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일시기 주요 퍼포먼스
(1)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
백남준은 1959년 11월 13일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갤러리22에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도 16)를 초연하면서 독일 내에서 예술 가로서의 공식적인 데뷔를 알렸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독일시기 내 내 여러 번 반복해서 무대에 올랐는데, 이듬해 6월에는 마리 바우어 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개최된 《반-음악제(Contre-Festival)》의 일환으로 다시 한 번 공연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 데뷔 작품이 “카 타르시스를 만들어 낼 충격이 필요”해 행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당시 이 공연은 지켜보던 관객들로 하여금 실로 충격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150) 작곡가 쾨니히(Gotfried Michael Koenig, 1926-)는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맹렬함, 무자비함, 무모함에 대한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공연은 “완전히 다이내 믹하고 폭력적인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도 17).151) 백남준은 이 문제적인 공연이 벌어진 1959년을 전후로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 에를 중심으로 하는 쾰른의 아방가르드 서클에서 점차 유명세를 타
150) “나는 피아노를 엎었어요. […] 나는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낼 충격이 필요했던 거죠. 극도의 전자적인 충동 말이에요. 놀라움이나 환멸 말이에요. […]”(밑줄은 필자 표시) 백남준,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이르멜린 리비 어와의 인터뷰(1974)」, 앞의 책, 에디트 데커-필립스·이르멜린 리비어 편, p.
206.
151) 쾨니히의 백남준 공연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Susanne Rennert, “About Paik, with Paik: A Collage of Conversations Dating from 1992 to 2010,” 앞의 책, eds. Sook-kyung Lee and Susanne Rennert, p. 216.
게 되었다.152)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가 얼마나 맹렬했고 무모했는지는 이 공연을 둘러싼 지역 신문의 리뷰들과 서신들, 이후의 회고들과 단편 적인 사진들을 통해서 불완전하게나마 복원이 가능하다.153) 1959년 11월의 『뒤셀도르프 신문(Düsseldorf Zeitung)』에 실린 기사는 당 시 공연의 전모를 상세하게 담고 있다.
[…] 관람객들은 의무적으로 1932년 한국에서 태어난 작곡가이자 쾰른 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백남준을 경험해야 했다. 이름 하여 그 작 품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였다. 저 위 높은 곳 사다리에는 작가 한스 헬름스가 앉아서 두루마리에 적힌 악보를 낭독하고 있었고, 저 아래에는 악단이 하나 구성되어 있었다: 두 대의 피아노(그 중 하나에 는 아예 건반이 없었다), 테이프 레코더들, 깡통들, 장난감 자동차 한 대, 플라스틱 기관차 한 대, 계란 하나, 유리판 한 장, 양초 동강이 담 긴 병 하나, 그리고 오르골 한 대. 콘서트의 관객들은 조심하도록 당부 를 받았다: “물러서세요!” 첫 악장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20명의 젊은 여인들의 고통에 찬 광란의 비명소리와 WDR의 뉴스보도가 시작 되었다. 백남준은 벽에 계란을 던지고 30초 동안 메트로놈과 음악상자 에 맞춰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2악장에서는 한국말로 외쳐 대면서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플라스틱 기관차의 경적을 울리고 방의 불 을 끄고 촛불을 켰다. 3악장은 촛불의 불빛 속에서 조심스러운 침묵 속에 시작되었으나 두 번의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관중을 몸서리치 게 했다. 4악장에서 백남준은 마지막 분노에 가득차서 미쳐 날뛰었고, 방을 가로질러 가서 식도를 들고 와 피아노의 현을 잘라 버렸으며, 마 침내는 피아노를 뒤집어 버렸다. 그리하여 피아노는 숨을 거두었다. 관
152) Thomas Kellein, “Hommage an Nam June Paik,” 앞의 책, eds. Wulf Herzogenrath and Andreas Kreul, p. 52.
153) 본 논문에서 다루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퍼포먼스 작품들을 촬영한 영상 기록물은 남아있지 않으며, 다만 테이프레코더로 녹음된 소리가 음반으로 발매 되어 있다. Nam June Paik Works 1958-1979(Audio CD)(Brussels: Sub Rosa Records, 2005) 스톡하우젠과 리게티(György Ligeti, 1923-2006)는 백남준의 액션 뮤직 작품들을 촬영할 것을 제안했으나, 백남준은 “철학적인 이유”를 들어 이 를 영상물로 남기기를 거부했다. Nam June Paik, “Expanded Education for the Paperless Society,” 앞의 책, ed. Judson Rosebush, unpaged.
