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한기 철학은 대체로 경험주의로 평가되지만, 형이상학적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최한기 철학의 두 면모를 최한기가 처음에 제시하였던 경험주의적 방법론의 윤 리이론으로서의 불충분한 점을 이후에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정립함으로 써 보충하고자 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2. ≪기측체의≫에서 최한기는 경험을 통하여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성리학, 불교, 천주교, 사주명리학 등을 비판한다. 이 중 에서도 주된 비판의 대상은 성리학이다. 최한기에 의하면 성리학은 사람 의 마음에 근본적인 원리인 리(理)가 갖추어져 있다고 보아서 이를 깨닫 기를 추구하는데, 이는 주공과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벗 어난 것이다.
따라서 최한기는 리가 아닌 기(氣)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한다. 세계는 천지지기(天地之氣)로 가득 차 있는데, 천지지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룬 것이 형체지기(形體之氣)이다.
모든 기는 작용 능력(神)을 가지며, 기의 작용 능력은 개별적인 사물의 속성을 형성한다. 사물의 속성은 돌의 단단함과 같은 단순 성질만을 의 미하지는 않는다.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는 운동 법칙, 사람의 일생 동 안 일어나는 생장노사(生長老死)의 변화 또한 사물의 속성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항상성을 가지며, 그 일정한 변화의 법칙이 탐 구의 대상이 된다. 즉, 기의 조리로서의 리, 사물의 법칙으로서의 리가 탐구의 대상이다.
이는 이전의 주기론(主氣論)을 계승한 것이지만 기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다. 최한기는 무엇보다도 기가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 최한기에게 있어서 태허(太虛)와 같은 무형(無形)의 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장 범위가 넓은 천지지기도 형체와 신(神)을 가지고 있다. 최
한기가 기의 형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형체를 가지고 있는 기의 움직임 은 측정할 수 있고 수량화하여 객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 추측을 제시한다. 추측은 대상 의 속성을 파악하는 주통(周通)과 이에 알맞은 일 처리법을 모색하여 적 용하는 변통(變通), 이상의 과정이 잘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증험(證驗) 으로 이루어진다. 변통은 주어진 조건에 맞추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방법을 창안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설이다. 따라서 추측은 관찰- 가설-검증의 구도로 구체화할 수 있다.
추측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지만 모든 사례를 관찰한 후에 결론을 도출해 내지는 않는다. 대상을 활용하는 방법 또한 인간이 생각해내지 못한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즉, 추측을 통한 지식 은 그 결과가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에 최한기는 유행 지리(流行之理)와 추측지리(推測之理)를 구분함으로써 진리 그 자체와 진리에 대한 인간의 탐구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최한기가 목표하는 바는 반복되는 추측을 통해서 진리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성리학은 추측지리에 불 과한 리(理)를 유행지리와 동일시함으로써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 성마저 저버리는 것이다.
3. 최한기는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기 위하여 역사라는 간접 경험을 활용한다. 그런데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 라, 역사 상 존재하였던 여러 가르침 중에서 가장 우수한 가르침을 선별 하여 수용하는 방식이다. 최한기는 우수한 가르침이란 효과가 있는 가르 침이고, 효과가 있다면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서 오래 지속될 것이기 때 문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가르침을 찾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적으 로 검증된 가르침은 바로 유학이다.
최한기는 개인의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유학의 전통적 가치를 제시 하며, 무언가를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추측을 강조한다. 악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도 추측의 능력만 있다면
선해질 수 있고, 이 추측의 능력이 악에 물든 정도보다 더 중요하기에 최한기는 ‘악은 얕지만 추측이 부족한 사람보다는 악이 깊어도 추측이 뛰어난 사람이 변화시키기가 빠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개인으로 하여금 도덕성을 갖추어 선을 행하도록 하는 동기 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최한기는 ‘인간은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는 자연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진정한 이익은 공익’이라는 명제를 더한다. 이로써 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이라도 추측 능력이 향상되면 공익이 진정한 이로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앎이 진실하다면[眞知] 자연스럽게 공익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최한기의 윤리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 면에서 한계를 가진다.
우선, 선행의 당위성 문제이다. 최한기는 인간은 이로움을 추구하는 존 재이므로, 공익이 진정한 이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공 익을 실천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하 는 존재이지 ‘참된 이로움 그 자체’를 추구하는 존재는 아니다. 공익이 아무리 참되고 큰 이익이라도 그것이 개인에게 어떤 이로움으로 돌아갈 것인지, 또는 전체의 이로움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이 설명 되지 않으면 선행의 동기는 확보되기 어렵다.
