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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 간 위계 확립과 그 기능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강해지면서 말단 행정단위에 여러 변화가 초래되었다. 里 예하에 洞이 설정되어 리-동 간 위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고 여전히 면 예하에 동리가 혼용되면서도 동리가 세분화되 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서는 리-동 간 위계가 잘 구축된 평안북도 정주 군 海山面 신호적280)을 분석하여 면-리-동 체계가 호정운영에서 수행한 기능을 살펴보겠다.

신호적 중 광무 3년(1899)과 광무 4년(1900)에 제작된 평안북도 정주 군 해산면 호적이 남아있다. 신호적이 작성된 기간이 총 10여년으로 길 지 않은데다가 한 지역에서 단 한 해의 호적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다수 라서 시계열적 분석에 한계가 있는 편이다.281) 해산면 호적은 1899년(광 무 3)과 1900년(광무 4) 연속된 두 해의 호적책이 모두 첫 호부터 마지 막 호까지 그리고 맨 마지막에 已上條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두 해의 기록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변화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주군 해산면은 1789년 《호구총수》, 19세기 초반 군현지도인 《廣 輿圖》, 18세기-19세기에 편찬된 읍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282) 1872년 지방지도 중 정주목 지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 정주목 西面 일부였다가 19세기 중반 어느 시점에 面으로 독립한 것으로 추측된 280) 인하대학교 근대호적 연구실, 1899 《平安北道定州郡戶籍表案第九海山》

(원문: 일본 學習院大學校 도서관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MF0008883); 인하대 학교 근대호적 연구실, 1900 《平安北道定州郡戶籍表案第九海山》(원문: 일본 學習院大學校 도서관 소장, MF0008883)

281) 예를 들어 한성부의 호적은 1896년, 1903년, 1906년 등 세 년도의 호적이 남아있는데 같은 지역[坊]에서 다른 년도의 호적이 중복되는 경우는 7방 밖 에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吉田光男, 1993 위의 논문 참고.

282)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전국지리지 《輿地圖書》 定州牧 坊里條 에는 해산 면이 없고 西面坊에 장도리가 포함되어 있다(이철성 역주, 2009 《여지도서 22 평안도》, 디자인흐름). 광무 3년(1899) 전국 읍지 상송령에 의하여 만들 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定州邑誌》에서조차 여전히 해산면이라는 지명을 찾 아볼 수가 없다(이태진·이상찬 편, 1990 《朝鮮時代私撰邑誌》, 韓國人文科學 院).

다.283) 신호적이 작성되던 1899 년(광무 3)과 1900년(광무 4) 당 시 해산면은 平安北道 定州郡 읍치에서 서남쪽으로 40여리 떨 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郭山郡 에 인접해 있는 해안가 지역이 었다.

1899년 해산면 호적책에는 총 387호 1,663구284), 1900년 호적 책에는 총 387호 1,686구285)가 기재되어있다. 해산면은 一里, 二里, 獐島里286)로 구성되었다 (<그림 3-5> 참고). 1899년에는 1리 예하에 9동이, 2리 예하에 7 동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 중 2 리 장도동은 2리 내 다른 동과 달리 통호수가 따로 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적으 로 운영되었던 듯하며 이에 따 라 1900년 호적에는 2리로부터 분리되어 장도리가 되었다.

1899년 해산면 호적에 등재된 387호 중 350호(90.4%)는 1900년 호적에 도 다시 기재되었다.287) 나머지 37호는 1900년 호적에서 존재를 찾을 수 283) 《호구총수》7책 평안도 정주 西面坊에 장도리와 도치곶리라는 지명이 등 장하여 해산면이 원래 서면 영역임을 알 수 있다. 해산면에서 장도는 <그림 3-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섬의 명칭이고, 도치곶은 목장이 있었던 해안가 지명이다. 본고 3장 2절 참고.

284) 호적책 말미의 이상조에는 1,720구로 기록되었다.

285) 호적책 말미의 이상조에는 1,677구로 기록되었다.

286) 장도리의 경우 1899년 호적책에는 二里 獐島洞으로 나타나는데, 1900년 호 적책에서 장도리로 분리된다.

287) 여기에는 호주에게 유고가 생겨 다른 동거친속이 代戶한 경우가 10호 포

<그림 3-5> 1899년-1900년

평안북도 정주군 해산면 지명

*출처: 朝鮮總督府 朝鮮臨時土地調査局 編, 1914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국토지리정보원 DB활용

없었으나 대신 36호가 1900년 호적에 처음으로 등재되었다. 즉 탈락한 만큼 호가 새로 진입하면서 면의 총 호수가 387호로 일정하게 유지될 수 가 있었다.

<표 3-2>에서 보이듯 리별 총호수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존속호 350호 중에서 같은 리 내 다른 동으로 옮겨간 사례는 있지만288) 리를 넘 나드는 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1리에 등재된 호는 다시 1리에, 2리 에 등재된 호는 다시 2리에, 장도리에 등재된 호는 다시 장도리에 등재 되었다. 아울러 1리에서 16호가 탈락하면서 15호가 새로 등재되었고 기 존호 중 1호가 2호로 분호하여 총 16호가 생겨났다. 2리에서는 19호가 탈락하고 19호가 새로 등재되었으며 장도리에서는 2호가 탈락하고 2호가 새로 등재되었다. 리별로도 탈락한 호수만큼 정확히 같은 호수가 보충되 면서 리별 총호수가 고정되었다.

아울러 각 동의 호수도 대체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경향을 보인다. 1리 의 경우 동월동에서 네 호가 줄어든 대신에 신성동에서 다섯 호가 늘어 난 것 이외에 커다란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상동과 성동에서 호수가 똑같이 유지되었다. 2리의 경우 예하 모든 동에서 호수가 고정되어 있었 함되어있다. 또한 1899년의 한 호가 1900년 두 호로 分戶하여 1900년의 존속 호가 한 호 늘어나게 되었다.

288) 본고 3장 2절 참고.

지명 1899년 1900년 지명 1899년 1900년 지명 1899년 1900년

1리 180 180 2리 157 157 장도리 50 50

구성동 9 8 사기동 30 30

구암동 19 17 선미동 37 37

동월동 18 14 소록동 30 30

상동 21 21 안동 20 20

성동 50 50 영평동 20 20

신성동 7 12 창전동 20 20

용당동 30 31

용성동 14 13

호암동 12 14

<표 3-2> 1899-1900년 정주군 해산면 호적 리동별 호수 (단위: 호)

다.

행정단위별로 戶數가 고정되는 것은 해당 행정단위가 납부해야 하는 세금 총액과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1896년 이후 1호당 3냥씩 일괄적으로 戶錢이 부과되었다. 중앙정부는 세금을 더 거두고자 지방 각 군에서 최 대한 실제에 가깝게 호수를 파악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각 군에서는 호수를 되도록 적게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더 많은 호를 파악하여 올리라고 압박하면 강하게 반발하고 시정을 요구 하기도 하였다.289) 한편 납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동납으로 이루어졌 다.290) 호적에서 면의 호수는 면에서 부담할 액수이고 리의 호수는 리에 서 부담할 액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정단위별로 호수가 고정되는 것 은 필연적이었다.

이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 정주군 해산면에서는 道-郡-面-里-洞의 행정 체계가 구축되었고 리-동 간 위계가 강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부담 해야하는 세액이기도 한 호수가 행정단위별로 고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즉 리는 물론 동까지도 부세 행정에 최적화되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289) 이세영, 1992 <대한제국기의 호구변동과 계급구조> 《역사와 현실》 7;

조석곤, 앞의 논문.

290) 이세영, 위의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