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명사구 실체의 정보지위의 의의 및 대상
이제 명사구 실체가 가지는 절대적 정보지위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다. 2장에서 살 펴본 담화-구, 담화-신ㆍ청자-구, 청자-신의 위계와, 담화-구 지위를 활성화와 준 활성화로 나누는 체계가 적용될 것이다.
기존에 한국어 논의에서는 특정 명사구 형식이 나타내는 의미에 대한 해석론적 방 향의 문법 연구는 많이 진행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지시어(demonstrative)나 대명 사, 생략 현상 등에 대하여 문법적 양상과 의미적 양상을 함께 다룬 논의들이 있다.
한편 표현론적 접근법의 연구에서는 ‘한정성(definiteness)’, ‘특정성(specificity)’ 등 의 개념에 기반한 것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국어 명사구 전반에 대하여 절대적 정보지위의 체계를 설정하는 논의는 별로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시체의 절대적 정보지위에 대한 특정한 위계를 상정한 것은 그것이 어떤 한국어 형식들과 유의미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위계의 한 지점에 해당하는 정보지위가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어떤 특정 형식으로 나타나거 나, 어떤 특정 형식이 일반적으로 한 특정한 정보지위를 표현한다거나 하는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지시체의 정보지위에 대한 이러한 기능과 형식의 상관관계가 깊지 않다는 기술이 종종 이루어져 왔다. 대표적인 것이 한정성이다. 한정성은 영어 의 문법 범주로서의 한정명사구와 관련된 문법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의미ㆍ화
용론적으로 ‘(유일)확인가능성’ 등을 뜻하기도 하는데, Lee, C.(1995), 전영철(2013 가) 등 한정성과 관련된 여러 논의에서 한국어에는 한정성이 문법 범주로 실현되지 않음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어에는 영어와 같은 관사체계가 존재하지 않아서 관사나 지시사 가 없는 명사구 형식인 맨명사구(bare noun)가 일반적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어떤 특정 인지적 지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 특히 한정성과 관련해서 한정 적인 의미와 비한정적인 의미에 모두 쓰인다. 즉, 맨명사구라는 형식과 한정성이라는 의미는 표현론과 해석론의 양방향 관계에서 모두 큰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 맨명사구 가 쓰였지만 비한정적인 경우가 많이 있으며 한정성이 맨명사구가 아닌 다른 형식으 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있어, 어떤 관계도 일반화하기 힘들다.
또한 맨명사구는 한정성에만 무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위에서 설정한 정보지 위의 어느 지점과도 깊은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 한국어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무표적 인 명사구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맨명사구가 어떠한 특정 인지적 지위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1) 가. 나 그 옆에 아가씨가 한 명 서 있었고, 내가 서 있었고, 내 오른쪽에 아줌마가 서 있었거던? //1) 아니 인제~ 아줌마가 인제~ 쫌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해서 그 냥 가만히 서 있었어.
나. 나 방학 때 돈 한::푼도 안 썼어. 밥두 내가 안 사 먹구, 간식도 내가 안 사먹 구, 사 줘 막 이러구. // 애들한테 동생들한테 막 -누나 좀 사 줘.
(1가, 나)는 모두 자연대화 말뭉치에서 나타난 발화인데, 아무런 수식 성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명사인 맨명사구가 다양한 인지적 위계의 지점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선 (1가)의 첫 번째 밑줄 친 ‘아줌마’가 가리키는 실체는 이 발화 이전 에 청자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 담화에서 처음 도입되는 실체, 즉 청자-신 실체 이다. 그런데 동일한 명사가 다음 문장에서 다시 출현하는데 이때의 ‘아줌마’는 이미 이전 담화에 도입되어 있는 것이므로 담화-구 실체가 된다. (1나)는 대학의 같은 학
1) 말뭉치에 나타난 실제 발화들에는 한 화자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다른 화자가 ‘어’, ‘그래?’ 등과 같 이 상대방의 발화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논의에 영향 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경우 지면 관계상 종종 이를 생략하여 예를 제시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생략된 부분을 ‘//’로 표시할 것이다.
