕭子章放, 餘 名各知在聽候.
여정부(黎定夫) 등 6명은 손모(孫某)가 어리다는 것을 이용해 그에게 몰래 전지(田地)를 장상사(張上舍)13)와 송통판(宋通判) 댁에 저당(倚當)14)잡히게 하여, 모두 120관족(貫足)15)의 돈을 차용하도록 했는데, 이 돈을 손모가 사용 하지는 않았다.16)여정부(黎定夫) 등 세 명은 손모(孫某)의 전(錢)과 회자(會 子)를 나누어 가졌는데, 이것은 재물을 편취(騙取)한 것이므로, 도죄(盜罪)에 의거하여 논죄(論罪)한다.17)여정부(黎定夫)가 편취한 돈은 도합 30관 800문 이므로, 본주(本州)의 상군(廂軍)에 배속한다. 하모(夏某)가 편취한 돈은 15
13) 上舍는 太學三舍法 시행 이후의 태학의 上舍生을 지칭하며,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外舍, 中舍, 上舍로 나뉘어졌는데, 그 중에서 최상급의 학생은 上舍에 소 속된 학생이다.
14) 倚當은 저당의 의미로, 부동산의 소유권을 넘겨주지 않고, 금전을 담보로 주 는 대신 일정기간 동안의 점유권을 지니는 것을 지칭한다. 저당 소송에 관해서 는 朴玖澈, 「淸明集 戶婚門에서 본 業訴訟-抵當 訴訟을 중심으로-」『大丘史 學』73, 2003 참조.
15) 足은 足陌이라고도 하는데, 100매의 동전을 100文으로 헤아릴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만약 100매이하의 동전을 100문으로 헤아릴 때는 省陌,短陌이라고 했다.
16) “非所使用”; 使用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17)『唐律疏議』卷25, 詐僞 “諸詐欺官私, 以取財物者, 準盜論”이라 되어 있다.
관 200문이므로, 도형2년에 처하고, 유강사(劉庚四)가 편취한 돈은 5관 500문 이므로 도형1년반에 처한다. 그 외의 사람은 비유(卑幼)를 꾀어 정당한 이유 없이 재산을 썼으므로 장형100대에 처하고 인근 주(州)로 편관(編管)시킨다.
이절(李楶)은 손모가 맡긴 전(錢)은 맡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도합 관회 (官會) 520관이었다. 손모(孫某)와 그 모친 양씨(阿楊)이 진술한 바에 의거하 면, 이절(李楶)이 이 돈을 맡아두고 죽거(鬻擧)18)의 비용으로 사용하려 했다 는 것이다. 이 일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므로 현재로서는 철처하게 조사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자장(蕭子章)은 단지 이절(李楶)의 명의로 돈을 빌렸을 뿐이고 이미 반환했으므로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손모(孫某)는 모친이 살아 있는데도 몰래 전지를 저당잡혔으므로, 이 또한
“속이고 기만하는 처벌 조문”에 따라 장형100대에 처해야 한다.19)유순(劉 順)은 중개인이므로 같은 죄에 처해야 한다.
비록 범행이 은사(恩赦) 이전이라 하더라도 여정부(黎定夫) 등은 사기로 재산을 취득했다. 또 비유(卑幼)를 꼬드겨, 다른 집의 재산을 잠식하고 다른 집의 자제에게 해를 주었으므로, 어찌 약간의 형벌이라도 가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담당부서에서는 진술서를 갖추어 지부(知府)에 보고해서 시행하도 록 하라. 소자장(蕭子章)은 석방하고 나머지는 각각 구류시켜 지시를 기다리 도록 하라.
호혼문(권8-31) 가정교사
20)가 빼앗은 재물을 강제적으로 돌 려주다.(監還塾賓攘取財物)
曹頣受恩於張僉判, 卽非一日. 今乃乘其夫婦踵逝, 孤幼可欺, 隨行錢物, 悉 從而奪之. 一死一生, 情其可見, 況張僉判之家生理素窘, 旅殯未歸, 未卜歸藏
18) 鬻擧는 뇌물을 사용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거나 혹은 추천장이나 보증서 등 을 받는 것을 지칭한다.『宋史』卷156, 選擧志에“(淳祐)九年, 以臣僚言, 士子又 有免解僞冒入試者, 或父兄沒而竊代其名, 或同族物故而塡其籍, 於是令自本貫保明 給據, 類其姓名, 先申禮部, 各州揭以示衆, 犯者許告捉, 依鬻拳法治罪”라고 되어 있다.
19) 『唐律疏議』卷12, 戶婚에 “諸同居卑幼, 私輒用財者, 十匹笞十, 十匹加一等, 罪止杖一百”이라 되어 있다.
20) “塾賓”; 館客 등과 동일하게 가정교사를 지칭한다. 과거제도가 정착함에 따라 유력자가 개인적으로 또는 동족을 위해 가정교사를 두었다.
8-31 계보도
장첨판 처
유 아 재산갈취
조 이 가정교사 之所, 累然諸孤, 誰其依怙, 行道之人, 罔不悽愴, 況於數十年相與之塾賓乎. 士 行至此, 掃地盡矣. 且監還所認錢五百九十五貫, 衣物九號, 交還張宅收領. 但 張僉判夫婦之殯, 皆未有所歸, 自合追還曹頣之錢, 責付其家, 先爲營葬之計.
二孤不能任大事之責, 非得其本族尊長與夫親故中疇昔尙義之士, 爲之主盟, 何以克濟. 王宗敎誼氣素高, 鄕曲起敬久矣, 聞此當能出力, 爲之扶持. 牒請宗 敎, 亟爲圖之.
조이(曹頣)가 장첨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지금 그 부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어린 고아들이 사기당하기 쉬운 것을 이용해 가지고 있던 금전과 물품을 모두 빼앗았다. 생사의 길을 달리할 때 비로소 사람의 진정한 정을 알 수 있는 법이다.21)하물며 장첨판 집안의 생활은 평 소 곤궁했으며, 객사한 유골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묻힐 곳22)조차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데, 여러 고아들은 누구를 의지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나가 는 사람들조차도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물며 수십 년간 서로 함께 한 가정교사라면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대부의 행위가 여기까지 이르 렀다면, 사대부의 행실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조이(曹頣)가 빼앗다고 인정한 전(錢) 595관과 의복 9점 등을 강제 적으로 반환시키고, 장씨댁에 인도한다. 다만 장첨판 부부의 유해(棺)는 아직 까지 묻힐 곳이 없으므로, 조이(曹頣)로부터 돈을 돌려받아 장씨 집에 지불 하여 먼저 장례부터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두 명의 고아가 장례를 행할 수 없으므로, 일족 중의 존장(尊長)과 친구 중에서 옛 의리를 숭상하는 선비에 게 이를 맡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왕종교(王宗敎)는 평소부터 의(義)로운 마음이 높아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존경하고 있다. 이 일을 그가 듣는다면
21) 출처는『史記』汲鄭傳.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다.
22) “未卜歸藏之所”; 묘소를 가리킨다.
반드시 힘을 다해 그들을 도와줄 것이다. 왕종교(王宗敎)에게 공문을 보내어 요청하여 조속히 조치하도록 하라.
