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네?
4.1. 화제
앞서 2장에서 화제 개념이 단순히 ‘문장이 그것에 대한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기존 논의들이 이러한 화제의 모호한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 고 언어특정적인 범주를 일반적인 화제 개념에 일치시킴으로써 혼란을 보였다는 점 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리는 화제의 표현론적인 접근법과 해석론적 인 접근법을 분리할 것을 제시하고, 이 중 특정 화제 의미에 대하여 이것이 표현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표현론적인 접근법의 논의를 수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4.1.1절 에서 우선 언어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화제 개념을 설정하고 4.1.2절에서 이것이 한국어에서 실현되는 형식들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미리 언급하자면, 본고 에서 설정하는 화제 개념이란 ‘정언판단의 대상’이며, 이는 문두의 ‘은/는’, 제시어,
‘이란’, ‘이야’ 등의 형식들로 표현된다. 이제 절을 달리하여 이를 상세히 논의하도록 한다.
4.1.1. 화제의 개념: 정언판단의 대상
‘대하여성’이라는 모호한 의미만 가지고는 문장의 화제를 규정하기 힘들다는 것은 2장에서 충분히 살펴본 바 있다. 우리는 대하여성의 의미를 포함하되 보다 제한적인 의미를 가져서 언어 분석의 도구로 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범언어적으로 적용 가 능한 화제 개념을 설립하려 한다.
기존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비교 개념’1)의 후보는 그리 많은 편이 아
1) ‘비교 개념’이란 앞서 1.3절에서 설명하였듯이 Haspelmath(2010)에서 설정한 것으로, 범언어적인
니다. 2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대하여성’이라는 개념만으로 화제를 규정하는 것이 충 분하다는 태도를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취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한 논의에서는 대하여성 외에 더 뚜렷하고 객관적으로 적용 가능한 개념을 가공하려는 수고를 특별히 기울이지 않았다.
일부 논의에서 우리가 비교 개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담 화주제, 파일카드의 주소, 틀 화제, 정언판단의 대상이 그것이다. 이 개념들을 각각 살펴봄으로써 이 중 어느 것이 한국어의 화제 논의에 적합할 것인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우선 담화주제(discourse topic)는 2장과 3장에서 살펴본 것으로 담화 전체에서 의 미적 핵심을 이루는 명제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Brown & Yule(1983) 등을 참 고할 수 있다. 이는 담화 분석에서 유용한 도구적 개념이라는 점은 인정되나, 특정한 언어 형식과 긴밀한 대응을 가지고 실현되지는 않는, 담화 해석적인 차원의 대상이라 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화제’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둘째로, 파일카드의 주소는 Heim(1982)의 파일 변화 의미론의 개념을 차용한 Vallduví(1990)에서 적극 활용한 개념이자 Jacobs(2001)에서도 화제의 네 가지 의 미 가운데 하나로 설정한 개념이다. 대화참여자의 정보 상태를 어떤 파일과 유사한 구조로 보는 것으로, 입력된 정보가 저장되는 파일카드의 주소가 화제라는 입장이다.
인지적 현상을 구체적인 사물에 유추하여 설정한 이 개념은 그로 인해 직관적인 설 명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유추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한다.
셋째로, 틀 화제(frame)는 Chafe(1976)에서 설정된 것으로, Jacobs(2001), Krifka(2008) 등에서, 그리고 한국어에 대한 논의로는 정희자(1993), Kim, I.(2015) 등에서 활용된 바 있다. 틀 화제는 말 그대로 문장이 표현하는 단언에 대한 틀이라는 개념으로, 시공간이나 개체가 틀이 될 수 있다(Chafe 1976: 50). 이러한 논의들은 대부분 파일카드의 주소에 해당하는 명사구 실체로서의 화제 개념을 따로 세우고, 이 것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틀 화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실체 화제와 틀 화제의 구별은 개념적으로도, 실제 자료의 분석에 있어서도 뚜렷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 개념은 기존에 화제로 논의된 것들만
비교에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을 뜻한다. 이는 특정 언어 내에서만 사용되는 ‘기술 범주’와 대립된 다.
