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新聞 속의 인천 해제
1883년 개항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천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실제 1세기 이상에 걸친 시기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 한 예로서 오늘날 ‘한국 최초, 인천 최고(最古)’라는 표제(標題)로 널 리 회자되는 각종 사안들이 개항 이후 모조리 인천을 현장으로 해서 이루 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 같은 인천의 역할과 위상을 설명한다고 할 것 이다. 이것은 물론 수많은 국사(國史) 기록과 사료(史料), 사재(史材) 등을 통해 규명되고 정리된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국사 기록과 사료, 사재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사실 자료의 하나가 신문기사 같은 종류이다. 당시 신문기사들은 우리 사회 제 분야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개항 후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각종 신문들의 기사 혹은 광고 형태로 활자화된 ‘인천’ 관련 자료들을 최초로 집성한 자료집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그동안 여러 향토사학자, 연구자들이 단편적이나마 이에 대한 연구 가 이루어지고 향토사학계나 세간에 그 결과가 발표되어 온 것은 사실이 나, 어디까지나 집필자의 안목에서 취사선택된 것들뿐이어서 실제 그 전체 적이고도 온전한 자료의 원 모습과 세세한 사정(事情)은 알 수 없었던 것 이 사실이다.
이로 인해 저간의 향토사 연구의 형편은 자료의 부족과 기술(記述)의 미 흡을 초래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인천광역시 시사편 찬위원회와 역사자료관에서는 차제에 인천 관련 기초 자료 총람(總覽)을 편찬키로 뜻을 모으고, 그 1차 사업으로서 개항 후 한국인 독자를 대상으 로 국내외에서 발행된 모든 신문을 대상으로 그 지상에 게재된 인천 기사
를 원문 그대로 망라한 자료집을 발간하는 데 이른 것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향토사학자, 연구자는 물론 학계와 관심 있는 시민 제위에게 요긴한 자료집으로서 공(供)함에 있다. 특히 인천 역사의 주요 부분이 대부분 축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근현대사 속의 인천 의 면목을 수월히 일별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는 점도 부차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에 발간되는 첫 자료집을 비롯해 향후 연속할 자료집으로 인천 향토사의 기초 연구의 증진과 기록에 있어 그 지평이 크게 확장되리 라는 기대를 갖는다.
서두에서 피력한 대로 인천은 수도 서울의 인후(咽喉)라는 지정학적 위 치로 인해 개항에서 일제 강점기 이르기까지 수도 서울을 제외하고는 신 문을 통한 기사 게재 빈도가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 양은 실로 방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번 1차 사업의 범위는 부득이 일부 신문에 국한되었다.
우선적으로 신문 발행 순서에 따라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 한성주 보(漢城周報, 1886~1888),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1899) 협성회회보(協成 會會報, 1898~1898), 황성신문(皇城新聞, 1898~1906), 대한매일신보(大韓每 日申報, 1904~1910)가 그 대상이었음을 밝힌다.
관련 기사의 추출(抽出)은 신문 게재 빈도에 따라 인천, 제물(포), 부평, 강화(강도, 심도), 교동, 월미도, 화도진, 인천감리, 인천해관, 인천영사관, 세 창양행, 덕적도, 백령도, 영종도, 인천 물치도 등을 주 검색어로 사용하였다.
기사 정렬은 검색어에 의해 추출된 기사를 각 신문별로 게재 일자 순서대 로 하였으며, 여기에 기사 제목과 신문의 면(面)과 단(段)의 수를 표시하였다.
각주는, 예를 들어 ‘세창양행’ 광고처럼 동일한 내용의 광고가 반복해서 등장할 경우에 한해서 최초의 광고 원문만 본문에 게재하고 각주에 그 각 각의 날짜를 표시하여 본래 원문이 생략되었음을 표시하였다.
│목│차│ 고신문속의 인천[하]
[황성신문]
1898년 5
1899년 12
1900년 43
1901년 73
1902년 109
1903년 132
1904년 284
황성신문
1898년~1904년
황성신문
[1898년]
1898년 9월 6일, 動費鉅萬, 2면 3단
仁川港에 在 典圜局을 龍山前軍資監으로 移設 器械搬運費와 倉庫毁撤費가 不小더러 爐鞴型範을 一新修築 度支部에셔 爲先十 一萬元을 支出다니우리그 幹事人에게말노니 國庫에 錢政窘絀이니 아모조록 節用야 一分이라도 國庫에 還入도록 豫筭시오
1898년 9월 16일, 吾問疑之, 3면 2단
向者에 外部顧問官具禮氏가 上海에 往야 西洋人三十名을 雇來야 我 皇宮을 保護게다 風說이 有다가 再聞즉 某大臣이 奏諫야 發 電停止하엿다다니 今에 聞즉 再昨日下午에 該雇人員이 仁港에 下陸하얏 다니 昨日子正에 仁川셔 發하야 抵暮에 入城하엿다더라
1898년 9월 16일, 花席羽化, 3면 3단
某學校에셔 卒業禮式이나 其他重大 禮式時에 排用하량으로 江華花紋 席二部를 准備하얏 稍大 一部 六間을 可▣하고 稍小 一部 四間을 可藉하 深深珍藏하야 以待後日需用하얏더니 二部花紋席을 忽然不兒 故로 校▣諸人이 四處搜覓하야도 形影이 渺然지라 聞者ㅣ疑 하야 曰學校 敎育하 處所인즉 如許微細之物을 竊盜 者가 必無지 니 畢竟此席이 羽化飛去하얏나보다고하더라
1898년 9월 22일, 仁川暴賊, 2면 1단
京畿道仁川紫壓里鄭兵使琦澤氏집에 盜賊十餘名이 突入야 人名을 亂打
고 家財를 沒奪여가지고 沙川塲을 過다가 塲軍二名을 亂肉勅殺 고 其近洞人民이 晝夜惶惶다니 該監理署警察官吏이런일을 不知
톄지
1898년 9월 23일, 忠愛爲書, 3면 3단
