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서독은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초국가적인 정보 교 환의 중심지였으며, 신음악과 퍼포먼스가 발흥하는 최전선으로 부상 하고 있었다. 특히 쾰른과 뒤셀도르프, 다름슈타트(Darmstadt) 등지 의 서부독일방송국(이하 WDR),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
《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기강좌(Internationalen Ferienkursen für Neue Musik, Darmstadt)》(이하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는 카를하인츠 스톡하우젠과 존 케이지, 루이지 노노(Luigi Nono, 1924-1990), 하인츠 클라우스 메츠거 등의 작곡가들과 비평가들, 그 리고 구체예술(Concrete Art)을 실험하던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 다.116) 백남준은 1956년 독일로의 이주 후 뮌헨(München)과 프라이 부르크(Freiburg)를 거쳐 라인란트(Rhineland) 지역에 정착했으며,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로 예술계에 데뷔하기 이전까지의 약 3년 동안 현지의 정치·문화적 상황을 기민하게 흡수하고 그 소 식을 한국의 『자유신문』과 일본의 『음악예술』을 통해 지속적으 로 전달했다.117)
116) Diedrich Diederichsen, “The Leftist Artist: Visual Art and Its Politics in Postwar Germany,” 앞의 책, Stephanie Barron et al., pp. 136-138.
117) 자유신문의 경우 다음을 참조. 백남준, 「피에르 셰퍼와 구체음악」, 1958년
『자유신문』; 이영철·김남수 편, 앞의 책, pp. 144-145에서 재인용; 同, 「와해 의 음악-다름슈타트 국제 신음악 하기강좌」, 1959년 1월 6, 7일자 『자유신 문』; 위의 책, pp. 146-147에서 재인용. 백남준이 독일시기에 『음악예술』에 기고한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白南準, 「音楽のバウハウス」, 『音楽芸術』
15-10(1957.10), pp. 106-109; 同, 「12音マニエリスムス?」, 『音楽芸術』
16-9(1958.7), pp. 117-121; 同, 「セリー・偶然・空間など」, 『音楽芸術』
17-13(1959.12), pp. 82-101; 同, 앞의 글(1961.3), pp. 13-17; 同, 「セリー以後-2
이 시기동안 백남준은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 《스트라스 부르 음악제(Festival de Musique de Strasbourg)》 등을 참관하면서 케이지, 스톡하우젠 등의 작곡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 했으며, 1958년 9월에는 2차 대전 이후 독일 뒤셀도르프 시립미술관 (Städtische Kunsthalle Düsseldorf)에서 최초로 개최된 다다의 회고전
《Dada: Dokumente einer Bewegung》도 관람했다.118) 백남준은 이 다다 회고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예술가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887-1948)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을 들고, “그 전시회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 다.119) 특히 그는 한 달 전인 1958년 8월의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 좌》에서의 케이지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자신의 “삶의 시작”으로 표현할 정도로 이를 일종의 혁명적 사건으로 정의한 바 있다.120) 전후 다다의 재-부상과 케이지의 등장은 실제 음악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퍼포먼스적 실천들, 즉 플럭서스·해프닝 예술가들에 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주지되어 왔다.121) 일찍부터
(完)-」, 『音楽芸術』 19-5(1961.5), pp. 32-35; 同, 「フォトルポ/Original: 音楽 劇場」, 『音楽芸術』 21-2(1963.2), pp. 36-46.
118) Jonathan Price, Video Visions: A Medium Discovers Itself(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77), p. 126.
119) 볼프 포스텔은 백남준이 자신에게 “나는 그 전시회로부터 충격을 받고 큰 영 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던 사실을 밝힌 바 있다. Jeff Perkins, “An Interview with Wolf Vostell: Fluxus Reseen,” Umbrella 4, no. 3(May, 1981), p. 50. 특히 슈비터스가 다다에서도 뛰어난 행위예술가였던 점은 중요하게 지적될 수 있는 데, 슈비터스는 예상치 못한 소리와 행동들로 관중을 도발했으며 이는 부르주아 의 안일한 정신 상태를 공격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략이었다. Taehi Kang, 앞의 논문, pp. 15-16.
120) “내 인생은 1958년 8월 어느 저녁에 다름슈타트에서 시작되었다. […] 1957년 이 기원전(BC) 1년이다. (BC 1년은 곧 Before Cage 1년이다) 1947년은 기원전 10년이다. […]” 백남준, 「기원전/기원후(1992)」, 앞의 책, 에디트 데커-필립 스·이르멜린 리비어 편, pp. 38-44.
