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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서 300여 킬로미터나 더 멀지만 동일한 운임을 적용한 것이다. 예를 들면 鐵嶺에서 大連 항만에 발송하는 화물의 운임은 1톤에 14.65엔, 개원은 15.70엔, 昌圖는 16.65엔이었으나 이를 營口으로 발송하는 운임과 같은 철령 7.40엔, 개 원 7.96엔, 창도 8.46엔으로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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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철령 이북, 공주령 이남에서 大連 항만으로 발송하는 화물의 운임이 35-40% 줄어들었고 공주령 이북도 45-50%나 줄어들었다. 滿鐵은 이 특수 운임제도에 대하여 수차 조절하여 그 범위를 旅順 과 丹東까지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물의 수량에 대한 제한도 취소하여 石 을 단위로 하는 소화물에도 적용하였다. 특수 운임제도로 滿洲 남부지역의 수 출화물들이 大連 항만으로 집결되기 시작하였는데, 당연히 大宗 화물인 大豆와 그 제품들이 선두를 점하였다.

滿鐵이 大豆 및 제품의 철도수송을 독점하여 이들을 모두 저들이 장악한 大 連과 丹東으로 집결시키기 위하여 취한 다른 조치는 ‘北貨南運’이라는 용어 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南滿철도와 東清철도의 화물수송을 연결시키는 방법 으로 北滿지역의 화물, 주요하게 大豆를 다롄 항만에 집결시켰다.

음과 같다.

1907년 4월부터 滿鐵이 공식적으로 大連 부두사무를 시작하여 大棧橋事務所 (大連埠頭事務所의 前身)를 설립해서 항만 관련 각 작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그 러나 여러 선박회사 지점과 노무관리 대행사가 난립하고, 감독하는 기관도 없 어서 하역작업과 관련된 세력 사이에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초기에 항만의 하 역문제가 많아서 항만 기능의 순행에 큰 지장이 되었다. 일본의 門司港에서 노 무관리를 경험한 경력이 있던 相生由太郎(아이오이 요시타로)이 大連埠頭의 항 무과장의 추천으로 大連 부두 조사를 부탁했고, 곧 이어 相生은 大連埠頭事務 所 소장을 맡았다. 1909년 滿鐵은 그에게 항만하역 청부 사업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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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는 福昌公司를 설립하여 大連의 하역노동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1월에 들어 이사인 沼田政二郎(누마타 세이지로)은 埠頭事務所 소장 楢崎豬太郎(나라자키 이타로)에게 相生과 하역노동자 공급 계약서를 작성 하고 그 청부계약서의 제출을 명령하였다. 楢崎는 그 뜻을 전하고 相生은 곧바 로 계약서 안을 제출하였다. 相生이 제출한 계약서 안은 나라자키소장을 통하 여 滿鐵에 회송되어 沼田이사가 의견을 첨부하여 이사회에 제출되었으나, 마지 막으로 이를 본 이사 犬塚信太郎(이누즈카 노부타로)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라고 되돌려 보냈다. 犬塚 이사는 “42년(1909년) 하역노동자 공급을 명령한 이 래 아무런 문제없이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계약서를 만들 필요가 없다. 만약 있었다면 명령이 내려졌을 때 제작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계약서 가 있으면 일을 속박해서 相生에게 이래저래 귀찮았을 것이다. 계약서가 없으 면 불편한 경우가 발생했을 경우 바로 일을 취소할 수 있다. 相生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부두에 관한 일은 相生에게 맡겨두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78)

이러한 사실은 당초 滿鐵과 相生 사이에 계약서 없이 하역노동의 청부가 맡 겨졌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첫째로 滿鐵과 相生 사이의 막역한 인간 관계가 청부의 수주를 가능하게 한 요인임을 의미한다. 둘째로는 相生이 노동 력의 모집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항만하역 노동력의 공급에 독점적인 지위 77) 國澤新兵衛, 『滿洲と相生由太郞』, 福昌公司互敬會刊, pp.955-956.

78) 遼寧省檔案館編, 『滿鐵與勞工』, 제1집(6), 廣西壯族師範大學出版社, 2003.8, p.282.

를 확보하고 있었을 보여준다. “하역노동자 공급을 명령한 이래 아무런 문제 없이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라는 발언은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약서가 있으면 일을 속박해서”라는 발언은 계절과 화물의 물량에 따른 노동자 공급의 파동성을 의미한다. 그의 노동력 공급에 관한 그의 독점적 지위는 다음 1919년 의 사례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919년 여름, 野村龍太郎(노무라 류타로)이 滿鐵사장이었을 때 부사장이던 中 西清一(나카니시 세이이치)은 부두苦力의 공급 청부를 相生으로부터 탈취하려 는 의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滿鐵의 기관지 『滿洲日日新聞』은 그런 뜻을 담 은 논지를 전개하여 相生을 공격하고 하역노동자의 滿鐵 직영을 주장하였다.

