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미・북관계
새해 벽두부터 북한은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하여 남북대화와 미
·
북 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1
년1
월 뉴욕에서 북한의 한성렬 유엔 차석대표가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를 만나2008
년 영변 핵시설의 냉 각탑 폭파 결정에 따라 지원을 결정한50
만 톤 중 모니터링 문제로 중 단되었던33
만 톤의 식량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모든 모 니터링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대남 대화공세 속에서 1월 11일 북한은
‘현사태 타개의
근본열쇠-조미평화협정’이라는 노동신문 논평을통해
“
지난해 유관국들이 북한의 평화협정체결 요구에 응했다면 연평 도 포격사태는 없었을 것”
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2011
년 초부터 미국은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북한과의 대화와 식량지원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0
년 북한의 천안함 폭 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을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의 공개에 대한 응답이 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1
월19
일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긴장 과 북한의UEP
가 우려 상항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북 간 건설적이고 진정성 있는 대화와 6자회담의 필요성에 대해 합의하였다. 6월 7일 싱 가포르 샹그리라 회의에서 게이츠 국방장관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이 미국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평가한 것은 미국의 대화 필요성 을 높였다.
4
월 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영남 최고인 민회의 상임위원장,
박의춘 외무상,
김계관6
자회담 수석대표,
박림수국방위원회 정책국장 등을 만나 북한의 남북대화 의지와 식량지원 및 모니터링 문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방북 후 한국 을 방문하여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달하기도 하였 다
.
북한의 식량사정에 대해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5
월24
일 로버트 킹 특사를 단장으로 하는 평가단이 북한의 식량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방문했다.
킹 특사가28
일 귀환 당시 북한에6
개월간 억류되었던 미국 시민권자 전용수씨가 동행할 수 있었다.
중국의 중재로 남북 핵회담
,
미·
북 핵회담, 6
자회담이라는3
단계 해 법이 나왔고, 7
월22
일 발리에서 남북 핵회담이 개최된 직후7
월28
일 뉴욕에서 미‧
북 간 고위급 회담이 개최되었다. 1
차 회담이후 북한과의 대화 분위기는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9월 21일 북경에서 2차 남북 핵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어 10월 23일부터 제네바에서 2차 미‧북 고위급 핵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들 회담은 남북관계 전망 및6
자회담 재개여 부와 관련하여 주목을 끌었으나 제네바 회담을 앞두고 양측의 신경전 은 회담의 전망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국은6
자회담의 전제조건으로UEP
중단, IAEA
사찰단의 복귀,
대량살상무기 모라토리엄을 주장했다
.
김정일은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조건없는6
자회담 재개를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외면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2
차 회담은 합의문 도출을 하 지 못한 채 끝났다. 미‧북 양측은 뉴욕채널을 통해 다음 회담일정을 잡 기로 했으나 진전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회담결과에 대해 북한 김계관 대표는“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
고 만족을 표시하면 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훨씬 냉정했다.
회담 직후 빅토리아 눌런드 미국무부 대변인은“
일부 의견차는 좁혔지만 돌파구를 찾지는 못했다
”
고 했다.
북한이 조속한6
자회담 개최를 희망하는 것은 비핵화를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북 제재를 완화시 키고 식량지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북한은2009년 2
차 핵실험이후6
자회담을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평화체제를 논의하 기 위한 장으로 주장하여 왔다.
12
월5
일 방한한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대북 영양지 원 의도를 밝혔으나 북한의 변화 필요성을 언급하며6
자회담의 조기 개최에 대한 회의감을 표명했다. 6
자회담의 비관적인 전망은 미‧
북 간 뉴욕채널을 통해서 북한이 우라늄농축의 잠정 중단을 받아들임으로써 급반전되었다. 12
월15
일 북경에서 미국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와 북한의 이근 국장이 전격 회동하였다. 미국은 매월 2만 톤씩 총 24만 톤의 영양보조식품(비스켓과 비타민)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합의하고12
월22
일3
차 미‧
북회담에 합의하였다.
미
‧
북관계의 급진전 무드는12
월17
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이19
일 발표되면서 주춤하였으나,
하루 뒤 뉴욕채널을 통해 미‧
북 양측은 대 화의 모멘텀을 이어가려했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북한 주민들에게 애 도를 표하며 북한에게 긍정적 신호를 보내기도 하였다.
2012
년에도 북한과 미국은3
차 미‧
북회담 합의의 모멘텀을 유지하 려 할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인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안정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지원은 북한이 자신감을 갖고 좀 더 적극 적인 대미 접근을 하도록 할 것이다. 북한은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 을 여는 해’
로 규정하고 각종 정치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김일성 생일100
주년,
김정일 생일70
주년,
김정은 생일30
주년이 되는 해이다.
북 한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정치행사를 위해 외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이 절실하다
.
