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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에 국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주로 토지와 인간이었다.

토지, 사람으로 구성된 戶,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 등은 고대 중국에서 租 庸調 제도가 정비된 이래 가장 기초적인 세원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서 는 이 골격을 이어받아 田稅, 貢納, 役의 부세 수취 체제를 구축하였다.

특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에서는 전국을 파악 대상으로 설정하여 부세제도 를 운용한다.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해당 지역의 세원(토지, 호, 사 람)을 파악한 후 이를 토지대장과 호적대장으로 만들어 중앙정부에 바친 다. 아울러 인력을 징발하는 지방 소재 군영과 역도에서도 군적과 형지 안을 제작하여 중앙정부에 올린다. 이들 자료들은 중앙정부의 부세 정책 이 실질적으로 각 지방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앙정부의 지방 지배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

가 된다.

이 중 본고에서 주로 활용할 자료는 호적대장이다. 호적은 사람을 戶 로 묶어서 편제한 문서로, 군현의 부세 행정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자료 였다. 조선후기 호적대장은 3년에 한 번씩 군현 단위로 작성되었으며 5 호가 모여서 1統을 이루고 있었고[五家作統], 이들은 행정구역인 里→面

→郡縣에 소속되었다.41) 1896년(건양 1) 9월 <戶口調査規則>42)과 <戶口 調査細則>43)이 반포된 이래로는 1년에 한 번씩 府·郡별로 호적이 작성 되었고, 10호를 1통으로 작통하였으며, 里 예하에 洞이 새로운 행정구역 단위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본고의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호적대장이 가지는 장점은 행정 체계의 위계적 구조가 잘 드러난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군현-면-리, 대한제국기 부군-면-리-동 체계에 소속된 호구를 분석하여 각 행정단위의 관할 범 위와 호정운영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호적은 호구 파악과 관계 된 여러 주체의 역관계가 반영된 산물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호적은 특정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구별로 주소에 따라 기록하는 센 서스가 아니었다. 총액제적 부세 운영 하에서 각 군현에서 면리로 총액 이 할당되면 누구를 호적에 등재할 것인지에 대하여 里 내부에서 논의하 고 또 面에서 이를 조정하는 과정이 있었다.44) 3년에 한 번씩 군현에서 호적을 작성해서 戶曹로 上送하라는 국가, 호구 총액과 역종별 액수를 면리에 배분하는 郡縣, 누구를 호적에 올릴지 결정하는 面-里의 입장이 조정된 결과물이 바로 호적이었다.

아울러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다. 호적에 기록된 거의 모든 사람이 직역, 성명, 연령을 기재하고 있으며, 主戶(호 대표자) 와 妻에 대하여는 四祖 정보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호적대장에 기록 된 자세한 정보를 다음과 같이 활용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호적대

41) 《經國大典》 戶典 戶籍; 《備邊司謄錄》 31책, 숙종 1년(1675) 9월 26일

「五家統事目」

42) 1896년(건양 원년) 9월 1일 勅令 61호 <戶口調査規則>

43) 1896년(건양 원년) 9월 3일 內部令 8호 <戶口調査細則>

44) 김선경, 1984 앞의 논문

장에 등재된 사람을 軍案이나 驛道 形止案 등 다른 인적대장에 기재된 사람과 비교하여 분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같은 지역 호적대장 여러 해 분을 연결하여 이를 토대로 시기별 호구 변동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후기 호적대장은 17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를 포괄하 고 있다. 다만 지역적으로 대구, 단성, 울산, 언양, 안의 등 경상도에 편 중된 데다가 해당 기간 내 모든 식년분이 전부 남아있지 않은 것도 한계 로 지적된다. 200여 년간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면서 자료가 연속되는 식년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경상도 대구부 호적대장45)과 단성현 호적대 장46) 정도인데 단성현 호적대장은 19세기 기록에 공백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군현과 기관이 호구를 파악하는 방식과 각각의 관 할 범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민을 대상으로 제작된 역도 형지안과 호적대장을 비교하였다. 《사근도형지안》(1747)47)은 사 근도 소속 15역의 역리, 역노비 등 역인 현황을 기록한 장부로 경상도 단성현 소재 벽계역, 신안역 역인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단성현 호적대 장(1750)에 기록된 인적 정보와 비교하였다. 또한 군현 내에서 행정단위 별 관할 범위와 호정운영 방식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구부 읍치지역인 동 상면·서상면 호적대장에서 세 식년이 연속되는 사례를 찾아(1729년-1732 년-1735년, 1855년-1858년-1861년) 동일인을 연결하여 면리 간 호구 이 동양상을 분석하였다.

1896년 이후 제작된 신호적의 경우 전국적으로 자료가 남아있는 장점 이 있다. 다만 제작된 기간이 1896년(건양 1)부터 1909년(융희 3)까지로 짧아서 긴 시계열을 만들기 어렵고 동일 지역의 호적대장이 연속해서 남 아있는 경우도 거의 없다. 본고에서는 일원화된 호구 파악 체계 하에서 최하위 행정단위인 里에 일어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두 지역을 선정 45)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07 《慶尙道大丘府戶籍大 帳-東上面》;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09 《慶尙道 大丘府戶籍大帳-西上面》

46)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06 《慶尙道丹城縣戶籍大 帳》

47) 문경옛길박물관, 《사근도형지안 전산데이터베이스》

하였다. 충청남도 공주군 우정면과 관련해서는 1896년 1월 신호적 제도 실시 직전에 제작된 오가작통책48)과 1904년(광무 8) 신호적49)이 동시에 남아있어 해당 기간에 행정 체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재편되는지, 시기별 로 호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해산면 은 里 예하에 洞이 공식적인 행정단위로 편제된 경우이다. 신호적에서 드물게 제작 시기가 연속되는(1899년-1900년) 2년 간의 호적이 잘 보존 되어 호구 이동을 추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광무 3), 1902년 (광무 6) 같은 지역 목장양안50)이 현존하여 두 자료에 기록된 인적정보 를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활용하여 행정단위별로 호구가 어떻게 파악되고 상위 행정단위에서 그 내용이 조정되는지 검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각종 고지도와 邑誌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규장각한 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해동지도》51)·《조선지도》52)·《광여도》53)·

《1872년 지방지도》54) 등은 18-19세기를 대표하는 군현지도로 군현 邑 治와 각 面의 위치는 물론 驛와 軍營 등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어 참 고가 된다. 특히 《조선지도》는 대략이나마 군현의 경계선을 점선으로 그리고 있어 이 시기 군현의 관할 범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 러 지역 읍지에서는 坊里條를 통하여 당시 행정체계 편제의 실상을 확인 하고 戶口條의 호구수 등을 활용하였다.

48) 인하대학교 근대호적 연구실, 1896, 《公州郡牛井面五家作統》(원문: 일본 學習院大學校 도서관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MF 0008883)

49) 인하대학교 근대호적 연구실, 1904, 《忠淸南道公州郡牛井面戶籍》(원문: 일 본 學習院大學校 도서관 소장, 국사편찬위원회 MF 0008883)

50) 《定州郡所在海山二里牧場土量案》 (奎1963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平安北道定州郡海山面二里牧場土田畓尺量成冊》 (奎22200, 규장각한국학연 구원 소장)

51) 《海東地圖》 (奎古大 4709-41,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52) 《朝鮮地圖》 (奎 16030,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53) 《廣輿圖》 (奎古4790-5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54) 《1872년 지방지도》(奎1056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2년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