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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洞 간 위계와 호 조정 방식

신호적에 등재된 호가 조선후기 호적에 등재된 호와 마찬가지로 편제 된 것이라면 호 변동 역시 호정운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한제국 기 위계화된 ‘군-면-리-동’ 행정체계 하에서 각 행정단위는 호정운영에 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가. 여기에서는 리가 세분화되면서 등 장한 리-동 사이에서 상위 행정단위의 지배력이 어떤 식으로 하위 행정 단위에 미치고 있었는지 양자 간의 위계에 주목할 것이다.

광무 3년과 광무 4년 해산면 호적에서 동일한 호구를 찾아내 연결하여 호구 변동 양상을 검토할 수 있다. 광무 3년 호적에 등재된 1,624명 중 1,346명이 광무 4년 호적에도 존속하였고 278명이 탈락하였으며 331명이 새로 등장하였다. 호는 전체 387호 중 37호가 탈락하고 37호가 새로 등 장하였다.327) 전체 중 10%의 호, 17%의 사람이 다음 해의 호적에 다시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1년 만에 해산면을 떠나 다 른 지역으로 옮겨간 것일까? 이는 호적 분석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해 산면 호적과 목장양안 제작 순서[광무 3년 호적(1월) → 광무 3년 목장 양안(8월) → 광무 4년 호적(1월) → 광무 6년 목장양안(7월)]를 감안하 여 광무 3년-4년 사이의 호구변동과 광무 3, 6년 목장양안의 작인 기록 을 상호 비교해 보자.

<표 3-12>를 보면 광무 6년 양안의 작인 중 광무 3년 해산면 2리 호 적에 기재된 작인은 총 108명이고 그 중 12명이 탈락하였다. 이 탈락자 들은 광무 3년-4년 사이 해산면 2리 호적에서 탈락한 호 19호 중 9호의 호주이기도 하다. 즉, 광무 3년 호적에서 탈락한 사람 중 약 절반은 3년 뒤에도 여전히 이 지역에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다. 단적인 예가 장용원의 사례이다. 장용원 호는 광무 3년 호적에서 사 기동 5통 3호에 등재되어 있었으나 광무 4년 호적에서 탈락하였다. 그런 데 장용원은 광무 3년 양안은 물론 광무 6년 양안에도 사기 지역 작인으 로 등재되었으며 광무 6년 양안에서는 사기에서 집주인으로 기록되어있 327) 본 논문 3장 1절 참고

다. 즉 호적에서 사 라진 호구 중 일부 는 여전히 해당 지 역에 거주하면서 생 활을 영위해 나갔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표 3-12>에서 광무 3년 호적에는 기록이 없다가 광무 4년 호적에 새로 등장한 사람이 총 8명이며 이들은 2리의 신입호 19호 중 7호의 호주이다. 이들 중 7명 은 5개월 전에 만들어진 광무 3년 목장양안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광무 3년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과 삼촌지간, 사촌지 간 등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호적에서 새로 등장하는 사람 중 일 부는 원래 이 지역에 있으면서도 호적에 등재되지 않다가 특정 시점에 호구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광무 3-4년 사이 호가 이동한 경우를 검토해보자. 광무 3-4 년 해산면 호적에서 里 사이 호 이동은 전혀 없으므로 洞을 분석 기준으 로 삼는다. 해산면 2리 호적에서 이동한 호는 해산면 호적에서 아예 탈 락한 호(D) 19호와 다른 동으로 전출한 호(A) 12호를 합쳐 총 31호가 된다. 2리에 소속된 총 157호 중 약 20%의 소속 행정단위가 바뀌는 것 이라 결코 적은 사례는 아니다. 나아가 두 해 동안 총 호수가 동별로도 똑같이 유지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같은 동 안에서 호의 총 감 소분(A+D)과 총 증가분(B+E)을 더하면 0이 되고 2리 내에서 이동한 호 의 소계(C)와 해산면 호적 전체에서 탈락하거나 새로 등장한 호의 소계 (F)를 더하면 정확히 0이 된다.

호적에서 호의 동 이동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호 적에서 3년간 동 이동이 확인되는 호를 제시하고 이를 목장양안에 기재 된 이들의 경작지 지명 기록과 비교하였다.(<표 3-14> 참고) 광무 2년 의 동명은 광무 3년 호적에서 前居地란을 통해 확인하였다.328) 위에서

사람 존속여부

광무 3년 호적의 양안 작인

광무 4년 호적의 양안 작인

존속 96

탈락 12

신입 8

<표 3-12> 광무 3-4년 해산면 2리 호적에서

광무 6년 양안 작인의 존속 여부 (단위: 명)

제시한 사례를 동 이동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3년 동안 소속된 동이 A동 → B동 → A동으로 변하는 경우 로 1, 4, 11, 12번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이것이 실제 이주를 반영한 결 과라면 이들은 A동에 거주하다가 1년 뒤 B동으로 이사한 후 1년 뒤 굳 이 다시 A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번째는 3년 동안 소속된 동이 A동

→ B동 → B으로 변하여 A동에서 B동으로 아예 이주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3, 5, 6, 7, 8, 9, 10번 사례). 그런데 3번과 10번의 경우 광무 6 년 목장양안에서 집주인으로 기록되어 집 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다. 10 번 승윤택호는 광무 2년 이후 호적에서 안동에서 선미동으로 이동하였다 고 하는데 목장양안에 따르면 그의 집은 선미동이 아니라 안동에 있었다 고 한다. 3번 양상천 호는 광무 2년 이후 호적에서 소록동에서 사기동으

328) 광무 3년 호적에는 2리에 속한 호에만 전거지가 17건 적혀있는데 지명만 기재되고 이전 전거지에서 통호수나 이거월일 등은 기재되지 않았다. 호적이 매년 작성되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전거지란과 이거월일란의 기재가 호적이 작성되기 직전 1년간의 이주 기록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거지와 이거월일 기 록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한성부 호적의 분석 사례를 보면 실제로 1년보다 훨씬 이전의 기록, 심지어는 10여 년 전의 이주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金 泳謨, 1982《韓國社會階層硏究》, 일조각, 168쪽 <表 2-23> 참고). 이 글에서 는 당시 호적 작성 주기의 원칙에 따라 1년 전인 광무 2년의 거주지로 기록 하였다.