중은 박수를 그칠 줄 몰랐고 전체 작품 중 유일한 불협화음은 날 것이 어야 했던 삶은 달걀뿐 이었다. 그 유감스러운 불협화음만 없었더라면, 작품은 매우 소름끼치는 공포극이 되었을 텐데.154) (밑줄은 필자 표시)
이 신문 보도에 의하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는 총 4악장 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테이프레코더를 통해 비명소리, 뉴스 등의 소 리가 흐르는 가운데 ‘소름끼치는 공포극’을 연상시키는 난폭한 행위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리뷰를 실은 또 다른 신문인
『신 라인 신문(Neue Rheinsche Zeitung)』에서 전한 공연 정황 역 시 『뒤셀도르프 신문』과 유사하다. 기사의 필자인 요하네스 클로 제(Johannes G. Klose)에 의하면, 놓여있던 테이프 레코더에서는
“외무장관회의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고, 정상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갑작스레 시작되는 2악장에서는 백남준이 “플라스틱 기관차를 집어 들고는 울부짖었다.” 여기에 더해 클로제는 이 공연 이 과연 “한 편의 서커스인지, 혹은 예사롭지 않은 징후”인지를 묻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를 공포극으로 느꼈던 『뒤셀 도르프 신문』의 필자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 다.155)
154) “Mutter, der Mann mit dem Schrein ist da,” Düsseldorf Zeitung (November, 1959); Wulf Herzogenrath ed., 앞의 책(1976), p. 42에서 재인용.
155) “[…] 마이스터는 녹음기를 두 번 켰다가 껐다. 그러자 녹음기에서는 광포한 외침소리가 울려퍼졌다가 사라졌다. 다음에는 그 자신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를 질렀고, 양철깡통을 집어던졌고, 계란을 벽에 던져 깨버렸다. 또한 피아노 한 대는 주먹으로, 나머지 한 대는 깡통과 칼로 가격했다. 그 다음에는 다시금 녹음기에서 소리가 울려퍼졌는데, 이번에는 외무장관회의에 대한 라디오 뉴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에 마이스터는 오르골로 작동하는 음악시 계를 켰고, 메트로놈을 틀어 똑딱거리게 했고, 그 자신은 몇 가지 정상적인 박 자의 피아노 멜로디를 연주했다. 하지만 아직 나쁜 연주가 끝나기에는 충분치 않았고, 새로운 폭발이 일어났다. 백남준은 장난감 자동차를 집어 들고는 울부 짖었다. 다음에는 전기 스위치 쪽으로 돌진했고, 그것을 돌려 불을 껐으며, 양초 에다 불을 붙였고, 마침내 두 자루의 장난감 딱총을 바닥에다 집어던졌다. 그리 고는 유리병을 발로 짓밟아서 쨍그랑거리며 깨지게 만들었고, 카펫이 깔려있고 쿠션이 놓여있는 바닥 위로 피아노를 뒤집어 엎어놓았다. 그러자 커다란 박수소 리가 울려퍼졌다. 한 편의 서커스인가, 아니면 예사롭지 않은 징후들인가? 예술 가 자신에게, 아니면 큰 박수로 화답했던 관객들에게도? […]” (밑줄은 필자 표
위의 신문기사들에서는 백남준이 4악장에서 단순히 식도를 들고 왔다고 기록했지만, 쾨니히는 백남준이 “칼을 이빨 사이에 물고 나 타났으며, 곧 고양이를 쫓기도” 했다고 기억했다.156) 또한 그는 백 남준이 반원을 그리며 서있던 관객들의 얼굴을 향해 갑작스레 묵주 를 던지기도 했다고 언급했는데, 하인츠 클라우스 메츠거 역시 백남 준이 묵주를 집어던졌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관객들이 마치 “대재 앙을 당했을 때”와 같이 놀랐다고 진술했다.157)
백남준은 자신의 행위들이 “테이프에 부수적인 것”으로 여길 정도로 공연장에서 재생되는 녹음테이프를 제작하는 것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도 18).158) 여기에는 한스 헬름스 등 동료 예술가들의 목소 리, 백남준 자신의 목소리, 여자의 비명소리,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제5번〉, 어느 독일노래, 라흐마 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제2 번〉,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복권 당첨 발표, 독일의 통일에 관해 제네바(Geneva)에서 열렸던 외상 회의 뉴스발표 등이 복잡하게 녹 음되었으며, 공연 내내 재생되었다.159)
시) 해당 기사의 전문은 다음을 참조. Johannes G. Klose, “Ein Müllmann und ein Eierwerfer,” Neue Rheinsche Zeitung(November, 1959); Wilfried Dörstel et al., 앞의 책, p. 31에서 재인용.