獨立協會會員李用錫氏가 十元金을 捐하고 一幅書를 裁하야 本會에 送致 하야스니 其忠愛하 誠意가 極히 致謝만한기로 左에 記載하노라 敬啓 者난 國을 愛하고 君에 忠은 秉性의 常理라 葵藿의 草性으로도 向日하
誠이 有하고 蜂蟻의 肖翹도 護將하 力를 用하거든 况吾人이야 五 行의 秀氣오 萬物의 是靈이라엇지 忠君愛國에 誠力이 無하리오 但世敎가 不明하고 治化가 未開하야 常性을 失하고 本心이 晦하야 忠愛에 名은 說 하나 忠愛에 實은 知치못한지라엇지 痛恨치아니리오 年來로 天命이 維新하 고 邦運이 回泰하야 獨立에 基礎를 建하고 自主의 政治를 行하난즁 本會 에 僉員이 忠愛의 實心으로 開明進步에 注意하야 遐邇가 響應하니 國家의 慶幸이오 民生의 福澤이라 獘員이 高會猥忝한갓 私分의 大幸아니라
한 忠愛에 秉性를 保守지니 蜂蟻葵藿의 微誠을엇지 此時에 用치아니 리오 特히 所居가 僻隅에 處하고 一身이 事故에 係하야 通商特別諸會에 叅席치못하오니 微懷悵缺이 比 無한지라 本會諸君子난 如此寸誠을 垂諒하고 私故를 蓉恕하야 忠愛의 敎訓으로 常常提示하시면 私分에 萬幸이 오며 獨立門建築費에 補助키 爲하야 十元을 仰呈하오니 數은 少하 誠은 深한지라 鑑亮領收하심을 望홈 光武二年八月二十八日在仁川港會員李用錫 白、獨立協會會長尹致昊閣下
1898년 10월 12일, 先公後私, 2면 3단
東萊府尹이 宮內府에 報告엿 多大鎭牧塲은 內藏司所管이라고
派員야 該鎭結納과 牧馬를 句管다온거슬 査온즉 該派員이 隠結八 十一結을 監守自盜기 本官이 度支部에 報告陞總케고 牧塲을 査
온즉 好馬 該監이 先揀斥賣고 所存이 不過病瘦者二十四頭이온 禾 麥方長之時에 散四吃穀케야 民多咨怨니 該馬段은 東萊牧塲에 送蓄 케이 恐好라얏 宮內府題內開結歸本郡고 賭歸派員야 各白上納
야 無至撕握라엿더니 今日에 再聞즉 宮內府大臣이다시 翻覆야 結錢과 牧賭를 全歸於派員라고 酌定되엿다니 大抵爲府尹郡守者가 該 地隱結을 隨現隨報야 陞總케거슨 分內에 堂堂 職責이거니와 前鑑 을 溯査즉 昨冬에 仁川府尹이 隠結六十一結을 査報 後吏輩의 誣陷을 被야 在▣이 不過三個月에 竟至免官엿다더니 今東萊府尹도 隱結을 査 報陞總케다가 成事가못되고 作嫌만엿다더라
1898년 10월 21일, 東宮設學, 2면 2단
今에 聞즉 皇太子殿下셔 英文을 學習시려고 英國敎師를 延聘
該敎師인즉 前駐仁川港英國領事周驪氏의 夫人인 今春에 上海로 歸엿더니 淸國人吳禮堂氏가 閔泳翊氏의게 囑托야 我 大皇帝 函奏 야 此夫人을 廷聘기로 作定엿 月給은 每朔三百元이오 限期 二 年이오 期滿되여 解雇 日에 一個月條를 叧加랴다더라
1898년 10월 28일, 役軍難保, 3면 2단
仁川鐵道所에 看役 西洋人이 都給 雇價를 役軍에게 分給지아니
役軍들이 食債를 支給지못여 難保 境에 至 故로 日前에 該役所 十長이 役軍을 率고 上京야 美國公使舘에 呈訴엿더니 該公使의말이 日間措處야 出給케거시니 退去라엿다니그 西洋人이 必然解事를
故로 大役을 看檢케엿 役軍으로야곰 此境에 至거알슈가 업다고더라
1898년 11월 14일, 設計剽奪, 3면 3단
水原府居 商人金益煥이가 金十餘兩重을 持고 仁川港에 往야 一 萬二千餘兩에 放賣야 山東紬를 換買負來다가 該邑沙川塲에 至야 日 暮投店얏더니 居無何에 鄰人貌樣으로 三四人이 房內에 同入야 骨牌로 設局雜技더니 良久에 門外喧譁聲이 有며 包頭持棒 五六名이 突入房 內야 本邑別巡檢이라 稱고 爲先金益煥을 捕縛 這間雜技軍이 金 商의 山東紬를 奪取여간 後에 別巡檢도 登山而走니 金氏가 束手 無策야 失物空還엿다뎌라
1898년 12월 10일, 放逐西島, 2면 3단
李基東兪箕煥兩人이 再昨夜亥正에 自現얏 裁判與否도 無고 昨 日寅初에 黃海道白翎島로 流配얏 主事一人과 巡檢二人이 押去얏 다더라
1898년 12월 17일, 周貧之義, 3면 3단
(周貧之義)仁川濟物浦居 車先達學三氏가 今年四月을 當 年饑之 餘에 穀價가 高騰야 富平金浦兩邑貧民數千名이 餓俘之境에 至지라 車 氏가 外國人에게 請債야 白米一百石과 粟米二百石을 貿야 富金兩郡貧 民에게 外上으로 分給야 使之圖生케고 價本은 秋收後에 隨力還報라
야 兩郡貧民이 餓死를 免엿다니 此可謂活人佛이라만더라
1898년 12월 17일, 周貧之義, 3면 3단
仁川濟物浦居 車先達學三氏가 今年四月을 當 年饑之餘에 穀價 가 高騰야 富平金浦兩邑貧民數千名이 餓俘之境에 至지라 車氏가 外國 人에게 請債야 白米一百石과 粟米二百石을 貿야 富金兩郡貧民에게 外 上으로 分給야 使之圖生케고 價本은 秋收後에 隨力還報라야 兩郡 貧民이 餓死를 免엿다니 此可謂活人佛이라만더라
1898년 12월 17일, 周貧之義, 3면 3단
仁川濟物浦居 車先達學三氏가 今年四月을 當 年饑之餘에 穀價 가 高騰야 富平金浦兩邑貧民數千名이 餓俘之境에 至지라 車氏가 外國 人에게 請債야 白米一百石과 粟米二百石을 貿야 富金兩郡貧民에게 外 上으로 分給야 使之圖生케고 價本은 秋收後에 隨力還報라야 兩郡 貧民이 餓死를 免엿다니 此可謂活人佛이라만더라
1898년 12월 19일, 鳥巖沒帆, 3면 1단
本月十五日初昏에 日本輪船尾勢丸이 仁川으로 由야 上來다가 豊德 界鳥巖近處에셔 沈破야 桅竿만 水上에 露出얏 仁川居鄭載錫氏가 他輪을 乘고 同日上來엿더니 鄭氏本家에셔 沈船을 聞고 其子가 下人一名을 率고 罔夜上來엿더니 其家에셔 電報가 來 故로 無事上 來쥴노 答電엿 該船中裝載物은 幾何인지 按騎人員數 二十名假 量이라더라
1898년 12월 26일, 悖漢亂倫, 3면 3단
陰曆十一月初八日에 漢洞居金學善이가 所幹事가 有야 仁川地에 下往
엿다가 十日만에 還家즉 其妻가 言되 君之發程 後에 堂姪老味가 乘暮來到야 謂有所言이라고 執手挽抱에 欲行淫事거 以理切責고 避身隣家여 艱辛免辱이라기 不勝痛駭야 意欲楚懲次로 往到老味家 야 責以倫綱니 該漢이 反執渠叔之髻고 亂打裂衣故로 中署巡檢이 捉來
야 三造對卞에 如出一口라 事係倫綱故로 押付엿다
[1899년]
1899년 1월 6일, 江賊賊花, 4면 1단
黃海道延安郡羅津浦 居하 鄭正植의 弟 吉用은 京城油可洞 居하 朴 五衞將의 女로 定婚하고 兩家가 俱貧하야 成婚치 못하얏더니 陰曆九月分에 未筓閨秀를 率去行禮 次로 木路로 下去하다가 風浪에 逐하야 江華山里浦 에 止泊하엿더니 蓬頭數人이 舟子를 招招하여 曰 所載何物고 舟子가 驚惶中 答曰 無物所載오 只載一內行이로라 厥黨이 突入舟中하야 處子 勒奪
鄭氏와 舟中人이 抵防하다가 敺打를 被하야 畢竟 見奪하고 其姓名을 搜聞 즉 本浦 居하 高壽浩 李應奎也라 不勝憤寃하야 本官 李海昌氏에게 呈즉 兩漢과 處子를 捉對하야 質問즉 其時處子劫姦 者 高壽浩라 李府尹이 其處子를 本府書記 崔仁得家에 保囚하고 數月未放하다가 本府尹上京 後署 理通津官에게 更訴하라 하니 鄭氏가 數月京鄕에 浮費가 三千餘金이라 家産을 蕩敗하고 道路에 棲屑다니 大凡 事莫大於嫁娶오 罪莫重於姦淫이어 被姦 人를 拘留不放과 强姦賊을 推委不決함은 知치 못다 하더라
1899년 1월 9일, 望門而還, 3면 3단
仁川港에 駐 日本郵便局長 巖崎直英氏가 景福 昌德 兩宮을 翫覽 次 로 日本公舘에셔 外部에 函請 故로 外部에셔 宮內府로 照會訂期엿더 니 該局長이 屆期臨闕 把守巡檢이 宮府에 申飾을 奉見치 못 故로 拒而不納지라 該局長이 彷徨하다가 虛還하엿다더라