호혼문(권8-32) 숙부가 어린 조카의 재산을 집어삼키려고 하 다 (叔父謀呑倂幼姪財産)
호석벽(胡石壁) 李文孜蕞爾童稚, 怙恃俱亡, 行道之人, 所共憐憫. 李細二十三爲其叔父, 非 特略無矜䘏之心, 又且肆其呑噬之志, 以己之子爲兄之子, 據其田業,毁其室廬, 服食器用之資, 雞豚狗之畜, 毫髮絲粟, 莫不奄而有之. 遂使兄嫂之喪, 暴露不 得葬, 孤遺之姪, 逃遁而無所歸. 其滅絶天理, 亦甚矣. 縱使其子果是兄嫂生前 所養, 則在法, 所養子孫破蕩家産, 不能侍養, 實有顯過, 官司審驗得實, 卽聽遣 還. 今其不孝不友如此, 其過豈止於破蕩家産與不侍養而已, 在官司亦當斷之 以義, 遣逐歸宗. 況初來旣無本屬申牒除附之可憑, 而官司勘驗其父子前後之 詞, 反覆不一. 又有如主簿之所申者, 上則罔冒官司, 下則欺虐孤幼, 其罪已不 可逃, 而又敢恃其强悍, 結集仇黨, 恐喝於主簿體究之時, 刼奪於廵檢抱收之後, 捍拒於弓手追捕之際, 出租賦, 奉期約之民, 當如是乎. 若不痛懲, 何以詰暴. 準 勑, 諸身死有財産者, 男女孤幼, 廂耆隣人不申官抄籍者, 杖八十. 因致侵欺規 隱者, 加二等. 廂隣不申, 尙且如此, 況叔姪乎. 因致侵欺, 尙且如此, 況呑幷乎.
又勑, 諸路州縣官而咆哱凌忍者, 杖一百. 凌忍尙且如此, 況奪囚乎. 又律, 諸鬪 以兵刃斫射人, 不着者杖一百. 斫射平人, 尙且如此, 況拒州縣所使者乎. 合是 數罪, 委難末減. 但子聽於父者也, 李少二十一豈知子從父令之爲非孝.原情定 罪,李細二十三爲重,李少二十一爲輕,李細二十三決脊杖十五, 編管五百里, 李 少二十一勘杖一百, 押歸本生父家, 仍枷項, 監還所奪去李文孜財物契書等. 李 文孜年齒尙幼, 若使歸鄕, 必不能自立於羣兇之中, 而劉宗漢又是外人, 亦難責 以託孤之任, 此事頗費區處. 當職昨喚李文孜至案前, 問其家事, 應對粗有倫敍, 雖曰有以授之, 然亦見其胸中非頑冥弗靈者, 合送府學, 委請一老成士友, 俾之 隨分敎導, 倂視其衣服飮食, 加意以長育之. 其一戶産業, 並從官司檢校,逐年租 課, 府學錢糧,官與之抱榷, 以充束脩服食之費, 有餘則附籍收管, 侯成丁日給 還.
이문자(李文孜)는 어린아이로, 의지할 부모23)는 모두 사망하여, 지나가는 23) “怙恃”; 출처는『詩經』小雅, 蓼莪, “無父何怙, 無母何恃”이다.
8-32 계보도
이소이십일 이세이십삼 이문자
死
고 아 재산침탈
사람들도 모두 가엾게 여긴다. 이세이십삼(李細二十三)은 그 숙부인데도 긍 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산을 집어삼키려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아들을 형의 아들로 삼아 전지(田地)를 점거하여 자신의 것 으로 삼고, 그 가옥을 부수고, 의복이나 식기·가구잡화· 닭·돼지·개 등의 가 축 나아가 실오라기 하나, 쌀 한 톨까지 가져가버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 게 되었다. 그래서 형과 형수의 유해는 방치된 채 장례를 치를 수 없었고, 고 아로 남겨진 조카는 쫓겨나서 돌아갈 곳도 없었다.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행위가 이처럼 심하도다!
가령 그의 아들이 정말로 형수가 생전에 양자로 삼았다 하더라도 법률 조 문에는 “양자로 들인 자손이 가산을 탕진하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였을 때 여기에 실제로 명백한 과오가 있어 관청에서 조사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가로 쫓아보낼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지금 그의 불효와 불우(不友)가 이 와 같고, 그의 잘못이 가산을 탕진시키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만이 아니 므로, 관사는 당연히 의(義)로써 단죄하고 추궁하여 본가로 돌려보내야 한다.
하물며 처음부터 일족이 관청에 제부(除附)24)한 증거가 없고, 관사가 그 부 자의 전후 소송장을 조사해 보니, 매번 소송장의 내용이 다르다. 또 주부(主 簿)가 보고해 온 것에 의하면 위로는 관사를 기만하고, 아래로는 어린 고아 를 속이며 학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 죄는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데도, 감히 힘을 믿고 도당을 결집하여 주부가 조사할 때 큰소리치고, 순검(巡檢)25)이 잡아들인 후에 빠져 나가고, 궁수(弓手)26)가 체포하려 하자 이에 저항했다.
24) “除附”는 한쪽의 호적에서 말소하여, 다른 한쪽의 호적에 등록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으로, “호적변경” 혹은 “호적변경절차”의 의미이다.
25) “巡檢”은 警察이나 消防, 練兵, 밀매 단속 등을 행하는 軍職名이며, 路·府·州·
縣·鎭·寨·驛 등에 배치되었다.
26) 弓手는 差役 중의 하나이며, 縣尉의 소속되어 주로 죄인을 체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세를 납부하고 법률을 지켜야 할 백성이 어럴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엄중 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어찌 이런 흉포함을 막을 수 있겠는가?
칙(勅)에 의하면 “무릇 사망했지만 재산을 남긴 자 중에서, 아들딸이 고아 가 되었을 경우, 상기(廂耆)나 이웃사람(隣人)이 관청에 신고해서 초적(抄 籍)27)하지 않으면 장형80대에 처한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재산을 편취하거 나 은닉하려 한다면 2등(等)을 가중하여 처벌한다”고 되어있다. 상기(廂耆) 나 이웃사람(隣人)이 신고하지 않아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숙부와 조카라면 두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편취하거나 은닉해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집어삼 키려 했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또 칙에 “무릇 로(路)·주(州)·현(縣)의 관서에서 고함을 지르고 모욕한 경 우에는 장형100대에 처한다”28)라고 되어있다. 관청에서 소리치고 모욕해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죄수를 탈취하였다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또 율(律) 에 “무릇 싸우다가 병장기의 날로 사람을 쳤거나 쏘았는데 맞지 않은 경우에 는 장형100대에 처한다29)”라고 되어있다. 일반민을 찌르거나 쏘더라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주와 현에서 보낸 관리에게 무기를 지니고 대항했다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죄를 지었으므로 형벌을 경감해 주기는 어렵다. 그러 나 아들은 부모의 말을 듣게 마련이다. (이 사건에서) 이소이십일(李小二十 一)은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 는가? 일의 정황을 보고 죄를 판결하건대, 이세이십삼(李細二十三)은 그 죄 가 무겁고, 이소이십일(李小二十一)은 그 죄가 가볍다. 따라서 이세이십삼(李 細二十三)은 척장(脊杖)15대에 처하고, 500리 밖으로 편관(編管)시킨다. 이소 이십일(李小二十一)은 장형100대에 처하고 강제로 생부의 집으로 돌려보내 고 또한 목에 칼(首枷)을 채우도록 하라. 빼앗은 이문자(李文孜)의 재물과 계 약서 등은 감독하여 돌려보낸다.