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로, ‘애들’과 ‘동생들’이 가리키는 실체는 화청자의 학과 후배 들을 가리키며 이는 화청자 사이에 공유되었지만 현재 담화에는 처음 나타난 담화- 신ㆍ청자-구 실체이다. 이때에도 맨명사구 형식이 쓰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1)에서 본 것처럼 맨명사구는 담화-구, 담화-신ㆍ청자-구, 청자-신의 지위들 중 어느 것과도 절대적인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 라도 높은 경향성을 가지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맨명사구가 항상 어떤 특정 지위를 가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혹 은 꽤 높은 확률로 어떤 지위와 연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본격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할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관관계가 강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우리말에서는 명사구의 형식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의 절대적 정보지위가 직접적인 대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그 동안의 연구에서 그 관계에 별로 주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본고는 맨명사구 외의 기타 유표적인 형식들 중에는 특정한 정보지위 혹은 인지적 지위와 유의미한 관련성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다고 보고 이에 주목하려 한다.
이에 해당하는 형식들은 생략형(영형대명사), 인칭대명사 및 지시대명사, 우분리(후 보충) 성분, ‘X 있잖아’와 ‘X 말이야’류의 X 성분, 비한정관형사 및 비한정대명사,
‘X-이라는 Y’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능과 형식의 양방향에서 절대적인 상관관계 를 보인다기보다는 어느 한 쪽의 방향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경향성을 가지는 관계를 보인다. 다음 절들에서 각각의 정보지위와 형식의 상관관계에 대해 하나씩 자세히 살 펴보도록 하겠다.
한편,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리가 다루는 실체의 정보지위는 담화에 출현한 모든 명사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본고는 명사구가 ‘지시 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 한할 것이다. 주어진 명사구가 시간의 흐름에도 연속적인 정체를 가진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일 때 그 명사구를 ‘지시적’이라고 한다(Du Bois 1980: 208). 이때 ‘대상’은 물리적 대상과 객관화된 개념을 포괄하는데, 우리는 이 중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실체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지시적으로 보이는 명사구이더라도 실제 쓰임에서는 비지시적인 용법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계사의 보어로 쓰여 속성을 나타낼 때, 서술어 ‘같다’의 선행 명사로서 나타날 때, ‘명사+명사’ 구성에서 후행 명사를 수식하는 선행 명사로 나타날 때에는 비지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주어진 명사구가 지시적인 것인지 아닌지의 여
부를 판단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이에 우리는 인간 명사구를 중심으로 하되 지시성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 되는 사물 명사구 등 맥락을 통해 지시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분명한 명사구 실체 에 한정하여 논의할 것이다. 지시적 명사구와 비지시적 명사구를 가르는 문제는 본고 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Du Bois(1980) 등에서 관찰하였듯이 적어도 인간을 가리키는 명사구는 비인간 명사구에 비해 지시성을 가지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정은 명사구 형식의 선택에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이 변인으로 작용할 가 능성을 차단한다는 측면에서도 논의의 편의를 돕는다. 명사구 형식의 결정에는 우리 가 살펴볼 정보구조적인 지시체의 인지적 지위뿐만 아니라 명사구가 나타내는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예컨대 맥락에서 같은 정도의 주어짐성을 가지 는 실체이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나타내는 경우와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그 표현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Fraurud(1996)에서는 인식론적 존재론에 의해 실체 를 크게 개체(individual), 함수(function), 일례(instance)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들이 명사구로 나타나는 양상을 살피고 있는데, 이러한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에 따른 명사 구의 실현도 중요한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인간이나 구체적 사물 을 나타내는 경우에 한해 논의함으로써 실체의 존재론적 성격이 명사구 형식을 결정 하는 변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차단하고 정보구조적인 성격에 따른 양상에 집중하도록 한다.
3.1.2. 담화-구 실체
이제 실체의 정보지위의 위계 중 가장 높은 주어짐성을 가지는 담화-구 지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담화-구 실체는 활성화 정도에 따라 다시 활성적 담화-구 실 체와 준활성적 담화-구 실체로 나뉜다. 각각을 절을 달리하여 논의하도록 한다.
3.1.2.1. 활성적 담화-구 실체
우선 실체의 정보지위 중 가장 높은 값을 가지는 담화-구 지위 중에서도 활성적 인 담화-구 지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담화-구 지위란 텍스 트나 발화상황에서 지시체의 표상이 주어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현재 발화 시점에서 현저한 것으로 두드러진 정보를 활성적 담화-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