1899년 1월 11일, 譎計未遂, 3면 2단
仁川來信에 云하되 本郡遠又今面甕巖里 本洞居 全州李某에 世居之地 요 屢代先山之局이라 지나간 陰曆十月에 德國人 華爾德이 火藥庫建築
次로 本洞後山西端一麓을 因外部訓令하야 請買하기로 不得已 許賣하엿더니 本郡島洞面居 李善浩 平昌后人이라 本山東麓에 在 古塚이 自己에 七
代先祖山이라 憑藉하고 此山局內가다 自己山坂인 他國人에게 許賣하엿다 하고 그 價錢을 하자 달나고 誣訴本府하온즉 本府尹 徐氏가 親審摘奸하야 快히 李善浩에 山麓이 안인 줄 알고 公決하엿더니 善浩가 仁川境內로 다 니며 말하되 近處사의 누구던지 平昌李氏에 山이라 하면 錢文 一千兩을 주마하니 그 譎計를 可知오 山下古塚 三四處를 誌石찻다 하고 掘塚 하나 自己山이 아니어 엇지 顯著 信蹟이 有하며 自己門內에 聖敎 하 사을 因緣하야 抑奪하랴 하나 聖敎하 사은 經緯가 더 昭然
엇지 秋毫인들 非理之事를 行하리오 그런 故로 도리혀 自愧하야 落訟 者ㅣ 稱寃으로 本府尹을 嫌疑하야 本洞 李某에게 돈 먹엇다 自稱遍論하나 本府尹에 淸白함은 一境이 稱訟하 라 뉘가 信聽하리오 畢竟 譎計를 이루지 못하엿다 하더라
1899년 1월 14일, 擴充其才, 2면 3단
仁川公立小學校에셔 學員들이 光武二年度 年終試驗을 經엿 學員 들이 다 學業上에 夙成 中에 孔永錫氏가 年今十六에 其才拔萃야 每朔 七日一次式 試講도 每每居首더니 今番 年終試驗에 優等居首에 拔함 一校中이다 讓頭다니 우리 孔學員을 向야 말노니 其才를 恃야 自滿치 말고 益加琢磨야 不試의 藝를 成就키를 深望노라
1899년 1월 14일, 仁港來報, 3면 3단
仁川客主 林鍾文家에셔 開城商民이 火藥과 自起黃을 潛賣할 次로 房中 에셔 火藥을 曬煉다가 起火야 該商與主人之子 十二歲兒가 暴死고 主人及傍觀人 數人이 受傷엿다고 該港監理가 外部에 報告하엿다더라
1899년 1월 14일, 設校請員, 3면 1단
(設校請員) 富平郡에셔 學校事로 學部에 請願하엿더니 指令內에 設立學 校하야 敎育人民이 寔今急務어 有此報請하니 聞極嘉幸이나 地方學校
均是公立이라 公立學校費用은 府或郡에셔 負擔함이 章程所在오 且學校를 設立하고 學員을 募集 後에 事由를 詳細報告于觀察府하야 本部로 轉報 케 하면 學校情況을 檢定 然後에 敎員을 派送하고 學員이 漸多하야 敎 員 一人이 敎授하기가 難하면 副敎員을 任用하지라 今只以設校二字로 遽請敎員 副敎員之派送이 是何糢糊乎아 設校事由와 學員募集과 費用如何를 詳報하라 하엿더라
1899년 1월 18일, 有闕試才 3면2단
仁川港新任警務官 河相驥氏가 赴任 지 一週日에 視務가 甚히 精公하 야 每日 一次式 街上에 巡察며 巡檢을 嚴히 團束하야 開明에 注意가 顯 著하고 巡檢의 闕이 有하면 通衢에 揭榜하야 試取 次로 願入者를 募集
다더라
1899년 1월 18일, 仁港來報, 3면 3단
本月十三日에 仁川港口에 盲風이 大發하야 船隻이 多沈하얏 米豆柴 各物이 水沈者ㅣ 不少하고 日本人溺死 者 七名이오 本國人死者 아직 的知치 못다더라
1899년 1월 30일, 必蒙明察, 3면 3단
坡州 居하 金殷鉉氏가 陰曆四月分에 米 十二石을 貿하야 文山浦居 姜 元淳處에 轉賣하엿더니 姜哥가 仁川德積浦居 張德心에게 䀋包를 外上으로 得하야 該米價 三千三百兩을 換給하고 䀋價은 以七月로 報償 意로 成票 給하엿 張氏가 當限督促즉 姜漢이 逃避지라 張氏가 䀋價捧 處 가 無하야 非理의 計로 仁川官에 誣訴하되 金與姜이 同商이니 䀋價를 金氏 에게 徵出하야 달나 하니 該港警署에셔 巡檢을 派送하야 坡州官에 訓令하니 該郡巡校 李錫智가 自稱書記라 하야 同類를 率하고 金氏門中에 到하야 手記 를 勒捧하고 金氏의 叔父를 捉去하엿다니 以若該郡의 明察로 此狀을 知하면
該巡校輩 重罪를 被 것이오 金氏 抑寃을 雪하리라고 하더라
1899년 1월 31일, 擇而更擇, 3면 2단
近日 官報를 見즉 元山港監理署主事 二人이 新差하엿더니 엇더 사이 該署主事를 圖得다 傳說이 浪藉하니 該港主事 極擇하 貌 樣이라고들 하더라
1899년 2월 7일, 淸何不淸, 3면 2단
京畿道仁川府濟物港沙村民人 等이 外部에 等訴하엿데 訴狀內에 矣洞 이 濱于沿海하와 僅成村落이오되 地界段은 本不入於陸地之界也라 十餘年前 에 無依流離之輩가 搆結蔀屋於白沙場하기 白沙場이 無主無稅之地也라 結屋居生하온즉 其情地 不言可燭이오며 以此로 四方離散之氓이 漸次 來 接온즉 築石運沙야 埋海爲基者ㅣ 過半矣라 甲午以後에 淸人怡泰가 稱 以渠有自買之文券이라 고 每朔 每戶의 地稅를 督捧오되 若不當場出給 則 或突入內庭고 或撤去門隻이기로 自洞中으로 不勝抑鬱와 怡泰더 러 探問買於何處이며 斥賣者亦何人乎아 온즉 不能答云하고 同往呈官 之路에 旋卽迯去隱避이온즉 事之無實은 推此可知也라 將此事由하야 卽訴于 監理營則 署理主事分付內에 汝洞地界를 怡泰가 四年前에 放賣于英舘하엿더 니 今英舘으로 照會가 來하야 沙村地稅를 火速收納란다 기로 洞民 이 言되 若使怡泰로 已爲放賣則 地界文券이 豈可尙在於怡泰乎잇가 主事 言內에 若欲不給地稅어든 汝各毀家出境云오니 爲牧民之道에 是豈公決乎 잇가 又卽往訴于本府則 監理使分付內 英國兵船이 未久出來하니 汝洞이 能 無大患乎아 云則 以賤慮로 思之컨 淸人之左右請囑하와 做出虛無無根之說 이 在所難免이오니 假使英人已買則 自本港으로 安有尙今不知之理乎잇가 此 所謂 虎威狐假者也라 不勝抑寃와 玆以齊聲仰訴於政府二天之下오니 洞 燭신 後 特下分揀之澤사 使矣洞居民으로 大韓地界에 居生지 他國 租界에 寓接지 指一知得케 시며 徵稅로 言여도 無據生抑 怡
泰를 徵給할지 中間에 聽囑挾雜 英人을 徵給할지 明的實示라고 外 部에지 齊訴하얏더니 題辭內에 已有監理署處辦하니 無庸煩訴하라 하엿스 니 到此地頭하여 更無呼寃處니 以何良策으로 民人 等이 保生고 蒼天 만 仰望하고 痛哭다더라
1899년 2월 8일, 散糓活人, 3면 3단
陰曆本年七月分에 仁川港 居하 車學三氏가 小米 二百餘石을 興利次로 貿하야 富平郡始川浦에 積置하엿더니 其時 富平金浦 兩郡居民들이 炊烟이 不起하야 餓死之境에 至지라 車氏가 不忍坐視하야 該小米 二百餘石을 計其人口하야 平均分給함 數千人命이 賴以生活하엿다니 車氏 可謂慈 海活佛이라 하더라
1899년 2월 16일, 逢賊被刺, 3면 2단
仁川郡蛇川場에셔 廣州郡居人 李順基가 行商으로 販貨歸路에 該郡大池洞 을 過 盜賊 二名이 追來하다가 李氏를 刃刺하고 行裝을 奪去지라 李氏가 縷命을 僅保하야 該洞 金進士家에셔 數日 委頓하엿다가 日前에 上 京하야 泥峴 贊化醫院에 往하야 治療다더라
1899년 2월 21일, 會社請願, 2면 2단
中署社洞 居 金奎植氏 等이 仁港에 米豆會社를 設置하 當社의 營業期限은 光武三年二月로 始하야 滿期十年 後에 總會員의 決議를 依 하야 更히 繼續 事로 該社定欵四十五條를 請願書에 付하야 農商工部에 呈하엿더니 該部에셔 指令하기를 資本이 確立하고 定欵이 詳明하기로 依 願認許라 하고 仁川監理에게 發訓하얏스니 知悉營業하고 恪勤做去하야 毋 或違越貽擾이 爲宜事라 하엿다더라
