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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사회·문화 교류·협력의 허와실 ···························· 조한범

Ⅱ. 남북한 정치·안보 대화의 전개와 문제점

홍 관 희

1. 서론

1998년 김대중정부가 출범한 이후, 남북관계는 커다란 변화를 겪

어왔다. 1998년 이후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의 중심에는 김대중정

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대북 포용정책” 곧 “햇볕정책”이 있다. 남 북 분단 이후 역대 한국정부는 북한의 대남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분 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대북정책을 지속적으로 추 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정부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튼튼한 안보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화해 와 협력을 추구함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변화의 길로 나올 수 있는 적 합한 환경을 조성하자는 명분을 제시하였다. 대북정책 3원칙으로서 제시된 ①무력도발 불용 ②흡수통일 배제 ③남북 화해·협력 적극 추진 방침은 이러한 근거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햇볕정책”의 추진에 힘입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5회에 걸친 이산가족 재회가 이루어졌다.69) 8회에 걸친 장관급회담도 열렸다.70) 또한 사상 최초의 국방장관 회담도 개최되

69)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다섯 차례의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을 통해 총 5,400여명의 가족들이 상봉하였음. 1차 상봉은 2000. 8. 15~18 (1,170여명), 2차 상봉은 2000. 11. 30~12. 2(1,220여명), 3차 상봉은 2001.

2. 16~2. 18(1,240여명). 4차 상봉은 2002. 4. 28~5. 3(849명), 그리고 5차 상봉은 2002. 9. 13~9. 18 (875명) 이다.

70) 제1차 회담은 2000. 7. 29~7. 31 서울에서 열렸으며, 6개 합의사항이

었다.71) 남북간 국방장관 회담의 개최는 역사적인 남북간 군사회담 이라는 점에서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군사분야의 남북대화는 남 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간에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정착을 위한 실천 적 노력의 대표적 사례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72)

담긴 공동보도문을 통해, △판문점 연락사무소 업무 재개, △8·15에 즈음, 남과북, 해외에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환영하고 실천 결의행사 개최, △경의선 철도의 끊어진 구간 연결 등에 합의했다. 제2차 회담 은 2000. 8. 29~9. 1 평양에서 열렸으며, 7개 합의사항이 담긴 공동보 도문을 통해, △연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사업 2차례 추가실시, △군 사당국자 회담 개최문제 협의, △임진강 수해방지사업의 공동추진 등 에 합의했다. 제3차 회담은 2000. 9. 27~9. 30 제주도에서 열렸으며, 6 개 합의사항이 담긴 보도문을 통해,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협의·

설치, △이산가족 생사확인, 서신교환, 면회소 설치 등에 관한 조속한 조치, △경제협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문제의 조속한 타결 등에 합의했다. 제4차 회담은 2000. 12. 12~12. 16 평양에서 열렸으며, 8개 합의사항이 담긴 공동보도문을 통해,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구성·

운영, △제3차 이산가족 교환 (2001년 2월말, 100명) △이중과세, 투자 보장 등 4개 합의서를 각기 발효절차를 거쳐 상대방에 통보 등에 합 의했다. 제5차 회담은 2001. 9. 15~9. 18 서울에서 열렸으며, 13개 합 의사항이 담긴 공동보도문을 통해, △당국간 대화, 협력과 함께 민간 차원의 접촉과 왕래, 협력사업을 위한 적극 지원, △금강산관광활성화 를 위한 당국간 회담, △제4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등에 합의했다.

제6차 회담은 2001. 11. 9~11. 14 금강산에서 열렸으며, 공동보도문 채택이 없었다. 제7차 회담은 2002. 8. 12~14 서울에서 열렸으며, 10 개 사항에 합의하였는 바, △남북경제협력위 제2차 회의 △제4차 남 북적십자 회담 △제2차 금강산관광당국회담 개최 등에 합의하였다.

제8차 회담은 2002. 10. 19~22 평양에서 열렸다.

71) 2000년 9월 25일 개최된 남북간 최초의 국방장관 회담에서, 남북 양 측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행, 민간인 왕래·교류 보장 관련 군사적 문제 상호 적극 협력 ▷긴장완화, 공고한 평화 구축, 전쟁위협 제거 공동 노력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인원·기재의 DMZ 출입 허가 철도·도로 주변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남북관할지역으로 설정 등에 합의하였다.