이문자(李文孜)는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만약 귀향시키면, 필시 나쁜 사람 들 사이에서 자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종한(劉宗漢)은 한 집안 사람 이 아니므로(外人) 고아를 떠맡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 일은 그 처리에 있
27) “抄籍”; 抄剳籍沒의 약칭.
28)『宋刑統』卷21, 鬪訟律에 “准刑部格, 州縣職在監臨, 百姓尤資禮奉, 其有謀殺及 毆, 並咆悖陵忽者, 先決杖一百”라고 되어 있다.
29) 『唐律疏議』卷21, 鬪訟3에 “諸鬪以兵刃斫射人不著者, 杖一百”라고 되어 있다.
어 자못 어려움이 있다.
본관은 전에 이문자(李文孜)를 불러내어 그 집안 일을 물었는데, 그 응대 함에 있어서는 대체로 조리가 있었다. 비록 답변하는 방법을 누가 가르켜 주 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보았 기 때문에, 부학(府學)에 보내 학식있는 사인에게 의탁하여, 천분(天分)에 맞 게 교육시키고, 아울러 의복이나 음식도 챙겨주고 성의껏 키우도록 해야 한 다. 이문자(李文孜) 일가의 부동산은 모두 관사가 검교(檢校)하고, 매년의 조 과(租課)30), 부학(府學)의 전량(錢糧)은 관에서 이를 조달하고, 이로써 학비 나 의복의 비용으로 충당한다. 남는 것이 있다면 장부에 기입하여 관리하고, 성인이 되면 되돌려 주도록 한다.
여승분(女承分) 31)
호혼문(권8-33) 고아에게 남겨진 전산(田産)을 처분하다 (處 分孤遺田産)
범서당(范西堂)
照對, 解汝霖因虜入冠, 夫婦俱亡, 全家被虜, 越及數年, 始有幼女七姑·女孫 秀娘回歸. 其桎解懃撫於其家, 主管生業, 可謂能厚睦族之義, 任恤孤之責. 余 榮祖連年入狀, 告論戶絶, 謂是解懃掩有入己, 乞行籍沒歸官. 前政已略施行, 抱納租課, 使之入錢, 數踰千緡. 繼而七姑·秀娘回歸, 乃與免行抱籍, 仍付解懃 主管. 而余榮祖至今猶未絶詞, 當元州府徒欲抱收花利, 其後解懃又欲視爲己 業, 區處失當, 不能絶詞, 展轉十年, 適滋吏姦. 旣有二女, 法當承分, 官司抱錢, 已犯不韙, 責付族人, 又因爲利, 詞訴薦至, 此實有以起之. 汝霖家業, 歲收主分 租穀大弱不下二百石, 不爲不厚, 解懃以己任之, 旣無收支簿書, 又不主盟姻議, 惟立繼絶之子一人, 曰伴哥, 以承汝霖之業. 雖云絶家尊長, 許令命繼, 異姓非 三歲以下, 亦姑勿論. 然挾一幼子, 而占據乃叔田産, 二女在室, 各無處分, 安能 免議. 解汝霖旣無親子, 合作戶絶施行. 准法, 諸已絶之家而立繼絶子孫, 謂近 親尊長命繼者. 於絶家財産, 若只有在室諸女, 卽以全戶四分之一給之, 若又有 歸宗諸女, 給五分之一. 其在室幷歸宗女卽以所得四分, 依戶絶法給之. 止有歸 30) 이 경우에는 검교한 부동산으로부터의 임대료, 소작료를 말한다.
31) 女承分은 딸의 상속분을 지칭하는 말이다.
8-33 계보도
칠 고 해녀림
수 랑 해 근 반가(후사)
재산침탈
宗諸女, 依戶絶法給外, 卽以其餘減半給之, 餘沒官. 止有出嫁諸女者, 卽以全 戶三分爲率, 以二分與出嫁女均給, 一分沒官. 若無在室歸宗出嫁諸女, 以全戶 三分給一, 竝至三千貫止, 卽及二萬貫, 增給二千貫. 今解汝霖只有幼女孫女, 竝係在室, 照戶絶法均分, 各不在三千貫以上. 半哥繼絶, 合給四分之一, 其餘 三分, 均與二室女爲業. 七姑雖本姓鄭, 汝霖生前自行收養, 與親女同. 今年二 十有五, 未諧親議, 儻更二十五年而後嫁, 豈無墓木已拱之歎. 乃兄撫存, 其意 安在. 況秀娘往年被擄, 遺棄九場, 襄陽將官王璋收拾歸家, 撫養如己子, 更歷 八年, 解懃始因榮祖之訟, 無可憑藉, 前往理取, 原其本意, 取之不過爲占田計 耳. 儻榮祖之訟下興, 汝霖之業可據, 秀娘必聽爲襄陽之人, 俾正丘首, 未豈暇 謀. 拖照回文, 秀娘元在王氏之家, 係存留爲次子婦, 此意本善. 解懃當官責領, 亦謂權暫取回, 承認田産, 不敢有負親盟. 今留秀娘於家, 誠可以爲占田之策, 而王氏親約, 乃不復顧. 且當時在難, 非遇王璋, 久入鬼錄, 旣得生還, 乃敢忘 義, 九原可作, 度祖父之意, 決不肯違. 昔王璋欲爲兒婦, 初非圖其厚資, 今秀娘 旣承女分, 正宜因以報德. 解懃無知, 自謀甚厚, 而薄以處人, 終訟之招, 不爲無 自. 當廳將汝霖田産照條均分, 置關三本, 一付伴哥, 聽從解懃之命, 使之繼絶, 一付七姑, 召人議姻, 一付秀娘, 收執爲業. 牒縣尉打量, 均作四分申上, 以憑抛 拈. 栘文襄陽, 喚上王璋, 聽照元約, 取回成婚. 戶絶之家, 自有專條, 官司處置, 一從條令, 非惟絶訟, 死者可尉舐犢之念, 生者可遠兼幷之嫌, 縱有健訟, 奚所 容㖨. 自度無慊, 於榮祖乎何畏, 牓示市曹. 或願議姻, 聽自入狀, 切待審度, 以 憑施行. 又據所供族圖, 解懃亦且無後, 僅有一女, 年踰六十, 此日迫崦嵫, 鍾嗚 漏盡之時也. 孶孶罔利, 不知自反, 能欺於人, 而不能欺於天, 能計於一時, 而不 能計於他日, 誠恐後之視今, 猶今之視昔, 倂書以戒之. 汝霖一分田租, 倂行樁 管, 存爲二女出適之用, 餘人並放. 申州照會施行.
