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통적 가치의 수용
⑴ 역사적으로 검증된 유학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생명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일용해야 할 음식과 물건들이 있어야 하고, 인간은 혼자 서는 살 수 없으므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제도, 규범이 있어야 한다. 추측은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으로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여 활용 하는데 적용되기도 하고, 인간에게 알맞은 가치 및 제도를 모색하는데 적용되기도 한다.
윤강(倫綱)과 일용(日用)은 인사(人事)이고 생성수장(生成收藏)은 천리(天 理)인데, 본성에 따르는[率性] 사람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사가 바로 천리이 지만, 본성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자면 천리와 인사는 서로 떨어 져 막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록 추측하는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미루는 바가 바르지 않고 헤아리는 바도 사사로울 뿐이다. 천리로 말미암아 인사가 생겼으므로 인사는 바로 천리의 운용이니, 천리로 미루는 것을 삼고 인사로 헤아리는 것을 삼는 것이 본성을 따르는 사람의 일이다.88)
예문에서 최한기는 사물을 활용하는 것과 가치 및 제도를 모색하는 것을 각각 일용(日用)과 윤강(倫綱)으로 지칭하며, 이를 인사(人事)로 규정한다. 또한 ‘생성수장(生成收藏)’이라는 만물에 주어진 자연적 속성 을 천리(天理)로 규정한다. 사물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을
88) ≪推測錄ㆍ推物測事(卷6)ㆍ天人隔窒≫,【倫常日用人事也。生成收藏天理也。自其率性者言 之。人事卽天理也。自其不循者言之。天理人事。便成隔窒。縱有所推測。必是所推非正。所測只 私也。因天理而生人事。則人事卽天理之運用也。以天理爲推人事爲測。乃率性者之事也。】
알아야 하며, 사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속성을 알아야만 한 다. 즉, 인사는 주어진 조건인 천리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하므로 ‘인사 는 천리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인사는 천리에 알맞은 사물 활용법, 일 처리법을 모색해서 적용하는 것이므로 ‘인사는 천리의 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최한기는 일용과 윤강에 추측이라는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소를 관찰한 후에 고삐와 쟁기라는 방법을 적용하여 밭을 갈도록 한 것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관찰을 통해 주어진 조건을 파악하고 이에 알맞은 가치 및 제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런 데 최한기는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어떤 구체적인 가치나 제도를 직접 이 끌어 내지는 않는다.
사실, 일용과 윤강에 동일한 방식을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인간의 조건에 가장 잘 맞는 제도를 찾기 위해서 당장 모든 제도를 적용 하고 검증하는 사회적 실험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간접적 경험이 축적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어떤 가치, 제 도가 인간의 삶을 향상시켰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한 기는 구체적인 제도들의 시행 결과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가르침을 선택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역사를 검토한다.
옛날의 인정과 물리가 지금의 인정과 물리의 경험과 내력[閱歷]이 되는 것 이니, 여기에서 유용(有用)한 것과 무용(無用)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손익의 도리를 모르는 것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에 통하는 것이 있어야 [이로 운 것을] 더하고 [해로운 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허망한 것은 경험[歷驗]한 결과 효험이 없으므로 후세 사람이 의지하여 모방하기를 싫어 하고, 옛날의 비루한 습속은 점차로 염치를 가리므로 후세 사람이 답습하지 않으니, 이런 것은 진실로 근심할 만한 것이 못 된다.89)
89) ≪神氣通ㆍ體通(卷1)ㆍ經驗難欺≫,【古昔之人情物理。爲今世人情物理之經驗閱歷。無攸 得於有用無用者。不知損益。有所通於攸利攸害者。乃有乘除。古之虛妄。歷驗無效。後人。不 肯依倣。古之陋俗。漸被廉恥。後人。不欲蹈襲。是誠不足憂也。】
몇 해만 지나도 없어지는 것은 정교(正敎)가 아니요,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나 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정교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은 정교가 아니요, 비록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정교이다. 다만 천하의 교도 (敎道)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한 가정이나 한 마을의 가르침을 세우는 것에도 오래가느냐 오래가지 못하느냐 하는 이치를 가지고 우열을 점칠 수 있을 뿐이다.90)
첫 번째 예문에서 최한기는 만일 후세의 사람들이 이로움과 해로움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면 이전의 허망한 것, 비루한 습속 등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예문에서는 바른 가르침[正敎]이라면 몇 해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이 효험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가 르침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에 예문 마 지막 부분에서 최한기는 ‘어떤 가르침이 오래 지속되는가의 여부를 통해 서 그 우열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한기는 직접 ‘관찰-가설-검증’의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결과를 도 출해내기 보다는 역사 상 존재하였던 여러 가르침 중에서 가장 우수한 가르침을 선별하여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가장 오랫동안 지속 된 가르침을 찾는다. 이는 우수한 가르침이란 효과가 있는 가르침이고, 효과가 있다면 사람들의 선택을 받아서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을 전 제로 한 것이다. 최한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가르침으 로 유교를 제시한다.
