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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제례 시행

Dalam dokumen 동아시아 지역교류와 민족정책 (Halaman 39-42)

I. 서론

2) 국가제례 시행

琿春 당국은 만주족을 중화민국의 국민으로 포섭하기 위해 동화교육 이외에도 文 廟, 武廟, 忠烈祠 등을 건립한 후 이곳에서 행해지는 국가적인 제례를 이용했다.

琿春에서 文廟는 1891년에 비로소 건립되었다. 이 해 琿春 縣城의 북쪽에 正房 5 칸에 공자의 신위를 모시고 안연, 자사, 증삼, 맹자와 공자의 12제자를 배향하고 좌우

32) 46號 全宗 第585號 案卷, 「設立平民學校」(1928.4.19.) 延邊州檔案館 소장.

33) 46號 全宗 第754號 案卷, 「宣講約法程序及推行識字方法」 (1931.7.16.) 延邊州檔案館 소장.

34) 1995년 9월 3일 細谷良夫, 江夏由樹, 加藤直人 등은 琿春에서 기지, 문서자료, 만주어 등에 관한 조사를 행했다. 이 때 다수의 만주족 노인들이 문혁 때까지 집에 만주어로 된 家譜, 誥命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郞保雲(1921년생)은 굉장히 많은 만주어 서적이 있었는데 문혁 때 전부 물속에 넣어 파괴했다고 언급한다. 細谷良夫, 「琿春的滿族」, 『滿族硏究』 1996年 第4 期. 필자가 인터뷰한 郞智賢(1957년생)은 샤만이었던 외할머니, 徐秀珍이 상당히 많은 만주어 醫書와 薩滿經을 갖고 있었지만 문혁 때 매장해버렸다고 증언했다. (2014년 8월 7일 琿春市 三 家子鄕 郞智賢의 집에서.

행랑에 先賢과 先儒를 배향했다. 하지만 1900년 러시아군이 琿春을 약탈할 때 파괴되 고 말았다.35) 1912년 중화민국 정부는 역대 왕조가 체제 유지를 위해 신봉하던 공자 를 공화주의자로 재평가했다. 임시대총통은 공자를 “전제 시대에 나서 대도가 행해지 지 않음을 번뇌하고 백성들이 혼란에 빠진 것을 슬퍼하여 물러나 요순을 祖述하고 육 경을 편찬하여 춘추의 혼란이 있은 후 승평, 태평한 세상을 위해 소강을 넘어서 대동 공화의 뜻을 제시했다” 고 추숭했다. 그리고 그의 도는 안연 이래 황종희, 왕부지 등 에게 이어지면서 미래를 준비하여 오늘날 민주의 국면을 낳았다고 평가했다. 임시대총 통은 각 성으로 하여금 전국의 학교에서 공자를 기리는 석존제를 올리는 방안을 의논 해 보고하도록 했다.36) 민국정부는 공자의 숭배를 통해 국민의 단결을 시도했던 것이 다. 1914년 북경에서는 대총통이 문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각 지방에서는 지방관이 문묘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했다. 제사는 봄, 여름, 가을에 지내는 정기 제사 이외에 개학일, 공자의 탄신일 등에도 자유롭게 거행하도록 했다.37) 현 단위에서 지내는 제사 에는 현지사 이하 현정부의 문무속관, 학교의 교장과 교원, 지방의 향신들이 참여하여 축문의 작성, 제물의 희생, 제수용품의 진설, 의례의 감독 역할을 분담했다. 제사 하루 전날에는 청소, 예행연습, 樂舞의 시연이 행해졌다.38) 琿春縣에서도 1915년 옛 성황 묘를 수리해 정전 3칸 등 총 17칸 규모의 문묘를 설치하고 새로운 문묘 제례에 따라 현정부 관원, 학교 교원과 학생, 지방의 향신이 참가한 가운데 매년 전례를 거행했 다.39)

한편, 琿春에는 이곳에 協領衙門이 설치된 지 5년 후인 1719년에 靈寶寺란 불교사 원이 세워졌다.40) 이 사원은 後殿에 석가모니, 관세음보살, 지장왕보살을, 正殿에는 關帝를 모셨다.41) 관제의 신위가 있던 정전에는 함풍황제가 내린 “萬世人極” (유사 이래 가장 걸출한 인물)이란 편액이 걸려있었다.42) 청조는 충군사상을 제창하기 위해 관우에 대한 숭배를 진작했다. 당시 만주에서는 만주족 등 소수민족 사이에서 관제신 앙이 유행했었다. 관우는 악비와 달리 변방민족과 전쟁을 벌인 장수가 아니었으므로 소수민족이 받아들이기 용이했다.43) 그런데, 1900년 러시아 군대가 약탈하여 文廟가 파괴될 때 靈寶寺도 전화를 입어 관우의 신주가 파괴되었다. 1902년 신주를 다시 설 치하긴 했지만 제사를 올리는 의식은 없었다.