조사해 보니, 해여림(解汝霖)의 경우에 있어서, 금나라 군대가 침입할 때 에(因虜入冠)32)부부가 모두 사망하고, 가족 모두가 포로가 되어, 수 년 후에
겨우 어린 딸 칠고(七姑)와 손녀 수낭(秀娘)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여림의 조카 해근(解懃)은 자신의 집에서 그 아이들을 돌봐주고, 가업(家業)을 주관 한 것은 일족의 우의를 두텁게 하고 고아를 돌보는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여영조(余榮祖)는 매년 소송을 일으켜, 해여림의 집은 호절(戶絶)이라고 주장하면서 “해근은 해여림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 합니다”고 하면 서, 그 재산을 몰관하기를 원했다. 전임 지현이 이미 조치를 취하면서, 소작 료를 몰수하여, 그것을 전(錢)으로 바꾸어 관청에 납입한 액수가 1000민(緡) 이 넘었다. 그 후 칠고와 수낭이 돌아오자 재산몰수를 면제하고 원래대로 해 근에게 맡겨 이를 주관하도록 했다. 그런데 여영조는 지금도 아직 소송을 멈 추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전 주부(州府)는 오로지 이익(花利)을 올리려고 만 했고, 그 후 해근도 자신의 재산으로 삼으려하고 있습니다. 처리 방법도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송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고 하면서 십 년간에 걸쳐 소송을 하게 되니, 서리의 악행만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두 명의 딸이 있는 이상, 법률상으로는 당연히 그 몫을 받아야 한다.
관청에서 돈을 취한 것은 이미 옳지 않은 일이고, 족인(族人)인 해근에게 맡 긴 것은 그 이익을 준 것으로 소송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소송이 일 어난 것은 확실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해여림 집안의 전지에서 1년에 걷을 수 있는 소작료는 대략 200석 이상이 므로 적은 액수라고는 할 수 없다. 해근은 직접 그것을 주관하면서, 출납 장 부도 만들지 않고, (칠고의) 결혼도 진행하지 않고, 그저 반가(伴哥)라는 계 절자(繼絶子)를 한 명 세워, 해여림의 재산을 승계하려 했다. 호절 집안의 존 장은 이성(異姓) 3세이하인 자를 명계(命繼)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지만, 그런데 유아 한 명을 세워 그 숙부의 재산을 점거하고, 2명의 재실녀(在室 女)33)에게는 아무런 몫도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문제가 없을 수 있단 말인 가?
해녀림은 친자가 없는 이상 당연히 호절가로 간주해서 (그에 적절한 법을) 시행해야 한다. 법률 규정에 의하면 “이미 후사가 끊긴 집에서 그것을 계승 하는 자손--근친의 존장이 명계한 경우를 지칭한다--을 세우는 경우, 호절 32) 因虜入冠는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의 군대가 침입하여 온 것을 이르는 말이
다.
33) 在室女는 미혼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집안의 재산에 관해서, 만일 단지 재실녀만 있다면 가산 전체의 4분의 1을 계절자에게 주는데, 만일 그 외에 귀종녀가 있다면, (계절자에게) 5분의 1을 준다. 재실녀와 귀종녀에게는 전체의 5분의 4를 호절법 규정에 의해 분배한 다. 귀종녀만 있다면 호절법에 의해 분배하는 외에, 그 나머지의 반을 줄여 계절자에게 주고, 나머지는 관에서 몰수한다. 출가한 딸만 있는 경우, 가산 전체를 삼등분해서 3분의 2를 출가한 딸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3분의 1은 관에서 몰수한다. 만일 재실녀와 귀종녀, 출가한 딸이 없다면, 가산 전체의 3 분의 1을 계절자에게 준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분배받는 몫이 3천관을 상한 선으로 하고, 만약 (전 재산이) 2만관이 넘을 경우에는 2천관을 더 보태준 다34)”라고 되어 있다.
지금 해녀림에게는 어린 딸과 손녀만 있을 뿐이고, 모두 미혼이다. 호절법 에 따라 균등히 분할하면 각각 3천관이 넘지는 않는다. 반가는 계절자이므로 4분의 1을 분배해야만 하고. 나머지 4분의 3은 균등하게 2명의 재실녀에게 주어 그들의 재산으로 삼게 한다. 칠고는 원래 성은 정씨(鄭氏)이지만 해녀 림이 생전에 양녀로 삼아 키웠으므로 친딸과 다름없다. 현재 나이는 25살이 지만 아직 혼담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만일 25세를 넘어 시집을 가게 된다 면 “묘터에 있는 나무가 너무 성장했구나”라고 하는 탄식35)이 있을 것이다.
그 형(해근)이 (칠고를) 양육한다고 하지만, 그 의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물며 수낭은 이전에 포로가 되어 멀고도 먼 변경(九埸)에 버려진 것을, 양 양(襄陽)의 장관 왕장(王璋)이 집에 데리고 와서 친자식처럼 정성스럽게 키 운 것이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 해근은 여영조가 소송해 오자 이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양양에 가서 다투고 데려온 것이다. 그의 의도를 추 측해 보면, 수랑을 데리고 온 것은 토지를 점거할 계략에 불과하다. 만일 여 영조가 소송하지 않고 (해근이) 해녀림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수낭 은 반드시 양양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또 그곳을 고향으로 생각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해근은 계략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양양의 왕장으로부터의) 답신을 참조해 보니, 수낭은 원래 왕씨 집에 있 으면서,차남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 의도는 본래 좋은 것이었다. 해근은 34) 『宋史』卷200, 刑法志에 “戶令, 戶絶之家, 許給其家三千貫及二萬貫者, 取旨,
帝曰, 其家不幸而絶, 及二萬貫廼取之, 是有心利其財也”라 되어있다.
35) “墓木已拱之歎”; 묘터에 있는 나무가 이처럼 한아름이 될 정도로 성장했구나 라고 하는 탄식이다. 출전은『左傳』僖公32년의 “爾何知, 中壽, 爾墓之木拱矣”
이다.
(양양의) 관청에서 수낭을 책임진다는 뜻을 표하며 이르기를 “잠깐 동안 데 리고 와서 전산(田産)의 소유권을 승인받게 되면, 결혼 약속을 어기지는 않 을 것입니다.”고 했다. 지금 수낭을 집에 데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계략 때문이고, 왕씨와의 혼담 약속은 이제는 생각지도 않는 다.
예전에 수랑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 당시, 왕장과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 라면 오래 전에 이미 사망했을 지도 모른다. 살아서 돌아왔으면서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 조부가 살아 돌아와서 조부의 뜻을 물어보더라도 결코 혼인 약속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예전 왕장이 며느리로 삼으려고 한 것은 그녀가 재산이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재 수낭이 손녀로서의 몫 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것으로써 왕씨의 은덕에 보답해야 한다.
해근은 무지하고 자신의 것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박정하다. 이렇게 끊임없는 소송36)이 발생한 것도 스스로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본관은 해여림의 전산(田産)을 법률에 따라 균등히 분할하고, 가산분할서 (關書) 3통을 작성하여, 한 통은 반가에게 급부하여 해근의 명령대로 그를 후사로 삼는 것을 허락한다. 또 한 통은 칠고에게 급부하여 사람을 불러 혼 담을 의논하게 한다. 나머지 한 통은 수낭에게 급부하여 재산의 증거문서로 삼게 한다. 현위에게 공문을 보내어 재산을 조사하여 균등히 4등분하고 보고 하게 하고, 이에 추첨에 하도록 한다. 공문을 양양으로 보내고 왕장을 소환 해서 원래의 약속에 따라 수낭을 왕장의 집에 되돌려 보내 혼인하게 한다.