다음으로 가치의 절대성 문제이다. 최한기는 경험주의적 방법으로 유 학을 정당화하였다. 따라서 유학은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이제까지 경험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결과가 좋았다는 의미를 가질 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나아가 유학을 비롯한 모든 가르침은 인간이 고 안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인 위상을 가진다. 인간이 미처 생각해내 지 못한 더 좋은 대안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험주의 내에 서의 모든 윤리적 가치는 추측지리이기에 상대적인 위상을 가진다.
추측은 자연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유용하지만 윤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한계를 가진다. 아주 먼 곳의 별이 움직이는 이치는 당장 알지 못해도 되지만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항상 필요하며, 윤리 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면 사욕을 추구하는 개인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최한기가 배제해버린 성리학의 리나 천주교 의 신은 윤리에 절대적인 위상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 ≪기학≫, ≪인정≫ 등의 후기 저술에서 최한기는 세계를 가득 채 운 기를 운화지기(運化之氣)로 운화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룬 기를 형질 지기(形質之氣)로 구분한다. 이는 용어는 달라졌지만 ≪기측체의≫의 천 지지기와 형체지기의 구분을 이은 것이다. 그러나 최한기는 이상의 구분 으로부터 개별적인 사물의 속성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운화 기가 만물을 생성하고 조화시키는 근원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는 곧장 만물이 운화기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만물은 당연히 운화기를 따른다. 예컨대 별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 직이는 것은 스스로의 운동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고, 자연 전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에 있어서는 운화기를 따라 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한기가 운화기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윤리와 통치의 문제 때문이다. 최한기는 윤리와 통치의 기준으로 운화기를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후기 저술에서도 최한기는 기가 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 그런데 최한기는 기의 움직임을 측정하여 수량화하기보다는 기의 크 기에 따른 형이상학적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즉, 만사만물은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기라는 점에서는 같기에 하나의 체계로 통합될 수 있으 며, 크기의 차이는 있기에 작은 기는 큰 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러한 관점에서 최한기는 일신운화, 교접운화, 통민운화, 대기운화로 이루 어진 사등운화의 체계를 정립하며, 작은 범위의 운화가 큰 범위의 운화 를 승순(承順)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가장 큰 기인 운화기를 윤리와 통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화기를 승순할 수 있을까? 최한기는 개별적인 사 물을 탐구함으로써 대기운화에 도달하고, 이로부터 윤리와 통치의 기준 을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한기는 운화기로부터 어떤 구 체적인 가치나 제도를 직접 도출해 내지는 못한다. 다만 경험주의적 방
법에 의하여 도출된 결론인 유학을 대기운화를 승순한 것으로 규정함으 로써 정당화한다. 공(公), 조화, 질서 등의 도덕적 가치 또한 대기운화를 승순한 것으로 규정된다. 이로써 대기운화를 승순한 유학과 도덕적 가치 는 보다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게 된다.
최한기는 가치의 정당성 문제 뿐 아니라 선행의 동기 문제 또한 운화 기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최한기는 만물이 ‘한 가지로 받은 기화(氣化)’, 즉 운화기로써 일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다. 이로부터 최한기는 개인이 운화기에 도달한다면 세계 전체가 곧 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로써 공익을 진정한 이익으로 여길 수 있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
최한기는 운화기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정립하였으며, 이 를 통해 유학을 정당화하고 도덕적 가치의 절대성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최한기가 추구하는 도덕성의 구체적인 의미는 성리학과는 구분되는 것이 다. 최한기에 의하면 성리학은 기질을 맑게 만드는 노력을 통하여 한 몸 의 도덕성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러나 최한기에 있어서 도덕성이란 치안 (治安)이라는 좋은 결과를 이루어내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 한 것은 사람들의 기질을 살피고 그에 적합한 일을 맡기는 것이다. 따라 서 성인(聖人)이란 ‘관리를 잘 등용하여 치안(治安)을 이루어 낸 사람’
으로 규정된다.
5. 최한기의 학문은 경험주의적 방법론인 추측에서 과학과 윤리를 통 합함으로써 윤리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기학(氣學)으로 변화하였 다. 따라서 최한기는 처음에는 추측과 배치되는 방법으로 도덕성을 추구 하는 성리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기학을 정립한 이후에는 성리학 또한 도덕성을 추구한다는 점을 인정하여 자신의 학문 내에 포섭하고자 한다. 이에 더하여 최한기는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도 기학을 따를 것을 희망한다. 결국, 최한기는 과학과 윤리를 통합하고 성리학을 비롯 한 여타의 학문들을 포섭하는 일통(一統)학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