1899년 2월 23일, 犯界造屋, 3면 1단
仁川港 淸人租界地段內에 大韓人의 築室居生 者ㅣ 百餘戶라 向者에 英國公使가 外部에 照會기를 犯界造屋은 公法에 違越이니 貴國民戶를 斯速毀黜云 故로 外部에셔 參書官 姜華錫氏를 該港에 派送야 民戶를 看審고 來報라 하니 當初犯界造屋 事由를 溯考건 其咎가 人民 에게 多在거니와 當時監理官吏가 恬嬉怠惰야 買還 多般好機會를 盡 失고 今에 民戶를 猝地撤毀라 면 貧困 民生의 奠接이 何에 賴成
지 矜惻도다 政府에셔 軫念하시고 恤金을 賜하실 듯하다더라
1899년 2월 28일, 淸商租界, 2면 2단
仁川港에 淸商租界가 挾窄야 丁亥年間에 確充租界를 另定야 該地所 有本國民屋의 移建費를 撥給야 毀撤고 淸商을 爲야 該地를 存留 엿더니 甲午日淸交戰以後에 韓淸和約이 未成 故로 本國人民이 該空地에 築屋作業고 該地月租를 或給或滯야 借地之約을 實踐치 못엿더니 數 年以來로 英國公使가 華商을 保護 職責으로 本國民屋을 毀撤라 照 促이 甚 仁港監理가 本年三月內로 該屋을 毀撤기로 許諾엿
外部에셔 參書官 姜華錫氏를 該港에 派送야 調査할 監理와 會同야 家戶業主의 姓名과 家屋間數와 某年某月에 建造와 月稅의 幾何와 借地約主 의 證書有無를 一一成冊하 該界居民 等 一百餘名이 官庭에 齊進하야 監理와 外部派員을 向하야 呼訴하되 矣等이 家屋을 毀撤하야 淸商原主에 게 讓還하 것이 理가 當然할 듯하나 矣等이 元非建屋之民이오 他人處에 轉買하엿고 原造之民을 訪探하온즉 淸商에게 許諾을 受하고 月租를 定 한 後에 建造한 것이오 某年某月에 毀撤할 明文은 無하온 猝地에 移 建할 基地도 無하고 移建할 浮費도 亦無하오니 統合一百二十一戶에 八百名 人口가 留接處가 頓無하오니 涵諒하오셔 幾箇月寬限을 許給하시면 該地原 主에게 月租를 信給하고 徐徐 毀撤하야 流移之境을 免하노라 哀乞하엿 다더라
1899년 3월 6일, 江校害民, 3면 2단
江華府別巡校行首 尹學祖가 欺官虐民하기를 양 廳用補助라 하고 各浦 村民人處에 私通이나 片紙를 送하야 或 不應한 民이 有하면 設謀陰害가 無所不至터니 今者에 各浦村 各島民處에 私通하고 巡校를 派送하야 捕 廳에 新年大告祠한다고 收斂이 無數하기로 居民이 支保할슈 업다 寃聲이 浪藉하다니 該府尹은 엇지하야 此等獘를 嚴覈懲治치 못하지 該所管觀察 府에셔도 築底査探함이 可할 듯하더라
1899년 3월 13일, 豫筭項目, 2면 1단
豫筭項目 (續) 外部所管 第一欵 外部本廳 二萬八千五百九十一元 第一項 俸給 一萬七千三百九十九元 第二項 雜給 一千九百九十二元 第三項 廳費 一 千八百元 第四項 廳舍修理費 三百元 第五項 旅費 一百元 第六項 電報費 六百元 第七項 宴會費 一千五百元 第八項 交接費 一千元 第九項 顧問官以 下俸給三千九百元 第二欵 各開港場監理署 三萬一千八百三十二元 第一項 仁 川監理署費 六千一百三十二元 第二項 東萊監理署費 六千十二元 第三項 德 源監理署費 五千六百七十二元 第四項 慶興監理署費 五千二百二十二元 第五 項 務安監理署費 五千二百二十二元 第六項 三和監理署費 五千二百二十二元 第三欵 在外公舘 十萬六千三百二十元 第一項 在日本公使館費 一萬六千八 十元 第二項 在美國公使舘費 二萬一千二百八十元 第三項 在英德義公使舘 費 三萬四千四百八十元 第四項 在俄法奧公使舘費 三萬四千四百八十元 外部 所管合計 十六萬六千七百四十三元 未完
1899년 3월 13일, 綽裕餘矣, 2면 3단
今에 傳說을 聞한즉 國庫에 時在銀이 幾千元에 不過야 本月 各府部院 廳의 經費를 支撥할 方策이 無다 或說은 仁川典圜局에 光武年號印 刷한 赤白銅貨가 四五十萬元이 尙在한즉 必然此中에셔 搬用리라고 한다 더라
1899년 3월 18일, 豫筭項目, 3면 1단
度支部所管 第一欵 度支部本廳 五萬一千九百九十九元 第一項 俸給 四萬 一千五百七十一元 第二項 雜給 六千四百二十八元 第三項 廳費 三千五百元 第四項 廳舍修理費 三百元 第五項 旅費 二百元 第二欵 耆老所 四百六十一 元 第一項 耆老所 四百六十一元 第三欵 稅關 十二萬元 第一項 仁川稅關 五萬六千三百五元 第二項 釜山稅關 三萬一百八十元 第三項 元山稅關 一萬 九千一百十五元 第四項 務安稅關 七千二百元 第五項 三和稅關 七千二百元 第四欵 典圜局 二十五萬元 第一項 典圜局 二十五萬元 第五欵 國債 一百三 十九萬三千四百九十一元 第一項 料祿及恒式未下 二萬九千二百十九元 第二 項 貢未下 八萬二千二百八十五元 第三項 舊未下 三萬八千六百二十六元 第 四項 招商局借欵 十七萬四千六百六十七元 第五項 乙未借欵幷利子 一百六 萬五千三百六十元 第六項 防糓事件費 三千三百三十四元 第六欵 功臣世祿 一千九百五十六元 第一項 功臣世祿 一千九百五十六元 第七欵 國庫金搬運費 二十二萬元 第一項 國庫金搬運費 二十二萬元度支部所管合計二百三萬七千九 百七元 (未完)
1899년 3월 30일, 參領權力, 3면 1단
曩者 軍部에셔 各地方隊隊規를 編制할 時에 其未成한 隊 成隊하기 前 에 下士를 減定하엿 江華地方隊參領 尹喆圭氏가 軍部에 報告하기를 勅敎를 奉承하얏스니 下士의 月給을 前額로 支撥하라 하엿다니 우리 生 覺에 勅敎가 계시면 軍部大臣에게로 下하지 江華參領에게로 下하실 理 無할 듯한고 만일 該參領의게로 下하셧더라도 卽時 該大臣의게 面傳 하면 該大臣이 奉行치 아닐 理가 無하거 今에 肆然이 下去하야 報告에 다 勅敎를 傳하엿스니 該參領의 權力이 軍部大臣을 壓制할 만하다고들 하 더라
1899년 4월 5일, 仁川海關稅收入額, 3면 2단
仁川海關稅收入額 昨年 仁川港에 海關稅收入額이 如左더라 元 輸入稅 四五七, 五三七, 九一 輸出稅 六八, 三四九, 六三 噸稅 一〇, 三四〇, 六七 合計 五三六, 二二八, 二一 其納稅額을 船藉에 由야 區分함이 如左더 라 元 日本 三五七, 〇四三, 八〇 淸國 三三, 四五九, 八四 德國 六二, 六 一九, 五五 英國 七〇二, 九三 俄國 七二, 一一六, 五一 諾威 五五五, 八一 布哇 二四〇, 二五 韓國 九, 四八九, 五二 (未完)
1899년 4월 6일, 雲金鉅稅, 2면 2단
仁川朝鮮新報를 據즉 美國人이 雲山金礦의 特許를 得야 年來에 盛 히 採掘다더니 右會社에셔 二十萬元(稅金乎)을 宮內府에 上納얏다
今에 該金礦을 視察 人에게 聞즉 其利益額을 詳知치 못나 或 은 一個年에 一千萬元以上이라 니 假令 此를 折半야 筭見더라도 五 百萬元以上이니 二十萬元納金은 九牛의 一毛라 云엿더라
1899년 4월 7일, 竟作洪喬, 3면 1단
(竟作洪喬) 農商工部主事 李文夏氏가 富平閔聖瞻氏에게 緊急 事가 有
야 郵遞로 七八次를 寄書얏스되 答書가 無지라 李氏가 訝惑야 閔 家에 往探즉 一次書信도 受 無얏다 더라니 該郡鄕長은 郵遞章 程을 文具로만 歸야 然인지 該面主人이 閔氏에게 点心次를 討索키 難
야 傳信치 아님인지 該部에셔 응당 嚴懲杜獘 듯더라
1899년 4월 8일, 李氏往仁, 3면 3단
仁川郡에 內藏司屯土가 有 該司長 李容翊氏가 무 調査 事(果 乎)가 有다고 日昨에 家隷 一名을 率고 龍山에 往야 小輪을 乘고 仁川으로 進向얏다더라