호절 집안에 대해서는 당연히 해당 법률조문이 있다. 관청의 조치가 오로 지 법률조문에 합치된다면, 소송은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죽은 자(해녀림)는 자기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에 감사할 것이고, 살아있는 자는 토지 겸병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비록 소송꾼들이 있어도 이에 끼어들 지는 못할 것이다. 또 (만약 해근이) 여영조에게 잘못이 없다면 저잣거리에 (판결 에 대한) 방문을 붙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혼인을 의논하 기를 원한다면 직접 혼인신고서를 제출하고 심의되기를 기다려 거기에 따라 행하는 것을 허락한다.
또 진술한 일족의 계보도에 의하면, 해근은 역시 후사가 없고 그저 딸만 한명 있을 뿐이다. 해근의 나이는 60이 넘었으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 36) “終訟”; 終訟에서 終은 끝까지 가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소송을 의
미한다.
다.37)그런데도 악착같이 이익을 구해서 반성할 줄 모르고,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늘을 속일 수는 없고, 잠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먼 앞날까지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미래에 현재를 보는 것 이, 현재 과거를 돌아보는 것처럼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울러 기록하여 본보기로 삼도록 한다.
해여림 몫의 전조(田租)는 일괄해서 보관하고, 칠고와 수랑이 시집갈 때의 비용으로 남겨둔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석방하라. 주(州)에 보고하고 조 회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유촉(遺囑)
호혼문(권8-34) 유언을 위조하여, 장례를 방해하다 (假僞遠囑 以伐喪).
채구헌(蔡久軒) 范瑜放蕩無藉, 乘范大佑神朝奉不祿, 妄起覬覦, 旣敎唆族人, 使於范朝奉垂 絶之際, 登門伐喪, 騙去錢會, 今又敢恃其破落, 自行詐賴. 鞠之囚圄, 理屈辭 窮, 卽無所謂遺囑, 特鑿空誣賴, 爲騙取錢物之地耳. 國家大臣薧, 肉未寒, 而不 肖之族已羣起, 而幷呑之, 此風俗之大惡, 人情所同惡. 不行重懲, 無以戒後. 范 瑜勘杖一百, 編管鄰州, 所有范朝奉垂絶之際騙去錢物人, 牒府第具姓名申來, 以憑追究. 院司引斷施行間, 續據國子進士范渙等連名箚狀陳告, 及范承議箚 狀, 乞從末減, 范瑜本合照已判勘杖編管, 以明堂赦恩適至, 而范族尊長及小范 佑神承議合辭有請, 姑從輕, 送州學, 決竹篦二十, 聽讀三月, 放. 餘照前判.
범유(范瑜)는 방탕무뢰한 자로서, 범대우신조봉(范大佑神朝奉)38)의 죽음 을 이용하여 망령되게 탐욕의 마음을 내어, 족인(族人)을 교사하면서 범조봉 이 임종(垂絶)할 때에, 그 집에 들어가 장례 치르는 것을 방해하고 전(錢)과 37) “日迫崦嵫, 鐘鳴漏盡之時”. 태양이 진다고 불리우는 산의 이름이 崦嵫이고, 밤에 휴식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뭀시계가 다 하는 것이 鐘鳴漏盡이다. 말하 자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비유하고 있다.
38) 范大는 小范과 대비되어 연령의 大小를 말한다. 佑神은 提擧佑神觀使를 말한 다. 佑神觀은 북송시대 개봉에 있던 宮觀名이지만, 남송시대가 되면 명목적인 祠祿官으로 종종 사용된다. 朝奉은 문관기록관인 조봉랑(정7품)이나 조봉대부 (6품)를 지칭한다.
범 유 족 인
범조봉 死 재산침탈
8-34 계보도
회자(會子)를 편취했으며, 지금 또 감히 난봉꾼 기질을 발휘하여 직접 무고 를 하려고 한다. 그를 감옥에 가두어 심문해 보니, 논리가 맞지 않고 말이 궁 색하며, 이른바 유언으로 남겨진 말도 아니고 다만 억지 이유를 대어 속이려 고 기만한 것인데, 그것은 다만 재산(錢物)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국가의 대 신이 죽어 주검이 식지도 않았는데 불초한 족인(族人)이 떼를 지어 일어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이것은 풍속에서도 가장 사악한 짓이며, 인정(人情)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이를 엄중하게 벌하지 않으면, 후세에도 교훈으로 삼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범유를 장형100 대에 처하고 인근 주로 편관시키고, 범조봉이 임종할 때에 재산을 편취해 간 사람은 모두 부(府)에 공문을 보내어 성명을 보고하도록 하여, 이것을 토대 로 소환하여 추궁하도록 한다. 원사(院司)39)가 소환하여 단죄를 시행하려고 할 때, 국자감진사(國子進士) 범환(范渙)등이 연명하여 올린 서장(書狀)과 범 승의(范承議)40)의 서장(書狀)을 근거로 하여 형벌의 감면을 요청해 왔다.
범유는 본래 이미 판결된 바에 따라 장형을 실시한 후 편관시켜야 하지만, 마침 명당의 은사(赦恩)41)를 만났으며, 범씨 일가의 존장과 소범우신승의(小 范佑神承議)도 함께 요청하고 있으므로, 우선 죄는 가벼운 쪽을 따라, 주학 (州學)으로 보내어 죽비 20대에 처하고 3개월 동안 면학하게 한 후, 석방한 다. 나머지는 이전에 판결한 바에 따른다.
호혼문(권8-35) 딸도 자기의 몫을 상속받아야 한다.(女合承 分)
39) 院司는 司理院의 府獄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0) 承議郞은 종7품이지만 朝官 최상위의 기록관이다.
41) 남송대에는 3년에 1번 궁중의 명당에서 천지신명에 대해 제사지내는 의식이 행해졌는데, 이 때에 恩赦가 내려진 것을 말한다.
정응진
정응진 사후 재산독식 시도 정효순 정효신 정효선(양자) 8-35 계보도
범서당(范西堂)
鄭應辰無嗣, 親生二女, 曰孝純·孝德, 過房一子曰孝先. 家有田三千畝, 庫一 十座, 非不厚也. 應辰存日, 二女各遺囑田一百三十畝·庫一座與之, 殊不爲過.
應辰死後, 養子乃欲掩有, 觀其所供, 無非刻薄之論. 假使父母無遺囑, 亦自當 得, 若以他郡均分之例處之, 二女與養子各合受其半. 今只人與田百三十畝, 猶 且固執, 可謂不義之甚, 九原有知, 寧無憾乎. 縣丞所斷, 不計其家業之厚薄·分 受之多寡, 乃徒較其遺囑之是非, 義利之去就, 却不思身爲養子, 承受田畝三千, 而所撥不過二百六十, 遺囑之是非何必辯也. 二女乃其父之所自出, 祖業悉不 得以霑其潤, 而專以付之過房之人, 義利之去就, 何所擇也. 捨非而從是, 此爲 可以予, 可以無予者. 設捨利而從義, 此爲可以取, 可以無取者. 設今孝先之予, 未至傷惠, 二女之取, 未至傷廉, 斷然行之, 一見可決. 鄭孝先勘杖一百, 釘錮, 照元遺囑, 各撥田一百三十畝, 日下管業.
