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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Dalam dokumen 氣候, 바다, 漁業紛爭* (Halaman 48-54)

이상에서 1882년에서 1910년까지 30여 년간의 조선과 청의 어업분쟁 을 살펴보았다. 230여 년의 장구한 조청어업분쟁의 역사에서 이 30여 년의 기간은 한․중․일 3국이 근대세계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그 한 가운데 조선의 바다가 있었다.

제3기(1882-1894)는 조청무역장정의 체결에서 청일전쟁까지로 청국 어선이 합법적으로 조업했던 시기였다. 그 법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 朝淸貿易章程 제3조였다. 여기에는 조선의 황해도․평안도, 중국의 산 동성․봉천성에 양국 어선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고기잡이할 수 있게 규정했다. 조선의 어업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국어민의 한국해 양 침탈을 합법화하는 일방적인 조치였다. 다음 해에는 일본과 朝日通 商章程을 체결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의 해양을 일본어 민에게 개방함에 따라, 한국해양을 둘러싼 청과 일본 간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해양환경의 변화이다. 19세기 후반은 근세 소빙기 (Little Ice Age)에서 20세기 온난기(Warm Period)로 전환되던 시기였 다. 조청무역장정 제3조 어업규정은 기후변동에 따른 청어의 이동을 반영하고 있다. 1850년대 이후 산동과 요동에서 청어가 사라져버리자,

청국어선들이 청어를 쫒아 대거 조선의 서해안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청어야말로 조청무역장정 제3조의 실제적인 배경이었다. 그러나 1880 년대에는 청어가 서해안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청국어민은 조선어민 들이 어획한 청어를 약탈하는 등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90년대 이후 서해에서 청어가 완전히 사라지자, 이를 대신해 갈치․준치․조 기 등 새로운 어종을 찾아야했다.

제3기 동안 한국해양에서 우위에 있던 것은 청이었지만, 점차로 일 본의 도전을 받게 된다. 청국어민들은 조청무역장정에서 규정된 범위 를 넘어 충청도․전라도까지 넘어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 민들도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에서 점차로 충청도․경기도로 어업구역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 여러 차례 어업협정 을 체결하여, 실제적인 이권을 장악해나갔다. 1888년 일본이 인천근해 에 대한 어업권을 획득하자, 청도 1891년 이를 강력히 요구했다. 남하 하는 청과 북상하는 일본이 인천에서 어업권을 놓고도 충돌하게 된 것 이다.

제4기(1894-1910)는 청일전쟁에서 한국병탄까지이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이전에 맺은 조약들이 모두 폐기되자 청국어선들이 한국해 양에서 조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사라졌다. 12년(1882-1894)의 합 법적 어업활동시기가 끝나고 불법적인 어업시기로 전환된 것이다. 청 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어선이 대거 밀려오자, 청국어민의 어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법어업의 규모는 여전히 상당했다. 흥미 로운 것은 이전의 조약이 폐기된 이후 얼마지 않아 새로운 조약이 체 결되었지만, 어업협정은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이 이 문제의 심 각성을 깨달은 것은 1901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청은 어업협정을 맺 으려고 시도했지만, 한국정부의 거부로 끝내 실패했다.

러일전쟁은 황해도․평안도에 불법 조업하던 청국어민의 활동마저 위협했다. 1900년 경기도에 대한 어업권을 획득했던 일본은 러일전쟁 을 빌미로 황해도․평안도․충청도에 대한 어업권마저 획득했다. 일본 어민이 황해도․평안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이곳은 3국의 어민이 경

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불법조업을 하던 청국어선은 3천여 척으로 사실상 평안도․황해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던 일본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 여 오히려 중국해양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일본은 1909년 4월 1일부로 한국어업법 시행을 앞두고, 청 정부에 한국과 어업협정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평안도․황해도․경기 도와 중국의 산동․봉천․직예의 해양을 양국 어민들에게 개방하자는 것이었다. 청 정부는 이것이 결국은 일본이 중국해양으로 진출하기 위 한 것임을 간파하고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함대를 이용하여 순찰을 강화하고 청국어선을 한국해양에서 축출했다. 2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 던 청국어민들의 불법어업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한국의 해양을 둘 러싼 어업경쟁에서 청은 완전히 밀려났다.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강점 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기억해야할 것은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어업은 통상과 는 별개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청은 서해에서 자국의 청어잡이 어선들 을 보호하기 위해 통상조약에 어업조항을 포함시켰다. 조선은 4일간의 짧은 검토를 통해 조선의 바다를 개방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 결 과는 혹독했다. 조청무역장정 제3조 어업규정은 일본을 자극하여 조선 의 바다를 둘러싼 청일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다의 막대한 해양자원도 청과 일본의 어선들에게 유린당하고, 이에 대한 경 제적 보상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빌미로 각종 이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韓國漁業令이 시행되면서 일본은 실제적 으로 한국의 바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韓國水産誌

제1권이 출간되었던 것이 1908년 12월이었다. 이때에 이르면 일본이 학문적으 로도 이미 한국의 바다를 지배했던 것이다. 일본이 뭍을 병탄하기 이 전에 바다를 먼저 병탄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19 세기 후반의 기후변동이 이러한 국제적 정세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해양을 둘러싼 청․일간의

<별표1> 조청무역장정과 어채금단

무역장정(貿易章程) 어채금단(漁採禁斷)