1899년 4월 8일, 水中火賊, 2면 3단
近畿沿江 等地에 水陸間竊盜가 蜂起은 本報에 屢記얏거니와 日昨에 江郊友人의 寄書를 見즉 高陽 陽川 金浦 通津 交河 豐德 江華 喬桐 白 川 延安 等地에 水賊이 大熾야 刀鎗과 六穴砲를 持고 江海上에 逐逐 往來면셔 船上物貨를 掠探고 人命지 傷害기로 商路가 漸次 零星
지라 昨秋에 沿江主人들이 警務廳에 呈訴고 水竊의 譏詗을 請얏 더니 題給기를 兩道觀察府에 往訴라 지라 事宜에 不合 故로 中止
얏더니 近日에 各處水賊이 尤甚야 商路가 永絶니 沿江生民의 窘 跲은 姑捨고 都下商民의 受害가 不少다니 우리 生覺건 警務官吏 들이 從此多事 것이 向日에 大皇帝陛下셔 畿沿의 民患을 周察시 고 十行 恩倫을 下사 警務廳과 各地方官으로 야곰 竊盜를 詗剿라
셧스니 警察上에 職務가 有 者ㅣ 誰敢怠慢리오
1899년 4월 11일, 銀銅化石, 2면 3단
江華郡松浦居 柳氏가 家勢稍饒더니 去月初에 何許 金哥가 粲粲衣服으 로 甚重 一介手帒를 自携而入야 貿糓商이라 自稱고 留宿을 請
니 柳氏가 許諾고 錢數를 問 金哥曰 銀銅相雜야 近萬兩이오 專船으로 輸錢야 追後將到라 고 手帒를 主人에게 任置고 喬桐郡으 로 往야 一千八百兩價値糓石을 貿來얏 其糓主와 伴來즉 柳氏 의 熟知 라 金哥가 穀石을 他船에 移載고 糓主다려 曰 些少錢兩 으로 開鎖키 不便니 數日後 更來라 고 一二日 逗留다가 貿糓次 로 他處에 出去더니 一去에 消息이 更無지라 柳氏가 驚惶四探야도 踪跡이 杳然지라 金哥의 手帒를 開見즉 所謂 銀銅은 烏有를 化얏고 無數 白石이더라
1899년 4월 11일, 離宮看審, 3면 2단
李容翊氏가 內藏司屯土調査 事로 仁川으로 乘輪發往얏다고 日昨 本
報에 記얏더니 今에 更聞즉 同氏가 李采淵 李先得(美人) 玄尙健 諸氏 로 더부러 仁港에 同往야 離宮基址를 看審고 再昨日에 回還얏다더 라
1899년 4월 17일, 京仁鐵道, 3면 1단
京仁鐵道의 總務員 足立太郞氏 技師及工人을 率고 去月三十日에 仁 川에 到着야 軌道를 敷設 터인 漢江에 架橋기가 多日을 費으 로 全線路의 開通은 來春에나 可히 竣成리라더라
1899년 4월 19일, 港署規制, 2면 3단
從前 各港口監理署官制及處務規程을 外部에셔 略干 加減야 政府會議 에 提出얏다더라
1899년 4월 24일, 盜賣生梗, 3면 2단
月尾島居南쇠돌의 畓三斗落이 仁港圻浦에 在 趙某가 多年 耕作다 가 年前에 德國人에게 權賣얏더니 監理署에셔 德人에게 該地段을 還推
고 其舊文記은 監理署에 留置얏더니 該署主事가 監理上京을 乘間 야 肥己之計로 該地段에 干緣 朴哥로 符同야 日本人大河에게 潛賣 事로 再昨日曉頭에 日人大河가 許多役軍을 率고 圻浦에 所在 民屋을 毀破 該署에셔 防止치 못얏다더라
1899년 5월 2일, 哀此韓民, 3면 1단
仁港圻浦人民基址를 該署前主事 金昌健氏가 日人大河에게 盜賣 事 前報에 記얏거니와 現聞즉 日本商民 等이 成羣而來야 該浦居民家屋 을 不問曲直고 一時毀撤 際에 幸이 人命은 免傷얏스나 家産汁物 은 盡被破傷지라 該港我國商民들이 日人의 無理을 憤忿히 넉이어 一 幷撤市고 監理署門前에 齊會야 懲辦야 달나즉 監理所答內에 汝等
이 退去면 陰歷今月二十三日內에 所願로 妥辦야 쥬마 故로 人民 等이 卽爲退散얏스나 此事를 因야 港內彼我商民間에 紛競이 大 有 듯다더니 傳說을 聞즉 諸毀破 家屋基址를 盡燒얏다 니 其詳細顚末은 隨聞更記노라
1899년 5월 5일, 新隊來韓, 2면 3단
仁川朝鮮新聞을 據한즉 昨年五月以來로 京城에 駐箚한 第四師團步兵第八 聯隊와 交代할 次로 第十一師團(丸龜)第三十二聯隊將校以下 二百八十三名 及電信守備憲兵下士以下 四十二名이 五箇日前午後에 門司港에셔 凱旋丸을 搭乘고 直行야 昨日午後에 着仁기로 豫定니 居留地에셔 宿舍를 擇定기 極히 多忙다더라
1899년 5월 9일, 舊憲遞歸, 3면 1단
舊守備隊 來十日出發 凱旋丸을 乘고 歸國 터인 京城, 松 亭, 可興에 駐屯 憲兵 三十八名도 同歸 次로 本日에 仁川에 來着기 로 豫定얏더라
1899년 5월 10일, 今世界의 文明이 日進함 民生의 應辦 事가 日로 增한즉, 1면 1단
今世界의 文明이 日進함 民生의 應辦 事가 日로 增한즉 不可不 口岸商民의 條理를 擴充여야 이에 可히 內權을 鞏固고 外交를 善修할 지니 何者오 政府란 者 其職責이 國民을 保護 在야 一切 通商 事件을 約章에 照야 遵行되 만일 彼民이 我民의 權利를 侵奪던지 財産을 損害할 地境이면 政府에셔 公法을 依야 抵力審辦니 其故를 言할진 雖一民이라도 他民에게 權利를 奪면 是 全國權利를 讓與함 과 同함이라 仁川圻浦洞 居 李得珠가 已往에 同里 居 南釗돌의 畓三斗落을 買得 本監理署에 呈야 新文記를 成給고 舊文記 本
府에 納얏 李得珠의 所買 畓堤外에 古塚移葬處의 可히 十戶즘 居 生 地가 有 朴成守라 者이 德國人 毛世乙處에 盜賣 故로 洞民이 本署에 齊訴야 其基址를 還退얏더니 年前에 本署代理主事 金 昌健이 朴氏가 德國人에게 盜賣얏던 基址를 南釗돌의 基址라 僞稱고 旣往本署에 納 舊文記를 盜出야 日人 大河原貞禧處에 二千三百三十元 에 定價고 八百元을 先納야 南哥 二百元을 給고 居間 劉景贊 은 七十一元을 給고 其餘 金昌健이 沒食지라 該洞居民이 此事狀을 知고 忿心을 不耐야 本署와 外部에 屢次寃訴얏스되 判決 處分을 未蒙야 民心이 敖敖더니 不意 本年四月廿一日曉頭에 大河元貞禧가 日 本募軍 百餘名及巡査를 率고 該洞으로 突入야 金昌健의 盜賣 基址 의 七民家와 其接地三民家를 藏産汁物지 並皆破毀니 該洞에셔 不意의 變을 猝當 百餘人口가 生命은 雖保얏스나 居接이 無處야 携幼扶 老고 道路에 奔走號哭지라 港內十二洞民이 此景狀을 見고 忿憤踴 躍여 曰 日人이 我大韓人을 如此히 蔑視니 此 我十二洞民이 次第 必當 事이라 고 本署에 齊訴얏다니 該署監理가 人民을 保有
權利에 必然好樣審辦이 有 쥴은 酙酌거니와 政府에셔도 此民의 所遭 를 思면 此를 民이 當 事인즉 國權에 相關이 無다고 謂키 難
지니 亟히 該署에 嚴飭야 所謂 金昌健者 以法重繩려니와 日人이 我民의 財産을 損害도 公法이 自在 터인즉 亦卽 妥辦야 後獘를 永 杜면 國家의 權利를 維持이 自此完固 쥴노 知노라
1899년 5월 12일, 仁川港開豊局에 有 眼藥은 各樣眼疾에 無不神効
더러1), 4면 1단
仁川港 開豊局에 有 眼藥은 各樣 眼疾에 無不神効 더러 老人이 常試면 霧睛이 轉晴고 少年이 常試면 鏡明을 益磨며 翳瘼과 風
1) 13, 15, 16, 17, 18, 19, 20, 22, 23, 24, 25, 26, 27, 29, 30, 31, 6월 1, 2, 3, 5, 6, 7, 8, 9, 10, 12, 13, 14, 15, 16, 17, 19, 20, 21, 22, 23, 24, 26, 27, 28, 29, 30, 7월 1, 3, 4, 5, 6, 11, 7월 7, 8, 10, 11, 12, 13, 14, 15, 17, 18, 19 등 비롯해 1899년 12월 29일까지 게재.