121) 벤 보티에(Ben Vautier, 1935-)는 케이지와 뒤샹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케이지, 뒤샹, 다다가 없이 플럭서스는 존재하지 못한다. 플럭서스는 포스트- 뒤샹, 포스트-케이지라는 지식으로부터 존재하고 창조한다.” Ben Vautier,
“What is Fluxus?,” Flash Art, no. 84-85(October-November, 1978), p. 53;
Owen Smith, “Fluxus: A Brief History and Other Fictions,” 앞의 책, ed. Janet
공공연히 뒤샹을 추종했던 케이지는 이미 1952년부터 노스캐롤라이 나(North Carolina)의 블랙마운틴칼리지(The Arts at Black Mountain College)에서의 〈연극 작품 1번(Theater Piece No.1)〉을 통해 해프 닝을 예고하는 멀티미디어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1956년부터 4년 간 계속됐던 뉴욕의 뉴스쿨(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강 의에는 이후 플럭서스에 가담하거나 해프닝의 중심인물이 되는 알 랜 카프로(Allan Kaprow, 1927-2006), 딕 히긴스(Dick Higgins, 1938-1998),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1926-2008), 라 몬테 영 (La Monte Young, 1935-) 등이 수강하고 있었다.122)
미국에서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던 케이지가 1950년대 말 독일에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 작곡에서의 무목적성, 비결정성, 우연작동법, 그리고 행위의 도입을 기반으로 한 그의 공 연과 강의는 이른바 ‘다름슈타트 서클’과 쾰른의 예술가들 사이 에서 신선한 자극제인 동시에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123) 특히 백남 준이 참관했던 1958년의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에서의 케이지 의 등장은 격렬한 논쟁이 촉발된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케이지는
‘과정으로서의 작곡(Composition as Process)’이라는 주제의 작곡 세미나와 함께 총 3회에 걸친 ‘변화(Changes)’, ‘비결정성 (Indeterminacy)’, ‘소통(Communication)’에 대한 강연을 열었으 며, 비결정성에 대한 두 번째 강의에서는 스톡하우젠이 이미 설파한 바 있는 ‘공간에서의 음악(Musik im Raum)’에 대한 논의를 지지
Jenkins, p. 30 주 18에서 재인용.
122) 블랙마운틴칼리지와 뉴스쿨에서의 존 케이지의 강의와 세부적 내용에 대해서 는 다음의 두 글을 참조. Bruce Altchuler, “The Cage Class,” in FluxAttitudes, eds. Cornelia Lauf and Susan Hapgood(Buffalo: Hallwalls Contemporary Arts Center and New York: The New Museum of Contemporary Art, 1991), pp.
17-23; Mary Emma Harris, The arts at Black Mountain College(Cambridge, Mass.: MIT Press, 1987), pp. 214-239.
123) Ian Pepper, “From the ‘Aesthetics of Indifference’ to ‘Negative Aesthetics’: John Cage and Germany 1958-1972,” October 82(Autumn, 1997), p. 35.
하고 강조했다.124)
백남준이 1958년의 《다름슈타트 신음악 강좌》라는 이 논쟁적 공간 속에서 케이지를 직접 대면하고 이를 “삶의 시작”으로 정의 한 것은 케이지의 강의와 공연이 1년 뒤 자신의 액션뮤직을 발전시 키는 데 있어 중요한 착상을 얻게끔 하는 계기였음을 시사 하는 것 으로 보인다. 케이지는 같은 해 10월 뒤셀도르프에서 데이빗 튜더 (David Tudor, 1926-1996)와 함께 〈음악 산책(Music Walk)〉을 초연 했는데, 이는 “퍼포머들은 언제든 행위의 위치를 이곳에서 저곳으 로 (지시를 변경 하면서) 이동할 수 있다.” 는 지시사항을 바탕으로 작곡에 비결정적인 행위를 도입한 작품이었다.125) 백남준은 《다름 슈타트 신음악 강좌》 한 달 뒤에 열린 이 공연에도 참석했으며, 이 후 『음악예술』에서의 기고문을 통해 “액션이 소리를 넘어선”
케이지의 〈음악 산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관람했다고 적기도 했 다.126)
그러나 이러한 케이지의 실험들은 루이지 노노, 피에르 불레즈 (Pierre Boulez, 1925-)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 독일 음악계에서는 완전히 긍정적으로 수용되지는 못했다.127) 대신 그의 실험은 울름 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의 막스 빌(Max Bill, 1908-1994)과 철학자 막스 벤제(Max Bense, 1910-1990) 를 중심으로 전파되고 있던 독일 내 구체예술의 흐름들과 공명하는
124) 케이지의 강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조. Amy C. Beal,
“Patronage and Reception History of American Experimental Music in West Germany, 1945-1986,” Ph.D. diss.(The University of Michigan, 1999), pp.
106-108.
125) William Fetterman, John Cage’s Theatre Pieces: Notations and Performances(Amsterdam: Harwood Academic Publishers, 1996), pp. 47-59.
126) 백남준은 한 비평가가 “케이지의 《음악 산책》에서는 어느덧 액션이 소리를 이겼다. 이것이 장래의 음악극장에의 가장 정당한 길이 될 것이다.”고 평한 것 을 주요하게 전달했다. 白南準, 앞의 글(1961.3), p. 15.
127) 하인츠 클라우스 메츠거와 한스 헬름스는 존 케이지의 옹호자들이었다. Amy C. Beal, 앞의 논문, p. 103.