72) 남북국방장관회담 합의에 따라 남과 북은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남

그러나, 이렇듯 가시적인 남북관계의 활성화에 북한의 태도 변화는 수반되지 않았다. 더욱이 “햇볕정책”이 목표로 하고 있는 “사실상의 통

일상황”을 만들기에 필요한 남북간 주민간의 상호이해를 위한 컴뮤니

케이션(communication)도 거의 전무하였다. 혹자는 오랜 기간 경색

되었던 남북관계를 해빙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후술하겠거니와, 2002년 10월, 북한은 오랫동안의 대량살상무기 개 발 의혹에 대하여 비밀 핵개발 계획 고백으로 반응하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절정으로 한 화해·협력 분위기는

2001년부터 재답보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2002년 6월에는 서해에 서 북한에 의한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 NLL) 침범 도 발이 있었고, 2002년 8월 이후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를 계기로 재활 성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2002년 10월 북한의 핵개발 고백으로 남북관계는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맞고 있다.

돌이켜 볼 때,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 추진에도 불구하고, 남북간

정치·안보 대화에 있어서 근본적인 상호불신과 긴장상태는 해소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화해·협력” 분위기는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 았던 것 같고, 남북간에는 상호간 위협인식이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 다. 군사문제에 관하여는 일보의 진전도 이룩하지 못한 상황이다.

2002년 11월 예정이던 남북간 국방장관 회담도 북한 측의 사정으로

열리지 못했다. 실제적으로 남북한은 상대방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 북군사실무회담을 2000년 11월 28일~2001년 2월 8일간에 5차례 개최 하여, ‘남북관리구역 설정과 남과 북을 연결하는 철도, 도로 작업의 군 사적 보장을 위한 합의서’를 타결하였으나, 북한측의 문본 교환 거부 로 발효되지 못하고 있었다. 2002년 9월 14일~17일, 2차례의 군사실 무회담을 통해 ‘동해지구와 서해지구 남북관리구역 설정과 남과 북을 연결하는 철도, 도로 작업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합의서’를 타결․발 효시켰다. 9월 17일 남측 국방부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장이 서명한 합의서 문본을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적에 대응하는 남북 양측의 군의 전술적 교 리는 변함없이 운용되고 있다.73)

2.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이후 남북관계 분석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55

년만에 최초로 남북의 최고 당국자가 만나고 대화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도 남북분단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다. 남북 정상이 상호 체제인정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대화를 통해 풀어가기로 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의 계기를 이 끌어 내고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에도 기여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울러 이산가족을 비롯한 인도적 문제 해결, 경제·사회·문화 등 다방 면에 걸친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함으로써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공동 번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두 정상은 남북간 대 화와 협력만이 분단의 심화를 막고 공동번영하며 평화통일을 앞당기 는 길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이러한 합의를 바탕으로 「6.15 남 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74)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은 몇 가지 결정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73) 홍관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한국의 대응」 연구보고서 (서

울: 통일연구원, 2002).

74) 6·15 공동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통일을 위한 남측 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한다.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 육, 보건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한다. ▷합의사항을 조 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한다. 김정일 국 방위원장은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

있었는 바, 아마도 가장 논란거리가 되어 온 것은 제2항―통일을 위 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한다―일 것이다. 연방제안 은 국민적합의를 거친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이 아니다. 더욱이 연방제 통일방안은―낮은 단계이건 높은 단계이건―대한민국의 국가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부합되지 않는다. 이는 중대한 문제점이며, 이를 반영 하듯 이내 정계, 학계 등에서 끊임없는 논쟁 잇슈로 부상하여왔다.

다음은 제1항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 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부분인데, 명목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 지만, 주한미군이 주둔해 있고 한·미 동맹관계를 기초로 국가안보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 조항은 북한의 선전전술에 크 게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북한은 이 후 대남 선전전에서 6·15공동선언을 중요한 준거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민족공조”와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언 제1

항이 활용되고 있는 바,75) 이를테면 “민족의 사활과 운명이 걸린 조 국통일 문제를 외세의 간섭 없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 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면서 “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관철하면 자주통 일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다.

제4항의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의

내용도 대북관계가 분명히 설정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재 남북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병영경제로 나뉘어져 있는 바, 남북 군사대치의 해소 없이 북한 군사력의 토대가 되고 있는 북 한경제를 남한경제와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는 합의는 남북 군사대치 상황에서 적절치 않은 것이다.

75) 「노동신문」, 2003년 1월 3일, 「6·15공동선언은 조국통일의 변함없는 이 정표」라는 제목의 “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