남북관계는 경색되어 있고,
김 정일의 중국과 러시아 방문도 큰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장기적 으로 미‧북관계의 진전을 정치적 승리로 선전하고 주민들에게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입장에서도 대선 정국에서 한반 도 안정을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북한의 과도기를 관리할 필요가 더욱 커졌다.
•
최진욱・북한연구센터 소장나. 북・중관계
2011
년은 북‧
중 양국 간 전략적 이해의 일치가 더욱 공고화된 해라 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은2009
년 이래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견제 강화와 김정일 건강위기설로 인한 체제 붕괴에 대한 방지 차원에 서 북한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왔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치‧
경제적보장은
2010년 미‧중 갈등,
천안함 사건 등 동북아 정세 지형의 불안정성 때문에 더욱 확대되었다
. 2011
년 역시 중국의 대북한 전략적 보 장은 후계 계승에 대한 불간섭,
북‧
중 우호협력조약 재평가,
지속적 경 제협력 강화로 나타났다.
멍젠주 중국 공안부장이 평양 방문(2.13)
시 김정은의 후계 계승에 대한 축하성 멘트를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리커 창 상무부총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기 이전에 북한 방문(10.23〜25)
이 전격 결정되는 등 북한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있었다.
특히 주요 고 위급 회담에 김정은이 배석해 사실상 중국이 후계 계승에 대해 인정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양국 간 고위급 인 사들이 어느 해 보다 잦은 상호 방문을 통해 정치적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
군사안보적 보장도 뒤를 이었다.
지난7
월 북‧
중 우호협력조약 체결 50주년 즈음에서 축하사절단 교환, 다양한 기념행사 이외에도 중 국 해군훈련 함대가 북한 원산항에 입항하는 상징적인 이벤트가 있기 도 했다.
또한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국영CCTV
보도를 통해 이 조약이 사실상 연장되었다고 발표해 한‧
미동맹 강화 등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 대한 세력균형 차원에서 북한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가능케 했다
.
이러한 중국의 대북한 전략적 보장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12.17)
이후 더욱 공식화되었다.
중국은 공식 조전에서‘
김정은 동지의 영도
’
를 명기함으로써 북한 후계 계승을 사실상 인정했으며,
후진타 오를 비롯한 고위급 지도자들이 발 빠르게 조문 행보를 하는 등 김정 일 사후 북한체제의 안정화에 후원 역할을 암시했다.경제협력 분야는 실질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었다
. 2011
년6
월 장성 택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과 천더밍 중국 상무부장의 회담 이후 나선경 제무역지대와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 관리에 관한 협정 및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신두만강대교 및 나진-
원정리 간 도로공사
,
다탕(大唐)
발전소 전력 공급 사업 등이 본격화 되었다.
양국 간교역액도 급증했는데
, 2011
년1〜9
월 간 경제 교류액이40
억 달러를 돌파하는 등 전년 동기 대비77%
이상 상승했고,
대중 수출은 전년 동 기 대비 133% 급증, 수입은 50% 증가했다. 그러나 북한 수출의 대부 분이 광물 자원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북한자원의 중국 유출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북한 입장에서는2012
년 강성대국 건설과 안 정적 후계구도 구축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외화 획득이 시급했고,
중국 역시 동북개발에 필요한 자원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급속한 광물 채굴이 진행되었다는 평가이다
.
결국 북한은 중국의 지원이 절실했으며,
중 국 역시도 동북아 세력균형과 동북개발을 위한 자원 배후지로서 북한 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국의 이해관계는2010년에 이어 2011년 역시
더욱 일치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 전략관계가 공고화되었다고 분 석할 수 있다.
그러나 밀월을 방불케 하는 양국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
상호 견제는2011
년에도 지속되었다.
중국은 북한과의 경협을 확대하면서도 자국 기업의 신중한 대북투자를 권고하는 상무부 지침을 발표하고,
북한에 대한 투자에 있어 국가중심보다는 시장원리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북한 역시 김정일이 전격 북‧
러 정상회담(8.23)
을 추진하는 등 경제의 대중국 의존도 확대 현상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했다.2012년에도 동북아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지형에 있어 미‧중 갈등
이2011
년과 비슷한 패턴을 보일 가능성이 높고,
이 때문에 중국에게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지속될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 위협론 확산과 미‧
중 갈등에 대한 부담이 있고,
주변부 안정을 위해서 는 최소한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의한 불안정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 하고 있다.
또한 김정일 급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강성대국 원년 선포 의 불확실성,
후계구축의 불안정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어,
중국의 북 한에 대한 전략적 관리 정책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 역 시도 체제 안정과 경제회복을 위한 재원마련이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 에, 당분간은 중국을 후견국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 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일정 정도의 제스처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내정간섭 확대 및 경제 의존도가 높아 지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에 다른 후견국을 찾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Dalam dokumen
통일환경 및 남북한관계 전망: 201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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