것을 통해 전후 독일에서 퍼포먼스가 발흥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128) 당시 쾰른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구체예술이라 는 노선 하에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들은 케이지의 미학적 실천들이 구체예술의 원리들과 유사한 특징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였 다.129) 특히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는 쾰른의 아방가르드 서클 내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공간으로, 구체예술의 실천을 위해 1960년 3월에 개최된 《Musik-Texte-Malerei-Architektur》에는 한스 헬름스, 실바노 부소티(Sylvano Bussotti, 1931-),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1929-), 제로 그룹(Gruppe Zero) 멤버들인 오토 피네 (Otto Piene, 1928-2014)와 하인츠 마크(Heinz Mack, 1931-), 그리고 존 케이지가 초대되었다.130) 한스 헬름스는 쾰른을 중심으로 예술가 들이 모여들고 교류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비단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 벌어진 공연들뿐만 아 니라, 이와 유사한 모든 행사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 이와 같은 것들을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 유럽으로 온 작곡가들은 반드시 쾰른을 찾게 되었다.131)
128) Claudia Mesch, Modern Art at the Berlin Wall: Demarcating Culture in the Cold War Germanys(London; New York: Tauris Academic Studies, 2008), pp.
163-164.
129) 빌프리트 되르스텔(Wilfried Dörstel)은 유럽 구체예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① 오로지 그 자체만을 함축하는 시각적 요소들의 사용, ② 개인의 창의적인 퍼포먼스의 포기, 즉 반-개인주의 혹은 주관적인 제스처의 극복, ③ 해석하는 관중의 자유, ④ 관중이 자유롭고 해석자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작품의 의미란 생각(idea)에 놓여있는 것, ⑤ 구체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현 실을 전용한다는 차원에서 직접적인 리얼리즘이 요구되는 것, ⑥ 계산 혹은 구 성과 우연이란 동등하다는 것. Robert von Zahn, “The Bauermeister Studio:
Proto-Fluxus in Cologne 1960-62,” in Fluxus Virus 1962-1992, ed. Ken Friedman(Cologne: Galerie Schüppenhauer and Kölnischer Kunstverein, 1992), p.
58.
130) Wilfried Dörstel, “Chronicle,” 앞의 책, Wilfried Dörstel et al., pp. 17-22.
131) 1993년 6월 2일 한스 헬름스의 구두진술; Robert von Zahn, “Refüsierte Gesänge. Musik im Atelier Bauermeister,” 위의 책, p. 103에서 재인용.
1960년을 전후로 쾰른의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와 그 주변 에서 열린 일련의 이벤트들을 통해 독일의 제로 그룹, 프랑스 누보 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의 다니엘 스포에리와 아르망(Arman, 1928-2005), 미국의 존 케이지와 데이빗 튜더, 그리고 백남준 등이 서로 조우하면서, 이 시기 서독에서는 마침내 퍼포먼스가 중심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132)
그러나 구체예술을 주축으로 하는 쾰른의 예술계와 케이지가 서 로 간의 접점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에서 형성된 케이 지의 실험들은 서독이라는 공간에 정착하면서 한 차례 굴절되어 수 용되는 과정을 거쳤다. 로버트 폰 잔은 케이지로부터 나온 아이디어 들이 당시 쾰른의 아방가르드 서클 내에서는 지극히 투쟁적이고 사 회비판적인 맥락 속에서 해석되고 실천되는 경향에 놓였으며, 따라 서 다분히 비-미국적인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했다.133) 이에 대해 한스 헬름스 역시“당시 쾰른이 케이지의 미학적 개념들을 너 무 정치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134)
실제 이 시기 서독을 포함한 유럽의 퍼포먼스에 잠재된 정서는 미국에서 발전한 해프닝에 비해 훨씬 더 정치적인 수사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135) 모더니스트적 미학에 대항하고 20세기 초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재평가하는 것으로부터 더욱 공격적으로 부상하기 시 작한 이들의 행위는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을 넘어 당대의 사회운동 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정치적 함의를 지닐 수 있는 매체로 기능하고 있던 것이다.136) 크리스틴 스타일즈는 전후 냉전기를 “트
132) 이듬해 건축가 네우페르트(Peter Neufert)의 집에서 개최된 《Der Geist der Zeit in Malerei und Plasik》에서도 막스 빌과 칼 게르스트너(Karl Gerstner), 아 르망과 다니엘 스포에리 등이 함께 초대되었다. Claudia Mesch, 앞의 논문, p.
14.
133) Robert von Zahn, “Refüsierte Gesänge. Musik im Atelier Bauermeister,” 앞 의 책, Wilfried Dörstel et al., p. 119.
134) 1993년 6월 2일 한스 헬름스의 구두진술; 위의 글, p. 115에서 재인용.
135) Laurie Carlos, “introduction,” 앞의 책, RoseLee Goldberg, p. 15.
136) Timothy Scott Brown, West Germany and the Global Sixties: T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