相生은 그때 바로 부두의 苦力공급 청부를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혀 기선을 제 압하였다. 滿鐵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로, 이에 대한 연구도 조사도 시설도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당황해 하였다. 결국 中西 부사장 도 언젠가는 이를 해제하고 직영으로 할 방침이지만 당분간은 현상 그대로 苦 力 공급 작업에 종사해 줄 것을 위무하여 마침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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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滿鐵로서는 청부업체에 노동자공급을 맡길 때 회사의 손익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항만하역작업에서 노동자임금은 그 경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 했고, 청부업체 福昌公司가 그 청부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가져갔다. 滿鐵에겐 직영이 회사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길이었다. 마침내 1926년 자연스러운 때가 왔다. 1926년 11월 相生이 병에 걸리자 華工部 사업을 滿鐵이 인수하고자 하였 다. 福昌公司는 시설 일체를 3백만 엔으로 평가해 제시했지만 滿鐵은 감가를 요구해서 평가를 변경해 2백 20만 엔으로 변경하여 제시하였다. 滿鐵은 이를 1 백 80만 엔으로 줄여 다시 요구해왔다. 병중의 相生은 이를 듣고 滿鐵에게도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곧바로 동의를 표하였다. 滿鐵은 1백 80만 엔 으로 福昌公司 華工部 사업을 인수하여 새롭게 자본금 1백 80만 엔의 福昌碧山 莊華工寄宿舍株式會社 즉, 福昌株式會社를 조직하였다.

80)

당시 大連 상공업계의 거두 相生이 순순히 滿鐵에 福昌公司를 싼 가격에 넘 긴 것은 福昌公司를 통한 이윤의 획득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점을 반증하는 일

79) 國澤新兵衛, 앞의 책, pp.193-194.

80) 國澤新兵衛, 앞의 책, p.964.

이기도 하다. 분명한 점은 청부이든 직영이든 大連 항만의 항만하역작업은 하 나의 회사가 전담하는 형태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청부업체 福昌公司에 대 하여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검토하겠다.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경영 하에 大連은 신속하게 세계무역항으로 성장 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大連을 거점으로 여러 정책을 통해서 滿洲 지역에서 원 초적 형태의 자원약탈을 진행한 결과였지만 만주사변 이전의 20년은 大連 항만 발전의 중요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大連 항만은 滿洲 특산물의 대외 수출을 위주로 한 세계무역항이 되었다.

<그림5> 1922년 大連 항만만의 대외무역 분포 (단위: 千海關兩)

*輸入 輸出

출처: 滿鐵庶務部調査課 編, 『大連港勢一班. 大正十一年』, 滿鐵, p.20.

<그림5>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大連은 항만을 통해서 세계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大連 항만의 세계무역 금액을 보면 아시아 와의 무역금액(79,669, 44,729)이 가장 많았으며 그 순서는 일본(66,454, 40,216), 조선(4,025, 716), 네덜란드領 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 6,425, 845), 그리고 홍콩(1,941,1,750)의 순이었다. 유럽(10,238, 5,439)에서는 주로 영국(4,630, 3,033) 과의 무역이 많았고, 아메리카(4,548, 15,423)에서는 북미합중국(4,440, 14,898)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大連 항만의 대외무역 상황에 의하면 아메리카 이외에 모든 국가와의 수출금액이 수입금액보다 많았다. 따라서 大連의 항만무역이 수 출을 중심으로 하였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1908-1930년 大連 항만의 주요 대외수출화물 관련 자료를 보면 滿洲지역의 특산물인 大豆三品(大豆, 豆粕, 豆油의 총칭)이 주요 수출상품이었다 (<부표3>).

1908년 大豆三品을 이용한 유럽시장의 개척으로 인해 大連 항만은 세계 주요 항만들과 연결된 국제적인 항만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동시에 大豆三品은 독립 된 상품으로서 세계시장에서 유통하게 되었다. 1920년대 전에 大豆三品의 수출 량은 대체적으로 증가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그들의 비율은 제일 많은 때에 항 만 전체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였다. 수출이 우위를 차지하던 大連 항만에서 매일 엄청난 양의 大豆三品이 기차와 윤선을 통해서 전 세계로 판매되었다. 이 로 인해 大連 항만은 "大豆의 大連"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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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關東廳 編,「千九百九年貿易概覧 大連」, JACAR:B03050338500 (第 42 畫像目), 各 國事情關係雑纂/支那ノ部/奉天省 第二巻(A-6-1), 外務省外務史料館.

제3장 大連 항만 하역체제의 확립

항만기능의 수행은 앞의 2장에서 언급한 항만의 발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만하역이 항만발전에 따르지 못하면 滯船이나 滯貨가 쉽게 일어날 수 있고, 결국은 도시와 국민경제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항만 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항만하역이 능률적으로 수행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항만하역의 효율화 수준은 항만기능의 발휘에 가장 중 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항만운송사업법 제2조에 의하면 항만하역이란 선박화물의 揚積荷작업 에서부터 보관, 장치, 운송 등 항만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一連의 화물취급을 말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3장에서는 大連 항만의 하역체제가 어떻게 확립되었 는지를 살펴보자고 한다.

제1절 항만 하역시설의 구축

항만 기능의 요인을 보면 하역, 운반, 보관의 대상은 화물이며 이 작업의 주 체는 인간 즉, 항만노동자이다. 그리고 항만노동자이 작업하는 장소가 항만이며 그들의 작업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하역기계나 도구가 존재한다. 또한 항만은 선박을 위한 충분한 수로와 선박이 안정하게 정박할 수 있는 장소, 여객이나 화물 등을 취급하기 위한 각종 임해시설과 항내의 수상설비 그리고 임항교통시 설 등 물리적인 시설이 구비되어야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우선 大連 항만의 투자에 따른 하역시설의 구축 상황을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 서는 주로 항만하역에 관련된 계류시설, 보관시설, 그리고 기계시설 등을 중심 으로 간단하게 고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