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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협정 논의와 청국어선 축출

Dalam dokumen 氣候, 바다, 漁業紛爭* (Halaman 39-48)

앞에서 살폈듯이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은 韓海에서 경쟁상대는 오직 러시아뿐이며, 중국어선이 侵漁하는 것은 일본의 出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했다. 韓海 곳곳에 일본어선이 진출함에 따라 그 주도권은 이미 자신들의 수중에 들어왔다고 단언했다.135) 실제로 청일전쟁 이후의 일본 기록에는 서남해안에 갈치조업을 하는 수십 척 의 청국어선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어선이 황 해도․평안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불법어업을 행하는 청국어선의 규 모가 의외로 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청국어선에 대한 일본의 인식은 바뀌게 되었다. 1909년 1월 新義州에서 鎭南浦에 이르 는 “西朝鮮灣”에 대한 한국농상공부 수산과장 이치하라 분이치(庵原文 一)의 평가는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6천 해리의 조선 해안) 중에서 일본인의 발전구역은 경상남북도․전 라남도여서 전체를 10으로 하면 아직 일본의 通漁는 겨우 2할 정도 밖에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船數는 3-4천 척, 인원은 1만 5-6천 정도며 어획고는 예상컨대 대체로 5백만 원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아직 2할 만이 개발되었을 뿐이고, 8할은 개발되지 않았다. … 이 해면[西朝鮮灣]에 서 어업의 종류를 분류하면, … 중국어선이 3천 척, 조선어선이 대체로 4 백 척, 일본어선이 약 백 척이다. 이렇게 보면 日․韓漁船 5백 척과 지나 어선 3천 척이 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조선만에서 어 업의 최대이익은 지나어선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 중국의 3천 척에 대해서 일본은 약 백 척 만이 경영하고 있고, 또한 현재 조선에는 4백 척

135) 가츠죠 슈기찌(葛生修吉)는 朝日通漁章程이 체결된 이후 “일본어민의 韓海 통어는 급속한 속도로 증가하여, 명치 23년(1890) 경에는 通漁船 숫자가 모 두 7-8백 척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경상․전라․강원․함경 4도의 연해 곳곳에 帆影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어 韓海의 漁業權은 거의 우리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고 했다. 葛生修吉, p.9.

이 있지만 이들은 미미한데다 어업은 작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은 도저 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136)

이치하라 분이치는 황해․평안도 연안의 무수한 무인도를 근거로 청국어선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예컨대 雲霧島에 70척, 外鶉 島에 50-60척, 艾島에 230척, 沙五溝에 200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청국 어민들이 근거지로 삼은 지역에는 乾魚場과 임시가옥 뿐만 아니라 소 금가마도 설치했는데, 많은 곳은 80여 개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좋은 어장은 지나인이 점령해 버려, 지나인이 사용하지 않 는 곳만을 조선인이 조업하고 있었다.”137) 적어도 황해․평안도 연안에 서는 청국어선이 여전히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통감부를 통해 한반도를 식민화하고 있던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흥미롭게도 일본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중국의 해양으로 진 출하려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어민을 “이식”시키는 이주어촌건설을 적극 추 진했다. 漁業協定書와 韓國漁業法은 그 귀결이었다. 1908년 10월 31일 한․일간에 어업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하고, 11월 11일부로 한국어업 법이 반포되었다.138) 한국어업법은 한국의 모든 연안 및 내수면에서 일본인이 한국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자유롭게 어업 할 수 있게 규정하 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이치하라 분이치는 한국어업법의 제정에 결 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어업법을 시행할 때는 명확하게 韓人과 동일하게 일본인의 권리와 의무도 정해, 강이든 호수이든 모든 동식물을 잡는데 어떠한 한국인과의 가림이 없다는 방침으로 어업법을 제정했다”고 했다.139) 일본인에게 연안의 어장을 합법적으로 탈취할 수 136)大日本水産會報告316, 西朝鮮灣の漁利 (1909.1.10) (韓日漁業關係調査

資料, pp.623-624).