동명 광무 3년 동별 호수

광무 3년 - 4년 호 변동 여부

광무 4년 동별 호수 2리 내 이동 해산면 외 이동

다른 동으로

전출 (A)

다른 동에서

전입 (B)

소계 (C)

호적 탈락

(D)

호적 신입

(E)

소계 (F)

선미동 37 -2 1 -1 -4 5 1 37

안동 20 -1 1 0 -2 2 0 20

창전동 20 -3 2 -1 -4 5 1 20

영평동 20 0 2 2 -3 1 -2 20

소록동 30 -3 5 2 -5 3 -2 30

사기동 30 -3 1 -2 -1 3 2 30

합계 157 -12 12 0 -19 19 0 157

<표 3-13> 광무 3-4년 2리 호적에서 동별 호 출입 현황 (단위: 호)

로 이동하였는데, 광무 6년 목장양안에서 집이 범우에 있었던 것으로 확 인된다. 범우는 해산면 2리 지명 지도(<그림 3-11>)을 보면 소록과 사 기 사이에 있는 지명이고 대체로 소록동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아래

<표 3-15>참고). <표 3-14>에 등장한 지명을 2리 지도에서 확인하면 거의 모든 경우에 인접한 동 사이에 호 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선미동-안동 간의 이동이 12건 중 5건이나 된다(6, 7, 8, 9, 10번 사례).330)

호적에 등재된 목장양안 집주인을 대상으로 목장양안에 기록된 집의 소재지와 그들의 호적상 소속 동을 비교해 보았다. 총 31명 중 목장양안 의 집 소재지와 호적에 등재된 동명이 일치하는 경우는 17건(54%)이다.

329) 광무 3년 양안에는 호적상 손자인 김문행만 작인으로 기재되었고, 광무 6 년 양안에는 호적상 호주인 김희순, 손자인 김문행이 작인으로 기재되었다.

330) 참고로 광무 3년부터 4년까지 2년간 동 변경 사례에서는 소록동-사기동 간의 이동이 12건 중 4건으로 가장 많다.

호주 성명

광무 2년 호적

광무 3년 호적

광무 4년 호적

광무 3년 양안 필지 소재

광무 6년 양안 필지 소재

소재

1 박지현 창전 소록동 창전동 소록 소록

2 이영 西面 소록동 영평동

3 양상천 사기 소록동 소록동 소록, 사기 소록, 사기,

범우 범우

4 박종수 소록 사기동 소록동 소록, 사기 소록, 사기, 범우

5 이상규 안동 창전동 창전동

6 김길갑 선미 안동 안동 안동 안동

7 임호경 선미 안동 안동

8 김성권 선미 안동 안동

9 김희순 안동 선미동 선미동 안동329) 안동

10 승윤택 안동 선미동 선미동 안동 창전, 안동 안동

11 박영걸 소록 선미동 소록동 12 김상준 창전 선미동 창전동

*비고: 西面은 정주군 면명으로 해산면 북서쪽 소재.

<표 3-14> 광무 2년-광무 4년 호적에서 연속적으로 洞名이 확인되는 사례

목장양안과 호적의 동명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14건(45%)인데, 이 중 소록에 대체로 수렴하는 범우의 사례를 제외하면 12건(39%)이다. 특히 호적상으로는 선미에 속해 있으면서 목장양안에는 집이 안동으로 기재된 경우가 가장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세 행정과 긴밀하게 연계된 당시 행정단위의 성격을 고려하면 호적 상 洞은 행정상 편의를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호는 개 별 세대가 아니고 행정적 필요에 따라 편제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호 적상의 동 역시 마을과 비슷하면서도 층위가 다른 개념이다. 대한제국기 에도 여전히 군별 총액이 하부 행정단위로 분배되었다. 호수는 곧 戶錢 액수이기 때문에 행정단위별로 호수를 최소 수준에서 일정하게 유지시키 는 것이 중요하였다. 즉 중앙정부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지방으 로 미치는 가운데 洞이 호정운영의 기초단위가 되고 있었다.

동의 상위 행정단위로서 리의 지배력도 강화되고 있었다.331) <표 3-13>에서 보듯이 2리에서는 다소 복잡한 매커니즘을 통하여 리별 호수 는 물론이고 동별 호수를 고정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상위 행정단위인 리의 지배력이 하위 행정단위인 동에 미치고 있었던 예이다.

리 단위에서 동별로 파악된 호를 수합하여 총액에 맞춰 조정하는 과정에

331) 해산면 호적에서 1리, 2리, 장도리가 각각 자체적으로 운영되었음은 본고 3 장 1절 참고.

목 장 양 안

지명 선미 안동 창전 영평 소록 사기 범우

선미 10

안동 1

창전

영평 5

소록 5 2

사기 6

기타 1 1

<표 3-15> 광무 6년 목장양안 가주의 호적 등재지 (단위: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