156) Susanne Rennert, “About Paik, with Paik: A Collage of Conversations Dating from 1992 to 2010,” 앞의 책, eds. Sook-kyung Lee and Susanne Rennert, p.
216.
157) Heinz-Klaus Metzger, “Fluxus-Musi-Aktionen: Paiks Musik als Musik,” 앞의 책(1976), ed. Wulf Herzogenrath, p. 35.
158) “테이프에 부수적인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1967년 5월6일 백남준이 휴 데 이비스에게 쓴 편지를 참조. Michael Nyman, “Nam June Paik, Composer,” 앞 의 책(1982), ed. John G. Hanhardt, p. 82에서 재인용. 백남준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Staatliche Hochschule für Musik Freiburg)에서 수학할 당시 포르트너 (Wolfgang Fortner) 교수의 추천으로 서부독일방송국(WDR) 소속의 전자음악스 튜디오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마그네틱 테이프에 각종 노이즈와 음 악, 뉴스 등을 콜라주 하는 것을 실험해볼 수 있었다. 포르트너 교수의 추천서 는 다음에 수록되어 있다. Wulf Herzogenrath ed., 앞의 책(1976), p. 38.
159) Susanne Rennert, “About Paik, with Paik: A Collage of Conversations Dating from 1992 to 2010,” 앞의 책, eds. Sook-kyung Lee and Susanne Rennert, pp.
213-214; Michael Nyman, “Nam June Paik, Composer,” 앞의 책(1982), ed.
신문보도와 목격자들의 증언들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의 진행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면, 백남준이 첫 데뷔무대의 몇 개월 전 에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를 주관하고 있던 볼프강 슈타이네 케(Wolfgang Steinecke, 1910-1961) 박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는 작품의 기획과정이 담겨 있다.160) 이 두 편지는 각각 1958년 12월과 1959년 5월에 작성되었는데, 첫 번째 편지에서 백남준은 “그랜드 피아노를 밀고, 피아노를 뒤집을 것”이며, “여러 가지 장난감, 뉴 스, 녹음기 소리 등 기능적으로 자유로워진 소리들”이 무대 위로 흐를 것임을 예고했다.161) 1959년 5월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더 욱 상세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에서 백남준은 〈존 케이지 에 대한 경의〉를 총 3악장의 공연으로 설명하면서 10분정도면 충 분한 간단한 퍼포먼스라고 소개했다. 해당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 다.
저의 반反음악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는 별 탈 없이 진행 중이며 […] 1악장은 마르셀 뒤샹+도스토옙스키=K.슈비터스. 다양성≠변주곡.
이것이 바로 숭고함이 근본적으로 추악함과 코미디와 분리될 수 없다 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모든 관객은 막 〈마태수난곡〉을 끝까지 듣고 온 사람의 자세로 공연을 관람해야 합니다. […] 소재는 콜라주-라디오 와 언어입니다. […] 끊임없이 이어지는 놀라움과 실망(1악장), 그리고 극도의 지루함(2악장)을 만들어내면서 일상의 법칙에서 벗어났습니다.
John G. Hanhardt, p. 82.
160) 슈타이네케는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의 토대를 세우기 시작한 인물로,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이전에 그에게 미리 서신을 보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슈타이네케는 백남준이 전자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서부독일방송국(WDR)에서 스톡하우젠과 함께 전자음악을 실험하던 헤르베르트 아이메르트(Herbert Eimert, 1897-1972)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했다. Susanne Rennert, “On sunny days count the waves of the Rhine, on windy days count the waves of the Rhine, Nam June Paiks frühe Jahre im Rheinland (1958–
1963),” 앞의 책, ed. Günter Herzog, p. 11.
161) 백남준, 「볼프강 슈타이네케에게 보내는 편지, 다름슈타트(1958)」, 앞의 책, 에디트 데커-필립스·이르멜린 리비어 편, pp. 401-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