淚를 兼治 其價가 亦廉니 僉君子 本局에 來야 買試시오
1899년 5월 18일, 華民呼寃, 3면 1단
江華北一場은 古之馬牧場인 三百年前에 信島로 移牧고 該場은 閔公 丹巖留守時에 許民耕墾야 三年後定稅케 니 伊來八九代居民이 轉相賣 賈러니 年前에 本府挾雜輩가 此土를 屬公코져야 宮內府訓令을 圖付얏거
居民들이 一齊上訴 其時宮內大臣 李載 純氏가 永爲勿侵 事로 題辦 지 于今四年이라 不意去月初에 內藏司에셔 別巡檢을 下送야 其 多結民 朱永叔을 捉上고 一面四年條秋收二百餘石을 徵納라고 牢囚督 促니 朱氏가 怯於威令야 徵納 次로 納考지라 該居民들이 此奇를 聞고 六七百名이 作黨야 中間 挾雜 張朴兩漢家를 長結不解
故로 該地方隊에셔 曉諭야 中止케 얏다더라
1899년 5월 23일, 本銀行支店을 本月十日에 仁川港圻浦에 創設얏기2) 3면 3단
本銀行支店을 本月十日에 仁川港圻浦에 創設얏기 仰佈오니 僉君 子 付換及出換의 關 事가 有시거던 本銀行이 支店으로 來臨시 와 問심을 望홈 天一銀行敬白
1899년 5월 25일, 宮相入城, 3면 2단
宮內府大臣 李載純氏가 肇慶廟와 乾芝山試役所奉審고 回程야 今日 仁川港에 下陸얏다가 卽是小輪船을 乘고 龍山津에 下야 入城다더라
1899년 5월 26일, 局長渡韓, 3면 1단
朝日新聞을 據한즉 日本水産局長 牧氏 來往三十日間을 豫定고 來月
2) 6월 30일까지 34차례 게재.
上旬에 渡韓한다 釜山, 元山, 木浦, 仁川 等地에 在한 日人漁業者와 且目今 漁業季節인즉 岡山, 廣島, 山口, 島根, 香川, 福岡, 長崎, 熊本等諸 縣의 漁業者ㅣ 韓國에 連續渡航함 互相紛議가 有기로 此際實地를 視 察고 事機에 由야 將來의 處置法을 制定할 터인 四國, 九州各縣의 視察員을 同行기로 한다더라
1899년 5월 26일, 開國五百三年以後情形, 1면 1단
開國五百三年以後情形 (續) (一開港口)仁川 釜山 元山은 開港지임의 有年이오 慶興 木浦 甑南浦 近年에 開港얏고 城津 昌原 沃溝의 口 岸과 平壤에 關市 新開얏스나 아즉 工業이 不振으로 輸入物品만 全 藉야 貧局의 漏巵를 成니 此 民智가 未開야 財源을 摸索 쥴을 不知이라 次次 工業의 發達과 機器의 利益을 鼓勵면 民의 趍利 이 水의 就下과 如게 日新月盛지니 國家의 富强을 致진뎌 (一通 電線)仁川 東萊 義州 合二千一百二十里의 電線은 曾往에 已通얏거니와
江原道金城에도 支線을 架設기로 工作을 已着얏다니 各地方 이 次第 設置면 其流通 信이 人의 血脉과 如지로다 (一架鐵道)京 仁鐵道의 起工이 已三年이라 明年初夏內로 竣役다 며 京釜 京義鐵道
未久에 建築다 며 京橋에셔 淸凉里지 電氣鐵道를 設얏스 니 此 其利益도 不無려니와 캄캄 漆夜 百姓의 眼目이 轉輪一聲에 忽開지니 엇지 進步의 一助가 아니리오마 京仁 京釜 京義 三鐵道 다 他國人에게 借與야 其利益이 아즉 國庫로 不入 畢竟還推 期限 이 有리니 轉運의 便捷을 國民間에 先得지로다 然而 有國有土有民 고야 엇지 如此大利益大權柄을 一日이라도 他人에게 讓與리오 (一置郵 遞)京城에 郵遞總司를 設야 十三道에 信脉이 乃通나 其遲鈍不靈을 尙覺스니 此를 刻期董飭야 或怠懈이 無면 其蒸蒸日上을 可 期지로다 汽電活郵를 天下의 四大器라 나니 此等利用厚生이다 國富 民强의 大基礎라 郵政을 掌 者ㅣ 엇지 振興치 아니리오 (一講兵制)現今
에 編成 制가 陸軍은 五大隊及鎭衞地方隊가 有나 海軍은 未設얏스 니 大抵 國의 有軍은 鳥의 兩翼이 有과 如야 水陸의 制가 可無치 못
것이오 軍制의 雄弱은 主將에 專在야 鍊法이 精면 制勝과 服習과 禦 侮折衝을 可必려니와 만일 不精면 兵士의 跋扈이 市中의 養虎과 如
야 其國民에 貽害됨이 反大지라 是以로 德將 毛奇가 卒 德皇이 그 卒을 隱야 曰 將軍이 卒니 我軍이 全沒과 如다 니 此 一將 이 無면 全軍이 無과 치 慟惜이라 天下後世의 整軍經武이 엇지 將材를 得 在치 아니리오 (一行警務)國內人民의 安寧을 維持코져 警務 廳을 置고 支署를 分며 各觀察府와 各監理署에도 警官을 置얏스니 其 良意美規가 公을 秉고 私를 不顧며 善을 護고 惡을 懲罰 在 니라 (一認報館)新聞紙者 政治를 佐 良箴이라 今에 國內新聞이 七八處 에 莫過나 足히 民心의 趍向을 知고 天下의 利病을 悉지니 此新聞은 國民의 聲이라 堯舜이 在上샤 四目을 明시고 四聰을 達시면 致治
方에 龜鑑을 宜作 만러라 右數件要領을 推見건 我國이 進步가 始치 아님은 아니로 一獘를 袪다가 百獘가 還生니 此 何故오 內而 行政과 外而講信을 力行實施치 아니일러라 (完)
1899년 5월 29일, 警部視察, 3면 1단
仁川港日本警察署警部 小泉恭郞氏 忠淸道沿岸漁業視察기 爲야 巡 査 一名과 再昨日에 出發얏 該港日本商業會議所에셔도 視察員 一名 을 同行케 얏다더라
1899년 6월 5일, 南擾稍息, 2면 2단
英學事件으로 南道警報가 連疊기로 外部에서 各公舘에 照會고 各 該國民이 該道에 留駐 者와 今 方前往 者를 召還고 或 防止야 意外의 患을 避케 고 軍部에셔 江華地方隊에 訓令야 兵丁 二百名을 卽速派送라 고 全州鎭衞隊에 令飭야 匪徒를 所在剿討라 얏다
더니 再昨 上午十一時와 昨晨에 南電이 續到얏다 古阜守城軍이 亂 魁 四名과 亂徒 七人을 捕捉얏고 餘黨은 自此壓靖 터이니 京派兵은 停止을 請얏기로 右項外部照會 停止고 江華隊兵은 姑待更訓라
얏다더라
1899년 6월 6일, 迎接節次, 2면 3단
德國親王迎接次로 軍部와 宮內府에셔 各其 官人 幾名式 派送야 仁川 과 五里洞에 舘舍를 修理다 德國親王의 到韓後邀接節次 如左 더라 本月九日上午六時에 到仁, 九時에 上陸, 十時半에 發程, 下午四時에 到南大鬥, 首相及各大臣出迎, 同時에 直到公洞洋屋, 六時에 陛見, 同時에 大皇帝셔 賜宴, 十日早朝에 遊覽東闕, 上午十一時에 大皇帝셔 親 臨公洞親王所, 親王設宴, 下午三時에 各國 公領事會見, 四時에 大皇帝
셔 邀親王看兵士操鍊 六時에 陛見, 皇太子셔 設宴, 十一日에 遊覽景福 宮, 大路馳馬後歷訪各部及各公舘이라더라
1899년 6월 6일, 朝鮮新報辨對論, 1면 1단
向日에 日本新聞紙에 韓國에 對한 政策에 猛進이란 句語가 有기로 數 條를 辨論얏더니 仁川셔 日本人이 刊行 朝鮮新聞紙에 其辨論을 對
야 誤解얏다 反對함이 有한지라 此를 更辨치 아니치 못◈기로 其過 激한 句語를 摘要야 玆論노라 本記者의 所記에 日本이 韓國에 對야 友道가 敦厚치 아님은 아니로 其實은 利益과 勢力에 專注한다 謂할 만
다 얏더니 朝鮮新報記者가 解기를 日本은 自個의 利益과 勢力에만 力을 專注 者오 韓國에 對야 親切한 者에 不有다 얏스니 此 를 辨言진 日本이 韓에 對야 友誼만 敦厚 아니라 利益과 勢 力에도 專注다 謂 만다 言이 로라 有曰 吾輩가 平素에 皇城記 者로 韓民中에 開明思想을 代表 者로 信認얏더니 今에 如斯 誤解를 見 平素信認의 遺憾이 不無다 얏스니 此 揚之抑之 健筆力
이라 然나 矇眛을 自顧건비록 空言이라도 最初에 信認은 堪承 키 難고 追後에 誤認을 悔야 遺憾이 有다 은 實노 本記者의 愧歎 바이로다 有曰 日本은 韓에 對야 利害關係가 진실노 他國에 比 아닌 故로 其利益을 侵害치 안토록 防禦기를 不怠히 다 얏스니 此 卽友誼가 敦厚다 言인즉 此 前報와 已上所辨에 備陳
바이오 有曰 我가 韓國貿易에 努力은 是 我의 利益을 進 로 韓國利益도 進케 이어 胡爲乎此를 畏며 忌리오 얏스니 此
卽利益에 專注다 謂 만다 言이라 此를 畏며 忌다 은 何를 據執야 論及인지 同記者의 自唱自歌인쥴노 可知고 軍隊 電 信 鐵道 郵遞 等事에 至야 卽前에 謂바 勢力이 有다 謂 만 다 言이라 本記者가 當初에 國內治安에 維持力이 無다던지 虛名에 走
고 實質은 忘다고 論 無즉 此 本記者가 日韓干繫에 對야 皮相만 看察이 아니라 實로 同記者가 我所記에 對야 皮相만 看察얏 다 謂 만도다 (未完)
1899년 6월 9일, 益設威儀, 2면 3단
今番 德國親王迎接時에 禮砲를 設할 次로 陸軍一中隊와 砲兵 二十名을 仁川으로 下送고 鷺梁津에 二帆船 十隻을 結着야 往來에 便易케 고 小船 八十隻은 其追從과 迎接 兵士를 乘渡케 기로 准備얏고 內部에셔 技師를 命送야 仁川셔 京江지 治道고 警務使가 上 奏기를 德國親王이 南山을 遊覽기가 可慮이은니 山路를 修治야 陞 降에 便易케 함이 可合할 듯오이다고 하얏다더라
1899년 6월 17일, 獘銀行에셔 貨幣流通기 爲야 仁港圻浦에 支店을 設
事는3) 4면 2단
獘銀行에셔 貨幣流通기 爲야 仁港圻浦에 支店을 設 事는 已爲敬
3) 8월 16일까지 52차례 게재.