137)大日本水産會報告317, 西朝鮮灣の漁利 (1909.2.10) (韓日漁業關係調査 資料, pp.625-626).

138) 박구병, 한․일근대어업관계연구: 1876-1910 , pp.45-47.

139)大日本水産會報告314, 韓國漁業法制定の要旨 (1908.11.10) (韓日漁業關 係調査資料, pp.617-619).

있는 정당한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영해는 일제 의 강점이전에 일본에 병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140)

다만 유의해야할 점은 한국어업법이 반포된 것이 1908년 11월 11일 인데, 그 시행은 다음 해 4월 1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어업협정서의 체결에서 계산하면 5개월이라는 유예기간이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 미할까? 실제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던 통감부가 5개월이라는 유예기 간을 둔 이유는 청국 密漁船과 관련이 있었다. 일본정부는 한국어업법 의 시행을 앞두고 韓海에 來漁하는 청국어선을 이용하여 한청어업협정 을 체결하려고 계획했다.

앞에서 이미 살폈듯이 청은 조청무역장정이 폐기된 이후 한국과 어 업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1901년 청국공사 徐壽朋이 어업협 정의 체결을 요청했고, 이후에 許臺身이 다시 요청했지만 朴齊純에 의 해 거부되었다. 다만 閔宗黙이 어업협정의 필요성을 동의하고 수시로 상의할 것을 수락했지만, 이후에 흐지부지 되고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한동안 진전이 없던 어업협정이 다시 논의되었던 것은 1908년 4월의 일이었다. 駐韓總領事 馬廷亮은 통감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어업협정체 결을 본국에 타진했다.141) 그는 直隸․奉天․山東 3省과 황해․평안․

경기도 通漁權을 교환했을 때의 이해득실을 3성 장관에게 照會했 다.142) 直隸․山東․奉天 3성 督撫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그 해 6월 直隸巡撫는 상호교환이 청국어민들에게 무익하여, 각기 경계를 지켜

“海權”을 지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회신한다.143) 140) 박구병,한국어업사(정음사, 1975), p.261.

141) 馬廷亮은 한 해 전인 1907년 여름 청국 밀어선 문제를 통감부와 상의했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1908년 3월 통감부는 나포와 징벌을 모면하는 것은

“目前之計”에 지나지 않으니, 通漁章程을 체결하는 것이 “方爲正辦”이라고 했다. 어업협정의 체결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이후에 어업 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馬廷亮을 설득하여, 청 조정에 협정체결을 촉 구하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142)淸季中日韓關係史料, 外務部收駐韓馬總領事信 (광서 34년 3월 25일), pp.6781-6785.

143)淸季中日韓關係史料, 外務部收北洋大臣文 (광서 34년 5월 17일),

이에 馬廷亮은 韓海에서 활동하는 청국어선의 정황을 상세히 보고 하면서 어업협정의 필요성을 다시 지적했다. 그는 중국어민들이 韓海 에서 捕魚한 것은 “중국 乾隆 연간부터 이미 건너오는 자가 있었으니 오늘날에 이르러 약 2백 년의 계보”가 있고, 다른 나라의 어선과 분쟁 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며, 한국인도 중국어선의 來漁를 바라고 있다고 강조했다.144) 그 자신이 어업협정의 체결을 강력히 희망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일어업협정서가 체결된 이틀 뒤인, 11월 2일 山東巡撫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어선이 산동성 海面內에서 捕魚하는 경우는 없다. 산동성 어선이 한국 海界內에서 捕魚하는 것이 왕년에는 그 수가 여전히 많았지만 근년 에는 항상 韓國稅關에게 苛罰을 당하고, 더욱이 그곳의 損項이 매우 많은 까닭에 나가고자 하는 자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올해는 산동에서 한국에 가는 어선이 백 척이 되지 않고, 한국에 도달한 후에 이익을 얻는 것도 매우 적어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한국에 가서 捕魚하려는 漁戶 는 더욱 모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산동성 지방을 그것들과 호환 한다면 本省의 漁戶人 등은 대부분 따르기를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 늘을 위한 계책은 각기 界限을 지켜 마땅히 通換하지 않고서 장래에 어 업을 확충하고, 漁輪을 구매하고, 西法을 參用하여 捕魚할 때를 기다려 다시 訂約하고 호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145)