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부사구까지도 포괄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진다. 예컨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다.’의 ‘경제적으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의 ‘놀이터에서’ 등도 이들의 개념에 따르면 틀 화제 가 된다.
마지막으로 정언판단은 Brentano, Marty의 이론을 바탕으로 Kuroda(1972)에서 언어학적 개념으로 정립한 것으로, 그 짝인 단언판단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정언판단 (categorical judgment)이란 논리적 의미의 주어2)가 가리키는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 와, 그 주어에 대해 서술어가 표현하는 것의 긍정 혹은 부정 행위, 이렇게 두 개의 구별된 행위로 이루어지는 진술을 말하는 것으로, 이중 판단이라고도 한다. 반면 단 언판단(thetic judgment)은 그러한 논리적 의미의 주어를 확립하는 행위가 별도로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 자체를 인식하는 하나의 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단순 판단이 라고도 한다. Kuroda(1972)는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판단이 일본어에서 각각 ‘wa’
가 쓰인 문장과 ‘ga’가 쓰인 문장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하였다. ‘wa’가 쓰인 문장 이 정언판단을, ‘ga’가 쓰인 문장이 단언판단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3)
(1) 가. Inu ga hasitte iru.
나. Inu wa hasitte iru.
‘A/the dog is running.’ (Kuroda 1972: 161)
예컨대 개가 달리고 있는 상황을 화자는 (1)의 두 가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1가)와 같이 ‘ga’를 쓴 경우에는 달리는 사건에 주목하여 ‘x가 달리고 있고 x가 개 다’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반면 (1나)와 같이 ‘wa’를 쓴 경우에는 ‘x가 달리고 있고 x가 개다’라는 판단에 더하여 화자가 관심을 두는 주요 대상으로서의 실체 x를 확립 하는(setting up) 행위가 있다고 한다. (1나)와 같은 문장의 발화 이유가 바로 이 실 체 x에 대해 해당 사건의 발생을 관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2) Kuroda(1972: 156-7)에서는 ‘논리적 의미의 주어’(subject in the logical sense)와 ‘논리적 주 어’(logical subject)를 구별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논리적 의미의 주어’가 정언판단과 관련되 는 개념이고 이는 Port-Royal 논리-문법가들의 주어 개념이라고 한다. 반면 그의 ‘논리적 주어’는 어떤 명제가 표현하는 사태의 행위주(agent)를 가리키는 ‘의미론적 주어’에 가까운 것이다.
3) 임홍빈(1972)에서도 ‘정언문’이라는 범주를 세우고 이를 ‘은/는’과 밀접히 관련시켰으나 이는 계사 문의 ‘귀속’과 ‘합동’ 의미의 구별에 대한 것이고 본고에서 다루는 정언/단언 판단과는 거리가 있 다.
또한 Kuroda(1972)는 (1)과 같은 명사구에 ‘wa’가 붙은 경우뿐만 아니라 명사구 에 조사가 결합한 요소에 다시 ‘wa’가 결합한 것까지도 정언판단문을 이룬다고 본다.
예컨대 한국어로 표현하면 ‘정원-에서-는(de-wa) 개가 고양이를 쫓고 있다.’(‘In the garden, the dog is chasing the cat.’)에서 ‘정원’이 정언판단의 대상이라고 한다.
Kuroda(1972)의 이러한 정언판단과 단언판단의 구별은 이후 많은 관련 논의들을 낳았다. 가령 Sasse(1987)에서는 정언판단의 무표적인 구조가 ‘문법적 주어+서술어’
라고 보고, 단언판단이 유표적으로 반영되는 통사구조를 여러 언어에 걸쳐 논의하였 다. 또한 Ladusaw(1994) 등 비한정 명사구와 서술어의 의미에 관한 논의에도 정언 판단과 단언판단의 구별이 이용되었다.
