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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어업활동 위축

Dalam dokumen 氣候, 바다, 漁業紛爭* (Halaman 33-39)

1900년경 일본인의 관찰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천혜의 조건을 갖추 고 있지만, 어업이 불완전하여 어업의 이권을 외국에 빼앗긴 상태였다.

포경업은 모두 외국인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중요한 해산물도 70-80%까지 외국인에게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있었다.110) 그 주요한 어업은 일본인어업, 한국인어업, 러시아․영국의 포경어업, 청 국어선의 갈치어업, 청국과 한국인 합작의 잠수기어업이었다.111) 1902 년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어민만 1만 명에 이를 정도여서 일본은 韓海 에서 주도권을 자신들이 완전히 장악했다고 보았다.112)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淸人이 황해부근에서 겨우 侵漁하는 것은 아직 유의할 만하 지 않았다.”113)

겨울이면 충청도 연안 및 전라도 七山灘 부근에 갈치어업에 종사하는 것이 수십 척이다. 올해에도 30척 정도가 出漁한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조직이 작고 어업이 단순하기 때문에 아직 우리가 出漁하는 것에 조금도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114)

이처럼 1900년경에 이르면 이미 일본은 청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 았다. 시노부 준페이(信夫淳平)는 “반도의 수산업에 대해서는 그 이해 관계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주된 외국은 일본 및 러시아 뿐”이라고 규 정하고, “韓民의 수산사업이 유치한 오늘날, 韓海 어업의 이권은 거의 우리나라 어업자가 독점하고 있다”고 했다.115) 그렇다면 과연 청국어 선은 무시할 만 했을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이러한 관찰에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조

110) 岡庸一,最新韓國事情(靑木嵩山堂, 1903), pp.160.

111) 葛生修吉, pp.410-411.

112) 岡庸一, pp.160.

113) 大分縣內務部,韓海漁業視察復命書(1900), p.53.

114) 大分縣內務部,韓海漁業視察復命書, p.55.

115) 信夫淳平,韓半島(東京堂書店, 1901), pp.609-610.

업하던 청국어선의 규모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일전쟁 이후 전라도․충청도에서 청국어선의 불법어업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분명 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양에서는 여전히 많은 청 국어선이 불법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뭍과 멀리 떨어진 무인도를 근거지로 삼아 조업했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청 국어선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사실은 1909년경 일본의 본격적인 조사에 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청일전쟁 이후 10년 뒤에 발생한 러일전쟁은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조업하던 청국어선의 활동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대한 제국이 사실상 통감부체제에 들어가고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韓 海에서 일본의 지배력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1904년 3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대비하여 일본군대의 어류를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평안․

황해․충청도의 出漁를 요구하며 대한제국 정부와 교섭을 벌였다.116) 그 결과 6월 4일 대한제국의 승인을 얻어 20년을 기한으로 이들 지역 에 대한 통어권을 획득했다.117) 이로써 한국의 모든 해역이 일본어민들 에게 개방되었고, 양국 어선의 본격적인 경쟁은 불가피해졌다. 평안남 도 鎭南浦의 경우 러일전쟁에 즈음하여 朝鮮海水産組合이 출장소를 설 치하여 300척 이상의 어선이 폭주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군대의 北進 에 따라 어선도 북방으로 이동하여 일시적으로 수가 줄어들었지만, 1905년경에는 항상 100척 이상의 일본어선이 출입했다.118)

흥미로운 것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어선의 역할이다. 황해도와 평안 도에 일시에 일본어선이 폭주한 것은 일본군대에 어류를 조달하기 위 해서였다. 일본군이 요동으로 이동함에 따라 일본어선도 이를 따라 청 116)韓日漁業關係往電 제292호, 韓國沿海 未開港場에의 日本漁船 出入 保障 건 (1904. 3. 14), p.582; 來電 제140호, 日本漁船의 韓國 未開港場에의 出 漁 保留 指示 건 (1904. 3. 16), p.582.

117)交涉局日記, 광무 8년 6월 4일, pp.662-663;韓日漁業關係往電 제527호, 黃海․忠淸․平安 三道에서의 日本 漁業權 特許承認 건 (1904. 6. 4), pp.583-584.

