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에서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와 그 의미에 대한 두 가지의 대극적 가설들을 살펴 보았다. 하나는 ‘북한경제는 변화하지 않으며, 따라서 붕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북한경제 는 시장화라는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따라서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로 이행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 극적인 가설들 이외에 보다 중립적인 어떤 가설은 존재할 수 없는 것
일까? 아마도 이러한 가설이 존재한다면, 그 내용은 ‘북한경제는 변 화하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를 시장화라고 볼 수는 없으며, 더욱이 이 를 통해 북한경제가 시장경제로 이행한다거나 붕괴한다고 주장할 수 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02년 북한 의 ‘7.1조치’가 발표된 직후 이른바 북한의 ‘계획경제 정상화 가설’이 제출되었다.48 이러한 가설에 따르면, 북한 경제정책의 목표는 경제 위기를 불러온 자본과 노동의 부족과 비효율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기능정지 상태에 빠진 계획경제를 정상화 시키는 것이지 결코 북한 경제의 시장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설명은 앞서 살펴본 북한 불변화 가설이나 시장화 가설 모두와 일정한 차별성을 갖는다.
물론 이 가설은 북한경제의 이행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 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의 이행과 관련해서도 앞서 언급한 붕괴 론이나 비공식화론에 대한 여러 반론이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반론 을 북한 계획경제 정상화 가설과 연결시킨다면 위와 같은 보다 중립 적인 내용의 가설을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가설은 1980년대 후반 북
48이러한 가설은 ‘조동호, “계획경제시스템의 정상화: 최근 북한경제조치의 분석 및 평가,” KDI 정책포럼, 제160호(서울: KDI, 2002.7)’라는 선구적인 연구에 의해 제출되었다. 그는 2002년 ‘7.1조치’가 자본과 노동 그리고 기술이라는 북한경제의 기본적 취약 요소들을 어떻게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이를 분석함으로써 이 조치의 목적이 북한 계획경제시스템의 복구에 있다는 가설 을 제출했다. 이 글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북한 계획경제 정상화 가설 역시 기본 적으로 그의 논의를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1) 타 가설들과의 보다 효과적인 비교와 2) 이 가설을 보다 확장하여 북한경제의 이행과 관련된 시사점을 끌어내기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약간의 서술상의 또는 강조점의 차이를 둔다.
하나는 이 가설을 서술하는 데 있어 자본과 노동 같은 투입요소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과거 북한 경제시스템의 유지와 변화라는 측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것이 며, 다른 하나는 이 과정에서 시장과의 관계를 보다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제시하는 가설은 본래 이 가설이 제출되었던 모습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일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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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경제개혁과 이행
한의 경제정책 변화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 미진진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정책적 변화가 북한경제의 이행에 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그다지 도전적인 가설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와 관련하여 계 획 정상화 가설과 사회주의 경제 붕괴론 및 비공식화론 비판을 서로 연결할 경우 어떤 강점과 약점을 가지는지에 대해 조금은 꼼꼼히 검 토해 보기로 한다.
북한 계획경제 정상화 가설
만일 누군가가 ‘북한경제는 변화하고 있지만 그것은 시장화와는 상 관이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그는 이러한 주장을 어떤 방식으로 전 개하는 것이 효과적일까? 이러한 질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서로 연결된 몇 가지의 부분 명제 또는 주장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C-1]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는 1980년대 이후 계속된 경제위기에 대
한 대응 과정이었고, 따라서 그 변화의 궁극적 목적은 북한경 제의 생존을 위해 경제위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C-2] 그런데 과거 북한경제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일반적 특징이었으며, 다른 하나 는 이러한 계획경제의 북한식 운영방법에서 발생한 고유의 특 징이었다. 특히 후자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과도히’ 중앙집중 적인 계획경제 운영과 시장을 완전히 배제한 배급제적 경제운 영을 들 수 있다.