민국초년 海陸軍部에서는 지금 바야흐로 어려움이 많으니 武를 앞세우고 忠誠을 숭 상할 것을 건의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최근 서구 각국에서 금박을 입힌 인물상을

35) 『琿春縣志』, 577쪽.

36) 『琿春縣志』, 578쪽.

37) 『琿春縣志』, 578-579쪽.

38) 『琿春縣志』, 585쪽.

39) 『琿春縣志』, 577쪽.

40) 동지편집위원회, 『琿春市地名志』, 琿春市人民政府, 1990, 386~387쪽. 현재 琿春市 중심지에 서 약간 서쪽에 있는 琿春市中醫院 자리인데 지금은 전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41) 『琿春縣志』, 592쪽.

42) 『琿春市地名志』, 387쪽.

43) 張子建, 「東北地區關帝信仰社會功能調査」 (중국 연변대학교 석사논문, 2011) 11~13쪽.

中華民族과 滿洲族 사이 -琿春 滿洲族의 二重的 民族正體性, 1911~1931- (윤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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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하고 일본에서도 靖國神社를 세워 선열을 표창”하는 것을 본받아 중국도 “우리 민족의 英武壯烈한 정신을 대표하는” 關羽와 岳飛를 합사하여 武廟를 만들 것을 제안 했다. 이 제안에 대해 대총통은 관우와 악비에 대한 제사의식을 마련해 이들이 “군인 의 모범이자 민족의 본보기”가 되도록 했다.44) 이어서 武廟의 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武廟의 正殿의 가운데에는 좌우에 각각 關羽와 岳飛의 神位를 설치하고 양쪽에는 역대 충성스런 장사들을 배향했다. 동쪽에 張飛, 王浚, 韓擒虎, 李靖, 蘇定方, 郭子儀, 曹彬, 韓世忠, 旭烈兀(훌라구), 徐達, 戚繼光 등을 서향하도록 배치하고 서쪽에 는 趙雲, 謝玄, 賀若弼, 尉遲敬德, 李光弼, 王彦章, 狄靑, 劉錡, 郭侃, 常遇春, 藍玉, 周 遇吉 등이 동쪽을 바라보고 배열되었다.45) 關岳의 양 옆에 배향된 장군들의 면면을 보면 원나라 때의 장수인 훌라구와 郭侃을 제외하면 모두 한족 조정의 장수들이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曹彬, 韓世忠, 徐達, 戚繼光, 常遇春, 藍玉과 같이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변방민족에 대항해 싸웠던 한족 민족영웅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정부가 武廟의 의례를 통해 국민들 사이에 형성하려는 “우리 민족”이란 의식이 결국 은 한족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단결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각 지 방에서는 春分과 秋分 후 첫 번째 戍日에 武廟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진행하는 직책인 正獻, 分獻, 糾儀, 執事 등은 지방의 고위관원, 속관, 군관, 경관, 지방관신, 교 원, 학생들 가운데 선발하였으며 해당 지방의 군관, 경관, 군직과 경찰직을 겸하는 문 관이 모두 제사에 참석했다.46)

琿春에서는 1925년 봄 關帝를 모셨던 靈寶寺를 武廟로 개조하고 새로 설치한 전례 에 따라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47) 이리하여 琿春에서 관우는 청대에 이어 민국에 서 다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나 목적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駐防의 만주족에게 충군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만주족, 한족을 막론하고 중화민국의 국민을 하 나의 민족으로 단결시키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고양하기 위한 전례의 일부로서 관우 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청대에는 또한 靈寶寺의 西園에 昭忠社란 사당이 있어서 이곳에서 금나라와 청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을 제사지냈다. 이 건물 역시 1900년 러시아의 침입 때 소각 되었다. 그런데 1925년 武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지방군경과 민병대원으로 활동하다 전사한 이들을 위한 임시 제사를 지냈다. 곧이어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비를 조성해 이전의 昭忠社 자리에 정전 3칸의 忠烈祠란 사당을 지었다.48) 충렬사를 건립 하는 사업에는 何廉惠, 關石玉, 何祥成, 孟廣泰, 徐宗偉 등 대표적인 만주족 鄕紳 (또 는 官紳)이 18명의 한족 官紳과 나란히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충렬사에서는 민국 이 래 琿春에서 전쟁으로 사망한 군인이나 민간인의 신위를 모셨는데 10월 10일 국경일

44) 『琿春縣志』, 592쪽.

45) 『琿春縣志』, 593쪽.

46) 『琿春縣志』, 593쪽.

47) 『琿春縣志』, 592쪽.

48) 白銀 4천냥을 들여 1927년 완공시켰다. 『琿春市地名志』, 387쪽.

이 되면 縣長이 제사를 주관하고 각 관공서에서 한 명씩 인원을 파견해 행사에 참여 하도록 했다.49) 민국을 위해 전쟁 중 산화한 인물들을 위한 사당을 짓고 만, 한족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의식도 역시 참여한 이들의 중화민족이란 의식을 고취하는데 기 여했다.

Dalam dokumen 동아시아 지역교류와 민족정책 (Halaman 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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