1850- 1852년 어채금단 자문 보냄

1869년, 1871년에도 어채금단 요청

1880 6.18 조선, 어채금단 자문 보냄

8.31 禮部 禁斷 상주. 이홍장, 엄중 금단 조치내림

10.3 금단조치 조선에 회자(回咨) 1881

1882 5

5월 통상논의 진행

李鴻章 服喪. 魚允中―張樹聲․周馥 논

筆答節略 ․ 問答節略 에 어업문제 언급 없음

6 6.23 조선, 어채금단 자문 보냄

7 7월 임오군란으로 통상논의 중단

8 8.28 이홍장, 어채 엄중 금단 조치

9 9.17 李鴻章―趙寧夏 회담

善後事宜六條 : 통상 필요성 제기했지 만, 어채문제 언급되지 않음

이홍장-조영하 회담 이후 통상장정 초 안 작성

통상장정과 어채문제, 별개의 문제였음

1개월 사이에 어채문제에 대한 이홍장 의 공식적인 입장 바뀜: 불법에서 합법 화로 전환→ 통상장정의 초안에 어업 문제 들어감

9.30 通商章程 본격 논의

9.28 魚允中 天津 도착. 9.30 魚允中―馬建忠․周馥 본격적인 통장장정 논의

魚允中節略 : 어윤중, 청측이 제시한 어업조항의 내용에 기본적으로 공감. 다만 조 항으로 넣는 것에 이의 제기함→ 청측의 반론으로 그대로 수용

10 10.4 朝淸貿易章程 체결

실제적인 협의는 9월 30일에서 10월 3일에 이루어짐 10.23 조청무역장정 재가

경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지구온난화 (Global Warming)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별표2> 조․청 어업분쟁의 전개과정

단계 기간 장정(章程)과 어업분쟁 주요내용

3

通漁시기 (1882-1894) 합법적 어업시기 淸․日의 경쟁 청의 우위 유지

1882 【淸】 조청무역장정(제3조):

―청, 평안․황해도 通漁權 획득

1883 【淸】 조선봉천변민교역장정, 조선길림상민수시무역장정

【日】 조일통상장정(제41관)

―일본, 함경․강원․경상․전라도 통어권 획득

【日】 처판일본인민재약정조선국해안어채범죄조규:

―일본어부에 대한 치외법권, 영사재판 처벌 1888 【日】 인천해면잠준일본어선포어액한규칙:

―일본의 인천해안 捕魚 허가 1889 【日】 조일통어장정: 영해 3해리 원칙 적용 1891 【淸】 청, 인천 근해 어채 준허 요청 (-1892.1)

4

(1894-1910)密漁시대

불법어업시기 일본 우위 확립

1894 【淸】 조청상민수륙통상장정, 조선봉천변민교역장정, 조선 길림상민수시무역장정 廢罷 통지

1894 【淸】 청상보호규칙 1895 【淸】 청상보호규칙시행세칙 1897 【日】 일본, 원양어업장려법 제정

1899 【淸】 한청통상조약: 어업문제 대상에서 제외됨 1900 【日】 일본, 경기도 통어권 획득

1901 【淸】 청, 대한제국과 통어장정 체결 시도

1904 【日】 어채구역조례: 충청․황해․평안도 일본에 개방 1907 【日】 몽금포 세관감시서 설치, 서해의 淸國密漁 단속 1908 【日】 11월, 한국어업법: 일본인 한국인과 동등한 자격으

로 한국 연안, 내수면 자유롭게 조업할 수 있게 함 1908 【淸】 통감부, 한업어업법 시행을 앞두고 지속적으로 한청

어업협정 체결 시도.

1909 【日】 4월 한국어업법 시행.

1909 【日】 6월 이후 군함 동원, 청국어선에 대한 대대적인 단 속 진행함

1911 【日】 조선어업령

(中文提要)

气候․海洋․渔业纷争

- 从1882年到1910年间朝鲜和清朝的渔业纷争之演变 -

金 文 基

对于渔业问题, 朝鲜和清朝之间持续着纠纷, 有230余年(1684-1910)

之长. 本文注重考察1882年到1910年, 因为这个三十年就是东亚三国转向到 近代世界的激变时期. 围绕朝鲜的海域, 清朝和日本两国的渔业竞争也是激 烈.

1882年, 朝清两国签订中朝商民水陆贸易章程, 就成为重大的转折点. 章 程的第三条, 则为有关渔业的条目, 把黄海道和平安道的海域向清朝渔民开 放. 这个条目给从前清朝渔民的非法渔业活动赋予了合法地位. 第二年, 朝 鲜王朝和日本两国签订了朝日通商章程, 把咸镜道․江原道․庆尚道․全 罗道的海域向日本渔民开放. 围绕朝鲜海域, 清朝和日本之间的竞争由此开 始. 我认为, 其实在朝鲜海域发生纠纷, 因为东亚三国海洋环境变化所致.

19世纪后期, 是从明清之际以来的小冰期(Little Ice Age)转向到20世纪的 温暖期(Warm Period)的时候. 中朝商民水陆贸易章程的第三条反映着海 洋环境变化所致的鲱鱼移动. 鲱鱼, 就是中朝商民水陆贸易章程渔业条目的 实际背景.

1894年的甲午战役, 清朝打败, 长达12年的合法渔业活动结束, 转向到密 鱼时期. 日本渔民大量流入, 清朝渔民的渔业活动倒是萎缩. 1901年, 清朝 提起签订通渔章程一事, 被韩国政府拒绝, 终于失败. 与此相反, 日本在 1900年获得了京畿道的渔业权. 1904年, 以露日战役为借口, 又获得了黄海 道․平安道․忠清道的渔业权, 所以确立了日本的优越地位. 在1909年4月1 日的韩国渔业法生效前夕, 日本向清朝提起韩清渔业协定. 协定究竟是日本 想进入中国海域的谋略, 清朝识破而拒绝之. 因此, 日本用舰队驱使清朝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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