白얏거니와 今에 開城北部龍洞에 支店을 又設얏기 仰佈오니 僉君 子 皇城本店이나 仁川 開城 兩支店間에 枉臨시와 貨幣交換기를 望 홈 天一銀行敬白
1899년 6월 19일, 鉄道試運, 3면 1단
仁川來信을 據즉 京仁鉄道 本月十日붓터 軌道敷設에 着手 以後로 漸益進行야 昨日午後에 牛角洞지 已設 軌道에 機關車運轉을 試
더라
1899년 6월 22일, 宮官迎使, 2면 2단
新任駐韓日本特命全權公使 林權助氏가 十八日에 發程渡來다말은 前 報에 記載얏거니와 今에 聞즉 宮內府參理官 申錫麟氏가 迎接次로 仁 川港으로 出去얏다더라
1899년 6월 23일, 南擾의 顚末(續), 1면 1단
全州鎭衞隊에셔 正尉 宋憲冕氏가 兵丁 一百四十名을 率고 古阜로 入
니 匪徒가 聞風失氣야 井邑郡附近地로 退走함 官兵은 一戰을 不勞
고 軍銃 二十柄과 火繩銃 百柄과 彈丸 一箱을 占取고 四日에 匪徒 十 四名을 捕獲야 兵丁으로 야곰 全州로 押送얏 其口招에 此亂에 首謀한 者 古阜人 鄭翼瑞와 泰仁人 金文行과 井邑人 崔益瑞라 기로 右三漢을 捕縛기 爲야 巡檢 十四名을 派送나, 然나 今後에도 匪 徒의 更起함을 慮야 六日에 兵丁 二百十名을 各郡에 分站니 古阜郡에 四十名이오 泰仁郡에 三十名이오 興德郡에 三十名이오 井邑郡에 三十名이 오 扶安郡에 四十名이오 居山에 三十名이더라 先是에 全羅南北道觀察과 鎭 衛地方兩隊에셔 急電이 日로 京師에 報 外部에셔 各國 公舘에 照會
야 該國人이 該地方에 留住 者와 今方 前往 者를 召還도 며 或 防止도 야 意外의 患을 避케 고 軍部에셔 全州鎭衞隊와 光州地
方隊에 訓令야 匪徒를 所在剿討고 江華地方隊에 訓令야 兵丁 二 百名을 卽速派送라 얏더니 南電이 續到기를 古阜郡에셔 亂魁 四名 과 亂徒 七人을 捕捉얏고 餘黨은 自此壓靖 터이니 派兵을 停止라
故로 軍部에셔 江華隊에 專人야 更訓을 姑待라 얏 該隊兵 二百名은 業已發程야 仁港에 到泊지라 卽爲召還다
日本兵艦摩耶号 仁港에 泊在얏다가 此匪徒의 勢力이 蔓延야 其一 部 木浦港으로 向다 報를 聞고 其電訓을 承야 木浦港警備次로 六月二日午後에 拔錨야 該地方으로 向얏더라
李化三은 本京城人인 年今五十이오 其前에 主事職을 經얏다 고 二三年前에 古阜附近地에 船稅徵收事를 司얏더니 昨年에 興德郡으로 來
야 英學黨의 首領이 되얏더라
今에 匪徒의 情形을 推度 者의 言이 或은 彼徒가 其首領 李化三을 救助랴 主意라 나 近來 全羅道가 非常한 旱魃로 麥苗가 盡枯고 秧坂을 未成한 中至貧한 民은 種子도 區處치 못야 一年計活을 思함 蒼天이 杳然한 又況官長의 侵害함을 數被야 正供과 私索을 日로 暇應 치 못니 此民들이 進 告訴處가 無고 退 生活方이 無야 於 木於石에 無處可附라 如此 情況이 다만 該所關五郡 아니러니 此際에 此變亂이 起얏슨즉 其鎭撫 方策을 速行치 아니면 來頭의 民情이 極 憐且慮라 더라 (完)
1899년 7월 4일, 隨聞姑錄, 3면 1단
仁川監理 徐相喬氏 喬桐郡守로 移任고 其代 河相驥氏가 承乏다고 巷說이 有기 隨聞야 姑錄노라
1899년 7월 5일, 富平郡西面後井洞居申泗川永勳의 次子聖奎가 酒色에 放逸
야4), 4면 1단
富平郡西面後井洞居 申泗川永勳의 次子 聖奎가 酒色에 放逸야 外債를 使人謀得 次로 方在京中周旋기로 其父 永勳이가 年近八十에 家産이 蕩敗야 饑死之境을 當오니 누구시던지 該人에계 見欺야 外債를 得給면 法司에 處辦을 難免 터이오니 後悔를 勿致시오 申永勳 告白
1899년 7월 6일, 江華河陰面富近洞居黃正煕의 三從弟明煕가5), 4면 2단 江華河陰面富近洞居 黃正煕의 三從弟 明煕가 去月分에 其三從兄 正煕家 에 來留數十日다가 該家壁帳에 深置 該近地所在田畓十餘石落文券을 暗地盜去야 私自放賣려 다 오니 누구시든지 有主之物을 不良人에 게 見欺買得지 말으시오 黃正煕 告白
1899년 7월 22일, 常備艦隊, 3면 2단
日本常備艦의 夏季航海 前報에 已載얏거니와 鮫島長官은 嚴島, 明 石號를 率고 楊子江方面으로 向고 角田少將은 高砂, 浪速을 指揮야 北淸及韓國西岸으로 向고 日高少將은 松島, 秋津洲를 指揮야 韓國東岸 及俄領方面으로 本月十四五日頃에 發航야 本月廿五日頃에 仁川으로 寄 航한다더라
1899년 7월 25일, 外遞設始, 3면 2단
萬國郵遞章程實施前에 諸般事務를 整理기 爲야 郵遞敎師 吉孟世 主 事 韓基準 通辯 崔鎭永 諸氏가 本月廿八日頃에 發程야 仁川 木浦 釜山 元山 四港場으로 前進야 地形을 踏査야 開暢地에 郵司를 擇定고 外 遞를 設다더라
4) 6월 26, 27, 28, 29, 30, 7월 1, 3, 4, 5일에 게재.