118)韓國水産誌제4권, pp.457-458.

의 해역으로 진출했다. 특히 1905년까지 반년 간 계속된 旅巡 공방에 서 “일본 육해군의 다수 장병에게 신선한 어류를 공급할 목적으로 아 직 일반인의 渡航을 허가하기에 앞서 일본인 어업자는 함대에 直屬하 여 도항했다. 旅巡 및 大連 근해에서 어업에 종사하게 됨에 따라 일본 인 어업자가 關東州에서 어업하게 되는 첫걸음”이 되었다.119) 이처럼 일본어선이 한반도의 서북해 및 중국의 동북해에 진출하는 과정은 제 국주의 침략과 맞물려 있었다. 특히 중국의 동북해에 일본어선이 다른 무엇보다 먼저 진출했다는 것은 일본의 수산업이 군사력 팽창과 얼마 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05년 1월 農商務省 派遣技師인 시모 케이츠케(下啓助)는 평안도의 椵島, 황해도의 椒島 및 巡威島․龍威島, 세 지역에 어업근거지를 설치 할 것을 입안했다. 그 이유는 도미․조기․갈치․민어 등 풍부한 어류 자원과 넓은 시장이 있다는 장점 외에도 “한국 주둔군 및 만주군에 어 류 공급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장래에 요동방면으로 어업을 확장 하는데 무엇보다 편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120) 평안․황해도의 해양은 일본어선이 중국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셈이 다. 평안․황해도 연안에 어업근거지를 설치하자는 시모 케이츠케의 입안은 본격적인 이주어촌건설의 시발점이었다.121) 일본정부의 재정적

119) 岡本正一,滿支の水産事情(水産通信社, 1940), pp.510-514.

120)韓日漁業關係, 機密 제9호, 平安․黃海兩道沿岸漁業根據地設置ニ關スル件 (1905. 1. 17) pp.598-600.

121) 요시다 케이이치는 “정부는 이주어촌건설에 관한 실태조사를 위해 明治 37 년(1904) 12월 農商務省技師 시모 케이츠케(下啓助), 同技手 야마와키 소지 로(山脇宗次)를 조선에 파견했다”고 했다. 吉田敬市, pp.248-249. 그러나 이 주어촌건설의 필요성은 시모 케이츠케가 平安․黃海道 연안조사에서 얻은 독단적인 판단이었던 듯하다. 시모 케이츠케의 입안이 가지는 중요성을 먼 저 인식한 것은 在韓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였다. 그는 오히려 일본정부에 “어업근거지설치”의 중요성을 설득했다.韓日漁業關係, 機密 제39호, 下技師ノ設計ニ係ル漁業根據地一件ニ關シ再申 (1905. 3. 18) p.603.

1905년 4월, 시모 케이츠케와 야마와키 소지로가 農商務大臣에게 올린 國水産業調査報告는 韓海 전역에 이주어촌건설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설명 하고 있다. 평안․황해도 연안에 어업근거지를 설치하자는 시모 케이츠케의

인 문제로 이 계획이 바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1908년 韓國漁業法이 제정되어 사실상 이주어촌건설을 합법화하고, 어민들을 통한 “殖民”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122)

분명한 사실은 평안․황해도에 대한 일본 어민의 이식은 한국의 식 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 본격적인 중국 진출을 위한 전제조건 이었다. 이로 인해 황해도․평안도의 해양은 아직 “졸렬”한 상태의 한 인어선, 점증하는 일본어선, 불법어업을 행하는 청국어선이 경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다만 풍부한 어류자원에도 불구하고 본토와 거리가 너 무 멀고, 한랭하고 낯선 기후조건으로 일본어민의 이식이 더디게 진행 된 것이123) 청국어선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1905년의 조사에 따르면 평안․황해도 해양은 어족이 풍부하여 충 청․경기․전라도 방면으로부터 500척 정도, 청국 山東․盛京省의 연 안으로부터 300척 정도의 어선이 出漁하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황해 도에는 수년 전부터 인천에 체류하는 어업자들이 출어하고, 평안도에 는 러일전쟁을 계기로 약 30척의 어선이 진출하는 정도였다.124) 따라 서 평안도는 “황해․경기․충청 3도의 한국어업자 및 청국어업자의 독 점어장”이었다.125) 황해도의 龍威島․巡威島 근해는 “4월부터 9월 사 이에 1개월 간 출입하는 선박수의 평균이 한국어선 220척, 청국어선 99척, 일본어선 46척으로 도합 365척”에 달했고, 魚泳島 근해는 “청․