‘정언판단의 대상’은 ‘대하여성’을 포함하면서도 더 구체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이 어떤 실체 x에 대한 진술로 이해될 수 있으면 그러한 x는 모두 대하여성 성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다음에 설명할 일부만이 정언판단의 대상에 해당 한다.
정언판단의 대상은 Kuroda(1972)의 개념을 따르면 ‘wa’ 성분이고 일반적으로 문 두의 것으로 한정된다.4) 이는 우리말에서는 문두의 ‘은/는’ 성분이다. 아래의 예를 통 해 이를 살펴본다.
(2) 가. 개가 달리고 있다.
나. 개는 달리고 있다.
다. 개가 고양이를 쫓고 있다.
라. 개는 고양이를 쫓고 있다.
마. 개가 키울만한 애완동물이다.
바. 개는 키울만한 애완동물이다.
위 문장들에서 대하여성 성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여기에 나타난 모든 명사구들 이 대하여성 성분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가진다. 예컨대 (2다)는 ‘개’에 대한 것으로 도 해석되고 ‘고양이’에 대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정언판단의 대상은 이들 중에 문두의 ‘은/는’ 성분으로 제한된다. (2다)에서는 ‘개’도 ‘고양이’도 정언판단의 대 상이 아니다. (2나, 라, 바)의 ‘은/는’이 결합한 ‘개’가 정언판단의 대상이 된다.
4) 여기에서는 Kuroda(1972)의 정언판단의 개념을 이용하는데, 4.3.1절에서는 Kuroda(1965, 2005) 의 논의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때 단지 ‘은/는’이 결합하였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문두라는 점도 중요하 다.
(3) 가. 개는 고양이를 쫓고 있다.
나. 개가 고양이는 쫓고 있다.
위의 예에서 같은 ‘은/는’ 결합형이지만 (3가)의 ‘개는’과 달리 (3나)의 ‘고양이는’은 정언판단의 대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Kuroda(1972)에서는 정언판단의 대상으로 문 두의 ‘wa’ 성분만을 다룬다.5)
정언판단의 개념을 화제 개념으로 명시적으로 취하지 않더라도 화제를 문두 성분 으로 제한한 견해는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화제를 문두 성분으로 제한하거나 그 위치와 깊게 연관시킨 것은 발화의 선형 순서와 그 발화를 이루는 인지적 과정에 도상성이 있다는 전제를 두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우선 인식하고 그것에 대하여 서술하는 과정이 문장 표현에 그대로 드러나, 그 대상이 우선 발화되고 나서 그에 대 한 서술부가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상성 전제는 지나치게 단순한 것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나 인식의 순서가 문장 표면의 순서에 그대로 반영되지 않고 다소 복잡한 관계를 가질 가능성도 염두에 두 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다른 유표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 한, 이 전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문두 ‘은/는’으로 대표되는 정언판단의 대상 개념을 화제 개념으로 채택할 것이다. 한국어에서 화제와 관련된 가장 두드러지면서 특별한 형식이 문두의
‘은/는’인데, 위에서 보았듯이 이 개념이 한국어의 문두 ‘은/는’ 성분의 특성을 잘 포 착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누차 말했듯이 다른 의미나 개념 요소들을 재료로 화제를 빚어도 논리적인 문제는 없다. 하지만 본고는 정보구조와 관련된 의미나 기능 이 언어 형식에 반영되거나 표현되는 양상에 집중하고, 동시에 언어보편성과 언어특 정성의 조화를 꾀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화제 개념의 정립이 적절하다 고 하겠다.
5) 보다 정확히 말하면 Kuroda(1972: 178, 각주 25)에서는 어떤 조건에서는 문중에 나타난 ‘wa’ 성 분도 정언판단의 대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존-wa 사람-wa 동물이라는 것을 믿고 있 다.’와 같이 동사구 보문을 요구하는 문장에서 문중에 나타난 ‘사람-wa’와 같은 것에 제한된다.
즉, (3나)의 ‘고양이는’와 같은 전형적인 문중 성분을 정언판단의 대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