5) 1899년 6월 26부터 1899년 7월 6일까지 10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1899년 7월 27일, 仁羣郵便, 3면 1단
群山은 新開港 後에 槪況이 漸次 發達 仁川日本郵局에셔 仁港과 羣山間에 郵便物을 次便붓터 發行 該郵物은 慶濟 明洋 二隻에 托送 기로 얏더라
1899년 8월 4일, 商會逼校, 2면 3단
江華負商들이 該府公立小學校를 商會所로 開設랴고 私力으로 勒迫
故로 該敎員이 學部에 擧報얏더니 該部에셔 該府에 訓令기를 商會開設 이 不患無處어 奈之何로 學校를 來逼지 夫學校 敎育 地라 關 係가 甚重니 另飭商會야 校務에 妨害됨이 無케 라 얏다더라
1899년 8월 17일, 飭收庖稅, 2면 3단
昌原監理 庖肆准許狀을 不受고 自意로 設庖야 監理署庖肆라 稱
고 公課를 拒納며 東萊府에 戊己兩年庖稅中七百十三兩五戔을 該港 警署巡檢 金商泳이가 從中挪用고 推託不納다고 該道派員이 農商工部 에 報얏더니 該部에셔 嚴辭發訓야 罰金與已屠之稅를 這這收納케 다 더라
1899년 8월 18일, 郵司還京, 2면 3단
郵遞敎師吉 孟世氏와 韓基準氏가 仁川 木浦 釜山 元山 四港에 進往야 外遞司設寘 形便을 踏勘고 昨日仁港에 到泊야 今日에 入城얏다더라
1899년 8월 25일, 鐵道罰則, 2면 2단
京仁鐵道會社에셔 敷設工役이 不久에 告竣야 漢江架橋外에 仁川 露梁 間行車를 開始 터이라 該線路建造物의 保全과 人畜의 觸傷을 預防기로 農部法部에셔 該當 罰則을 議定 中이라더라
1899년 8월 26일, 醫師到泊, 2면 3단
醫學校敎師古城 梅溪氏가 月前 歸國얏다가 該學校의 開學이 在邇함 으로 再昨日에 釜山港에 到泊얏 今日은 仁川港으로 自야 入城할 덧다고 더라
1899년 9월 8일, 各港日人, 3면 1단
去七月末의 調査를 據즉 仁川에 在留 日本人口 四千四百十二 人, 平壤은 四◈人, 甑南浦 三百五人, 馬山浦 八十二人이니 總計 四千 九百三十四人이더라
1899년 9월 11일, 派一中隊, 2면 3단
檢蔘一行이 開城으로 發往은 向報에 已記얏거니와 現에 海州 黃州 江華 各地方隊兵丁도 各幾十名式 派送야 潛蔘과 搶採 防禁다
日前에 日本商民 六七十名이 仁港에셔 韓國船隻을 貰乘고 開城으 로 駛往얏다더니 其間에 무 事端이 起얏지 再昨日에 侍衛隊兵丁 一中隊 發야 開城으로 倍道行陣얏다더라
1899년 9월 12일, 萬國通信, 3면 1단
日本人은 仁川 元山 木浦 甑南 四港에 中央氣像臺 築야 本月二十日 붓터 電報 發通고 法國人은 上海徐家滙天文舘에 所管한 報風電信을 大韓電報局으로 由야 萬國에 遞傳할 事로 該報費 免케 야 달나고 日法兩公使가 外部에 照會얏다더라
1899년 9월 13일, 元港爭端, 2면 3단
元山港에셔 日本兵丁과 我國商民이 相詰다 은 前報에 記얏거니와 今聞즉 該港監理 尹致昊氏가 外部에 報告기 日本船人이 海關에 下 陸야 監理署使令과 其他 下隷로 互相爭詰타가 敺打之境에 至야 我國
人 四名은 死境에 至고 被傷 者ㅣ 無數지라 港口人民들이 忿激을 不勝야 屯聚 者ㅣ 三四百名에 至기로 一面으로 人民에게 曉諭고
該港日領事에게 照會얏스나 日本船人과 港口人民이 各聚不散야 其 光景이 甚危다고 얏다더라
1899년 9월 13일, 姑無蔘警, 3면 1단
日來에 日本商民들이 開城으로 發向은 前報에 記얏거니와 今聞즉 松京附近地에 日來新到 日人은 現無고 該地에 從前 居留던 日人 四 五十名인 日昨에 日商들이 船隻을 搭乘고 新堂浦와 江寧浦 等地에 到泊야 浦邊蔘圃에 着手랴다가 兵丁과 巡檢의 攔佳을 被야 卽地 退去고 別樣警動은 現無다 蔘政官吏들은 이믜 採蔘의 役을 始
야 本月十日에 擧火(蒸蔘)얏고 現下 蔘圃防護兵은 原駐兵外에 江華兵 一 百五十名, 海州兵 一百名, 京兵 一中隊가 增進얏다더라
1899년 9월 15일, 學事, 2면 2단
金浦郡公立小學校副敎員 李義洛은 論報寮員이 極爲爽實기 免本任할 事, 慶尙南道觀察府公立小學校副敎員 鄭弘濟 解任고 黃炳周로 任用 며 慶尙北道觀察府公立小學校副敎員 李斗錫은 解任고 趙漢九로 任用 며 務安港公立小學校副敎員 金顯弼은 解任고 金潤浩로 任用며 江華府 公立小學校副敎員 은 朴承台로 振威郡公立小學校副敎員은 趙東翊으로 洪州 郡公立小學校副敎員은 尹致華로 任用事
1899년 9월 15일, 車運改定, 3면 1단
京仁鐵道會社에셔 仁川 露梁間 輪車始運式을 本月十五日에 行다고 向 報에 已載얏더니 更聞즉 該會社에셔 貿來 要用物品이 暴風雨를 因 야 船運이 遲着됨으로 豫期로 實行치 못고 其運車日을 追定다더라
1899년 9월 16일, 十八日行, 3면 2단
京仁鐵道會社에셔 仁川 鷺梁間 運車日을 追定다더니 今에 該社의 請 帖을 接즉 本月十八日上午九時에 永登浦 假設停車場에셔 列車를 始發 야 十時半에 仁川에 到야 該地에셔 立食을 供고 下午一時에 仁川에셔 旋發야 二時半에 永登浦에 到야 京城來賓을 送고 三時에 更發야 四時半에 歸仁기로 豫定얏더라
1899년 9월 20일, 申商路訴, 3면 1단
延安郡居 商民 申子玉氏가 昨年六月에 白米 三十餘石을 貿得하야 船隻 에 裝載하고 江華府末島에 到泊하야 放賣하니 價文이 一萬三千兩이라 忽地 에 賊漢 十餘名이 暮夜에 乘船來到하야 搶奪而去거 追後 探知즉 該 敵黨이 海州居 張宗錫 等이라 申氏가 呼訴本府야 張漢을 跟捕야 査問 得情얏스나 該府總巡 吳冀叔氏가 무 所由인지 該錢懲給할 究竟은 無
고 賊漢으로 私和라고 强勸니 賊贓等事에 如此히 措處면 人民이 何를 依야 生리오 고 申氏가 日前에 內部大臣에게 路訴얏다더라
1899년 9월 21일, 米價稍騰, 2면 3단
仁川港에셔 日商이 貿米 該港時價가 稍騰다 傳說을 聞고 沿江商民들은 乘機踊價함 日間市値가 每升五六分이 加더라
1899년 9월 26일, 度支懸罄, 3면 1단
地方各郡稅納은 貪官奸吏의 圖囑費와 京鄕有勢者의 外劃으로 入고 國 庫輸納은 無幾 度支部에셔 本月俸金의 頒給이 無路다더니 今聞한즉 度支에셔 仁川典圜局에 懇求야 鑄貯한 白銅貨 輸來야 皇室費도 封 進고 軍警兩處의 月俸을 分俵할 터이오 他各部에 波及할 計劃이 全無
다더라
1899년 10월 12일, 宮府派員, 2면 1단
李景仁氏가 宮內府船稅派員이라 고 江華各嶋에 前往야 船稅를 勒捧
기로 該郡居 梁聖煥 等이 農部에 鳴寃얏더니 農部에셔 從法歸正을 宮府에 照請얏스되 歸正은 無日고 李氏의 憑凌嚴督은 現下 難堪 다고 梁氏가 農部에 再次 呼訴더라더라
1899년 10월 13일, 永宗設校, 1면 3단
仁川監理 河相驥氏가 永宗鎭에 小學校를 設始야 人民를 敎育다고 學部에 請願얏다더라
1899년 10월 16일, 郵期改定, 2면 1단
漢城과 仁川間에 郵遞物發送 時限을 本月十五日붓터 每日下午一時 와 七時로 改定얏더라
1899년 10월 16일, 派員報請, 2면 2단
仁川船稅委員 金星模氏가 管船課에 報告기를 現捧한 船稅憑票金이 六 百餘兩이라 船舶이 東西散在에 尺量이 不齊고 査檢等節에 巡檢 二人 과 使令 一名의 幫助가 有나 抵應키 初難니 使令 一名을 加定고 食費 每日 二角式 差下라 얏더라
1899년 10월 25일, 防糓非惠, 2면 3단
一友人이 江華府에셔 移家야 上京 船載 什物을 攔阻야 出 境치 못지라 其由를 問즉 一府에 防糓令이 甚嚴이라더라 우리 竊想컨 該境內에 年榖이 不登야 民食이 不足기로 此令을 下인 듯 此 少惠라 엇지 民間에 普及리오 夫物은 通行을 便利케 이 可니 防糓으로써 榖價를 低落면 目下에 少利 有 商客이 不入
터인즉 前途의 困難은 何로써 補充며 尤況外國人이 貿糓면 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