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章 老·莊思想의 現代的 示唆
第二節 老·莊思想의 敎育哲學에의 示唆
二. 至一과 天性으로부터 멀어진 敎育
天性을 잃게 된다. 옛사람(연나라의 人君)은 混芒한 가운데 살면서 한 세대의 백성 과 더불어 염담적막한 무위의 도를 얻었다. 그 당시에는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고 요하고, 귀신이 날뛰지 않으며, 네 계절이 순조로와 만물이 상하지 않았고, 모든 생 물이 夭死하지 않았다. 사람도 비록 지혜가 있었으나 쓸 곳이 없었다. 이것을 일러 至一 이라 한다. 그 당시에는 인위적인 행동이 없었고 만물은 항상 自然 그 자체일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인군의 덕이 차차 약해져 수인씨나 복희씨때에 이르러 인위 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백성은 자연에 순응은 하면서도 하나가 되지는 못하 였다. 덕이 더욱 쇠약해져 신농씨나 황제의 세상이 되어 더욱 인위로써 세상을 다 스리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편안히 살면서도 자연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덕이 다시 쇠하여 요나 순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인위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그래서 政治나 敎化의 流弊로 순박함이 흐려지고 소박함이 흩어졌다. 그리고 善을 위해서 道를 떠나고 덕을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그런 뒤로 천성을 버리고 인심을 따라 행동 했으므로 서로 마음대로 앎없이 세상을 평정 하려했다. 그 뒤 文華를 더 하고 博學을 더하여 문화는 질박함을 없애고 박학은 마음을 어지렵혔다. 그런 뒤에 백성들은 비로소 惑亂 하게 되어 본연의 性情으로 돌아가서 태초의 至一 의 상태로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11]. 이로 볼 때 세상은 도를 잃고 도는 세상을 잃어 세상과 도가 서로 분리되어 버렸으니 도를 행하는 사람인들 무슨 수로 세상을 부흥시키며, 세상 또한 무슨 수로 道를 부흥시킬 것인가? 도가 세상을 부흥시킬 수가 없고 세상 이 도를 부흥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는 비록 성인이 산림속에 파묻혀 있지 않더라도 그의 덕은 숨겨지는 것이다. 덕이 숨겨 졌으나 스스로 숨긴 것은 아니다. 옛날의 이 른바 隱士란 그 몸을 숨기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또 입을 닫고 말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지혜를 감추어두고 드러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時世의 운명이 크게 글렀기 때문이다. 시세의 운명이 맞아 그 생각을 천하에 크게 실천할 수 있다 면 세상을 至一의 세상으로 돌이켜 인위의 자취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세의 운명을 만나지 못해서 천하에서 크게 궁하게 된다면 다만 본연의 性命을 깊 고 편안하게 갖기를 힘쓰며 새로운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몸을 편안하게 유 지하는 방법이다. 옛날에 몸을 편안히 유지한 자는 변론으로써 자기의 지혜를 수식 하지 않고 지혜로써 천하 만물의 이치를 규명하려 하지 않으며 또 지혜로써 덕을 규명하려 하지 않고 홀로 자연적인 처소에 거처하면서 그 본성으로 돌아갈 뿐이었 다. 그러면서 또한 어떤 인위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란 본디 仁義 같은 작은 덕행이 아니며, 덕이란 본디 시비나 변론하는 작은 지식이 아니다. 작은 지식은 도 리어 덕을 상하게 하고, 작은 덕행은 도리어 도를 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바로 잡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래야 온전함을 즐기는 것이니 이를 일러 뜻을 얻었 다고 하는 것이다. 옛날의 이른바 뜻을 얻었다는 것은 높은 벼슬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즐거움을 더하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 늘날에 뜻을 얻었다는 것은 벼슬을 가지고 말한다. 벼슬이 우리 몸에 있어도 그것 은 본래부터의 우리의 性命이 아니요, 外物이 우연히 우리 몸에 일시적으로 와서