[C-3] 북한당국은 경제위기를 맞아 더 이상 과거 북한식의 고유한 계획경제 운영방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러 한 과거의 운영방법을 개선해 기존의 계획경제를 부활시킴으 로써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시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의 경제정책 역시 1) 기존 사회주의 계획경제 자체는 굳 건히 지키되, 2) 그 운영을 분권화하고, 계획에 일부 시장적 요 소를 도입함으로써 전체 계획경제의 효율성을 증대 시키며, 3) 계획경제가 완전 정상화되기 전까지 주민들의 자구적 생존을 위해 일정 부분 시장을 제도화하여 체제 내화 시킴으로써, 한 편으로는 계획경제 자체에 대한 체계적 도전을 방지하고, 다 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자원을 활용해 계획경제 정상화를 꾀하 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C-4] 이러한 정책의 결과 북한경제에서 시장의 위치가 더욱 중요해
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북한에서 시장화가 진행 되고 있다고 과잉 해석할 수는 없다. 북한 경제정책의 근본 목 적이 계획경제의 정상화에 있다고 볼 때, 만일 시장의 성장이 이에 걸림돌로 작용할 경우, 얼마든지 시장을 규제하려는 노 력이 나타날 수 있고, 또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C-5] 따라서 현재 북한경제의 변화를 과거의 ‘시장 없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 있는 사회주의 경제’로 변모한 것으로 판단하 기 보다는, 과거의 ‘통제적이고 경직적인 계획경제’에서 보다
‘분권화되고 유연한 계획경제’로 변모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우선 위의 [C-1]의 주장은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매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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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경제개혁과 이행
연스러워 보인다. 또한 [C-2]의 주장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실제로 과거 북한경제는 정상적인 사회주의 경제라고 보기에는 어려 울 만큼 매우 독특한 여러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사적 소유의 부재’와 ‘계획 및 계획기구의 존재’ 그리고 ‘공산당 독재’
라는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 위에 건설된 경제였다. 그러나 그 운영방법은 독특하였다. 무엇보다 북한당국은 계획의 일원화와 세부 화라는 원칙을 내세워 말단 경제주체의 모든 구체적 경제행위를 중 앙 집중적인 위계화된 행정기구의 명령으로 해결하려 했다. 다시 말 해, 사회주의 경제 내의 모든 경제행위를 중앙계획자가 계획하고 통 제하는 완전 계획화 체계를 구축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체계에 서는 당연히 계획부문 내부의 모든 자원배분이 계획으로만 이루어져 야 한다. 자원배분을 둘러싼 기업간, 성(省)간 또는 기업과 省사이의 협상이나 거래, 바게이닝(bargaining)과 같은 행위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대표적 경제운영 원리라고 하는 ‘대안의 사업체계’에서는 모든 물자공급을 중앙이 위계화된 행정기구를 통해 책임을 지고 생산자에게 공급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이러한 비계획 기구에 의한 자원배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완전 계획화 체계에서는 개별 경제주체의 소비행위 역시 철 저히 중앙계획자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북한 은 그간 식량을 비롯한 거의 모든 주요 소비물자를 배급제를 통해 분 배함으로써 이러한 소비행위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완성하고자 시도 했다. 이러한 북한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경제운영 방법은, 과거 소비 에트의 戰時공산주의 경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북한경제가 모델로 했었다는 스탈 린 시대의 소비에트 경제에서도 기업간, 성 간 또는 기업과 성 사이
에 자원배분을 둘러싼 협상이나 거래는 흔히 발견되는 일이었다. 개 별 경제주체의 소비행위를 조직하는 일 역시 배급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 경제는 이후 후르 시쵸프 시기의 분권화와 브레즈네프 시기의 ‘코시킨 개혁’ 등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보다 유연화되고 분권화된 경제체제로 이행하였다. 동 구 사회주의 경제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 대다수 동구 사회주의에서는 광범위한 화폐의 기능이 인정되고, 시장과 계획이 양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계획의 유연화․분권화나 이윤동기가 강조됨으로써 기업의 (부분적) 시장참여와 개인영리활동의 추구, 중요 자산의 개인적 점유 등과 같 은 시장경제적 현상들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일부분으로 작용하였 다. 북한경제가 비록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 위에 건설된 것이기 는 했지만, 그 운영방법만은 다른 나라와 달리 독특하고 통제적인 것 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런 북한식 계획경제의 운영방법에는 두 가지 커다란 약점 이 있다. 하나는, 여타의 사회주의 경제에 비해서도, 계획을 작성하고 계획기구를 유지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클 것이라 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기업과 개인 모두를 포함한 개별 경제주체의 인센티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물론 이러한 약점들은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가용자원이 충분히 남아 있는 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 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보유한 가용자원이 바닥나고, 특히 산 출량 마저 하락하기 시작하는 경제위기의 시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 다. 경제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생산성 을 향상 시키는 것이 급선무인데, 기존의 북한식 경제운영 체제로는 이