정응진(鄭應辰)은 후사가 없이 두 딸을 낳았는데, 효순(孝純)과 효덕(孝德) 이고, 1명의 양자42)가 있는데 효선(孝先)이라 한다. 이 집은 3천무(畝)43)의 전(田)과 창고 10좌(座)가 있어서 매우 부유하였다. 정응진이 살아 있을 때 두 딸에게 유언으로 전(田) 130무와 창고 1좌를 주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많이 분배되었다고 할 수 없다. 정응진이 사망 한 후에, 양자인 효 선은 모든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하였다. 그가 진술한 바를 보면 매우 인정이 없고 각박하다.
가령 부모의 유언이 없더라도 (딸들이 재산을) 분배받는 것은 당연한 일 이고, 만약 다른 주(郡, 즉 州)에서 균분한 예로써 이 안건을 처리한다면, 두
42) “過房子”; 同宗 중에서 소목상당한 자를 양자로 삼는 것을 말한다.
43) “畝”; 송대의 1尺은 약 30센티미터로 사방 5척을 1步라 하고, 240步를 1畝라 하며, 100畝를 1頃이라 한다. 角은 4분의 1畝 즉 60步이다.
딸과 양자는 각각 그 반을 받아야 한다. 지금 단지 한사람에게 전(田) 130무 를 주라고 했을 뿐인데도 그것조차 주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운다면 그것은 심히 불의(不義)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또 돌아가신 부친이 이것을 안다면 얼마나 유감스럽게 생각하겠는가?
현승이 판결한 것에 의하면, 그 집 재산의 많고 적음과 상속분의 많고 적 음은 계산하지 않고, 다만 그 유언의 진위여부와 의(義)와 이(利)의 거취만을 문제로 삼고 있으며, 도리어 양자인데도 전(田) 3000무를 상속받게 하려고 하고, (두 딸에게는) 불과 260무만을 떼어주면 된다는 것을 고려하지도 않는 다면, 유언의 진위여부를 가려서 무엇하겠는가? 두 딸은 아버지의 친자식임 에도 불구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재산의 은혜를 하나도 입지 못하고, 오히 려 재산을 양자로 들어온 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면, 의(義)와 이(利)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는가? 그른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따른다면 그것은 주어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다. 만약 이(利)를 버리고 의(義)에 따른다면 그것은 취 해도 좋고, 취하지 않아도 좋은 경우이다. 지금 정효선이 두 딸에게 주는 것 은 그의 이익에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며, 두 딸이 재산을 분배받는 것이 염 치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단연히 그렇게 하여 결말을 짓는 편이 좋다. 정효선 은 장형100대에 처한 후, 칼을 씌워 못으로 고정시키고(釘錮)44)원래의 유언 에 따라 각각 130무를 분배하도록 하고, 즉시 인도하여 관리하도록 하라.
호혼문(권8-36) 조카들이 (숙부가) 유언한 전(錢)을 찾아달라 고 소송하다.(諸姪論索遺囑錢).
범서당(范西堂) 柳璟兄弟四人, 久矣分析, 各占分籍, 素無詞訴. 三兄俱亡, 有姪凡四, 璟死 之日, 家業獨厚, 生子獨幼, 遂以四姪貧乏, 各助十千, 書之於紙, 歲以爲常. 今 纔五七年, 而璟之妻子乃渝元約, 諸姪陳論, 意欲取索, 就其族長索到批貼, 係 璟親書, 律以干照, 接續支付, 似可無辭. 第探其本情, 實有深意. 昔人有子幼而 婿壯, 臨終之日, 屬其家業, 婿居其子之二, 旣而渝盟, 有詞到官. 先正乖崖以其 善保身後之子, 而遂識乃翁之智, 從而反之, 九原之志, 卒獲以伸. 柳璟之死, 子 在襁褓, 知諸姪非可任託孤之責, 而以利誘之. 觀其遺詞, 初念生事之薄, 而助 之錢, 終以孤兒寡婦之無所託, 而致其懇, 且言獲免侵欺, 暝目無憾. 執筆至此, 夫豈得已. 此與古人分付家業之事, 意實一同, 其所措慮, 可謂甚遠. 諸姪不體 44) 釘錮란 칼(枷)을 채워서 못으로 고정하는 것을 말한다.
유 경 처
아 들 조 카 조 카 조 카 조 카
유경 사후 소송 제기 8-36 계보도
厥叔之本意, 歷年旣遠, 執券索償, 若果固有. 不知璟之子受年日以多, 璟之妻 更事日以熟, 門戶之託, 旣有所恃, 則以利啗人, 無嫌諾責. 合當倣乖崖之意行 之, 元約毁抹, 自今以始, 各照受分爲業, 如有侵欺, 當行懲斷.
유경(柳璟)의 형제 4명은 가산을 분할하여 각자 호적을 달리한 지가 오래 되었으며, 지금까지 소송은 없었다. 3명의 형은 모두 사망하였고 (유경에게 는) 조카가 4명 있었다. 유경이 사망할 즈음에, 유경 집의 재산만이 많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아직 어렸다. 당시 4명의 조카가 가난했기 때문에 각 각 10관을 주고 그것을 종이에다 글로 남겨 해마다 이와 같이 하도록 하였다 (歲以爲常). 이제 5-7년밖에 지니지 않았는데 유경의 처자가 원래의 약속을 어기자, 조카들이 소송을 하여 돈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곧바로 유씨의 족 장에게 문서(批貼)를 찾아서 가지고 오게 해 보니 유경의 직접 작성한 것으 로, 이 증거문서를 토대로 판결하면 계속해서 금전을 지급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경의) 본 뜻을 헤아려 보면 거기에는 실로 깊은 의 도가 있다.
예전에 어떤 사람에게 어린 아들과 장년이 된 사위가 있었다. 그가 임종할 때 사위에게 집의 재산(家業)을 맡기면서 사위에게 아들 몫의 2배를 가지도 록 유언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소송이 관청에 접수되 기에 이르렀다. 선현 장괴애(張乖崖)45)는 그러한 조치가 자신이 죽은 후에 사위가 자식을 잘 돌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부친의 지혜로 움을 생각하여, 그 의도에 따라 분배율을 뒤집어 배분함으로써, 마침내 고인 의 의지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유경이 사망하였을 때 아들은 아직 어렸는데, 조카들이 이 어린 고아를 잘 보살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유경은 조카들에게) 이익을 주어 꾀어낸 것이 었다. 유언의 문장을 살펴보니, 처음에는 (조카들이) 생활이 궁핍한 것을 생 45) 張乖崖는 張詠(949-1015)을 지칭하며,『宋史』卷292 張詠傳 참조.
각하여 전(錢)을 원조하도록 적었지만, 말미에는 고아와 과부가 어느 누구에 게도 의탁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또 “재산이 부당하게 빼앗기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고 있다. 유경이 이 렇게까지 썼다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과 (상술한) 옛 사람이 재산을 사위에게 많이 배분한 하였던 상황에서 그 의도 는 완전히 같은 것이며, 그 배려는 매우 깊은 뜻이 있는 것이었다. 조카들은 숙부의 본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그 증거 문서를 가지고 돈 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는 것과 같이 하고 있다. 유경의 아들이 날마다 성장하고, 유경의 아내가 날마다 가사 일 에 대한 경험이 쌓여, 일가를 책임질 수 있을 정도라면 그들에게 이익을 주 어 조카를 잘 돌보도록 배분한 약속은 그대로 지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46) 이 안건은 장괴애의 뜻을 본받아 처리하고, 원해 유경이 조카에게 유언으로 한 약속은 무효로 하고(毁抹)47), 지금부터 각자 자신의 상속분에 따라 분배 된 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도록 한다. 만약 부당하게 침탈한다면 이를 징벌 할 것이다.