붙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우리 몸에 와서 붙어 있는 것은 그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 떠나가도 말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벼슬을 한다고해서 그 뜻 을 교만하게 갖지않고, 곤궁에 빠진다 해서 세속에 붙좇지 않는다. 그 마음의 즐거 움은 벼슬이나 곤궁에서도 한결같기 때문에 근심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 기 몸에 붙어 있던 벼슬 등이 떠나가 버리면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로 볼 때 비록 벼슬을 하여 즐거울 때에도 未嘗不 마음은 본성을 떠나 거칠 었던 것이다. 그러므 로 ‘외물 때문에 자신을 잃고 속세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은 本末顚倒의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하였다. 즉 태고 적에는 無爲自然의 본성에다 근본을 두었 기 때문에 진정한 인·의·충·악·예가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 올수록 形式化되어 가면 서 본연의 德을 잃어 가고 있다고 논했다. 삼황시대로부터 오제시대로 내려오면서 점차로 이런 德目이 形式化되어 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儒家의 덕목을 인정하면서 도 정통 유가설의 상대적인 입장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장자는 《莊子》外篇 第11〈在宥〉에서 현재 우리가 교육적으로나 인간 본성적으 로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聰明仁義禮樂聖知의 項目에 대헤, 이들은 인간 本性 을 잊게하고 顚倒하는 미혹함으로 단정하고 있다. 〈在宥〉篇에 “而且說明邪 是淫 於色也. 說聰邪 是淫於聲邪也. 說仁邪 是亂於德也. 說義邪 是悖於理也. 說禮邪 是相 於枝也. 說樂邪 是相於淫也. 說聖邪 是相於藝也. 說知邪 是相於疪也. 天下將安其性命 之情 之八者 存 可也. 亡 可也. 天下將不安其性命之情 之八者 乃始臠. 卷愴囊而亂天 下也. 而天下乃始尊之惜之. 甚矣 天下之惑也. 豈値過也而去之邪 乃齊戒以言之. 跪坐 以進之. 鼔歌以儛之. 吾若是可哉. 그러므로 明을 즐기면 색에 빠지게 되고, 聰을 즐 기면 소리에 빠지게 되며, 仁을 좋아하면 德을 어지럽히고, 義를 좋아하면 理에 어 긋나며, 禮를 좋아하면 技를 더 대하게하고, 樂을 좋아하면 음탕함을 도우며, 聖을 좋아하면 藝를 더하게하고, 知를 좋아하면 남의 흠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세상이 바야흐로 그 생명의 진정에 편안할 수 있다면 이 여덟 가지는 있어도 좋을 것이고 없어도 좋을 것이다. 세상이 그 性命之情이 불안정하면 이 여덟 가지는 곧 엉키고 설켜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곧 이를 존중하고 아낌이 심하여 세상의 미혹함이다. 다만 일시적 방편으로서 이용하고 끝나버리면 그만일 것이나 이들은 곧 목욕재계하고 그것들을 말하며 꿇어앉아 그것을 바치며 북치고 노래하며 그것을 떠들어대니 내 이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다. 즉 인간 최대의 善 情의 상태는 나면서 부여받는 천하의 氣와 德 아래에서, 마음속이 虛寜하고 욕심을 찾아볼 수가 없으며(無爲), 大 自然속에서 大地의 德을 함께 누리므로 豐足하고 의 심이라고는 없는 淳朴함을 유지한 락을 樂과 非樂으로 구분되지 않는 原樂을 즐김 일 것이다. 그러나 聰明仁義禮樂聖知의 구분을 하며 더욱더 탐닉이 생김으로 자연 본성에 멀어지고, 낙원적인 삶의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러면서도 樂이라고 생 각하는, 자연의 덕을 받고 있는 인식이 전혀 없는 백성들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런 구절은 舊約聖書에 나오는 두 인간의 에덴이라는 자연의 덕에서 점점 멀어짐을 연 상시키고, 결국은 大自然의 德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고생과 고생속에서의 小穫
을 樂이라고 밖에 여기지 못하는 타락이 아니라, 가히 불쌍한 인간들을 만들어 냄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莊子는 일찍이 이렇게 道와 德에서 멀어지는 인 간에 대해 聰明仁義禮樂聖知의 사회적 항목들이 최선으로 보이나 인간 본연의 天性 에서 顚倒됨을 간파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은 인간 윤리면에 서도 적용 가능 하겠으나, 우선 교육현장에서의 주장들이 산재하므로, 교육철학적으 로 적용하여 그 시사함과 폐단에 대한 해결책을 충분히 얻어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