입안이야말로 ‘국가’ 주도적 이주어촌건설 논의의 실제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주어촌건설에 대한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국가’가 주 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사례에 대해서는 김수희(2004), pp.55-56 참조.

122) 시모 케이츠케는 “本邦(일본)의 오늘날 상황에서 한국경영은 실로 국가안위 에 관한 중요한 문제로서, 각자 그 직분에 따라 奮勵하여 이 나라에 견실한 근거를 마련하고 목적하는 사업을 수행하는 것은 진실로 당면한 급무”이며,

“이때에 우리 어민을 이 나라에 이주시키는 것은 가장 긴급한 要務”라고 했 다. 漁民의 移植이야말로 “목적하는 사업”, 즉 한국 식민지경영을 위한 첫걸 음이었던 것이다(下啓助․山脇宗次, p.2).

123) 山口縣水産組合,韓國水産業調査報告(1907), p.116, p.121; 下啓助․山脇宗 次 (1905), p.2

124) 下啓助․山脇宗次, p.2.

125) 下啓助․山脇宗次, p.28.

한어선이 모여드는 것이 매년 200-300척”에 이르렀다.126) 갈치어업은 이즈음도 여전히 청국어선의 중요한 어업이었다.

가장 성행하는 어업은 청국인의 갈치어업으로 수십 년 동안 서해에서 성행했던 어업이다. 어장은 전라도 隔音列島부터 황해도 夢金浦에 이르는 사이로 매년 5월경부터 30-40석 선적의 親船에 漁艇 수척을 적재하고 식 염을 준비하여 어장에 와서 7월경까지 고기잡이 한다. … 청국인은 대부 분 山東縣 사람이 많고, 어획물은 선내에 鹽積하여 仁川․鎭南浦, 기타 한국의 도시에 판매한다. 매년 通漁船은 약 2백 척 이상으로 성행한 다.127)

다만 러일전쟁 이후에는 청국어선과 한국어선 사이에 포획어종의 차이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청국어선이 이전에 자국판매를 목적으로 했던 것에서 벗어나 한국판매를 목적으로 한국인 이 좋아하는 어류도 집중적으로 잡았음을 의미한다.

청국인은 同國 산동성 登州방면 및 威海衛 부근으로부터 通漁한다. 황 해도 장연군 몽금포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통어선 수는 170-180척이라고 일컬어진다. 양국인의 어업은 규모에 대소의 차이 가 있어도, 어업의 종류는 거의 同一體이다. 流網으로는 삼치․준치, 때로 는 고등어를 포획하는 경우도 있다. 手繰로는 달강어․넙치․새우를 잡 고, 鮟鱇網으로는 조기․갈치․준치 등을 포획한다.128)

韓國水産誌

에 의하면 청국어선은 주로 갈치․준치․달강어․조 기․새우를 어획했다.129) 특히 중요한 것이 갈치와 새우였다. 갈치어업 은 전라․충청․경기․황해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조업했고, 山東 登州府․萊州府 및 關東州뿐만 아니라 멀리 福建省의 福州, 廣東 省의 海南에서도 오고 있었다.130) 새우어업은 평안도 淸川江口와 鴨綠 江口에서 성행하여 청국어선이 폭주했다. 청천강구에서는 沙五浦․艾 126) 下啓助․山脇宗次, pp.37, 40.

127) 山口縣水産組合, p.57.

128) 山口縣水産組合, p.128.

129)韓國水産誌제1권, pp.200-201.

130)韓國水産誌제1권, pp.266-269.

Dalam dokumen 氣候, 바다, 漁業紛爭* (Halaman 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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