별택자(別宅子) 48)
호혼문(권8-37) 증거가 없다 (無證據)
범서당(范西堂) 饒操無子, 養應申以爲子, 儻果有庶出之親子, 不自撫育, 倂母逐去, 以嫁其 僕李三, 非人情也. 今李三之子李五, 謂其母懷孕而出, 以嫁李三, 自陳歸宗, 何 所據而然也. 準法, 諸別宅之子, 其父死而無證據者, 官司不許受理. 李五生於 李三之家, 年踰二十, 父未嘗以爲子, 其無證據也決矣. 李三·饒操之僕也, 二十 年間往來饒操家, 不知其幾,必嚴主僕之分, 欲爲子者果如是乎. 據李五所供, 謂 是生母之出, 母實逐之, 理固有此, 第母死十年之後, 饒操身故, 十年之久, 非一 朝夕, 饒操胡爲一倂棄逐. 初母死而不持母之喪, 今父死而欲分父之業, 夫豈可 46) “無嫌諾責”; 출전은『禮記』表記에 “是故君子與其有諾責也, 寧有已怨”이라 되
어 있다.
47) “毁抹”은 무효의 印을 찍는 것으로, 폐기처분하다는 의미이다.
48) “別宅子”; 부친 및 가족과 호적을 달리하는 아들을 지칭한다.
8-37 계보도
요응신 요 조
이 오 이삼(하복)
양 자
처
요조 친자 주장 行. 越年二十, 明居李三之家, 而陰爲饒操之子, 天下豈有無父之國哉. 夫父子, 天性也, 不可以强合. 縱是其己之所出, 而父不認, 亦無可强之理, 矧爲僞乎.
昔衛太子歸詣北闕, 公車以聞, 是否未可知也, 衆方艱於區處, 京尹雋不疑乃叱 從吏收縛, 謂太子得罪先帝, 亡不卽死, 今來自詣, 是罪人也, 詔獄而竟得其僞.
夫大義所在, 古今不易之理, 家國雖異, 其理則同, 以義斷之, 何所容喙. 綠李五 出沒於族人之家, 往往多有主之者, 若問族長, 必有出而證其實. 大㮣饒操過房 應申, 族多不平, 乘機扺巇, 令得以騁.若果崇篤族義, 其行以公, 當操存日, 何 不俾正父子之名於一時, 絶紛爭之禍於他日. 胡爲操死之後, 遽相扶持, 以圖終 訟, 族義之薄,莫甚於此. 郡縣所斷, 反覆辯證, 如見肺肝. 今之爲政, 非曰知之 艱, 必須行之果也, 及室無訟, 家已用喪, 卒墮族人之姦. 李五勘杖一百, 編管隣 州. 李三本是饒操地客, 押出縣界, 有詞決配.
요조(饒操)는 아들이 없어서 응신(應申)을 양자로 삼았다. 만일 첩이 낳은 친자식이 있는데도 직접 양육하지 않고 어미와 함께 쫓아내어 노복(僕)인 이 삼(李三)에게 시집보냈다면 인정(人情)에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 이삼의 아 들 이오(李五)는 “자신의 모친은 임신한 채로 쫒겨나 이삼에게 시집갔습니 다”고 하면서, 요조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데, 무슨 근거로 이 런 말을 하는 것인가? 법률에 의하면 “무릇 별택자(別宅子)는 그 부친이 사 망하여 증거가 없는 경우에는 관사에서 그 소송을 수리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오는 이삼의 집에서 태어나 나이는 20살이 넘었다. 부친이 아직까지 아들로 삼지도 않은 것은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삼은 요조의 노복이다. 20 년 동안 그는 요조 집에 왕래하고 있었는데, 주복(主僕)의 분(分)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요조가 이오를) 아들로 삼으려 고 했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오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생모가 그 집에서 쫒겨 나온 것은 사실은 정 처(正妻)가 쫓아내었기 때문입니다”고 하고 있는데, 이치상으로는 당연히 이 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처가 사망한 10년 후에 요조도 사망하
였는데, 10년이라는 기간은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과 같은 짧은 시간이 아 니다. 요조는 왜 이 기간 동안 어미와 아들을 내쫒은 것일까? 처음에 요조의 정처가 사망했을 때에는 그녀의 장례도 행하지 않았으며, 지금 부친이 사망 하자 부친의 재산을 취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인 가? 20년이 넘게 이삼의 집에 거주하였으면서도 몰래 요조의 아들이 되려고 하고 있다. 천하에 어찌 아버지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는가? 무릇 아버지 와 아들은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지49)강제로 맺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령 자기의 아들이라도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으면 역시 강요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허위라고 한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옛날 한(漢)나라의 위태자(衛太子)가 북궐(北闕)에 들어오자, 공거(公車)가 이를 보고했지만, 진위(眞僞)를 알수 없어 사람들이 이를 처리하는데 고심하 고 있을 때, 경윤(京尹) 준불의(雋不疑)가 이에 부하들을 꾸짖으며 포박하며 이르기를 “위태자가 선제(先帝)50)에게 죄를 짓고 도망갔으나 곧바로 죽지 않 고, 지금에 와서 스스로 관청에 출두하더라도 이것은 죄인인 것이다.”라고 했다. 감옥에서 심문한 결과51)결국 그것이 허위임을 밝혀냈다. 무릇 대의 (大義)가 존재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이치이고, 가정과 국 가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는 같으니 대의로써 판단하면 어찌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겠는가?
이오가 족인의 집에 드나들기 때문에 어쩌면 (이오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지만, 만약 족장에게 물어 본다면 반드시 출두하여 그 사실을 증명 해 줄 것이다. 대개 요조가 응신을 양자로 삼은 것에 대해 족인들에게 불만 스러운 것이 많아서 기회가 있으면 이를 발설하려고 한다. 만약 정말로 종족 의 대의를 두텁게 하고 그 행위를 공정하게 하려 한다면, 요조가 살아 있을 때 부자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 두지 않고 나중에 분쟁이 일어날 화근을 끊어 놓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요조가 사망한 후에 갑자기 서로 도우며 끝나지 않는 소송을 행하는가? 일족의 대의(大義)가 이처럼 얕은 것이 있단 말인까?
주현(郡縣 즉 州縣)이 판단한 바로는 거듭하여 논증하면서 그 깊은 곳까 지 꿰뚫어 보고 있다. 지금 정치의 요체는 알기가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 49)『孝經』聖治章에 “父子之道, 天性也”라 되어 있다.
50) 여기서의 先帝는 漢 武帝를 지칭한다.
51)『漢書』卷71, 雋不疑傳. “위태자 출현사건”에 관한 시대적 배경이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 최덕경․임대희 옮김,『중국의 역 사―진한사』혜안, 참조.
고52)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소송이 끝났을 때에 가산이 이 미 없어지게 된다면 이는 결국 족인들의 간계에 빠진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오는 장형100대에 처하고 인근 주(州)로 편관시킨다. 이삼은 본래 요조의 소작인(地客)53)이므로, 현 밖으로 추방하고 소송을 걸면 배형(配刑)에 처할 것이다.