요(堯)와 순(舜) 그리고 주공(周公) 이래로 수천 년 동안 많은 백성이 이 가르침 가운데서 함양되고 화육(化育)되었으며, 일치일란(一治一亂)이 모두 이 가르침이 밝으냐 밝지 않으냐에 달려 있었다. 만약 이 가르침이 밝지 않 아 [세도(世道)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는 난세의 조짐이 있으면 지각이 있
90) ≪推測錄ㆍ推己測人(卷5)ㆍ推師道測君道≫,【稍俟幾年之久遠。而息滅者非正敎也。雖久 遠。而不息滅者正敎也。有之可無之可者非正敎也。雖須臾不可無者正敎也。非特天下之敎道。
雖一家一鄕之立敎。以其常久與不常久之理。可占優劣耳。】
는 사람은 근심하여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이 가르침이 아름답고 밝아 장차 융성한 [치세의] 조짐이 있으면 동물이나 식물 등 모든 생명을 가진 무리들까지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91)
최한기는 ‘요, 순, 주공 이래로 수 천 년 동안 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함양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유교가 수 천 년 동안 지 속되어온 가르침임을 밝힌다. 그런데 유교가 올바른 가르침이고 또 오랫 동안 지속되어왔다면 늘 태평성대였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 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최한기는 ‘국가의 치란은 유교의 가르침이 밝으 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고 말한다. 유교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해서 난 세를 겪기도 했지만 유교 자체는 올바른 가르침이고 또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중국 등의 유교문화권이 아닌 지역에 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가르침이 있지 않을까?
천하의 교가 넷이 있으니, 중ㆍ남ㆍ동의 인도로부터 …… 모두 불교이고, 서 인도에서 …… 모두 천방교(天方敎)이고, 대서양의 유럽(歐邏巴) 여러 나라 와 대서양 밖의 아메리카(彌利堅)의 각국은 모두 천주교이고, 중국, 베트남 (安南), 조선, 일본은 유교인데, 그 햇수를 헤아려보면 모두 삼천 년을 넘지 않는다. 이 삼교(三敎) 자체에서도 자연 서로 분열되어 같은 가운데 이론(異 論)을 세우고, 드디어 지파(支派)의 문호(門戶)를 열어 …… 하나가 쇠퇴하 면 다른 파가 대신해 일어나 문득 호월(胡越)의 다툼을 일으키니, 어찌 천하 를 통관하여 그 가르침을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92)
최한기는 지역에 따라 불교, 천방교(이슬람교), 천주교, 유교의 가르
91) ≪神氣通ㆍ體通(卷1)ㆍ通敎≫,【自堯舜周公以來數千載。億兆民。涵育於斯敎中。一治一 亂。由於斯敎之明不明。敎若不明。將有壞亂之漸。則有知者莫不憂歎。敎若休明。將有治隆之 漸。則動植羣生。莫不悅豫。】
92) ≪推測錄ㆍ推己測人(卷5)ㆍ推師道測君道≫,【凡天下之敎有四。自中南東三印度。…… 皆 佛敎。自西印度 …… 皆天方敎。自大西洋之歐邏巴各國。外大西洋之彌利堅各國皆天主敎。與 中國安南朝鮮日本之儒敎。計其歷年。則總不過數三千年之久。而三敎中自相分裂。同中立異。
遂開支派之門戶。…… 因衰迭興。便成胡越之干戈。何以洞天下而一敎化哉。】
침이 지속되어왔음을 밝힌다. 그런데 유교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르침은 서로 분열되고 다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온전하게 지속되어온 가르침은 유교뿐이며, 따라서 유교가 가장 우월한 가르침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로부터 최한기는 유교를 기존의 유교문화권 뿐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받아들여야 할 가장 훌륭한 가르침으로 제시한다.
유도(儒道) 중에서는 윤리와 강상과 인의(仁義)를 취하고 귀신과 재앙이나 상서에 대한 것을 분변하여 버리며, 서양의 법 중에서 역산(曆算)과 기설(氣 說)을 취하고 괴이하고 속이는 것과 화복에 관한 것은 제거하며, 불교 중에 서 허무를 실유(實有)로 바꾸어서, 삼교(三敎)를 화합하여 하나로 돌아가게 하되 옛것을 기본으로 삼아 새로운 것으로 개혁하면, 진실로 온 천하를 통하 여 행할 수 있는 교가 될 것이다. 그 나머지 의복이나 음식과 기물 따위는 각각 그 땅에서 산출되는 것이요, 언어나 예절은 제도와 문식(文飾)이라 일 정하게 할 수 없다.93)
최한기는 ‘유도(儒道)에서는 윤리, 강상, 인의(仁義)를 서양의 법에서 는 역산(曆算)과 기설(氣說)을 택하고, 불교의 허무를 실유(實有)로 바 꾸어서 이 세 가르침을 화합한다면 천하에 통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화합이라기보다는 불교, 서양의 가르침이 아닌 유교를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산과 기설이라는 서 양의 발전된 과학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 이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는 가치(윤강)와 일용(日用)을 들 수 있다. 최한기는 이 중에서도 가치는 전통적인 유교가, 일용은 서양의 과 학이 우월하다고 본 것이다. 유교의 우월함에 대한 최한기의 확신은 아 래의 예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군신유의ㆍ부자유친ㆍ부부유별ㆍ장유유서ㆍ붕우유신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93) ≪神氣通ㆍ體通(卷1)ㆍ天下敎法就天人而質正≫,【儒道中取倫綱仁義。辨鬼神災祥。西法 中取歷算氣說。祛怪誕禍福。佛敎中以其虛無。換作實有。和三歸一。沿舊革新。亶爲通天下可 行之敎。其餘服食器用。出自土宜。言語禮節。乃制度文飾。不可歸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