산동순무는 산동 연안에서 생산되는 어류만으로 연해 거민들의 수 요에 충분하기 때문에 호환은 필요 없으며, 이것이 결국은 중국의 “海 權”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산동순무가 ‘호환’을 pp.6798-6799.

144)淸季中日韓關係史料, 外務部收駐韓馬總領事節略 (광서 34년 6월 29일), pp.6806-6807. 馬廷亮은 청국어민의 어업을 새우잡이와 고기잡이 두 종류로 나누었다. 새우잡이는 평안도 연해, 고기잡이는 경기․전라․충청․황해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각각 2백 척씩, 총 2천여 명이 來漁한다고 했다. 그 는 청국어민이 韓海에서 어업 한 연원을 乾隆 연간에서 찾고 있지만, 실제 로는 17세기 후반인 康熙 연간부터 시작되고 있다.

145)淸季中日韓關係史料, 外務部收山東巡撫袁樹勳文 (광서 34년 10월 초9 일), pp.6827-6809.

거부하는 중요한 논거는 韓海에서 고기잡이 하는 산동어선이 백 척도 되지 않고, 그 수도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8년 11월경 일본의 조사에 의하면 평안․황해도 부근의 여러 섬에 근거지 를 두고 조업하는 중국어선은 2,600척이고 어민은 약 2만 9천명에 달 했다.146) 산동순무의 보고와는 달리 韓海에서 조업하는 불법어선의 규 모는 막대했던 것이다.147) 일본은 당시의 실제적인 현황을 馬廷亮과 중국정부에게 인지시키고 어업협정의 체결을 재촉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중국정부가 어업협정의 체결에 미온적이었던 이유 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본이 한청어업협정에서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즉 “산동․직예 및 봉천 3성의 연안에 日․韓人의 어업을 허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148) 본질적으로 이것은 한 국어민이 아니라 일본어민과의 문제였던 것이다. 설령 한․청간에 어 업협정이 체결된다고 할지라도 한국어선이 중국해양으로 진출하는 것 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청어업협정을 통해 중국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본어선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韓海를 볼 모로 일본어민을 중국해양으로 진출시키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일본은 1909년 4월 1일부로 한국어업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한청어업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서둘렀다. 일본은 한국어업법이 시행되면 이전의 어업관계는 모두 폐지되고, 한국정부와 특약을 체결 한 국가만이 韓海에서 한국인과 동일하게 조업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한․중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여 협약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149) 146)統監府文書10, 機密送 제11호, 淸韓漁業協約締結ニ關スル件 (1909. 2.

27), 別紙: 淸韓漁業協約締結ニ關スル件 (1909. 2. 17), pp.426-427.

147) 당시 밀어선 규모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압록강․청천강 부근에서 조업 하는 奉天․盛京에서 온 어선이 약 7-8백 척, 황해․평안도 난바다에서 조 업하는 盛京․山東․廣東에서 온 어선이 대략 2천 척이었다.統監府文書10, 往電 제18호, 漁業問題ニ關スル件 (1909. 3. 2), p.428.

148)統監府文書10, 往電 제6호, 韓國에서의 淸國人漁業問題에 관한 조회 (1909. 1. 19), p.423.

149)統監府文書10, 機密統發 제107호, 淸國人漁業ノ件 (1909. 1. 25), 別紙:

淸國人漁業ノ件(1909. 1. 15), pp.423.

Dalam dokumen 氣候, 바다, 漁業紛爭* (Halaman 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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