의자(義子)
호혼문(권8-38) 모친을 배반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다 (背母無 狀).
채구헌(蔡久軒) 詳王氏所供, 初事張顯之爲妻, 顯之旣死, 只有男張大謙. 王氏以夫亡子幼, 始招許文進爲接脚夫. 許萬三者, 乃許文進之義子, 帶至王氏之家者也. 許文進 用王氏前夫之財, 營運致當. 其許萬三長成, 王氏又爲娶婦, 悉以家計附之, 雖 前夫親生之子已死, 不復爲之立繼, 所以撫育許萬三之恩, 可謂厚矣. 今年四月, 許文進病重, 口令許萬三寫下遺囑, 分付家事, 正欲杜許萬三背母之心. 許萬三 從而竊之, 固已無狀, 且縱其妻何戴 悖慢其姑, 又將鹽筴席捲而去, 有是理哉.
王氏有詞, 夫豈得已, 本州委林都監究實, 不能正其母子之名分, 乃只問其財貨 之着落, 舍本求末, 棄義言利, 知有貨利, 而不知有母子之天. 鄙哉, 武夫何足識 此. 尤可怪者, 王氏方訴于本司之庭, 忽有許文通者, 突然執狀而出, 曳王氏而 前, 若擒捕一賊之狀, 押下供對, 乃知許文通者, 乃許萬三所生之父. 所供之狀 與所執之狀, 字畫已出兩手, 無故而欲干預孀婦家事, 一不可也., 又爲出繼男入 詞, 率子攻母, 二不可也. 違背公理, 入脚行私, 孀婦在公庭, 猶且爲其擒紐欺 撼, 則其在私家可知矣, 則其助所生之子, 以悖所養之母, 又可之矣. 當職親覩 其無狀, 心甚惡之, 誰無父母,誰無養子, 天理人倫, 何至於是. 許文通勘杖八十, 封案, 如敢更干預王氏家事, 卽行拆斷, 牒州差人管押. 許萬三夫妻及財本, 與 王氏同居侍奉, 如再咆哱不孝, 致王氏不安跡, 定將子婦一例正其不孝之罪. 仍 門示.
52) 『書經』說命中에 “說拜稽首曰, 非知之艱, 行之惟艱”라 되어 있다.
53) 地客은 신분적으로 예속성이 강한 소작인을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로서는 소 작인 일반을 지칭하기도 한다.
장현지死 왕 씨
장대겸死 허만삼(의자)
허문진(접각부)
재산 침탈 시도 8-38 계보도
왕씨(王氏)가 진술한 바를 살펴보면 처음에 장현지(張顯之)를 섬겨 처(妻) 가 되었지만, 장현지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장대겸(張大謙)만 있었다. 왕씨 는 남편은 죽고 아들은 어려서 처음에는 허문진(許文進)을 접각부(接脚夫)54) 로 삼았다. 허만삼(許萬三)은 허문진의 의자(義子)55)로서 왕씨의 집으로 올 때 데리고 온 자식이다. 허문진은 왕씨의 재산을 운영해서 부유하게 되었다.
허만삼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자 왕씨는 또 며느리를 맞이하고 가계를 모두 그녀에게 맡겼다. 비록 전남편의 친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후자를 세우지도 않았으니 허만삼을 양육해 준 은혜가 상당히 깊다고 할 수 있다. 올해 4월에 허문진의 병이 중해지자, 허만삼에게 유언을 받아 적게하고 집안 일을 나누 어 주었는데 (이로써) 허만삼이 어머니를 배반하려는 마음을 막으려고 한 것 이 확실하다. (그러나) 허만삼은 유언을 베껴적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이것을 숨겨버렸으니, 그 행위자체가 비도(非道)이다.56)또한 처인 대씨(阿 戴)가 시어머니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며 업신여기는 것도 내버려두고 염의 장부57)도 모조리 빼앗아 가버렸는데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 로 왕씨가 소송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당 주는 임도감(林都監)에게 사실을 규명할 것을 위임하였는데, 모자(母 54) 接脚夫는 과부가 재혼할 때에 맞아들이는 後夫를 말한다. 접각부에 관해서는
滋賀秀三『中國家族法の原理』創文社, 1967 참조.
55) “義子”는 養子의 일종으로, 繼承를 위한 양자를 嗣子, 혹은 過房子라 하고, 恩 養的인 양자를 義子 혹은 義男이라 했다.
56) 都監은 주로 城內에 주둔하는 군대를 관할하는 軍政官이다. 관위가 낮은 자 가 임명이 되면 監押이라 했다. 路, 州에 각각 설치되었는데 남송에서는 安撫 使가 겸직을 하면서, 兵馬都監이라 했다.
57) 鹽筴은 塩策(염책)이라고도 했는데, 塩은 먹는 사람들을 기록한 대장을 말한 다.『管子』海王,“齊桓公問管仲, 何以爲國, 管仲曰, 海王之國, 謹正塩策”이라 되 어 있다.
子)간의 명분을 바로잡지는 않고 다만 재산의 행방만을 물어볼 뿐이다. 이는 근본(本)을 버리고 말단(末)만 추구하는 것이고, 의(義)를 버리고 이(利)만 따지는 것이며, 금전문제만 알고 모자지간에 천륜(天倫)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비천하구나! 무관이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왕씨가 본 관청에 소송했을 당시에, 갑자기 허문통(許文通)이라는 자가 나타 나서 뜬금없이 소송장을 들고 출두해서는 왕씨를 끌어 당기는데 그 모양이 마치 한 명의 도적을 사로잡은 것 같다. 붙잡아 와서 대조하여 진술해 보니, 허문통이라는 자는 바로 허만삼의 생부였다. 진술서와 손에 들고온 소송장은 글씨체가 서로 다른 사람의 것으로, 정당한 이유없이 과부의 집안일에 개입 하고자 한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출계(出繼)한 아들 을 위해 소송을 하거나 아들을 부추겨 모친을 공격하게 한 것이 용서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공리(公理)에 위배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하여 사적인 의도를 행하려 하고, 과부가 법정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에게 압도 당해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데 자기 집(私家)에서는 오죽했겠는가? (허문 통이) 친아들을 도와서 길러준 양어머니에게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게 만 든 것도 또한 알 만하다.
본관이 직접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게 되니 참으로 증오감이 든다. 부 모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식을 부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 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가 어떻게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허 문통은 장형80대에 처해야 하지만, 집행은 유예시킨다(封案)58). 만약 이후로 재차 왕씨의 집안일에 간여한다면 즉시 형을 집행하도록 하라. 주(州)에 공 문을 보내고 사람을 파견하여 허만삼 부부와 재산을 감독하거나 차압하고왕 씨와 함께 거주하면서 봉양하도록 하라. 만약 다시 불효를 하여 왕씨를 불안 하게 한다면 반드시 아들과 며느리를 불효의 죄를 논죄할 것이다. 이 판결문 을 관청 문에 게시하라.
주제어: 청명집, 송대, 재판, 關鍵詞: 淸明集, 宋代, 裁判,
Key Word: Qingmingji, Sung Dynasty, jury
(2009년 9월 10일 원고접수, 9월 12일 심사완료, 10월 24일 게재 확정) 58) 封案은 형의 집행정지 내지는 집행유예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